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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섹스 파트너를 위해 그런 수술을 한다고? 클레이 디어에게는 상대할 오메가가 부족하지 않다. 수술이라는 귀찮은 짓을 하지 않고 그냥 다른 상대를 구하는 게 더 쉬운 길이었다. 클레이 디어가 손만 내밀어도 무릎을 꿇을 남자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많을 테니까.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대니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클레이도 클레이지만, 벤틀로가 이 수술에 동의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어요. 밀리안도 알겠지만, 벤틀로는 클레이 몸에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아무리 조심을 하더라도 절개 자국은 남을 수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정소가 밖에 노출된 남자와는 달리 여자 알파의 정소는 복부에 숨어 있어서 수술도 조심해야 하고요. 그런데 입원도 하루만 하더니 밀리안이 보고 싶다고 가버렸어요.’
‘아…….’
‘아무래도 클레이는 밀리안을……. 아, 미안해요. 이제 휴식 시간이 끝나서. 다시 진료실로 들어가 봐야 해요. 그럼 다음에 봐요!’
‘네, 감사합니다.’
뚝- 밀리안의 대답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천천히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어냈다. 피임약을 구할 생각으로 연락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히트 사이클이 온다는 말보다 클레이가 그를 위해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대체 언제? 언제 수술을 한 거지? 여자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떨어져 있던 날이…….
‘아, 그때…….’
클레이 디어가 그를 먼저 집에 보내고 혼자 어디론가 사라졌던 날. 그리고 서재에 혼자 있던 모습을 봤던 날. 그날이구나. 그리고 그다음 날 하루 돌아오지 않았었던 것까지. 그날뿐이었다. 클레이가 그를 두고 사라졌던 날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었다. 밀리안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황망한 감정이 그를 휩쓸었다. 왜 그랬지? 그것도 남자처럼 가볍지 않고, 까다로운 수술이라는데…….
자연적으로 그녀가 돌아왔던 날,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던 모든 것이 꿰어 맞춰졌다. 혼자 옷을 갈아입고, 옷을 입고 자고, 가벼운 키스와 포옹 외에는 별다른 접촉을 하지 않았던 모든 행동이 여자가 수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열에 들떠 자위하고, 잠자던 여자를 깨워 안겼다. 수술하고 몸도 성치 않을 여자에게.
‘미쳤어.’
부끄럽고 황망하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여자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아니었다.
‘입원도 하루만 하더니 밀리안이 보고 싶다고 가버렸어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클레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자가 했던 말과 행동은 하나의 감정으로 모든 아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데 그의 감정만 갈 곳을 잃은 채 정신없이 흩날렸다. 단 하나만은 명확했다. 클레이 디어는 자신을 결코 섹스 파트너로 대하고 있지 않았고, 자신은 그 사실에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첫 섹스를 한다는 말 아래에 히트 사이클을 강제로 끌어내겠다는 말이 숨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공포와 분노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을 위해 수술을 해가면서 배려를 해주었다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밀리안은 히트 사이클이 와야 해요. 그건 오메가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신체 흐름인데 십 년이 넘도록 강제로 막아놨으니 이런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런데 이 방법의 가장 큰 부작용은 임신할 수도 있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밀리안은 지금 피임약을 먹을 수 없어요. 아무리 오메가용 피임약이 많이 발전해서 몸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다고는 해도 인위적으로 배란을 막는 약이 독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서 클레이가 수술을 결정하게 된 겁니다.’
닥터 크래포드의 말이 잔상처럼 남았다. 밀리안은 클레이가 서류에 사인하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봤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에 걸린 만년필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살짝 내리뜨고 있던 클레이의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눈을 마주칠 때까지.
“왜 그렇게 봐?”
“…….”
“밀리안?”
여자의 붉은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밀리안은 여자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는 모습조차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온몸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여자가 의자를 뒤로 밀고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의 책상에 살짝 걸터앉고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여자의 손이 닿는 순간 달뜬 신음이 흘러나올뻔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 눈으로 보면 내 마음대로 오해할지도 몰라.”
“사장님.”
“응. 그래, 나야. 무슨 일인데 그래?”
“일, 하셔야 합니다. 휴가를 무리하게 잡아서 처리하셔야 할 게 많습니다.”
“…….”
밀리안이 단호한 얼굴로 빨리 자리로 돌아가라며 그녀를 밀어냈다. 클레이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홀리는 얼굴을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표정을 바꾸는 밀리안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저녁에는 연말 파티가 있지 않습니까. 준비하실 시간을 제외한다면 앞으로 두 시간 안에 끝내셔야 시간이 맞습니다.”
