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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클레이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체셔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짜증 난다는 듯한 얼굴로 밀리안의 무릎에서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렸다.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던 밀리안은 제 앞에 서 있는 클레이를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어딘가 우울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우아한 귀족이 존재했다. 그래,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던 모습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 자신이 느꼈던 비열한 감정은 없던 일이 될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어딜 보더라도 저 여자와 나는 결코 같아질 수가 없는데…….
“분명 며칠 뒤에 오신다고…….”
“보고 싶어서.”
클레이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꼭 온 세상의 빛을 머금은 듯한 화사한 미소에 밀리안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어딘가 달랐다. 내킬 때마다 웃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 웃지는 않았다. 대체 뭐지…….
“왜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평소와 달라.”
평소와 다른 것은 그가 아니라 클레이 디어였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볼을 만지고 있던 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조금 전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도 예전과 다르다. 여자는 제 마음대로 그를 몰아치지 않고, 그가 물러선 만큼 더 다가오지도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사소한 질문을 해왔다.
“체셔와 언제 친해진 거야?”
“이름이 체셔군요……. 지난번 서재에 갔을 때 처음 보고 이번이 두 번째로 봤습니다.”
“두 번? 두 번 만에 쟤가 당신 무릎 위에 올라갔다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니, 그건 아닌가. 클레이 디어를 대할 때의 고양이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굴었다. 분명 주인이 이 여자일 텐데 가까이 있는 것도 싫다는 것처럼 여자가 다가오자 바로 가버렸다. 클레이의 표정도 그의 예상과 달랐다.
“체셔가 사람을 좋아해? 쟤는 사람을 자기 종이라고 생각하는 애야.”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건방진 고양이라며 클레이가 툴툴거렸다. 밀리안은 클레이가 그런 고양이의 성격을 받아주며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래도 관리가 잘 되어 있던데요.”
“얼굴은 예쁘장하니 성질이 지랄 맞아도 다들 오냐오냐하고 있거든. 아, 가장 오냐오냐하고 있는 사람은 벤틀로야. 체셔라면 껌뻑 죽으려고 하지.”
“…….”
클레이는 애교도 없는 고양이가 뭐가 그리 예쁘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밀리안은 왠지 모르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벤틀로는 체셔를 예뻐하는 게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셔는 클레이와 판박이였으니까. 심혈을 다해 그녀와 닮은 고양이를 골라낸 것처럼 닮았다.
“메이만 아니었더라면 키울 일도 없었을 텐데.”
“메이요?”
“응. 내가 가장 사랑한 고양이.”
체셔에 대해 말할 때와는 달리 클레이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나만 따랐거든. 비쩍 말라서 살려달라고 빽빽 울어대며 날 졸졸 따라와서 밥도 주고 예뻐하면서 키웠는데, 어디서 이상한 놈하고 배를 맞췄는지 임신한 채로 다시 나타났어.”
“…….”
“그때는 조금 짜증이 났는데, 고양이 발정을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고, 그때는 중성화라는 것도 모를 때라 임신한 메이를 내칠 수도 없으니 새끼를 낳을 때까지만 돌봐주자 했지.”
“그게, 몇 살 때입니까?”
“열세 살. 왜?”
“……아닙니다.”
열세 살 때부터 저 성격이었다니. 그나마 임신한 고양이를 내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럼 새끼를 낳은 후에는 어떻게…….”
“어떻게 하긴. 누가 봐도 나랑 비슷한 새끼를 낳아서 그나마 보는 눈은 있구나 싶어서 죽을 때까지 옆에 끼고 살았지. 체셔는 메이의 자식이야. 순한 메이 성격은 닮지 않아서 짜증은 나도 날 닮은 애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는 건 용납 못 해.”
“그렇, 군요.”
당당한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체셔가 밖에서 사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이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체셔는 이 저택과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그때,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밀리안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클레이의 눈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뭔가……. 으음.”
닮았다. 클레이는 이제야 밀리안이 메이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모가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갈색과 흰색 검은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였으니까. 눈동자도 노란색이었고.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어딘가 처연한 느낌도. 돌봐주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면이 메이와 닮아있었다.
‘귀신같은 놈.’
오로지 메이에게만 조금 곁을 주었던 그 까다로운 체셔가 왜 밀리안에게 달라붙어 있나 했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도…….
“취향이라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나 봐.”
“네?”
무슨 소리냐며 밀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제야 제가 소리를 내어 말했다는 것을 깨달은 클레이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 안 추워? 이렇게 옷도 얇게 있고 왜 계속 밖에 있었어?”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습니다.”
