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86화 (8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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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라 디모시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남편의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생긴 버릇이었다. 그녀의 손톱은 이미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연이어 터진 상처로 피가 멈추는 날이 없었다.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고, 창문도 커튼으로 모두 가린 채라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한 그녀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당당한 모습으로 모임도 참여해봤지만, 이제는 그러지도 못했다. 평소에는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이 그녀를 꺼리고 말도 섞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가 용기 내어 말을 걸어도 어색한 웃음으로 대응하다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렸다. 시선이 마주치면 흡사 더러운 것을 보듯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철저히 고립되고 무리에서 제외당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아니, 상상은 해보았다. 밀리안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지인들에게 알려지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방출당하리라는 끔찍한 상상을.

딱 그 상상과 똑같았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밀리안이었다.

‘이 짐승 새끼!’

아이가, 아니 짐승이 자신의 배를 빌어 태어난 이후, 그녀의 인생은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짐승인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었던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래. 어차피 사람도 아니잖아. 짐승 하나 없애는 거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나?’

그녀는 남편이 처박혀 있는 방을 조용히 바라봤다. 원망스럽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능력 있는 의사인 척 굴더니 고작 다른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해서 자신마저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

무의식중에 손톱을 깨물다 이미 헤집어진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엉망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봤다. 이런 버릇이 생기기 전까지는 항상 곱게 다듬었던 손이 이젠 남들 앞에 보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망가진 자신의 인생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들의 추락을 비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바깥으로 표출을 할 수가 없다. 괴로움과 고통에 찬 절규를 그들이 들으면 꼴 좋다고 좋아할 것 같아서. 엔젤라 디모시의 눈이 증오로 번들거렸다.

‘그래, 그 짐승 새끼를 없애자. 그래야 내 인생도 다시 정상이 될 거야.’

* * *

모니터에 비치는 여자를 보던 에릭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엔젤라 디모시는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자신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뒤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부하도 질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 진짜 소름 끼치는 여자예요.”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정신병이 걸리는 기분이라는 부하의 말에 에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무슨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릭, 이것 좀 보세요. 지금 엔젤라 디모시가 이런 걸 검색하고 있는데요.”

살인청부업자. 조심성도 없이 핸드폰으로 이런 걸 검색하고 있다며 다른 부하가 그를 불렀다. 에릭은 계속 화면이 움직이고 있는 모니터를 신중하게 바라봤다. 살인까지 해주는 심부름꾼을 포털에 검색해서 찾을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자신의 명의로 된 핸드폰으로. 순진한 것도 정도 것이지. 하지만 그래서 일이 쉬워졌다.

“아주 증거를 줄줄 남기고 있네요.”

“…….”

“어쩔까요?”

“기다려야지.”

무엇이든 해준다는 심부름센터의 홈페이지로 화면이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홈페이지에 표시된 전화번호가 찍혔다. 에릭은 해킹 중인 핸드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녹음은?”

“당연히 하고 있죠.”

“음.”

에릭은 손가락으로 입술에 대고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연결음이 끊기고,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말, 무엇이든 다 해주나요?]

덜덜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저희는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해결해 드립니다만.]

[…….]

[뭐, 고객님께서 그런 걸 의뢰하실 리가 없겠죠?]

[……네. 전혀 불법적인 의뢰가 아니에요. 설마, 그럴 리가 없죠. 절 뭐로 보고!]

[혹시나 해서 하는 충고입니다만, 개인 전화로 그런 의뢰를 하시면 바로 걸립니다. 되도록 이상한 의뢰 자체를 안 하는 게 가장 좋고요.]

[쓰, 쓸데없는 충고군요. 끊겠습니다.]

뚝-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듣고 있던 에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 쓸데없는 충고였다. 여자는 이제 좀 더 조심해서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먼저 움직이는 쪽이 좋겠지.

“이쪽과 접촉해.”

“어떻게 하시려고요?”

