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07화 (10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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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가려던 계획은 대니얼을 저택으로 부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예민한 시기에 파파라치가 끼어들면 골치 아파질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안 그래도 많은 사람이 클레이의 반지 주인을 파고 있는데, 허술한 옷을 입은 밀리안과 함께 병원에 가면 말이 나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디어 가 지하에는 웬만한 병원보다도 좋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섣불리 병원에 가서 진료기록을 남길 수 없는 밀리안을 위해 클레이가 준비한 것이었다. 그걸 밀리안만 몰랐다. 막 완공이 되었을 시기에 밀리안이 도망친 탓이었다.

대니얼 크래포드는 밀리안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정관 수술을 푼 지 얼마나 됐다고 무슨 임신이냐고 코웃음 쳤지만, 클레이의 벼락같은 다그침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디어 가로 튀어왔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지하로 내려온 대니얼이 얼굴에 가득 흐른 땀을 닦았다. 하도 빨리 오라고 성화를 부리는 탓에 운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름대로 전속력으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벤틀로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청결함을 선호하는 그에게 땀을 손으로 닦는 것은 눈 뜨고 보지 못했다. 수건을 주면서도 땀을 닦았던 손에 닿지 않으려고 하는 벤틀로의 표정에 질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눈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대니얼만 아무 생각 없이 수건을 받고 열심히 얼굴을 닦았다.

“정말 임신 맞아? 착각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는데…….”

“확실히 하려고 널 부른 거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검사부터 해.”

“아니 정관 수술을 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이제 고작 이 주밖에 안 됐는데. 그냥 다른 증상인데 임신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지.”

“착각이든 아니든 일단 검사해. 그럼 확실하겠지.”

“물론 그러려고 왔다.”

대니얼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검사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벤틀로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정관 수술을, 풀었다고요?”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끝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밀리안 님의 검사가 끝난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지요.”

정작 당사자인 밀리안은 아무렇지 않은데 벤틀로가 난리를 떨었다. 클레이는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혹시라도 실망한 기색이 보일까 걱정했지만, 밀리안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임신시키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잡고 싶었던 클레이의 마음이 만족스러웠던 탓이었다.

밀리안은 웃었지만, 그의 감정을 가장 빠르게 느끼고 있는 클레이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이 그렇게 괴로워하며 애타게 그를 잡으려고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남자가 귀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던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볼을 꼬집으려는데 반대쪽에 앉아 있는 벤틀로가 눈을 새파랗게 뜨고 그녀를 감시하고 있어 그대로 손이 내려갔다.

“누가 보면 벤틀로가 밀리안의 부모인 줄 알겠어.”

“주인님도 밀리안 님도 소중한 제 아이입니다.”

“…….”

노골적인 애정의 말에 밀리안의 얼굴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클레이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다 피식 웃었다.

“이제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주인님은 너무 제멋대로라 엄격한 관리가 필요한 대상이라서요.”

“들었어, 밀리? 나 섭섭해.”

“클레이…….”

전혀 섭섭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지만 짐짓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제 품에 안기는 클레이가 귀여워서 밀어낼 수는 없었다. 벤틀로의 혀 차는 소리만 커졌을 뿐이었다.

* * *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를 한 뒤, 대니얼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클레이를 따로 불러냈다. 빈 검사실 안으로 들어간 클레이는 문을 닫음과 동시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임신이 아닌 거지?”

“알았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던 대니얼은 먼저 치고 오는 클레이의 확신 어린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말이 안 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검사하고 섹스를 한 건데 밀리안이 임신을 할 수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 것치고는 실망한 얼굴인데?”

“당연하지.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잖아.”

그토록 바랐던 아이인데. 클레이는 맥빠진 얼굴로 등을 벽에 기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이라는 가능성이 그녀를 들뜨게 했었다.

“밀리안이 테스터기는 양성으로 나왔다는데, 그게 가능해?”

“상상 임신은 정도가 좀 심하면 몸이 임신의 징후를 만들어 내거든. 이런 경우엔 테스터기에 양성이 뜨는 것도 흔한 일이야. 그래서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하는 게 중요한 거고.”

“하…….”

“이 경우엔 밀리안이 자신이 임신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게 중요한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증상이 더 심각해질 수도 있어서 너만 따로 부른 거야. 심인성 증상이라 보호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선 검사 결과를 알려줘야지. 그래야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니까. 그게 가장 첫 번째야.”

“그리고?”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지금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할 때라는 거야. 정말 임신을 했든, 상상 임신이든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가 커져서 평소와 달리 비이성적이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 남성 오메가는 여성에 비해 이런 증상이 더 심하거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

“그래. 아무리 본인이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더라도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헤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반드시 원하는 대로 해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겪었다. 진작 알았다면 그 지옥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그 모든 일의 시초는 눈치 없이 아이가 필요 없다고 했던 자신의 말이었다. 누구를 탓할 자격도 없었다. 클레이는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상상 임신은 대체 왜 하는 거지?”

