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75화 (75/144)

-75-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클레이가 벤틀로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이게 대체 뭐야?”

클레이는 식탁을 장식한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얀색과 푸른색 붉은색 꽃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식탁 가장 상석부터 반대쪽 끝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바닥에 닿았다. 꼭 신부의 웨딩드레스 자락처럼.

일반적인 아침 식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게다가 식당 전체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놓아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이 호화로운 자리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밀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꾸며놓은 벤틀로는 무척이나 당당한 얼굴로 어서 자리에 앉으라며 채근했다.

클레이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어색하게 서 있는 밀리안을 끌어 옆자리에 앉혔다. 자리에 앉고 나니 더 적나라하게 의도가 느껴졌다. 아, 진짜 부끄럽다. 밀리안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벤틀로가 식탁 위에 촛불을 켰다. 목 안쪽까지 소름이 돋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밀리안뿐이었다. 클레이는 다소 어이가 없긴 해도 기분은 좋았다. 생생한 생화의 잎 하나를 따서 이리저리 만지며 벤틀로를 향해 물었다.

“온 지 얼마 안 됐다더니 대체 언제 이걸 다 준비한 거야?”

“이 정도에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신난 거 같은데?”

“설마요. 이것도 아주 많이 자제한 거랍니다.”

“뭐 하러 자제해. 아주 끝을 달려보지.”

“호오. 역시 그럴 걸 그랬습니다. 사실 섬 전체를 꾸미려다 말,”

“제발, 그만 하세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축하가 아니라 괴롭히는 수준이라며 밀리안이 애원했다. 클레이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개를 숙인 밀리안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웃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맑았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해사한 웃음을 듣고 있으니 결국 밀리안의 입술에도 미소가 비쳤다.

* * *

오후까지 함께 있던 벤틀로는 해가 지기 전에 배를 타고 돌아갔다. 다시 단둘만 남게 되었다. 섬은 한 시간이면 전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해가 지고 밤하늘에 별이 갈리기 시작하자 더 작게 느껴졌다. 하늘도 바다도 모두 새카맣다. 세상의 끝에 단둘이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우스운 비유지만, 이 순간은 그렇게 느껴졌다.

밀리안은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의 체온은 가만히 느꼈다. 만약 혼자 이곳에 왔다면 이런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지 못했겠지. 아마 참지 못하고 저 새까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새 클레이 디어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여자는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공간을 모조리 차지해 자리를 잡아버렸다. 너무 막무가내여서, 쫓아낼 수도 없었다. 여자에게 제 공간을 계속 빼앗기는 불안감에 경계하고 두려워했지만, 어느새 동화되어 버렸다. 그녀조차도 자신의 일부분이 되어 버려서 이제 클레이가 다시 나가버릴까 봐 두려울 지경이 되었다. 무작정 침입했을 때처럼, 그녀가 나간다고 한다면 아마도 잡을 수 없을 테니까.

“무슨 생각해?”

“……꿈 같다는 생각이요.”

그래, 이 모든 순간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깨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그런 이상한 꿈을. 만약 일 년 전으로 돌아가 과거의 자신을 향해 일 년 뒤에 클레이 디어와 이런 사이가 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농담으로도 치부하지 않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겠지. 그 정도로 그와 클레이 디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조용히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도 그를 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설치된 조명의 옅은 빛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이 순간이 꿈 같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 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사실일까. 그때의 떨림과 애틋함이 생생한데도 믿을 수가 없다. 바보 같구나, 밀리안. 겁쟁이. 며칠 전의 용기는 대체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네?”

“무서워. 꿈 같아서. 깨면 당신이 내 옆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

너무 행복해서 도리어 무서울 정도라는 여자의 나직한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실렸다. 살짝 아플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클레이는 말없이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밀리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안해, 밀리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 당신이 내게 질려서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

밀리안과 감정이 이어지는 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게 사라지면 아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각인(오메가와 알파는 상대에게 각인하면 평생 그 사람의 페로몬만 맡을 수 있다. 상대가 죽는다 해도 풀리지 않는다.)까지 해 버린 자신과는 달리 이 남자는 사랑한다는 말도 아직 하지 않았다.

무섭다. 당신이 떠나려고 할까 봐.

클레이는 그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서 온전히 자신이 전부라는 자만을 하지 않았다. 정이 고팠던 외로운 남자는 그저 눈앞에 있는 온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자신을 선택하면 벤틀로도, 대니얼도, 에릭도, 회사 동료들까지 모두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욕심이 사나운 자신과 달리 정말 다정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자만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난 평생 이런 불안을 느끼며 당신이 주는 행복을 야금야금 주워 먹겠지.’

