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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03화 (10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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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근래 마치 의식을 잃듯 잠들었고, 일어날 때쯤이면 클레이가 돌아오는 시간이곤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탓일까, 잠에서 깨자마자 마치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클레이가 나타났다. 밀리안은 다급한 얼굴로 뛰어와 저를 끌어안는 클레이의 행동에 당황했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건 좋았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오늘 분명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했다. 즉, 지금 이곳에 오면 안 되는 상황이란 뜻이었다.

“클레이, 이 시간에 왜 여길…….”

“보고 싶어서.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싫어?”

“……아니요.”

그럴 리가. 얼굴 전체에 내려오는 짧고 다정한 키스에 밀리안은 열띤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를 봐서 좋은 것과 일정은 별개의 일이었다. 밀리안은 녹아내릴 정도로 아름답게 웃는 클레이의 입술을 피해 머리를 뒤로 밀었다.

“그래도 일정은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미룰 수 있는 일정이었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냥 기뻐하면 안 돼?”

아까 내가 보고 싶다며?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며? 클레이는 그 말에 밀리안만 생각하고 달려온 자신이 조금 억울해졌다. 이 남자는 왜 여기서까지 비서의 본분을 지키는 걸까. 그녀가 서운한 얼굴을 하자 밀리안의 단호하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일정을 미루면 그걸 수습하기 위해 며칠은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줄어, 드니까…….”

말을 이어갈수록 클레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다 결국엔 다 끝맺지도 못했다. 밀리안은 클레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지만, 붉어진 피부를 숨기지 못했다.

날 사랑한다던 그의 애타는 고백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내게 직접 했을 때보다도 더 진심이 가득하고 절절했던 고백. 정말이야? 정말, 정말 날 그렇게 사랑하고 있어? 모니터 화면을 통해 도둑처럼 훔쳐 듣는 게 아닌, 그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싶었다.

“날, 사랑해?”

그렇다고 말해. 이제 믿을 테니까. 당신이 내게 한 말은 모두 믿어줄 테니 그렇다고 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하고 있던 남자의 피부가 더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밀리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로 만족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리로,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자신이 없을 때는 그토록 애절하게 고백을 해놓고 왜 내 앞에선 못하는데?

“말해.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해!”

“―!”

“내가 네 것이라고, 나를 사랑한다면 좀 더 당당하게 날 소유해.”

“클레이.”

“사랑하니까,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너만 사랑해 달라고, 그렇게 말해 줘. 제발 부탁이니까. 나만 당신을 집착하고 붙잡고 사랑하는 건 싫어.”

“…….”

“나도 네게 사랑받고 싶어. 제발 날 붙잡아. 그렇게 이 감정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마음껏 질투하고, 마음껏 소유하고,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해달라고. 클레이는 밀리안을 향해 애원했다. 처음으로 보이는 집요한 욕망에 당황했는지, 밀리안은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 클레이는 엉망으로 뒤엉킨 속을 가라앉히고 숨을 깊게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리로. 네 입으로 말해 줘. 날 사랑해? 정말?”

“……사랑해요. 너무, 너무 사랑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밀리안은 괴로운 얼굴로 사랑을 토로했다. 이 마음이 너무 크고 깊고 어두워서 가슴이 아프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등에 감긴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욱신거렸지만, 아픔보다도 사랑이 더 컸다.

드디어, 그토록 믿을 수 없던 말이 완벽한 진실이 되어 클레이의 가슴을 향해 박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달칵,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흔들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몸의 감각을 통해 울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 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꼈다.

[사랑해, 클레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괴로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것 같아서……, 두려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밀리안의 목소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귀로, 소리로 들리는 게 아니다. 클레이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전신을 내달리는 밀리안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소름 끼치도록 달콤한 감각이었다. 계속 이 감각을 느끼고 있으면 머리가 돌 정도로.

각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라도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이 제게 각인했다는 것을. 서로의 감각이 이어졌다는 것을.

밀리안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맙소사. 클레이는 눈을 크게 뜨고 밀리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밀리안이, 그녀의 세상이 흔들려 보였다.

“밀리, 당신. 지금…….”

“클레이. 뭔가 이상….”

“이상한 게 아니야. 당신이, 당신이 내게 각인했어.”

이런 게? 밀리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아슬아슬한 눈을 하고. 클레이는 밀리안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려?”

제발, 당신도 내 마음이 들리기를. 클레이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물었다. 밀리안은 흡사 절정에 달했을 때처럼 그녀의 품에 무너져내렸다. 목덜미로 헐떡이는 뜨거운 숨이 쏟아진다. 이미 그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어 집요하게 물으니 남자는 거의 녹아내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사랑한다고, 내 거라고, 제발 어디에도 가지 말아, 달라고…….”

아. 클레이가 탄성을 흘렸다.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각인했구나.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고, 또 믿어야 하는 진실이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몸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손이, 몸이 떨린다.

“맞아. 나는 계속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왜 내게…….”

바보 같은 질문도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내게 각인한 사실보다도, 내가 그에게 각인했다는 것만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조차도 밀리안다웠다. 나는 이미 예전에 각인했는데, 그 사실을 당신만 몰랐을 뿐이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안고 침대로 이동했다. 이 상태라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침대에 닿기 무섭게 클레이는 밀리안과 함께 푹신한 시트에 뒹굴었다.

