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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남편마저 집을 비워서 혼자인데 이 정체 모를 남자와 단둘만 남은 상황이 무서워졌다.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 지었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어, 어떻게 집을 알고…….”
“전화번호만 알면 다 알 수 있죠. 이 정도면 꽤 신용이 가지 않습니까?”
“왜 찾아, 온 건가요? 나, 나는 그냥 전화를 끊었는데…….”
어떻게든 침착하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잔뜩 겁에 질린 채 잘게 떨려 나왔다. 그녀의 경계에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전화로 하지 못할 의뢰를 하시려는 것 같아서요.”
제가 잘못 판단한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낯익었다. 그때 전화를 받았던 심부름센터의 남자. 엔젤라는 떨리는 두 손을 겹쳐 꽉 쥐었다.
“정말, 다……. 어떤 것이든 다 된다는 건가요?”
“들어보죠. 아, 선수금은 먼저 입금해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얼마.”
“일의 경중에 따라 다른데, 아마도 부인의 의뢰는 좀 비쌀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새, 생각을 좀 해봐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 부인. 제가 이곳에 온 시점에서 부인은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남자는 재킷 안쪽에서 총을 꺼내 손으로 빙글 돌렸다. 남자는 총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하려던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의뢰를 하지 않으면, 저 남자는 꼭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어, 어쩌지?’
‘뭘 어째? 지금이 기회야. 아니면 어떻게 저런 청부업자를 찾아서 그 짐승을 죽일 수 있겠어?’
‘하지만 살인은…….’
‘내가 직접 죽이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
머리에서 두 개의 자아가 공방을 벌였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다시 총을 재킷 안으로 집어넣는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저, 저와 얽히는 건, 아니죠?”
“당연하죠.”
돈만 입금되면 일의 책임은 모두 자신들이 진다며 남자는 호언장담했다.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의 집까지 쳐들어온 남자는 그녀가 집 주소는 물론, 집을 판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정도로 그녀의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고작 이틀 밖에 안 됐는데. 게다가 무기까지 꺼내 들어 그녀를 위협했다. 이건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그래. 나는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는 거야.’
그 짐승 새끼를 죽이려던 생각은 그때 이 남자와의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접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뒤돌아갈 수 없다며 총까지 들고 위협을 하는데 연약한 자신이 뭘 어쩐단 말인가.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닐까? 제멋대로 자기합리화를 마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뢰 대상은…….”
* * *
“이거 미친년이네요?”
사무실로 돌아온 루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친아들을 살해 의뢰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크는 사무실 중앙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앉아있지 왜 서 있어요?”
루크가 가리킨 소파는 담배 자국으로 구멍이 뻥뻥 뚫린 낡고 더러운 소파였다. 남자는 그 소파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녹음기.”
“여기요.”
녹음기는 물론, 여자에게 받은 밀리안 디모시라는 남자의 사진과 신상명세까지 모두 넘겼다. 남자는 묵묵히 그가 넘긴 것을 받아들었다. 디모시 부부의 집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를 모두 잡아내려면 가까이에서 직접 녹음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루크는 비굴한 얼굴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씨발, 존나 살벌하게 생겼네. 돈도 안 되는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다가 대박을 건지긴 했지만, 상대는 자신에게 좀 벅차 보였다. 아니 저 남자의 뒷배가. 돈을 많이 준다길래 덥석 물긴 했는데, 이러다가 자신마저 엮여서 골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다.
“저기, 돈은…….”
“녹음기를 확인한 후에 바로 입금하지.”
“지금 여기서 확인하면 안 됩니까? 이대로 입을 싹 닫으면…….”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루크가 입을 합 닫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선수금을 그렇게 줬는데, 그게 신뢰가 가지 않는 건가?”
“그건 그렇지만, 아니, 뭐, 믿습니다. 어후, 눈으로 사람 죽이겠네.”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오래 살려면.”
“…….”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낮았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감쌌다. 총도, 칼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협을 느꼈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남자가 나간 뒤에야 긴장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소파 뒤쪽에 있는 금고를 슬쩍 열어 켜켜이 쌓여있는 현찰 더미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도망가서 살아도 꽤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잔금 욕심을 부리다 목이 쓱싹 썰리느니 차라리 이대로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지잉- 하며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표시되지 않은 전화에 그는 딱딱하게 각을 잡은 채 양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충고하는데,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몸을 숨긴다거나, 도망간다거나 하는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씨발, 대체 어떻게 알았지? 루크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왠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고 있는 듯한 섬뜩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 당연하죠. 제가 왜 도망갑니까? 하하하!”
뚝-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끊어졌다.
“아오, 씨발. 좆 까, 새끼야!”
* * *
집에 돌아오니 아프리카에 혼자 가라던 아내는 갑자기 말을 바꿨다. 닥터 디모시는 의심쩍은 눈으로 그녀에게 다시 확인했다.
“진심이야?”
“그래요. 생각해보니 내가 좀 너무한 거 같더라고요. 왜요? 가지 말아요?”
