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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54화 (5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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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직 한 창 때의 의사였다. 어려운 수술도 성공해 이제 명성도 쌓아가고 있는. 그런데 고작 약 하나 뒤로 빼돌렸다는 것에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기 싫다며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을 따라가 이런 불합리한 처사에 대항해 병원에 소송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그녀의 말을 무시하던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소송. 소송 좋지. 그런데 병원 원장은 밀리안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내가 입을 여는 즉시, 그것마저 까발려버린다고 하더군. 아들이 오메가로 발현해 십여 년간 독한 약을 먹인 의사라는 게 알려지면 그나마 남아 있는 면허증마저 취소될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

“어차피 여기서 더 살기는 힘들잖아. 지역을 옮기는 게 나아.”

어차피 호적도 정리했으니 밀리안을 다른 나라로 옮길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남편이 그녀를 설득했다. 디모시 여사는 그런 남편을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모두, 모두 밀리안 때문이네요? 그 아이 때문에…….”

“뭐?”

남편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디모시 여사는 그저 알겠다고 모두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해한 거야?”

“네. 이렇게 된 거 빨리 이사 준비를 해야겠네요. 집도 팔아야 하고, 옮길 지역은 당신이 정해요. 옮길 병원이 정해지면……, 말해줘요.”

“……그래. 당신도 마음고생 했을 테니 좀 쉬어.”

남편이 지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만진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디모시 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내 인생을 모두 망쳐버렸다. 그 짐승 새끼 하나 때문에.

밀리안만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 짐승을 낳았던 흔적을 지워버린 뒤 새로 시작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다. 그래. 그 배은망덕한 짐승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평생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 테니까. 이제 그런 삶은 지긋지긋했다.

새롭게 살고 싶었다. 그래, 남편의 말대로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밀리안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지?

그게 문제였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지워버린단 말인가. 디모시 여사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손톱을 깨물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손톱으로 부족해 살점까지 깨물어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입술에 빨갛게 번졌다.

밀리안이 아직 깨지 않은 새벽, 대니얼은 클레이 디어의 저택으로 불려왔다. 며칠 전 클레이가 한 번 비틀거린 것에 벤틀로가 검진을 받지 않는 이상 안심할 수 없다며 극성을 부린 것도 있고, 지난번에 채취한 밀리안의 소변 검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투자금을 엄청나게 받은 대니얼 크래포드는 거의 노예처럼 부려졌지만, 앞으로도 그가 하는 것에 따라 돈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클레이의 말에 그녀의 발도 핥을 것처럼 굴었다. 비록 속에는 클레이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챠트를 뒤져 지난 검사표를 비교하던 대니얼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맞은 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클레이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정말 제대로 사정한 적이 없다고?”

“베이비 퍽 정도는 했지.”

“그게 뭐…… 아, 베타들이 하는 그거?”

“그래.”

별 이상한 단어를 다 만든다며 대니얼 크래포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대로 섹스한 적이 없는 것치고는 안정적이야. 아니, 이 정도면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던 때보다 더 좋아.”

오메가 서너 명과 함께 뒹굴던 때보다도 체내에 남은 노폐물이 없었다. 각인을 한 상대와 섹스를 하더라도 완전히 배출되지 않은 페로몬이 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타부타 말을 붙일 것도 없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이니 좋은 거긴 한데, 이런 경우를 처음 봐서 그런지 대니얼은 검사 결과를 질린 듯이 바라봤다.

“넌 진짜 괴물이다.”

“칭찬 고마워.”

클레이는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벤틀로가 하도 닦달해서 밀리안의 검사 결과도 들을 겸 대니얼을 부른 것뿐이었다. 당연히 밀리안의 결과도 좋겠지. 클레이는 앞에 앉은 대니얼에 의해 상해버린 눈을 밀리안의 얼굴을 보며 정화 시키고 싶었다.

“칭찬이……. 아무튼 너는 됐고, 문제는 밀리안이야.”

대니얼이 마우스를 움직여 밀리안의 검사표로 모니터 화면을 바꿨다. 사뭇 심각해진 대니얼의 표정에 클레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밀리안이 왜?”

“생각보다 노폐물이 많이 쌓인 것 같아. 액상 약으로는 제대로 배출이 안 돼.”

“처음보다 색이 좋아졌던데? 건강해지고 있다는 뜻 아니었어?”

“아니야. 밀리안이 그동안 먹었던 약의 양을 생각하면 벌써 이렇게 색이 달라질 수가 없어.”

“…….”

배출된 소변의 색이 붉어야 하는데 짙은 노란색에 가까웠다. 이 상태로 페로몬을 억누르는 약까지 먹는 건 무리였다. 버릇처럼 손에 쥔 볼펜으로 책상 표면을 툭툭 치던 대니얼이 클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오래 쌓여서 체내에서 굳은 것 같아. 조금 강한 방법이 필요한데…….”

