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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06화 (10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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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갑자기 직접 차를 운전해 어디론가 향하는 클레이를 미행해 밀리안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아낸 에릭은 다시 디어 가로 돌아왔다. 잠시 차 안에서 기다리니 벤틀로가 바바리코트에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타났다. 실종이니 뭐니 했지만, 결국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에릭 드와이스는 옆좌석에 앉아서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벤틀로를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우린 탐정 놀이를 하는 게 아닙니다.”

“탐정 놀이라니요.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합니다.”

“어딘지도 알아놨으니 그냥 가면 됩니다. 그 이상한 선글라스는 벗으십시오.”

에릭이 타박하자, 벤틀로가 크흠, 헛기침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솔직히 별로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신 거죠?”

“주인님께서 밀리안 님께 해를 끼칠 리는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시설을 다 갖춰놓고 감금해 놓은 게 전부일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럼 대체 저를 왜 엮은 겁니까?”

“만에 하나라도 밀리안 님께서 원치 않는다면 저는 그분만 모시고 갈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주인님을 막을 경호원 한 명은 필요하고요.”

방패막이가 필요해서 엮었다는 말이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해놓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다웠다. 다만, 의외인 점은 평소 클레이 디어를 가장 우선으로 하던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다. 에릭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벤틀로가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웃었다.

“밀리안 님께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사랑하는 두 아이가 함께 행복한 것이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밀리안만이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선글라스니 바바리코트니 하는 것을 입은 이유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노력일 뿐이었다. 노쇠한 심장은 삿된 상상만으로도 불안하게 덜컹거렸다. 클레이가 밀리안에게 혹시라도 나쁜 짓이라도 했을까 봐 두려웠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디어 가에 유구히 이어져 온 불행을 끊고 싶었다.

정말 내가 늙긴 했구나. 벤틀로는 덜덜 떨리는 심장에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고는 안 좋은 상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억지로 비우고 에릭을 채근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

아까와는 달리 가라앉은 얼굴이 꽤 심각해 보였다. 에릭은 말없이 네비게이션에 찍어 놓은 주소를 따라 핸들을 돌렸다.

* * *

클레이가 밀리안을 어디에 숨겨놨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들어갈 방법이 막막했다. 높은 철문은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수많은 감시카메라가 움직이고 있었고, 철문 가장 상단은 평범해 보였지만, 가끔 푸른 스파크가 튀어 전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어찌나 벽이 높은지 안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감금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심지어 외부인을 받을 생각도 없는지 지문과 홍채 인식 장치 외에는 벨을 누르는 곳도 없었다.

벤틀로는 혹시 몰라 카메라 앞에서 서성이며 경호원이 자신을 알아보길 바랐지만,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 참…….”

“어떻게 들어갈 생각입니까?”

“일단 누군가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설마 여기서 밤새우자는 말입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싸움을 조금 크게 하는 것뿐인데, 여기서 밤샐 정도로 걱정하는 벤틀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마치고 첫 복귀부터 집에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 엘레나가 무척 화낼 텐데……. 에릭은 잠시 어떻게 엘레나를 다독여야 하나 고민했지만,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환하던 해가 저물어가고 밤이 오고 있었다. 밖에서 버티는 건 의미가 없으니 일단 차에 돌아가서 기다리려던 차였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벤틀로와 에릭의 얼굴이 열린 문을 향해 돌아갔다. 잠시 후, 검은색 세단이 모습을 보였다. 막 속력을 내기 전, 벤틀로가 황급히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차가 덜컹 흔들리며 급정거를 했다. 바퀴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뒷좌석의 문이 벌컥 열리고 클레이가 나왔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 질렀다.

“미쳤어? 그러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어쨌든 안 치였으니 된 거지요. 그나저나 밀리안 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택 안에 있다면 당장 들어가야겠다는 벤틀로의 고집에 클레이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단, 타. 급해.”

“밀리안 님이 계신 곳부터 말씀해주십시오.”

“급하다고 했잖아. 밀리안이 임신했다고!”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벤틀로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한 행동에 클레이가 이를 갈았다.

“빨리 안 타면 놓고 갈 거야.”

“탑니다!”

자세한 건 차에 타서 들어도 된다. 당장이라도 버리고 출발하려는 클레이의 표정에 벤틀로가 황급히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세단은 속력을 내며 출발했다.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오로지 에릭 드와이스뿐이었다. 뭐에 홀린 것 같다. 엉뚱하게 얽혀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결국 혼자 버려진 그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엘레나를 만난 이후 끊었던 담배가 절실히 생각났다.