타인의 감각을 공유하는 기분은 이상했다. 온몸이 붕 뜨는 것 같고, 어색하기도 했다. 심장이 두 개인 것만 같았다. 클레이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자신과 달리 여전히 어지러운 듯 눈을 감고 있는 밀리안의 왼쪽 가슴을 손으로 더듬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그 생각을 한 동시에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지옥의 끝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천국에 도달했다. 밀리안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그녀의 눈가에 밀리안의 손이 닿았다.

“클레이.”

“……응.”

“왜, 울어요?”

“좋아서.”

당신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와. 클레이는 밀리안의 손을 잡고 볼에 비볐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눈을 뜨니 울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클레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왜 울어?”

“좋아서요.”

“응.”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목구멍에 무언가가 꽉 낀 것 같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설픈 대답과 함께 간신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약한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한번 크게 앓고 나서 다신 흘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 순간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감정이 복받쳐서 넘쳐 흐르는 것을 참을 도리가 없다.

당신을 이곳에 가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어. 당신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물음에 클레이는 눈을 부릅떴다.

“날 떠나려고 했잖아. 그런데 그동안은 그렇게 안 해주다가 가둬두니까 각인을 해주는 건 무슨 이유야?”

“―!”

“말해. 그동안 말하고 싶어서 안달해놓고 왜 물어보니까 대답을 못 하는 건데?”

“……그건.”

그걸 어떻게 말해. 이렇게 되고서야 버림받지 않을 거란 자신이 생겼다는 말을. 당신이 날 이렇게 가둘 정도로 집착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만족했다고. 내가 없어질까 봐 무서워 떠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좋았다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병적인 집착이라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회피하려는데 클레이가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꼭 들은 것처럼. 설마, 그럴 리가. 밀리안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런 밀리안에게 쐐기를 박듯 클레이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다 들렸어, 밀리.”

“―!”

“이거 좋은데? 각인하면 원래 이런 건가?”

밀리안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민망해서 당장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클레이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 말조차도 들었다는 듯이.

“다른 건 다 좋아. 하지만 도망치는 건 안 돼. 생각도 하지 마.”

[당신이 날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아.]

[사랑하는데 왜 자꾸 도망치고 싶어 해.]

“…….”

강압적인 말과는 다르게 심장을 비틀어 짜는 듯한 고통스러운 외침이 생생하게 들렸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줄은 몰랐다. 클레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집착과 사랑에 혼자 만족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 와중에도 심장이 들뜨려는 걸 어떻게든 가리고 싶었는데, 클레이는 그조차도 들은 듯했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좋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변태야?”

“…….”

“물론 당신이 변태여도 사랑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죄, 죄송….”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맞아?”

클레이가 가쁘게 뛰고 있는 밀리안의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 소리는 단 하나의 감정만 나타내고 있었다. 기쁨. 나는 그동안 지옥을 헤매고 있었는데 당신은 이렇게 좋아했었던 거야?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이렇게 나쁜 남자인 줄 몰랐어.”

“사랑해요, 클레이.”

“……약아빠져서는.”

정말 화난 척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클레이는 결국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허탈하게 웃었다. 손이 많이 가는 남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럼에도 사랑스러웠다.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한 입맞춤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가쁘게 뛰어서 중간중간 마지못해 입술을 떼어야 했다. 완벽하게 온몸이 겹쳐진 느낌이었다. 상대가 개별의 객체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각인이었다. 혼자 각인하고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된다. 이제 밀리안은 완벽하게 내 것이 되었다. 각인한 이상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 자신이 그랬듯, 밀리안 역시 나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을 테니까. 그게 좋았다. 너무,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언제 각인을 한 겁니까?”

“섬에 간 날.”

크리스마스. 그렇게 일찍 각인했다고? 밀리안의 눈이 커졌다.

“왜 말 안 했어요?”

“어떻게 말해.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스스로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면, 그때 말할 생각이었다. 결국은 참지 못해 강제로 그를 여기에 가둬두긴 했어도, 처음엔 그런 마음이었다. 얼마나 소중하게, 또 간절하게 밀리안의 사랑을 기다렸던가. 클레이는 밀리안의 볼을 세게 잡아당겼다.

“아!”

“도망칠 준비는 다 하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다니. 내가 그 말에 얼마나 상처받은 줄 알아?”

“하지만, 그때가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읏!”

“미워.”

밉다는 말에도 밀리안은 웃었다. 입 밖으로 뱉은 말과는 다르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진심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알겠어? 난, 처음부터 당신 거였다는 사실을. 당신이 날 버리면 난 죽어.”

각인한 단 하나의 존재를 잃은 알파는 천천히 미쳐 간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정신이 파괴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어머니를 따라 자살했던 아버지처럼. 클레이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행동을 각인한 이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그저, 세계가 그렇게 돌아가듯 당연한 이치였다.

밀리안에게 한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그 역시 제게 각인을 했으니 이해하리라 믿었다.

“당신이 날 떠나려고 한 행위는, 날 죽이겠다는 것과 같아.”

“잘못, 했어요.”

이 나쁜 남자. 저렇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다니.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밀리안의 모든 감정이 하나로 귀결되어 제게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사랑.

가장 순수하고 지독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 진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감정에 클레이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렸다.

“소원이 있습니다. 들어주세요.”

“……뭔데?”

소원이라는 말에 살짝 불안했지만, 밀리안이 모처럼 환하게 웃고 있어서 거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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