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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91화 (9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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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가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밀리안,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사장이 계열사 사장들과의 점심 식사를 겸한 미팅으로 자리를 비운 덕에 레이는 처음으로 사장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만약 사장이 있었다면 밀리안에게 샌드위치를 전해주는 것도 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기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동안 계속 궁금했었다. 예전에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통유리로 사장실이 그대로 비쳤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구조를 알게 되었는데, 밀리안이 승진한 뒤 사장실 안으로 들어간 이후 아예 벽이 만들어져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장실을 들어갈 용기가 그에게 있을 턱이 없으니 지금 레이는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궁금했던 것과는 달리 사장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밀리안의 책상이 추가된 것 외에는. 레이는 사장의 책상과 밀리안의 책상 간격을 보며 질린 낯을 했다.

“밀리안, 사장님과 굉장히 가까운 자리네요?”

“……네?”

모니터만 보며 타자를 두드리던 밀리안이 레이의 말에 움찔 몸을 굳혔다. 레이는 사장실 전경을 돌아보느라 밀리안의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제 궁금증을 늘여놓았다.

“괜찮아요? 난 사장님과 한 공간에, 그것도 이렇게 가깝게 있으면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데…….”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

“정말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강해요.”

“일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래도……. 아, 맞다. 여기 샌드위치요.”

“고맙습니다.”

밀리안은 갓 만들었는지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냄새가 이상했다. 뭔가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상한 재료라도 들어있는 걸까. 잠시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밀리안이 레이를 향해 물었다.

“혹시 샌드위치 재료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갓 구운 호밀 빵에 토마토, 훈제 닭가슴살, 아보카도, 양상추, 소스는 레몬과 마요네즈소스에요. 이거 인기 많아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레이.”

걱정할만한 재료는 없다. 그런데도 냄새가 묘하게 역했다. 밀리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잡담을 나눌만한 시간이 없었다. 레이는 밀리안이 다시 일에 몰두하자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사장실을 나갔다. 그렇게 궁금했던 사장실이 딱히 특별하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여기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급한 서류를 먼저 처리한 후 먹으려고 했는데 자꾸 냄새가 거슬려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샌드위치 봉투를 열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따뜻한 온기가 있는 샌드위치는 정말 갓 만든 것처럼 재료가 모두 싱싱했다. 비주얼만 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까. 냄새만 그럴지도 모른다. 레이가 이상한 걸 사 왔을 리도 없고. 막상 먹으면 다르겠지, 하고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읍!”

밀리안은 그대로 샌드위치 조각을 휴지에 뱉어내고 남은 것도 다시 봉투에 싸 휴지통에 버렸다. 시간이 부족해 가볍게 때울 생각이었는데, 안 먹은 것만 못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밀리안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 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하아, 하, 우욱!”

깨끗했던 변기 안에는 아침에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색의 구토물과 위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밀리안은 변기 물을 한번 내리자마자 다시 속을 게워냈다. 이번에는 위액만 나왔다. 내장이 모두 쥐어짜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속을 게워내고 나니 위액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밀리안은 벌써 세 번째로 변기의 래버를 내렸다. 속이 뒤집힌 탓인가, 배가 아팠다. 요즘 수시로 배가 아팠다. 통증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매번 달랐다. 배가 조일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배가 부푸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또 단단하게 뭔가가 뭉치는 통증도 느껴졌다.

분명 한 달 전, 섬에서 돌아온 이후 받았던 검진에서는 몸 상태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고, 앞으로 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했다.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던 닥터 크래포드의 표정은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왜 몸은 계속 안 좋아지는 거지?

‘그것도 꼭 입덧이라도 하는 듯이…….’

저도 모르게 든 생각이 황당해서 기운 빠진 상태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클레이는 정관수술을 했고, 자신은 그녀 외의 다른 알파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황당하리만큼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클레이와의 관계에서 뭔가가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뭔가 아쉬워졌다. 나도 참 간사하구나. 임신을 그렇게 끔찍하게 여겨놓고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마음을 바꿨다.

무엇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가지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았다. 밀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사고가 틈만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비관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클레이와 떨어져 있으면 그 증상이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클레이의 곁에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다.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부담을 주긴 싫었다. 지금도 그녀의 곁에 서 있기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데, 더 모자라게 굴면 안 된다. 하지만 당당하게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이렇게 그녀의 뒤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연애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해질 날이…….

‘제발 그만 좀 해.’

