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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08화 (10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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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크래포드는 어딘가 지친 얼굴로 돌아와 처음 사용한 거라 그런지 검사 결과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병원에 가져가야겠다며 확정을 미뤘다. 그 순간 모든 걸 파악한 벤틀로가 저도 모르게 실망하는 얼굴을 하다 클레이의 눈짓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대니얼이 돌아간 이후, 밀리안은 마치 잘못 건드리면 깨질 얇은 유리 장식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침실로 옮겨졌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침대에 앉힌 후, 특히 남성 오메가는 임신하면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다는 대니얼의 말을 전했다. 그러니 그동안의 모든 일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멍청했던 거라며, 클레이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검사가 끝난 이후 정관 수술을 푼 것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자던 벤틀로는 자신이 했던 말도 잊어버린 듯 허공을 봤다가 밀리안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요. 밀리안 님께서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이건 모두 다 주인님의 잘못인 거지요.”

“아뇨, 그런 건…….”

“내 잘못이 맞아. 눈치 없이 아이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해서 네가 놀란 거지.”

“…….”

그런 말까지 한 줄 몰랐던 벤틀로는 클레이를 시선으로 조용히 비난했다. 클레이는 꿋꿋이 벤틀로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밀리안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널 잡은 건 후회하지 않아.”

“저도, 그래서 좋았습니다.”

클레이는 자신이 제게 나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잡고 강제로 가둬둔 게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언제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그 덕에 각인할 수 있었고, 클레이 역시 제게 각인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클레이의 모든 행동이 제게 좋은 영향만 끼쳤다. 모든 게 불안하고 불안정했던 자신을 붙잡아 땅에 내딛게 만든 최고의 처방이었다.

남들은 미쳤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친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남의 시선을 걱정하고 신경 쓰고 괴로워하다가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소홀히 하느니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게 옳은 거다.

어쩌면 또다시 비이성적인 감정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하니까. 그러니 우린 괜찮을 거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만 하던 때가 지나자, 밀리안은 한없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밀리안의 말에 감동한 클레이가 그를 와락 끌어안자 벤틀로가 기가 막힌 듯 두 사람을 흘겨보다 이내 두 사람을 두고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복도에 서자 벤틀로는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한 사람만이 아닌, 서로 각인을 했으니 이제 두 사람은 온전하다. 살아서 이런 일을 겪을 줄 몰랐다. 평생 클레이가 행복하길 바라며 살았지만, 유구히 이어졌던 디어 가의 불행은 징크스의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기 때문에 반쯤은 포기했었다. 밀리안과 클레이의 시작도 좋지 않았고, 그 과정에 자신 역시 동조했기에 밀리안이 도망쳤다고 했을 때는 드디어, 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저주 같은 징크스를 끊을 수 없는 거라면, 디어 가와 상관없는 밀리안만이라도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마치 기적처럼 신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를 결국은 완벽하게 아물게 했다. 감사하고, 감격해서 심장이 떨렸다. 부디 이제 좋은 일만 있기를. 내 아이들이 끝까지 행복하기를.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 * *

클레이를 끌어안고 있던 밀리안은 문득 든 생각에 그녀를 뒤로 밀었다.

“수술 자국, 보여주세요.”

정관 수술을 푼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것에 다시 상처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의 속을 끓게 하기 충분했다. 밀리안이 다소 경직된 얼굴로 클레이의 셔츠를 끌어 올렸다. 선명한 붉은 자국. 새로운 상처를 만들지 않았지만, 기존의 상처를 다시 절개했던 탓에 흉터는 더 커졌다. 이렇게 예쁜 피부에…….

“내 거라고 했잖아요. 왜 함부로 상처를 만들어서…….”

“그래놓고 버리고 가려고 했잖아.”

“…….”

“아니야. 미안,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클레이는 황급히 사과했다. 생각 없이 그를 탓하는 말을 해버렸다.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사람이 자신인데. 불안해하는 밀리안을 상대로 멍청하게 아이 따위 필요 없으니 다신 말도 꺼내지 말라고 일축했던 자신의 행동이 떠오른다. 만약 시간을 다시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말을 하기 전에 제 입을 막아버렸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용서해 달라고,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말하며 그의 얼굴에 전체에 입을 맞추니 밀리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각인한 것은 좋기도 하고 감당하기 힘들기도 했다. 상대의 감정에 너무 쉽게 휩쓸렸다. 기쁨도, 아픔도, 슬픔도 몇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클레이는 문득 든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이 상태로 섹스를 한다면, 그의 성기를 질 안에 넣고 그의 요도에 관을 삽입하면 그 쾌감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성감이 은밀하게 올라가는 것을 느낀 밀리안은 그녀의 어깨를 황급히 흔들었다. 음탕한 망상에서 깨어나온 클레이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클레이, 저 먹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미셸이 만든 크림수프와 양고기 스테이크요.”

