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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소포지?”
앞으로의 계획이 세워지자 어느 정도의 활력을 되찾은 닥터 디모시는 체력을 올리기 위해 저녁마다 가볍게 근처를 뛰곤 했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집에 오는데, 누런 봉투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그는 우편함에 꽂힌 얇은 봉투를 꺼냈다. 발신인은 없이 아내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엔젤라? 여보?”
안 들리는 건가 싶어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부엌으로 가 물을 꺼내 마시려는데, 냉장고 겉면에 장을 보고 오겠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흠.”
그는 소포를 아일랜드 바 위에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그런데 자꾸 소포에 눈이 갔다. 닥터 디모시는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소포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봤다. 만져지는 느낌으로는 안에도 종이인 것 같다. 발신인이 없어 혹여나 했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별거 아니겠거니 싶어 다시 바에 올려놓는데 접착이 약한 건지 봉투가 툭 하고 열려 안에 있던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
떨어진 내용물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던 그의 몸이 움찔 굳었다. 밀리안의 사진이었다. 밀리안의 얼굴이 확대된 사진과 숨어서 찍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장거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뒤엉켜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사진이 아내에게 온 걸까…….
의문과는 별개로 이제는 완전히 연이 끊어졌다고 믿었던 아들의 사진을 보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그는 아예 의자에 앉아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간혹 원망도 했었고, 미안하기도 했었다. 아들도 오메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닐 테니까.
죄 없는 아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원망했었던 대가가 지금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묘한 회한이 그를 휩쓸었다. 아내도 이런 기분이 들어서 아들의 사진을 찍은 걸지도 모른다. 밀리안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말라며 화를 내더니 사실은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걸까.
‘그나저나 대체 누구에게 의뢰한 거지?’
아내의 대외활동이라고는 동료 의사의 부인들이 만든 봉사 활동 모임뿐이었다. 그 외에는 가정을 돌보는데 충실한 주부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고 사람을 고용했을지 신기했다. 아내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는 보던 사진을 뒤로 넘겨 다음 사진을 바라봤다.
얼굴이 확대된 사진이었다. 아들은 예전보다 낯빛이 좋았다. 제 앞에선 딱딱한 표정만 지었는데, 사진에는 웃는 모습이 찍혔다.
‘그래, 원래 잘 웃던 아이였지.’
밀리안이 어렸을 적,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만 하더라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이 사진의 모습보다도 더 밝고 크게 웃었었다. 그는 왜인지 먹먹한 기분에 들고 있던 사진을 바에 올려두고 이 층, 아들의 방으로 향했다.
내쫓다시피 밀리안을 내보낸 이후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아들의 방은 아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모양인지 먼지가 가득했다. 얼마나 먼지가 쌓였는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바닥에 신발 자국이 찍힐 정도였다. 그는 되도록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책장 쪽으로 갔다. 앨범이 어디에 있더라. 아내가 버렸을 가능성도 있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아있었으면 했다.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버려놓고 이제 와서 그리워하는 꼴이라니. 남자는 자신을 잘 알았다. 지금은 잠시 그리워하더라도 다시 아들과 연을 잇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얼마 뒤면 몇 년간 이 나라로 돌아오지 못해서 잠시 기분이 센티해진 것뿐이라는 사실도.
먼지가 너무 많아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눈으로 책장을 더듬어 앨범을 찾는데 뭔가 이상했다. 누군가의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내의 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큰 성인 남자의 손자국이었다.
* * *
엔젤라 디모시는 깨끗하게 치웠던 집이 남편의 흔적으로 흐트러진 것을 보고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수건을 아무 데나 놓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수건을 들어 올리려다 아일랜드 바 위에 흩어져있는 사진에 몸이 굳었다. 왜, 왜 이런 사진이 여기에…….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사진을 모았다. 대체 이런 사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때 사진 옆에 자신의 이름만 적혀 있는 봉투가 보였다. 딱 사진이 들어 있는 거라고 예상이 될 만큼 비슷한 크기의 봉투였다. 그 순간 이 사진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남자. 부동산업자로 가장해 자신을 찾아온 청부업자.
거기다 이 사진이 뜯어져 있는 것으로 봐선 누군가 본 게 틀림없었다. 일부러 아무도 없는 때를 노려 이렇게 펼쳐놓은 걸까? 아니면, 남편이 뜯어 본 걸까. 엔젤라 디모시는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위에서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고개가 그곳을 향해 휙 돌아갔다.
남편이었다. 그는 손에 앨범 하나를 들고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엔젤라 디모시는 눈을 깜박이지 못했다. 사진만 온 거다. 그 외에 수상한 건 없었다. 이런 거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편은 계단을 내려오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밀리안의 사진이 당신 이름으로 왔던데, 봤어?”
