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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빈이 나간 후, 클레이는 밀리안의 책상 위에 올려진 꽃다발을 치워버리게 했다. 향이 좀 독하긴 해도 아름다운 꽃만으로 모아 만든 꽃다발을 이대로 버리기 아까웠지만, 맥시는 사장의 표정에 군말 없이 봉투에 싸서 사무실 밖에 있는 휴지통에 버렸다.
게빈이 머물렀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머물었던 흔적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밀리안은 공기 정화 시스템을 켜서 강제로 공기를 순환시켰다. 몇 분이 지나자 사무실 내부의 공기는 산뜻해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클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일은, 어떻게…….”
“그녀는 비밀을 지킬 거야. 당신이 걱정할 일은 없어.”
“……죄송합니다.”
“뭐가?”
“분명, 손해가 되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아서요.”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아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갈 리가 없다. 클레이가 비밀을 지킬 거라고 확언까지 했다면 더더욱. 자신으로 인해 클레이가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하니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슴에 닿는 반지의 감촉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걸 가질 자격이 없다. 저 여자에게는 자신보다 훨씬 나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 우유부단하지도, 무능력하지도 않은 잘난 남자가 클레이 디어에게 어울렸다.
“밀리, 이리 와.”
그렇게 창백한 얼굴 하지 마. 꼭 떠날 것처럼 무서운 표정 짓지 마. 클레이는 철렁 내려앉는 심장에 가까스로 표정을 정돈하며 밀리안을 향해 팔을 벌렸다.
“정말 별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클레이는 창백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밀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는데, 단 하루 만에 이렇게 불안정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게빈이 일을 치기는 했지만, 그녀와 상관없이 우리의 사이가 그만큼 신뢰가 없음을 뜻했다.
“너로 인해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어.”
“…….”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게 제일 손해야. 내겐.”
용기가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 그리고 그런 주제에 끝까지 그녀를 놓을 수 없는 자신의 욕심에 치가 떨린다. 떨리는 손을 들어 클레이의 허리를 안으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 내가 이 여자를 잡을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보잘것없는 내가…….
클레이가 게빈을 상대하며 자신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밖에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이 관계를 인정해버리면 클레이가 손해를 볼 일이 없다. 그런데 고작 그것도 못 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아니, 설혹 인정한다 한들 정말 클레이에게 손해가 가지 않을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어머니의 저주가 그의 머리로 쏟아졌다.
‘네가, 네가 짐승으로 태어나서 내 인생이 망가졌어! 너만 아니었더라면 완벽했을 내 인생이!’
제발 사라져버리라고, 넌 존재 자체만으로도 해가 되는 존재라던 말이.
* * *
밀리안이 요즘 이상했다. 간혹 먼저 요구하기도 하던 섹스를 근래 썩 내키지 않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몸을 겹치고 싶어 하는 그녀와는 너무 달랐다. 일이 과할 정도로 많아져서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지?’
클레이는 밀리안의 사소한 변화에도 예민했다.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더 그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의 부모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들킨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갔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그쪽을 가장 먼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밀리안이 체셔를 방에 들이는 것도 제지하지 못했다. 마치 방어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셔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 밀리안의 곁으로 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밀리안은 그녀의 키스에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살짝 떨어진 입술에 그가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댔다. 평소와 다름없는 애정표현에 클레이의 눈매도 부드럽게 휘었다.
체셔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클레이가 밀리안과 자신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체셔가 먼저 짜증을 내며 밀리안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체셔는 꼬리를 위로 바짝 세우고 창가에 있는 자신의 쿠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샐쭉한 눈으로 밀리안의 곁에 앉은 클레이를 노려보다 휙 고개를 돌려 몸을 말고 누웠다. 클레이는 고작 고양이를 이긴 것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동물과 사람의 기 싸움에 중간에 낀 밀리안만 난처해졌다. 그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클레이를 타박했다.
“유치하다니까요.”
“내가 유치하게 구는 게 싫으면 체셔를 여기에 데려오지 말라니까.”
