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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갖가지 모양으로 장식된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가 바로 앞에 와 있는 것처럼 유난히 반짝였다. 밀리안은 일찍 해가 지는 탓에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는 트리 장식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 로비에도 트리가 있었지. 마치 이제 크리스마스라고 모든 곳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 첫 섹스를 하는 거야.’
하필 그렇게 빨리 알려준 탓에 날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디데이를 크리스마스로 바꿀 정도로 심란한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밀리안이 창밖을 계속 보고 있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클레이가 그의 등에 상체를 기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아, 트리 장식?”
“네.”
“당신도 이런 걸 좋아해?”
“아니, ……네.”
밀리안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했었다, 예전에는. 그의 대답에 클레이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벤틀로와 잘 맞겠어.”
“네?”
“벤틀로가 오늘 저택에 트리 장식을 할 거라고 하더군.”
“아…….”
“빨리 오라고 유난을 떨어서 이 나이에 무슨 짓인가 했는데 당신도 좋아한다니 마침 잘 됐어.”
가서 열심히 장식해보자며 여자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속삭였다. 밀리안은 차창에 비치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봤다. 우연이겠지? 여자는 근래 그가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것을 함께 하자고 종용했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갔고, 결국에는 그가 더 즐겼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여자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동자에 서린 따듯한 온도가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그를 특별하게 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을 대하듯 점점 더 친절해졌고, 뭐든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좋아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입버릇처럼 특별하다고 말을 할 때는 그렇게 와닿지 않던 말이, 수없이 쌓인 그녀의 눈빛과 행동에 점차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착각하게 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처음 자신을 막무가내로 몰아치던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서 자꾸 헷갈렸다.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의 변화에 흔들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 한들 뭐가 달라지는데? 어차피 계약관계일 뿐이다. 자신은 계약이 끝나면 영원히 이 여자와의 일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게 바른 수순이었다. 그러면 다신 알파와 엮이지 않고, 평생 베타로, 혼자…….
‘혼자.’
혼자. 안전하지만 고독한 삶.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와 살을 맞대지도 못하는 외로운 생활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바랐던 미래가 왜인지 섬뜩했다. 밀리안은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택에 도착해보니 일층 로비에 이미 커다란 트리 나무가 옮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수많은 상자가 열려 있었고, 나무 꼭대기에도 닿을 수 있는 높이의 사다리가 두 개 있었다.
항상 침착했던 벤틀로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밀리안과 클레이를 향해 빨리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재촉했다. 평소라면 침실까지 쫓아와 시중을 들었을 벤틀로가 트리 장식할 생각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클레이가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며 상자 쪽으로 가 안에 든 것을 살폈다.
“벌써 다 꺼내놓은 거야?”
“그럼요. 오늘 내로 끝내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오늘 저녁은 간단한 샌드위치니 장식을 하면서 틈틈이 드십시오.”
“애도 아니고.”
클레이의 말에 벤틀로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애든 어른이든 상관없습니다. 크리스마스지 않습니까? 자, 어서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밀리안은 트리 근처에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봤다. 왠지 그가 끼어들어선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자에서 붉은색 구슬을 꺼낸 클레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리 와, 밀리안.”
“…….”
“어서.”
여자의 재촉에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발을 떼어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웃으며 그에게 들고 있던 구슬을 넘겼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 쪽으로 가게 했다.
“걸어 봐.”
여자의 말에 밀리안은 두 손에 꽉 차는 커다란 구슬 바라봤다. 트리 장식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묘하게 낡아 있었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지만, 색이 바랜 감이 있었고, 요즘 길거리에 보이는 것보다 조금은 촌스러운 색감이었다. 밀리안이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클레이가 입을 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산 거야. 후계자가 태어나면 그해 트리 장식을 새로 바꾸는 게 디어 가의 전통이지.”
“아.”
그래서 이렇게 낡은 거구나. 밀리안은 이렇게 부유한 가문에 이런 전통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클레이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내 아이가 태어나면 이 지긋지긋한 것도 새로 바꿀 수 있겠군.”
“…….”
당연한 말인데 밀리안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클레이 디어의 아이. 언젠가 그녀의 배우자가 낳을 아이. 여자의 옆에 서 있을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분명 그녀 못지않게 아름다운 남자겠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때, 클레이가 장난스럽게 그의 배를 손으로 더듬었다.
“이 납작한 배가 이만큼 부풀면 어떻게 되려나?”
“무, 무슨 짓입니까?”
밀리안은 구슬을 손에 쥔 채 몸을 비틀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해도 될 말이 있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었다.
“……장난이야. 이제 안 할 테니 빨리 나무에 걸고 옷 갈아입자.”
“다신, 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클레이는 밀리안이 나무에 구슬을 거는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일부러 한 번 떠본 말이었는데, 밀리안의 격렬한 반응에 오히려 제가 더 타격을 받았다.
‘앞으로는 정말 하면 안 되겠군.’
밀리안이 싫어하는 것도, 그의 반응에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도 싫었다. 클레이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았다. 이런 감정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강제로 임신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본 이상, 그에게 더 이상 강압적으로 굴 수가 없어졌다. 우울한 얼굴도, 상처받아 슬픈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그게 자신으로 인한 감정이면 더더욱.
* * *
밀리안은 트리 장식의 마지막인 별을 달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가 있었다. 중앙에 꽂으면 된다고 했는데 아래에서 클레이가 자꾸 훈수를 뒀다.
“여기요?”
“아니, 조금 더 오른쪽으로.”
“이 정도면 됩니까?”
“으음. 살짝 왼쪽? 아, 별이 조금 삐뚤어졌어.”
“…….”
밀리안은 고개를 내려 클레이를 바라봤다. 정색을 한 그와 달리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눈치챘어?”
