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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98화 (9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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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안은 갓길에 차를 대고 비상등만 켠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계속 눈물이 흘렀다. 이런 상태로 운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떠나도, 모든 걸 버리고 가도 되는 건가. 밀리안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배가 아팠다.

돌아가고 싶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녀에게 가고 싶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클레이의 마음이 식어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리면, 그러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녀의 마음이 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절박한 감정이 틈을 깨고 나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야 한다고 소리쳤다. 사랑하는데 왜 도망칠 생각만 하냐며. 평생 그렇게 한심하게 살 거냐고.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고민의 반복일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를 끝에 현재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다 하더라도…….

“바보도 아니고.”

밀리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프던 배도 거짓말처럼 통증이 잦아들었다. 마치 이런 생각을 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육체도 마음도 모두 클레이에게 내어줘 놓고 도망칠 생각을 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돌아가자. 클레이에게로. 그래야 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그녀만 생각하며 살자. 아이 문제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뒤를 생각하면 된다.

다시 핸들을 잡고 돌아가려는데, 그의 차 앞에 검은색 세단이 가로막고 멈춰섰다.

* * *

항상 보던 차였다. 번호판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모를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얼어버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멍하게 클레이가 차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떨어져 있는 내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아하게 제게로 다가오는 여자가 클레이가 아니었으면 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 그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창문을 두드렸다. 밀리안은 홀린 것처럼 창문을 내렸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따뜻한 빛을 내던 녹색 눈동자가 섬뜩하도록 차가웠다. 마치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클, 레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정도로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그러자 클레이가 여전히 차 안에 앉아 있는 그에게 시선을 맞추며 상체를 숙였다.

“왜 그래? 꼭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 숙이지 마. 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굴고 그래.’

“아, 비행기 탑승 시간에 늦을까 봐?”

‘밀리안, 당신은 조금 더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있어. 얼굴에서 다 티가 나.’

다 알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였다. 클레이의 손이 안으로 들어와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잖아.”

설마 비밀이었어? 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이 아는 게 당연한 거라고, 비밀로 할 생각을 한 게 이상하다는 듯이.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여자의 눈동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녀가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어 변명하려고 했다. 당신에게 가려고 했다고. 잠깐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했지만, 후회했다고.

하지만 소리를 내려고 한 순간, 그의 볼을 만지고 있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이. 아무 말도 하지 마, 밀리. 난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게 체온이 높던 여자의 피부는 이 순간만큼은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디찼다. 밀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클레이는 직접 그의 차 문을 열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려.”

“…….”

“내가 끌어내야 하는 거야?”

그 말에 밀리안이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끌고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그녀는 먼저 밀리안을 태운 뒤 그 옆자리에 앉았다. 문이 닫히자 차는 어디론 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밀리안은 조심스럽게 클레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꾸며낸 미소조차 짓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거워 속이 답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그의 입을 틀어막던 것이 떠올라 입술을 뗄 수조차 없다.

밀리안은 고개를 숙여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 등을 바라봤다. 나는 그저, 무서웠다. 이 무거운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고도 부족하다는 듯 클레이까지 집어 삼켜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다 버려질까 봐. 그래서 버려지기 전에 버리려고 했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클레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를 딛고 일어서리라고 생각해서.

“…….”

돌아가려고 했다는 말은 변명일 뿐이다. 클레이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동안 참고 참으며 제게 돌이킬 기회를 주었다. 무심결에 넘겼던 클레이의 말과 행동, 표정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같이 갈래?’

‘아뇨, 저는 남아있겠습니다. 지금 자리를 비우기는 조금…….’

‘하긴. 그건 그렇지.’

씁쓸하게 웃던 여자의 얼굴.

‘밀리안.’

‘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 없어?’

‘……무슨.’

‘그냥.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

‘클레이.’

‘응?’

‘사랑해요.’

‘……뭐?’

그때는 제 감정에 벅차 여자의 반응을 살필 수가 없었다.

‘이 말을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밀리안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클레이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을 텐데. 무슨 말로 그녀의 화를 가라앉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럴 방법이 있긴 한 걸까. 되돌아가려고 했다는 말은 그녀의 화만 돋울 것 같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뒤엉켜 정제되지 않은 조각들만 정신없이 떠돌았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왜? 도망가기 전에 잡혀서 짜증 나?”

“―!”

냉기가 가득 실린 말에 밀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려다 이내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표정이 차가운 것보다도 이 순간마저도 그를 향해서는 웃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여자의 행동에 가슴이 시렸다. 새삼스럽게도, 클레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이제 와서.

“클레이, 저는…….”

목이 턱 막힌 것만 같았다. 빨리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결코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을 상처입힌 내 멍청함을 원망하던 중이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입을 벌렸다가 힘없이 다물어졌다. 잠시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클레이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는 여자의 얼굴은 매우 지쳐 보였다. 그 순간 밀리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변명하더라도 화가 날 것 같으니까.”

그러니 잠깐 잠들어 있는 편이 네게 더 좋을 거야. 그 말을 하며 클레이가 그에게 무언가를 먹였다. 강제로 벌린 입 안으로 들어온 작은 알약은 타액이 닿기 무섭게 녹아내렸다. 밀리안은 그걸 목 안으로 넘기기 전에 클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먹어, 밀리.”

“…….”

강제로 입 안에 넣어놓고 그녀는 마치 선택권이라도 준 듯이 속삭였다. 클레이가 제게 나쁜 것을 먹일 리가 없다. 그녀의 말대로 잠시 잠들게 할 수면제일 것이다. 밀리안은 클레이의 손에 의해 가려진 시야 속에서도 눈을 감았다. 고민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혀 중앙에 고인 씁쓸한 약을 목구멍 안으로 밀었다. 예상대로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지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 * *

클레이는 쓰러지는 밀리안의 몸을 품에 안았다. 내가 뭘 먹일 줄 알고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어. 약아빠져서는. 이렇게 하면 자신의 화가 풀어질 거라는 걸 알고 한 행동이 분명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밀리안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 안았다.

눈가가 붉었다. 울었나? 그래도 날 떠나는 게 슬프긴 했었나 보군. 아니, 나 때문은 아닐지도 모른다. 클레이는 살짝 부푼 밀리안의 눈을 만지려고 손을 들어 올리다 움찔 멈췄다.

이제 그의 기분 따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각인의 효과는 대단했다. 제 주인의 심기를 먼저 살피는 알파의 본능이 짜증 난다. 자신을 버리려고 한 남자인데, 이 순간조차도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차게 굳었던 심장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시선을 내려 살짝 벌어진 밀리안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렇게 세심하게 가꿔놨는데 떨어져 있던 일주일간 뭘 했는지 입술에 까슬한 각질이 섰다. 주저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여 밀리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이 애끓는 마음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녀는 밀리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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