자신은 좋은 여자가 아니다. 착하지도 않지. 만약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떠나더라도 절대로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밀리안이 입 맞췄던 배가 화끈거렸다. 자신의 것이라며 눈을 빛내던 밀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상처를 더 길게 내 달라고 할 걸 그랬다. 마지막 봉합을 성형외과의가 담당하게도 하지 않는 건데. 이게 아쉬워질 줄이야. 클레이는 손으로 수술했던 부위를 더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거야. 네가 원했으니 절대로 물려 주지 않을 거야.

클레이는 완전히 밤이 되어 살짝 서늘해진 바람을 느끼곤 밀리안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밀리안의 향이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흩날렸다. 그에 화답하듯 클레이의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밀리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조였다.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로…….

* * *

섬에서의 휴가는 매우 평화로웠고, 좋았다. 밀리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간간이 그때 기억을 떠올리고는 했다. 모든 것이 바뀐 날. 마음도 가벼워졌고,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해졌다. 늘 그를 따라다니던 두통도 사라졌다. 약을 많이 먹어 속이 뒤집힐 일도 없다. 가볍게 시작했던 운동은 이제 강도가 꽤 높아져 어설프게나마 클레이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체력이 붙었다. 그리고 그만큼 식욕도 늘었다.

점심은 스테이크였다. 주방장인 미셸이 아주 좋은 고기가 들어왔다며 솜씨를 뽐낸 요리는 그의 자신감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클레이가 워낙 대식가인 탓인지 스테이크는 매우 컸다. 예전이었다면 반이나 먹었을까 싶은 크기였지만, 요즘 밀리안도 식욕이 늘어서 부담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식사량이 늘었어.”

“네?”

밀리안은 스테이크를 썰다가 고개를 들었다. 클레이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밀리안은 입 안에 든 고기를 씹어 삼킨 뒤, 물을 마셨다. 밀리안이 식사를 멈추려고 하자 클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쁘다는 게 아니야.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하지만 닥터 크래포드가…….”

“대니얼이 뭐라고 했어?”

“……아니요. 아닙니다.”

“그래? 그럼 직접 물어보면 되지.”

클레이의 미소가 짙어졌다. 분명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 안에 미세한 살기가 느껴졌다. 밀리안은 정말 별거 아니라며 말을 흐렸다. 생각 없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죄도 없는 닥터 크래포드가 화를 입게 생겼다. 밀리안의 변명에도 클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정말 별거 아니라면 대니얼도 그 가벼운 주둥이를 쉽게 열 수 있겠지.”

“…….”

점점 더 짙어지는 미소가 매우 수상쩍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겠구나 싶어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매우 다정해졌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성격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클레이 디어는 집요했고, 뒤끝이 강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녀의 기분은 더 나빠질 테고,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사람은 닥터 크래포드만이 아닐 것이다. 밀리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몸매 관리를 못 하는 남자를 싫어한다고 해서…….”

“누가? 내가?”

“…….”

밀리안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얼굴에 열이 올라 뜨끈했다. 섬에서 돌아오는 전세기 안에서 닥터 크래포드는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그에게 앞으로 살이 찔 거라고 그걸 주의해야 한다며 속삭였다. 클레이 디어는 관리를 못 해 군살이 잡히는 남자는 혐오한다면서. 더듬거리는 밀리안의 말에 클레이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정말 쓸데없는 주둥이야.”

쓸모없는 김에 아예 찢어 버리고 싶다며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다 식욕이 떨어진 밀리안이 아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그거 다 비우기 전까지 포크 내려놓지 마.”

“배가 불러서…….”

정확하게는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져서였다. 밀리안이 물만 연거푸 마시자 클레이가 손등에 턱을 괬다. 묘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래서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거였어?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크흡. 정곡을 찌르는 말에 밀리안이 물을 마시다 사레에 걸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레이는 그의 옆자리로 옮겨 밀리안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지만 짓궂은 말은 계속 흘러나왔다.

“그렇게 운동을 하고 나와 섹스까지 하는데 살이 찔 리가 없잖아. 너무 울어서 더 마를까 봐 걱정될 정도인데.”

“그, 그만. 크흠. 흣.”

“당신은 왜 기침 소리도 야할까?”

조금 전까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던 클레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여자의 기분이 좋아진 건 다행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밀리안은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다.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먹긴 하니까 살이 붙는 게 제 눈에도 보였다. 게다가 클레이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고 만졌다.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이상한 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