“원하는 걸 말하게 해야지.”

언제든지 전화 한 통화면 주소는 물론 개인정보가 모두 털린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켜만 보느니 수렁으로 가는 계기를 직접 만드는 편이 나았다. 되도록 짧고, 그만큼 강렬하게. 그의 짧은 설명만으로 모두 알아들은 부하가 반색했다.

“그럼 이제 이 지루한 짓도 끝나겠네요.”

“그래야지.”

몇 개월이나 이어진 감시는 정신력을 소모시켰다. 일단 계기를 만들어 준 여자의 성급한 행동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자신보다도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엘레나였다.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한 아내는 그가 집에 들르는 일이 줄어들자, 힘들어했다. 밤이 새도록 일하고, 몸을 다치는 것보다도 아내가 힘들어하는 게 에릭에게는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클레이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신호가 가고 바로 끊어졌다. 밀리안이 함께 있다는 뜻에 에릭은 시계를 바라봤다. 아마 삼십 분 이내로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삼십 분이 지나기 전에 클레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에릭은 그녀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과 그 뒤에 하려는 대처까지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자는 후, 하는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그리고 닥터 디모시는 따로 밖으로 불러내.]

진창으로 떨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단꿈을 꾸게 해주겠다며 잔인한 말을 쉽게도 말한다. 하지만 디모시 부부에게 어울리는 결말이기도 해서, 에릭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닥터 디모시는 몇 개월 만에 받은 전화에 들떠 몸을 일으켰다가 상대의 제안에 표정을 굳혔다.

“아프리카, 말입니까? 거긴 좀……. 아, 아니요. 거절하려는 건 아닌데 지역이 너무 멀어서 고민이 좀 되는군요.”

[이삼 년만 그곳에 있다가 오면 닥터 디모시의 평판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다시 돌아오셔도 큰 무리 없이 합류하실 수도 있고요. 지금은 좀……, 아시죠?]

“……네.”

[역시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닥터 디모시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셔서 이대로 실력이 묻히기엔 아깝다고 생각해서 오래 상의를 하고 내린 결론이거든요.]

“하하…….”

웃고는 있었지만, 입술이 잘게 떨렸다. 아프리카라니. 봉사 활동을 하고 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바로 거절하기에는 그 제안을 한 병원이 몹시 큰 기업이라는 것이었다. 이삼 년. 이삼 년이라. 그의 인생에서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장 상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다른 병원에선 그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삼 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시고, 괜찮으시면 본 병원에 한 번 방문해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좋으니까요.]

“아니요.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내일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오, 그럼요. 그럼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두겠습니다. 늦어도 한 시간 내에 메일로 안내를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빠르게 결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뵙지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닥터 디모시는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다. 일을 저지르고 나니 심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래요?”

밖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들어온 아내가 초조한 얼굴로 빨리 말해보라며 채근했다. 예전에는 저런 식으로 제게 큰 소리를 내지도 못했던 여자가 이제는 아주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다. 닥터 디모시는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아내도 그로 인해 몇 개월간 전전긍긍하며 속을 태웠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 좀 가라앉았다. 그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흘러나왔다.

“아프리카에 이삼 년만 있다 오면 본사로 복귀하는 조건이라는군.”

“아, 프리카요?”

“그래. 일단 봉사 활동을 하면서 다시 평판을 높이라는 뜻이야.”

“그걸 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이대로 자존심 세우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썩을 수는 없잖아.”

“……난 못가요. 아프리카라니, 내가 거기서 어떻게 살아요? 당신만 갔다 와요.”

“지금 나보고 혼자 거기에 가라고?”

“그럼 내가 왜 가야 하죠?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당신인데, 왜 나까지 같이 고생해야 해요?”

“그래? 그럼 이혼을 하고 갈까?”

“……읏.”

“잘 나갈 때는 내 덕에 떵떵거리며 살더니 같이 고생해야 할 때는 나 몰라라 해? 그럴 거면 뭐 하러 부부로 살지?”