“얼마 안 되긴, 손이 차가워졌는데.”
그녀는 이미 파랗게 질린 밀리안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안 그래도 체온이 낮아 걱정인데 몸 상할 짓만 골라서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리안과 떨어져 간 곳은 대니얼의 병원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한들 수술을 한 몸으로 밀리안 옆에 있긴 힘들었다. 그가 옆에 있는데 건드리지 않을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를 안으면 수술 부위에 무리가 갈 수 있어 차라리 떨어져 있는 걸 택했다.
삼 일은 입원해서 완전히 회복된 후에 올 생각이었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결국 하루 만에 퇴원을 해버렸다. 회복이 더디더라도 차라리 그의 곁에 있는 게 나았다.
그녀는 밀리안의 두 손을 꽉 잡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작 하루만임에도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다. 보고 싶었어, 밀리안. 당신은 아니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떠들어댔지만, 심장이 떨렸다. 당신은 이런 기분을 알까? 곁에 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겠는 심정을…….
좋아해. 사랑해. 당신과 평생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하면 그가 보일 반응은 뻔했다. 좋아할 리가 없지. 클레이는 차가운 그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웠던 그의 손이 자신의 체온에 녹아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도 이렇게 변하길 바랐다.
밀리안은 침실로 들어온 뒤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가는 클레이를 향해 물었다.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왜? 걱정했어?”
여자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밀리안은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는 사장님의 비서니까요.”
“야박하긴. 하지만 비밀이야.”
클레이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훔쳐보면 안 된다며 문을 닫았다. 이런 점도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누가 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을 때도 문을 닫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밀리안은 닫힌 문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이상했다. 아니, 그제부터 이상했지.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굴더니 갑자기 그와 거리를 뒀다.
“아…….”
그런 건가. 하루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다른 오메가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인데 너무 깊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측근에서 그녀를 지켜봐 왔던 자신이 그 가정을 반박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저 사람 성격이라면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걸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비겁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레이 디어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밀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묘하게 경직됐던 몸이 한숨과 함께 조금씩 풀렸다.
* * *
“…….”
정말 이상하다. 클레이 디어가 이상했다.
여자는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포옹과 가벼운 키스를 제외하면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강제로 그의 성기를 빤다든가, 그의 몸을 만진다든가, 변태 같은 속옷을 입히려고 하지도 않았다. 성기 안에 이상한 막대를 넣어 괴롭히지도 않았다. 노폐물을 빼는 약도 참견하지 않고 그에게 맡겼다. 다행인데, 그에게 무척이나 좋은 일인데……, 갑자기 변한 클레이의 행동에 석연찮은 기분을 느꼈다.
클레이는 막연히 긴장하고 있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바로 잠들어버렸다. 그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괴롭힘당했던 몸이 욱신거렸다. 밀리안은 제 허리를 감싸고 잠든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그의 허리에 감긴 여자의 팔은 더 조이기만 했다.
“흣.”
자연스럽게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든 여자의 다리가 반쯤 발기한 성기를 문질렀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곤히 잠든 모습 그대로였다. 규칙적이고 고요한 숨소리가 깊게 잠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다행히 여자의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쉰 밀리안은 하체를 조금 뒤로 빼고 억지로라도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다.
“하아…….”
밀리안은 새하얀 목에 얼굴을 비벼대는 자신을 깨닫고 눈을 깜박였다. 이전과 달리 여자의 페로몬 냄새가 너무 옅어서 몸이 그녀의 냄새를 쫓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든 척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을 만큼 미묘하게 그를 자극하던 여자는 거의 움직임조차 없었는데, 저 혼자 몸이 달아 있었다.
차라리 여자가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신이 벌인 추태를 그녀가 보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치심과 자괴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밀리안은 살짝 헐거워진 여자의 팔에서 벗어나 조금 떨어져 등을 돌려 누웠다.
‘몸이 이상해.’
달아오른 몸이 식지 않는다. 어느새 완전히 발기해 버린 성기의 존재감에 밀리안은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이 뛰는 소리, 그리고 가라앉지 않는 흥분이 그의 이성을 좀먹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하지만 자제심을 잃은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가 성기를 부여잡았다. 아주 살짝 건드렸는데도 흘러나온 액체로 흠뻑 적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밀리안은 어느새 양손으로 성기를 훑고 흔들고 있었다.
“하, 하아……, 흣, 응.”
하지만 뭔가 자극이 부족해 끝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허리마저 흔들며 열중하고 있어 어느새 잠에서 깬 클레이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