“그딴 건 안가도 상관없어.”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당일에 취소라니. 말도 안 됩니다. 이러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하.”
철벽같은 비서 모드로 들어간 밀리안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 그와 뒹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강제로 쾌감을 끌어낸다면 싫다고 말은 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끌려 올 테지만, 이제 그를 마음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니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고 툴툴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클레이 디어와 거리가 멀어지자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안심한 듯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밀리안은 떨리는 손가락을 펴고 키보드 위에 얹었다. 클레이 디어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그에게 일이 몰리는 것도 많았다. 특히 비서실 팀원 두 명이 먼저 휴가를 내서 더 그랬다.
히트 사이클.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 단 한 번 경험했던 것은 그에게 끔찍한 기억만 남겨줬다. 그런데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다시 경험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
만약 끝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끔찍한 일을 다시 겪었겠지.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밀리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클레이 디어의 수술과 히트 사이클.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 결정했던 만큼 또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독단적인 선택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언제 말을 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흠하나 없이 완벽한 몸에 칼을 대고 수술을 결심한다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 수 있을까. 이것으로 그녀가 혹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혹시나 하고 추측하기만 했던 가정이 더 명확한 색이 되어 다가왔다. 하지만…….
엉망이었던 시작. 괴롭고 힘들기만 했던 클레이 디어와의 관계. 그걸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차마 그럴 수 있다고 확언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심장이 이렇게 떨리는 걸까. 입원 일자를 채우지도 않고 하루 만에 보고 싶어서 돌아왔다던 여자의 웃는 모습만 떠올랐다.
처음으로 저택에 남자를 데려왔다던 것도,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하던 여자의 행동들도, 싫은 행동을 하면 키스를 하라던 여자의 말도. 그래. 그때부터 여자의 곁에 있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든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것들이 하나로 뭉쳐 그를 짓눌렀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만 생각해.’
밀리안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남은 시간이 두 시간뿐이라는 것은 클레이 디어만이 아니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 * *
샾의 모든 직원이 달라붙어 온 정성을 다해 단장한 클레이 디어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퇴색할 정도로 빛났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클레이를 보며 밀리안은 회사에서 했던 확신에 대한 자신감이 급속도로 빠져나감을 느꼈다. 저런 여자가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걸까.
“어때? 잘 어울려?”
클레이가 마치 런웨이에 선 모델처럼 그의 앞에서 몸을 돌렸다. 허리까지 내려온 긴 금발이 찰랑거리며 흩날렸다. 한올 한올이 흩어져 날릴 때마다 조명에 의해 반짝였다. 여자의 모습이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조각조각이 나서 눈에 박혔다. 밀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은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클레이의 드레스를 정돈하던 샾의 직원이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굉장히 무심한 분이시네요.”
“그렇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저런 무뚝뚝한 얼굴이라니……. 하긴, 어떻게 보면 최고의 비서네요.”
“맞아. 최고의 비서지. 나에게 절대 빠지지 않는 유일한 남자야.”
클레이는 직원이 건네주는 작은 클러치를 받아들고 밀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택에 있을 때도, 회사에 있을 때도 보지 못했던 생소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묻고 싶어도 저택이 아닌 곳에서 그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티 낼 수 없어 참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 고작해야 비서와 사장의 업무적인 관계로 보여야 했다. 그걸 밀리안이 원하기 때문에.
클레이는 모든 치장을 마친 뒤, 차에 올라탔다. 밀리안은 아까와 같은 얼굴로 그녀의 차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돌아서 안으로 들어왔다. 차에 타고서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묘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린 눈을 들어 올리고 싶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추궁하고 싶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오늘 당신 일정은 이걸로 끝이야. 먼저 돌아가도록 해.”
“……네?”
“언제 끝날지 모를 파티를 언제까지 기다리려고? 먼저 집에 가 있어.”
“알겠, 습니다.”
밀리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단 나은 표정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밀리안의 손을 잡고 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밝히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법을 밀리안을 통해 배워가고 있었지만, 평생 마음대로 살아왔던 성격을 제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트너로 데려가지도 못하고, 그런 파티에 데려갈 마음도 없었다. 영원히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나올 때까지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이래서 가기 싫었다. 항상 붙어 있다가 떨어져 있으려니 썩 내키지 않는다. 저 남자가 혼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할지 몰라서 더 그랬다. 하지만, 불참하면 안 된다던 밀리안의 말처럼 쳐내고 쳐낸 파티 중에 이것만은 물릴 수 없었다. 와락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나마 밀리안의 손을 잡고 있어서 참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