갑자기 이혼까지 튀어버린 극단적인 대화에 부부 모두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안젤라 디모시가 습관적으로 손을 물어뜯었다.

“그 손 좀! 제발 손 좀 내버려 둬!”

피범벅이 되어 아주 무서울 지경이라며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면서 뻔뻔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상처가 나면 치료나 한번 해줬어요? 그동안 쳐다도 안 봐놓고 왜 소리를 질러요?!”

“됐어. 이제 나가야 하니까 더 이상 말 걸지 마.”

“―!”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캐리어를 꺼내는 남편을 본 엔젤라 디모시는 화를 못 이겨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속이 엉망이었다. 아프리카라니. 의사가 간다는 아프리카 지역은 대부분 의료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곳이었다. 덥고, 문명의 혜택에서 먼 곳. 그곳에 따라간다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편의 말마따나 이삼 년만 그곳에서 고생하면 의사로서의 평판은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까지 퍼졌던 비리에 얽힌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테고, 그럼 다시 원래대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쁠 것이 없었지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잘못을 같이 짊어진다는 사실이 싫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엔젤라 디모시의 몸이 움찔 굳었다. 누구지?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울린 초인종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그건 며칠 전에 섣불리 한 전화로 인한 불안한 감정이었다. 아니다. 자신은 본론을 채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찾아올 일은 없다. 엔젤라 디모시는 다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시죠?”

“릴 부동산에서 왔습니다. 집을 보러 왔는데,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부동산업자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여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풍채가 좋은 남자는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이미 집이 팔린 줄 알았는데, 아직 계시는군요.”

“아, 잠깐 집을 비우는 바람에. 그런데, 집을 산다는 사람이 있나요?”

“네. 그것 때문에 왔는걸요. 일단 집을 좀 봐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어제 집을 청소해둬서 다행이었다. 부동산업자가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엔젤라 디모시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산다는 사람은 같이 안 왔나요?”

“네. 제게 대행을 맡겨서요. 관리를 꽤 잘한 집이군요.”

“당연하죠.”

그때 남편이 외출 준비를 마친 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왔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에 눈을 찡그렸다.

“누구…….”

“오, 남편분이신가 보군요. 저는 릴 부동산의 마이크 겔런입니다.”

“아, 부동산. 집을 산다는 사람이 나왔습니까?”

“네. 그래서 방문한 참입니다.”

“저는 이제 나가봐야 해서.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녀, 오세요.”

“음.”

부동산업자와는 사람 좋은 얼굴로 대화를 하더니, 자신의 말에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나가버렸다. 타인이 있는 상태에서 무시당한 수모에 엔젤라 디모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인사한 줄 아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타인이 있는데 존중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는가. 남편의 매너 없는 행동에 안 그래도 짜증 났던 속이 더 뒤집혔다. 이 기분이라면 남편의 말대로 이혼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때 혼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부동산업자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 층을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올라가세요.”

“그런데 두 분만 사시는 집치고는 꽤 큰 저택이군요.”

“뭐, 이 정도면 보통 아닌가요.”

이 층으로 올라가는 도중 감탄하는 부동산업자의 말에 엔젤라 디모시가 짐짓 콧대를 세웠다. 그래. 항상 이런 말을 들어왔다. 설핏 입꼬리를 올려 웃는데 부동산업자는 예전 아이의 방이었던 곳을 가장 먼저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수북이 쌓여있던 먼지가 훅 올라왔다.

“여긴 사용을 안 하시나 봅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먼지가 많군요.”

“……창고예요.”

하필이면. 아이가 집을 나간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방이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네? 본론, 이라면…….”

“며칠 전에 의뢰를 하겠다고 전화하지 않으셨습니까.”

“―!”

선한 인상이었던 남자의 표정이 슬쩍 바뀌었다. 엔젤라 디모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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