“…….”

교외로 집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 가능한 한 이곳에서 먼 곳으로. 엘레나가 몸이 약하니 따뜻한 나라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돈은 벌 만큼 벌었다. 에릭은 잠시 떠올리기만 했었던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로 했다.

* * *

그토록 찾던 사람은 이미 차 안에 있었다. 벤틀로는 중간에 있는 클레이를 제치고 상체를 뻗어 밀리안의 손을 잡았다.

“밀리안 님!”

“벤틀로, 큰일 날 뻔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임신이라니요?”

“아…….”

“게다가 어떻게 제게 말도 없이 떠나려고 하실 수가 있습니까? 진작 제게 상의하셨다면 완벽하게 준비해드릴 수 있었는데. 그럼 저와 함께.”

“그러니까 지금 나만 두고 너희 둘이서 도망치겠다는 모의를 하는 중인 거지?”

그것도 내 앞에서. 벤틀로가 자신의 앞에서 상체를 길게 뺀 탓에 등받이에 몸을 딱 붙이고 있던 클레이가 기가 막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벤틀로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몸을 옮겨 밀리안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덕분에 클레이의 몸이 끝으로 옮겨졌다. 그나마 차가 넓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중간 자리를 차지한 벤틀로 탓에 얼떨결에 밀리안과 멀어졌다는 게 어이없었다. 벤틀로는 오로지 밀리안만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그를 샅샅이 훑었다. 클레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젠 대체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자는 생각이었다.

“대체 주인님께서 어떻게 하셨길래 이렇게 피부가…….”

“아뇨, 클레이는 정말 잘해줬….”

“잘해주긴요. 마지막으로 보기 전보다 훨씬 야윈 게 보이는데요.”

“벤틀로.”

“임신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저딴 곳에 감금할 생각을 하신 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벤틀로, 이제 그만하지?”

임신했다고 하면 당장 결혼식부터 올려야 한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마음을 다잡은 밀리안을 다시 부추기는 꼴이 황당했다. 게다가 밀리안은 저 말에 좋아하고 있었다. 클레이가 눈꼬리를 세우고 그를 바라보자 밀리안은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벤틀로의 말을 받아주다가 뜨끔했는지 시선을 돌렸다.

“밀리안은 내게 각인했어.”

“각인, 말입니까? 설마 강제로…….”

“아니야!”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냐며 클레이가 참다못해 불을 뿜었다. 벤틀로가 밀리안의 몸을 끌어안아 제 품에 숨겼다.

“임산부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대체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

“이렇게 섬세하지 못한 분이니 밀리안 님께서 떠나려고 한 겁니다.”

“그 떠난다는 소리 좀 그만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숨이 막혔다. 클레이가 괴로운 얼굴을 하자 벤틀로에게 안겨 있었던 밀리안이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어깨에 걸치고만 있던 코트가 풀어져 단추도 제대로 잠겨 있지 않은, 셔츠 하나만 어설프게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클레이의 눈이 더 사나워졌다.

“무슨 짓이야!”

“아…….”

“이리 와.”

클레이는 밀리안의 손을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와 동시에 벤틀로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워 밀리안의 어깨에 감싸주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밀리안의 고백도, 각인도, 임신한 사실까지 모두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차 앞을 가로막은 벤틀로의 행동까지. 모두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하기 충분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코트 단추를 꼼꼼히 채운 뒤 그를 끌어안고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엉망이야.”

“…….”

“당신은 뭘 잘했다고 그렇게 웃어?”

“음.”

하지만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행복해서. 어떻게 해도 불안했던 마음이 모두 채워진 것 같아서 웃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밀리안이 계속 웃자 클레이가 그의 볼을 꼬집어 주욱 늘렸다. 아플까 봐 손에 힘조차 주지 못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사랑을 말해서 미약하게 일었던 짜증도 사라져버렸다. 클레이는 결국 피식 웃으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이만 낳아 봐. 아주 제대로 벌을 줄 테니까.”

“하지만 아이를 낳으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벌을 주다니요. 배가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부터 준비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대체 무슨 소립니까?”

“일단 병원부터 가…….”

다시 시작된 벤틀로의 잔소리에 클레이가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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