밀리안은 도망치듯 화장실을 나와 자리에 앉았다. 일을 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속을 게웠던 오후와는 달리, 클레이와 함께한 저녁 식사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았다. 밀리안이 의욕적으로 음식을 비워내자 클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 점심 안 먹었어?”

“……깜박해서.”

차마 샌드위치가 비위 상해 입맛을 버리다 못해 속을 게워내기까지 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말하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하나 남은 크로와상을 베어 물었다. 빵을 먹으면서도 밀리안은 빈 그릇들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봤다. 클레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식사는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 밴틀로, 더 가져와.”

“안 그래도 미셸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많던 음식을 모두 해치운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자 밀리안은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괜찮다고 거절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더 먹고 싶었다. 꼭 속에 뭐라도 든 것처럼 먹어도 먹어도 부족했다.

“계속 배고팠던 거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아니요. 분명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파져서…….”

“잘 먹는 건 좋은데, 굶지는 마. 걱정된단 말이야.”

안 그래도 요즘 일정이 바빠져서 밀리안을 고생시키고 있다는 자각을 하던 차였다. 평소라면 함께 먹었겠지만, 외부 스캐줄이 생기면 그것도 요원해진다. 특히 다른 사람과 있는 자리에서 비서를 옆에 앉히고 같이 식사를 할 수는 없다. 밀리안을 뒤에 세워두고 굶기고 싶지 않아 혼자 나갔는데, 그렇게 한 보람도 없이 굶었다고 하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밴틀로가 음식을 가지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혹시 몰라 넉넉하게 가져왔는데, 밀리안은 남김없이 해치웠다. 그 납작하던 배가 볼록 튀어나올 때까지.

클레이는 과식을 해 살짝 튀어나온 밀리안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귀여워.”

“…….”

“어떻게 배가 나와도 귀여울 수가 있지?”

“이제 그만 하세요.”

귀엽다는 말이 더 민망했다. 밀리안은 살짝 인상을 쓰고 클레이의 손을 떼어냈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근래 몸이 좋아지면서 운동량이 늘어 식욕도 함께 늘긴 했지만,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과식을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오후엔 모두 게워낼 정도로 속이 안 좋았던 터라 조금 전의 과도할 정도의 허기가 더 괴이하다고 느껴졌다.

밀리안은 클레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페로몬, 더 풀어주세요.”

“좋아.”

여자의 냄새가 짙어지자 안정감이 들었다. 역시 아까 그렇게 속을 게워낸 이유는 클레이와 떨어져 있던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밀리안은 향이 짙게 흘러나오는 클레이의 목덜미에 콧등을 비볐다. 이렇게 살갗이 닿아야 안심이 됐다.

* * *

밀리안은 침대를 손으로 더듬다 번뜩 눈을 떴다. 애초에 함께 누웠던 적이 없었다는 듯 여자의 자리는 서늘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가슴도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여자는 드문드문 이렇게 자리를 비웠다. 제게 비밀로 할만한 일이 뭘까. 추측조차 할 수가 없어 클레이가 먼저 말해주기만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은 자는 척하며 여자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마도 에릭과 만나고 있겠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자신을 두고 그와 단둘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이렇게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읏!”

갑자기 몸을 일으켜선지 배가 아팠다. 이상할 정도로 배 안쪽이 쑤셨다. 오늘은 무리할 정도로 섹스를 한 것도 아니었고, 원래 클레이의 방식대로 거칠지도 않았다. 다음날에도 일해야 하는 평일에는 패팅이나 가벼운 섹스 한 번으로 합의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배가 아팠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도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밀리안은 가운을 걸치고 클레이와 에릭이 만나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잠시 사그라들었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밀리안은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지나 평지로 내려가니 나아졌다. 배가 당기는 느낌은 들었지만,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이내 언제 배가 아팠냐는 듯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차라리 클레이가 없을 때 아파서 다행이었다. 클레이가 봤더라면 이 새벽에 대니얼을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신경성일 텐데.’

요즘 과할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무리 클레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여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시시각각 그를 위협했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다가 한순간에 감정이 식어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마음을 준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다.

밀리안은 왜 지금까지 그토록 사람들을 경계하며 사무적으로만 대했는지에 대해 새삼스러운 자각을 했다. 지금에 최선을 다하면 헤어지고 나서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때 받았던 사랑만을 품고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밀리안은 과거에 했던 자신의 멍청한 생각을 비웃었다. 그럴 리가. 아마도 부모님께 버림받았을 때보다도 더 심하게 무너져내릴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면. 더 이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그럼 괜찮지 않을까?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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