밀리안은 그대로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가 바닥에 완전히 내려오자 클레이가 그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잘했어.”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그거라면 수긍이 갔다. 고작 별 하나 다는 것으로 십여 분이 걸린 것 같았다. 밀리안은 트리에서 조금 떨어져 완성된 모습을 감상했다. 벤틀로가 저택의 조명을 끄고 트리의 불만 켰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움직이는 조명을 따라 흘러나왔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번갈아 깜박이는 조명은 정말 촌스러웠다. 게다가 중간중간 전구가 나간 것도 있어서 더 오래된 느낌이 났다. 망가지기 직전이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살아있었다. 밀리안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웃지 마. 오래된 거라고 했잖아. 그땐 오히려 이런 게 드물었다고.”
“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길래 삼십 년이 넘도록 이게 안 망가지죠?”
“그건 벤틀로의 마법이지.”
하지만 아무리 관리를 잘 했다고는 해도 삼십 년의 세월을 온전히 버티는 것은 무리였는지 노래가 중간중간 끊겼다가 다시 흘러나왔다. 아무리 전통이라고 하지만 디어 가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가 태어났을 때 산 것이라는 트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이 트리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트리가 워낙 큰 탓에 장식이 많아 꽤 시간이 걸렸다. 슬슬 자야 할 시간이었다. 벤틀로가 은근히 별을 보기 좋은 날이라며 밀리안을 부추겼다. 갑자기 무슨 별인가 하다가 예전에 벤틀로가 자신에게 별채 다락에 천체망원경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클레이 디어가 그곳에 가지 않으려 한다는 말도.
망원경으로 보는 밤하늘이 어떤지 잠시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한 번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아니요, 정말…….”
밀리안이 다시 거절하려고 할 때,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났다. 클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밀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밀리안.”
“네?”
“보러 가자고. 벤틀로 와인을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클레이는 의도한 대로 목적을 이룬 벤틀로가 은은히 미소짓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원래는 저러지 않았는데 갈수록 능글맞아졌다. 자신을 뜻대로 움직이려면 밀리안을 이용하면 된다는 걸 눈치 빠른 벤틀로는 진작에 파악하고 열심히 사용하고 있었다. 둔한 밀리안만 모르고 모두 다 알았다. 그녀는 정말 괜찮다며 사양하는 밀리안을 강제로 끌고 별채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별채 다락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관리인은 갑자기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늦은 시간에 불려 나왔음에도 싫은 티는커녕 드디어 주인이 이곳을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더 드러냈다. 클레이는 관리인이 건네주는 담요 두 개 모두 밀리안의 어깨에 씌웠다. 천장의 돔이 열리면 차가운 외부의 공기에 노출이 되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오메가였고, 유독 체온이 낮은 탓에 추위를 많이 탔다. 간혹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파의 페로몬을 많이 받으면 좋아진다고 하는데, 대니얼이 밀리안의 히트 사이클을 대비해 페로몬 노출을 최소화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배출해야 할 것을 모두 체내에 몰아 가두는 것은 유독 페로몬이 강한 클레이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래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남자가 ‘밀리안 디모시’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하는 중에 틈틈이 알파와의 섹스에 대해 검색하는 걸 보는 것도 그녀를 참게 해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회사 PC로 검색을 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해킹이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핸드폰으로 동영상까지 다운받는 건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운받은 동영상이 재생됐다가 멈췄다, 또 한참 뒤에 다시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볼 땐 별로 수위도 강하지 않은 AV였고, 오히려 지금까지 그가 그녀로 인해 경험했던 것이 더 난잡했을 정도인데 밀리안은 결국 동영상을 다 보지 못했다.
모른 척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도 즐겁게 감상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대하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아!”
돔이 열리자 하늘에서 눈이 떨어져 내렸다. 클레이는 모처럼 마음을 먹고 이곳에 왔는데 타이밍이 나쁘다며 혀를 찼다. 눈이 내리면 하늘에 구름이 껴서 별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때마침 벤틀로가 따뜻하게 데운 뱅쇼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안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고 놀란 듯 황망한 얼굴을 했다.
“이런, 눈이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아쉽군요.”
밀리안이 벤틀로가 건네는 뱅쇼를 받아들며 물었다.
“눈이 오면 별을 보기 어려운가요?”
“아무래도 하늘에 구름이 있으면 보기 힘들죠.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벤틀로는 밀리안보다 더 아쉬워했다. 일부러 ‘다음 기회’라는 말로 여지까지 만든 벤틀로의 말을 무시하며 클레이는 밀리안이 한 모금 마신 뱅쇼에 입을 댔다.
어머니가 즐겨 먹었던 뱅쇼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벤틀로가 아주 날을 잡은 모양이었다. 트리 장식에 별채 다락, 뱅쇼까지. 모두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만 즐기던 것이었다.
계피를 넣어 따뜻하게 끓인 와인은 여전히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밀리안이 마셨던 건 느낌이 조금 달랐다. 클레이는 후한 평가를 내렸다.
“맛있네.”
“네? 아, 그럼 더…….”
“아니야. 난 이 정도면 돼.”
클레이는 아예 컵을 제게로 들이미는 밀리안의 입술을 살짝 혀로 핥고 얼굴을 뗐다. 고개를 돌리니 벤틀로가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꼴사납게 또 왜 저러는지. 짐짓 혀를 찼지만, 그녀는 벤틀로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별채 다락에 오지 않았던 것은 그렇다 쳐도 뱅쇼가 취향이 아니라는 말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벤틀로는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으니 클레이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니 벤틀로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준 밀리안에게 얼마나 더 잘할지 예상이 갔다. 클레이는 뜨거운 뱅쇼를 마시며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밀리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비록 별을 보진 못했지만, 두루두루 좋은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