“그게 뭐지?”

“으음. 혹시 섹스를 안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왜? 섹스를 해야 돼?”

하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맛만 보며 참았던 이유는 밀리안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었으니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서 기다리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는 게 좋긴 한데. 뭐, 너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을 테니…….”

“왜 나하고 상관이 없어.”

죽고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대니얼의 말에 클레이의 심기를 긁었다. 밀리안의 건강은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넘길 수가 없는데,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클레이가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대니얼은 불똥을 맞은 것처럼 의자를 뒤로 밀어 간격을 넓혔다. 얘, 얘가 왜 이러지?

“진심이야? 그냥 가볍게 가지고 노는 상대, 아니었어?”

“내가 가볍게 가지고 놀 상대에게 이렇게 공을 들인 적이 있던가?”

“없지. 없는데…….”

분명 기존의 상대를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하긴, 고작 플레이 한 번 재밌게 즐겼다고 제게 거액을 송금한 것부터 다른 건가? 아니, 애초에 저를 불러 상대의 건강을 챙긴 것도 처음……. 거기까지 생각하던 대니얼이 소리를 질렀다.

“완전 티를 줄줄 내고 있었잖아!”

“이러니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이렇게 눈치가 등신 같으니 어떻게 연애를 하겠냐고, 클레이가 대니얼의 아픈 속을 후벼팠다. 심지어 조용히 클레이 뒤에 서 있던 벤틀로마저 대니얼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대니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펜을 흔들었다.

“뭐, 일단 나름의 극약처방 중 하나야. 평일은 말고, 주말에 네 페로몬을 완전히 개방해서 몰아붙여야 해. 히트 사이클까지 올 때까지. 그래야 안에 굳은 게 터져 나올 거야.”

이건 클레이가 가장 잘하는 걸 테니 방법적으로는 걱정이 안 된다만, 당할 밀리안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그동안 베타로 살아왔던 탓에 클레이를 감당하기 벅찰 텐데, 이런 짓까지 당하면 멘탈이 아예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 정도까지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되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오메가는 없으니까. 심지어 클레이 디어는 평범한 알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페로몬 수치가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그러다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건데……. 밀리안이 건강했다면 피임약을 먹으면 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피임약까지 먹으면 부작용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서 처방 불가야. 정말 괜찮겠어, 클레이?”

평소보다 진지한 상대라고는 해도 아이가 생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디어 가의 후계자가 생긴다는 뜻이니까. 아무리 밀리안 디모시라는 남자가 안타깝기는 해도 대니얼은 클레이의 주치의였고, 그녀의 오랜 친구였다. 클레이의 입장을 더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 섞인 말에 대한 클레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임신?”

“어? 어어. 역시 임신은 좀 그렇지? 다른 방법을 알아볼까?”

“임신이라고…….”

좋은데? 그 납작한 배에 내 아이를 배고 낑낑거릴 밀리안을 상상하자 심장의 박동이 가팔라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엎어놓고 그의 자궁에 정액을 쏟아내고 싶었다. 임신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가득.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임신을 하고 나면 그 심약한 밀리안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계약이고 뭐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이까지 생기고 나면 공식적으로 제 호적에 들어와야 한다. 밀리안도, 아이도.

“완벽해.”

클레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전부 들은 대니얼이 자신이 대체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허탈해졌다. 그러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클레이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야, 지금 당장 그러라는 게 아닌 거 알지? 밀리안의 몸이 준비돼야 해!”

“섹스를 해야 건강해진다며?”

“아, 미친. 아이까지 가질 준비를 하려면 산모의 몸이 더 건강해야지! 아직은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러다가 당장이라도 일을 벌일 기세인 클레이를 향해 대니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모의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말에 클레이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친구인 대니얼은 무시해도 되는 대상이었지만, 의사인 대니얼의 말은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밀리안의 건강과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한 달. 그래도 아직까지 약이 좀 작용을 하는 것 같으니까 이대로 좀 더 복용하고, 식사도 제때하고, 가벼운 운동도 병행하도록 해. 히트 사이클이 어느 정도의 강도로 올지는 나도 몰라. 밀리안이 너무 오래 약으로 눌러서 예측이 힘들어. 아이를 가지지 못할 정도일 수도 있고, 혹은 일주일 이상 지속될 가능성도 있어. 너무 길어지게 될 경우 너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밀리안은 그걸 대비해서 체력을 키워둬야 해. 그리고 일주일 간격으로 검진을 하면서 상태를 봐보자. ”

“음.”

한 달. 별로 길지 않은 기간이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만큼만 더 기다리면 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원하는 것이 목전 앞에 두고 멈춰야 한다는 건 앞에 진수성찬을 두고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클레이를 향해 대니얼이 절대 함부로 일을 치지 말라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밀리안에게 못 할 짓을 한 기분이어서, 또 그 방법을 알려준 원인이 자신이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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