“임신을 정말 하고 싶거나 혹은 정말 하기 싫거나. 둘 중의 하나야.”

“…….”

아이를 원하는 것 같던 밀리안의 말과 표정을 생각하면 싫어서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였다. 임신하고 싶어서. 그가, 우리의 아이를 원해서. 클레이는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얼굴 전체에 퍼진 웃음을 가리기엔 부족했다. 진지하게 의사로서의 소견을 말하던 대니얼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질색했다.

“야, 너 표정 진짜 재수 없어.”

“귀여워서 미치겠는데 어쩌라고.”

“…….”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대니얼은 사랑이라는 걸 하게 된 이후 점점 이상해지는 친구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아니, 잠깐. 그럼 정관 수술을 푼 건 밀리안의 동의가 없었다는 거잖아?”

“이제 동의하겠지.”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결과만 좋으면 다 된 거야.”

밀리안이 떠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얻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나쁜 마음을 먹고 정관 수술을 풀었지만, 그가 아이를 원하니 잘한 결정이었다. 상상 임신이라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어차피 그는 곧 임신하게 될 테니 시간이 조금 늦춰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날 묶어두고 혼자만 독점하고 싶대.”

“뭐?”

“밀리가 소원이라면서 꼭 들어달라고 그러더니…….”

“안 궁금해! 말하지 마!”

“내 온몸을 구속하고 완전히 만족한 얼굴로 웃는 거야. 귀엽게.”

“안 궁금하다니까?!”

클레이는 강제로 구속구를 끊어내느라 흔적이 남은 손목을 보여주며 자랑 같지도 않은 자랑을 해댔다. 진짜 이런 애가 아니었다. 이렇게 팔불출처럼 다 풀어진 얼굴로 웃으면서 제 남자를 자랑하는 꼴이 소름 끼쳤다. 하지만 대니얼이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해도 한번 터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밖에서 밀리안이 기다리고 있다고!”

“……아.”

친구 커플의 은밀한 사정을 강제로 듣게 된 대니얼이 씩씩거리며 밖에 있는 밀리안을 언급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대니얼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으로 벅벅 닦고는 지친 얼굴로 이 미쳐버린 친구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럼 이제 나가…….”

“잠깐.”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문을 밀어내는 클레이에 의해 열리지 않았다. 대니얼은 창백한 얼굴로 옆을 힐끔 바라봤다. 제 얼굴 옆으로 뻗어진 매끄러운 팔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별로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문을 당겨도 열리기는커녕 흔들리지조차 않는다.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거든?”

* * *

대니얼과 함께 어딘가로 갔던 클레이가 먼저 돌아왔다. 밀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 옆자리에 앉는 클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응?”

“남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지 말라고 했잖아요.”

“……임산부를 대할 때의 주의 사항을 듣고 왔어.”

“정말인가요?”

“정말.”

밀리안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저 자신이 다른 남자와 한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것 같았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꽉 끌어안았다. 질투할 대상이 글러 먹었는데도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좋은 걸까.

“귀여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이야. 너무 귀여워. 더 질투해줘.”

“그 전에 아까 했던 약속부터 지키세요. 빨리 나올 줄 알았는데 오래 걸려서…….”

속이 부글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며 밀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머리로는 제게 각인한 클레이가 다른 남자를 돌아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본능은 사납게 날뛰었다. 한번 풀린 고삐를 억지로 잡아 누르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상대가 대니얼 크래포드여서 참을 수 있었던 거였다. 클레이가 그를 남자로 볼 리가 없으니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왜? 또 묶어두려고?”

“네.”

거리가 멀어지자 그토록 가깝다 느꼈던 클레이의 감정이 희미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당연한 건데, 불안했다. 밀리안은 욕심껏 클레이를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는 그녀의 감정을 받아먹었다.

돌아가고 싶다. 단둘만 존재했던 그곳으로. 이 여자가 밖을 돌아다니는 게 싫다. 다른 남자가 이 여자를 보지 못하도록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숨기고 싶다. 나만의 것이다. 클레이 디어는. 이 여자는.

밀리안의 감정이 사납게 날뛸수록 클레이는 더욱 짙은 웃음을 흘렸다. 사소한 것에도 화를 내는 남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클레이는 밀리안의 코트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고 단아한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

“나는 네 거야. 어디에 있더라도.”

“……네.”

“너도 내 거고.”

그렇지? 클레이가 속삭이자 밀리안이 몸을 떨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겹쳐진 몸을 통해 밀리안의 성기가 살짝 발기했음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코트 안으로 손을 밀어 넣다가 벤틀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섬세하게 가꾼 수염이 그의 심리를 대변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데서나, 발정 난, 짐승처럼, 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전.”

“…….”

“…….”

“제발, 품위를 지키십시오.”

아무리 두 분이 서로 좋아 미치겠어도 말입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이를 악문 벤틀로의 경고에 클레이는 밀리안의 옷 안에 집어넣었던 손을 슬쩍 빼냈다. 하지만 뻔뻔한 얼굴을 유지하는 클레이에 비해 밀리안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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