남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순간 쿵 내려앉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남편은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입이 바싹 말라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봤, 어요. 이거 당신이 뜯은 거예요?”
“아니. 당신 주려고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봉투가 열렸어.”
“그, 그랬, 어요?”
“떠날 생각을 하니 밀리안이 보고 싶기라도 했어?”
남편의 시선은 마치 동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알아서 변명을 만들어주기까지 해서 그녀는 바로 긍정했다.
“맞아요. 그, 그랬어요.”
“역시 그랬군. 나도 사진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짐짓 쓸쓸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자 남편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 저런 것으로 눈치를 채는 게 더 이상하지.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점점 제 속도를 찾아갔다. 그녀는 공연히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척하며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밀리안의 방에서 앨범을 가져왔는데 당신도 보겠어?”
“……그, 그래요. 저도,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상한 걸 봤는데.”
“―!”
이상한 거? 집에 이상한 게 있나? 남편의 어깨에 가려진 엔젤라 디모시의 눈이 정신없이 깜박였다.
“이, 상한 거요?”
“그래. 밀리안의 방에 남자 손자국이 찍혀 있었어. 먼지가 거기만 없는 것으로 봐서는 최근인 것 같은데, 혹시 누군지 알아?”
남자의 손자국. 최근에 밀리안의 방에 들어갔던 남자는 그 사람뿐이었다. 엔젤라 디모시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해야 해.
“지난번에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왔었잖아요. 그 남자가 그 방에 들어갔었는데, 아마 그때 찍힌 게 아닐까 싶은데…….”
“아, 그…… 릴 부동산, 맞나?”
“네, 네에. 거기요.”
“하긴. 집을 보러왔는데 거길 안 들어가는 게 이상하지. 먼지가 많아서 놀랐겠군.”
“그러니까요. 계속 안 들어갔더니 거길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 사람이 밀리안의 방문을 열어서 자신이 더 놀랐다고 말하자 남편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됐으니 사진이나 보지.”
“……그래요.”
남편은 그녀를 이끌고 거실의 소파로 향했다. 앨범을 펼쳐 아이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드러나자 엔젤라 디모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딴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아 저리 치우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남편이 말을 걸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
“한 살이 되었을 때군. 이때는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왜, 왜요? 다시 짐, 으음, 밀리안을 만나고 싶어요?”
“그건 아니야. 난 밀리안과 연을 끊은 걸 후회하지 않아. 당신은 어때? 사진까지 찍게 할 정도면 보고 싶어 한 거 같은데.”
“아니요! 저도, 저도 아니에요. 그냥, 잘살고 있으면 됐어요.”
“그래. 이런 건 당신과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군.”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남편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냉혹하게 연을 끊어버리고선 어릴 때 모습을 그리워하는 위선적인 표정이라니.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래, 이런 남자라서 다행이지. 어쩌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들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이의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맞은편에 설치된 아주 작은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었다.
* * *
또 사진이 왔다. 이번에는 붉은색 글씨로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엔젤라 디모시는 대체 그 남자가 제게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했는데, 자꾸 이렇게 저를 연관시켰다.
‘전화를……. 아니, 그건 안 돼.’
전화를 하면 흔적이 남는다고 했다. 용의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내버려 두면 남편이 눈치챌지도 모른다. 연락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빨리 이 나라를 뜨고 싶다. 이러다 신경 줄이 타다 못해 정신병이 올 지경이었다. 그래, 남편을 닦달해 빨리 이 나라를 뜨자. 어차피 갈 거라면 조금 일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여자는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에 사진을 집어넣었다. 검은색 연기와 함께 사진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남편이 꺼내왔던 앨범이 떠올랐다. 그것도 다 태워버려야지. 그 짐승이 제 아이였을 때의 사진 따위 남겨둬선 안 된다. 밀리안은 짐승이지 자신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편이 앨범을 거실의 책장에 뒀었다. 그녀는 뛰듯이 책장으로 가 앨범을 찾았다. 남편이 오기 전에 모두 치워버릴 것이다.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앨범이 없다. 벽면 한쪽을 모두 차지한 책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시 치운 걸까? 그녀는 황급히 이 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여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정신없이 기침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여기에 있어?”
“여, 여보.”
“당신 설마, 밀리안이 그리운 거야?”
남편이 의심스럽다는 듯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앨범이 없어서……. 혹시 당신이 치웠나요?”
“앨범? 무슨 앨범? 설마 밀리안의 앨범 말하는 거야?”
“네, 그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그 뒤로 그걸 건드리지도 않았어.”
추억회상은 한 번이면 족하다며 남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럼 대체 그게 어디로 간 거지? 여자는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는 남편을 따라 방 밖으로 나서며 다시 물었다.
“지난번에 앨범, 거실 책장에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안 보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