“하지만 체셔는 귀엽고, 털이 복슬복슬해서 만지면 기분 좋아요.”
“나보다?”
클레이가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토라진 것처럼 굴었다.
“……아니요.”
밀리안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체셔가 더 귀엽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분명 체셔가 아닌 자신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으리라. 그는 조금 전까지 체셔가 차지하고 있던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클레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클레이, 내가…….’
속으로 내뱉는 질문조차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밀리안은 작게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클레이가 듣지도 못하는 질문조차도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걸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흘렸다.
“밀리안.”
“네?”
“지금 내가 본 것만으로 열 번이 넘게 한숨을 쉰 거 알아?”
“―!”
“대체 뭘 그렇게 혼자 고민하는 건데?”
내게 하지 못할 말이냐며 여자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에 보석 같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게 아니라 잠깐 다른 생각을…….”
“나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생각하는 건 자유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다른 생각이 뭐냐고 묻잖아.”
클레이는 살짝 몸을 돌려 밀리안의 위를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뀐 탓에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버린 밀리안은 클레이의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밀리안이 입술만 달싹이며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클레이의 표정은 더 거칠어졌다.
“왜? 벌써 내게 마음이 식기라도 한 거야?”
“네? 아니요!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게 아니면 내게 말하지 못할 말이 뭐가 있는데?”
클레이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속삭였다.
“계속 관계도 피하고, 나와 함께 있는데도 다른 생각을 하는 널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해?”
“―!”
입술을 질끈 깨문 여자가 화를 못 이기고 침대를 내리쳤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크게 출렁거렸다.
“내가 며칠이나 참은 줄 알아?”
“클레이…….”
“섹스는 그렇다 쳐. 내가 화가 난건 네가 분명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난 그걸 물을 수가 없다는 거야. 혹시라도 내가 싫어졌다고 할까 봐!”
밀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티를 내고 있는 줄 몰랐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밀리안은 황급히 클레이의 팔을 잡았다.
“혹시, 아이를.”
“아이?”
“아이를, 좋아하시나 해서요.”
“뭐?”
밀리안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고민이 고작 저거라고? 클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밀리안의 얼굴이 긴장으로 살짝 굳어져 있었다. 일부러 다른 말로 자신의 신경을 돌리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일까. 그녀는 밀리안과의 아이가 아닌 이상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인생에 아이라는 존재는 배제하고 있었다. 밀리안이 아니었더라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리안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그를 떠보기 위해 아이에 대한 언급을 하면 밀리안의 안색은 확연히 안 좋아졌다. 아니, 질색했다. 그런 밀리안에게 어떻게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클레이는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오래 고민을 할 정도라면 밀리안은 나름대로 이 주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아이를 원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자신이 아이를 원할까 불안해한 것뿐. 그동안 밀리안이 임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격렬하게 반응했던 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 클레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안 좋아해. 아니, 필요 없어.”
“…….”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런 작고, 예민한 생물을. 아이 따위 있어봤자 귀찮기만 하지.”
클레이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밀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희망이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밀리안의 표정은 아까와 똑같이 담담하기만 했다. 설핏 웃음을 짓는 게 자신의 말에 안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망은 무슨.’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기운이 빠졌다. 살짝 부풀었던 마음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그냥 궁금해졌어요. 예전에 당신이 아이에 대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나서…….”
아아. 그랬었지.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불안하기라도 했던 걸까.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내가 바랄까 봐 두려워서? 다시 한번 확인사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밀리안이 자신과의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그냥 농담했던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렇, 군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밀리안을 보는 클레이의 눈이 가라앉았다.
‘밀리안 나는, 너만 있으면 아이가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아. 물론 우리 두 사람의 결실이 생긴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란 것도 알고 있어.’
이런 화제가 다시 오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에게도, 또 내게도. 클레이는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 일부러 쐐기를 박듯이 다소 냉정한 경고를 했다.
“다신 아이에 대한 말 하지 마. 내 인생에 아이는 필요 없으니까.”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밀리안의 입술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는 힘없이 클레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