혼자 가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하라며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어딘가 불안한 듯 손을 자꾸 깨물었다. 또 피가 나고 있었다. 닥터 디모시는 한숨을 쉬며 아내를 소파에 앉히고, 비상약을 꺼내왔다.
“고생할 거야. 그래도 같이 간다고 해줘서 고마워.”
“……뭐, 그 고생은 당신도 같이 하겠죠.”
“그래. 손 좀 줘봐.”
“여기요.”
그렇게 곱던 아내의 손이 완전히 망가진 채였다. 이렇게 불안해했다니. 닥터 디모시는 혼자 괴롭다고 생각했던 시간 동안, 그녀도 손이 이렇게 될 정도로 힘들어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미안해. 고생만 시켜서.”
“갑자기 왜 이래요. 평생 한 번도 그런 말 안 하더니.”
“그냥. 갑자기 마음이 좀 그래서. 그 녀석이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로 당신 계속 힘들어했잖아.”
“그 애 얘기는 하지 말아요!”
“……그래.”
괜한 말을 꺼내서 누그러졌던 아내의 표정이 다시 사나워졌다. 그는 드레싱까지 꼼꼼하게 붙인 뒤 바짝 말라버린 아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내는 잠시 주저하더니 그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이제 다 잘 될 거야. 조금만 더 고생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래요. 그럴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엔젤라 디모시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으로 속삭였다. 불행의 싹을 제거할 거니까. 그러니 잘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 남자가 돌아간 이후, 부동산업자가 방문했다. 이번에도 속는 게 아닌가 싶어 경계했는데, 정말 부동산업자가 맞았다. 구매자까지 와서 순식간에 집 매매 서류까지 처리했다.
‘이것 봐. 불행의 싹을 제거하려니까 좋은 일이 생기잖아.’
자신의 판단이 옳은 거였다. 신이 그동안 고생한 자신을 위해 시련을 빗겨 가게 해주는 것이다. 진작에 이럴걸. 이 생각을 왜 이제야 한 건지. 너무 늦게야 짐승을 없앨 생각을 자신이 어리석었다. 미리 처리했더라면, 남편의 커리어가 엉망이 되는 일도 없었으리라.
집을 판 금액으로 선수금을 대기로 했지만, 후회는 없다. 어차피 다시 남편이 재기하면 그깟 돈은 쉽게 벌 수 있을 테니까. 잘 한 거야. 그럴 것이다. 그녀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 * *
엔젤라 디모시는 너무 허술했고, 황당할 정도로 순진했다. 이런 여자를 자신과 동급 취급하며 경계했던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몰랐다. 물론, 그렇게 경계했던 가장 큰 원인이 밀리안의 친모라는 점 때문이었지만.
[밀리안 디모시? 당신의 성과 같은데, 혹시…….]
[그,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중요하지 않죠. 친어머니가 아들을 청부살해를 하든 말든 우리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그 짐승 새끼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네네, 알겠으니 흥분하지 마십시오. 방식은 어떻게?]
[그, 그것까지 제가 정해야 하나요?]
[간혹 특별한 방법을 원하시는 분들도 계셔서요. 뭐, 부인은 아닌 것 같으니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선금은…….]
클레이는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벌벌 떨면서도 꿋꿋이 아들을 죽여달라는 말을 하는 여자는 역겹다는 말로 부족했다. 남을 탓하느니 자신을 탓하는, 지나칠 정도로 착한 밀리안의 친모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부모라 밀리안을 온전히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밀리안이 자신에게 곁을 내줄 일은 없었을 테니까.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클레이에게 넘겼던 녹음기를 다시 품으로 회수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에릭을 대신해 이 일을 맡고 있었다.
“이 뒤는 이전에 이야기된 대로 처리할 생각입니다. 다신 이 나라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건 육체가 없는 영혼뿐일 것이다. 사람을 죽이려는 일을 어수룩하게 처리한 대가는 결코 어설프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원래의 계획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썩 마땅찮았지만, 밀리안의 친부모라는 점을 감안해서, 가볍게 정신병원으로 처넣으려던 계획은 그 여자의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급선회 되었다.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그게 디어 가의 철칙이었다. 그리고 그 혈통을 이은 클레이의 신조이기도 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평소보다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 중간에 깨진 않았겠지. 클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운을 살폈다. 밀리안이 질색한 이후로 나름대로는 꼼꼼하게 몸을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질투하는 게 귀엽긴 했지만, 그렇다고 밀리안이 싫어하는데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또 중간에 일어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그게 다행이면서도 묘하게 섭섭했다.
침실로 돌아가니 밀리안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자신이 곁에 있을 때는 따뜻한 온기를 찾아 그녀에게 바짝 안겨 잠들었고, 혼자 잠이 들면 저렇게 안쓰러운 모습으로 자곤 했다. 클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고 밀리안의 곁에 누워 그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평소와 달리 바로 안겨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그의 얼굴을 살피려는데, 밀리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묻고 깊게 끌어안은 밀리안의 행동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클레이는 묘하게 서늘한 밀리안의 체온에 페로몬을 풀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체온이 올라갔다.
“잘자, 밀리.”
클레이는 밀리안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