“그게 다야?”

“애플파이도 먹고 싶어요. 아, 생크림과 딸기를 얹은 크레페도, 초콜릿 아이스크림하고 자몽주스도요.”

클레이의 신경을 분산시킬 의도로 말한 거였는데,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미친 듯이 식욕이 돌았다. 클레이와 단둘만 있었던 저택에서의 식사도 좋았지만, 그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은 모두 디어 가의 요리장 미셸이 만든 음식이었다. 밀리안은 멍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클레이를 채근했고, 클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벤틀로를 부르려다 말고 직접 일 층의 주방으로 내려갔다.

며칠만, 며칠만 더 늦추고 싶었다. 그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날을. 혼자 힘들어했을 그에게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서. 고작 하루만으로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소중하게 담아두고 있던 비밀을 밝히자마자 거짓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밀리안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테니까…….

미셸에게 밀리안이 불러준 음식을 모두 말한 뒤 다시 돌아가려던 클레이는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에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금만 늦게 막았다면 멍청한 얼굴로 웃어버릴 뻔했다. 밀리안과 각인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 그도 내게 각인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아무리 입을 막아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다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허공을 보고 있는 벤틀로가 보였다. 세상이 꽃밭으로 보이는 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클레이는 자신이 앞을 지나쳐도 모르는 벤틀로를 굳이 건드리지 않고 밀리안이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문을 벌컥 열자 밀리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사한 얼굴. 자신을 굳게 신뢰하는 얼굴을 보자 클레이는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당일에 진실을 밝히는 게 가혹한 일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항상 그를 위한 행동이라고 멋대로 행동한 다음 매번 후회하지 않았던가.

항상 중요한 대화를 하지 않고 피하다 보니 엇갈리는 일이 생겼었다. 이젠 그래선 안 된다. 모든 일은 그와 상의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걸 깨닫고서도 또 밀리안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멍청하게.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클레이는 밀리안을 침대 위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클레이는 자신과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남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당신이 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사실 검사 결과는 이미 나왔어.”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밀리안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알아차렸다.

“……임신이, 아닌 거군요.”

“응. 상상 임신이래.”

밀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웬만한 병원의 시설보다 나을 거라더니, 그다음에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검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소릴 했다. 그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는데…….

상상 임신이라니. 실제로는 임신이 아닌데 그 난리를 피웠던 게 어이없었다. 밀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클레이가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난 기뻐. 당신이,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

“사실 이 사실을 밝히는 걸 조금 더 미루려고 했는데, 그건 내 욕심이지 결국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닌 것 같았어.”

바보 같지? 클레이가 작게 속삭이자 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늦게 말해줬으면 화가 많이 났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당신에겐 항상 바보 같은 짓만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사랑해. 맞닿은 손을 통해 클레이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생생한데. 아직도 배 안에 우리의 아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모두 착각이라니. 몸에 기운이 쑥 빠졌다. 허탈해서, 황당해서, 부끄러워서……. 밀리안이 결국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클레이가 황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아. 평생 함께할 거잖아.”

“…….”

“천천히 가자. 그동안 우리가 너무 빨랐으니, 속도를 조절하라는 뜻일 거야.”

“클레이.”

“알고 있어? 난 당신이 우리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울고 싶어.”

거칠게 넘쳐 흐르는 감정은 마치 폭풍 같았다. 그 감정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아 밀리안은 클레이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클레이가 그런 밀리안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날 묶어놓고 기뻐하고, 또 감금당하고도 도리어 좋아하던 일까지. 모두 행복한 일뿐이야.”

“그건.”

짓궂은 말에 밀리안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가 몸을 떼고 도망치려고 하자 클레이는 밀리안을 안은 채 침대를 뒹굴었다. 미안함, 자괴감,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뛰어넘는 행복이 그들을 감쌌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사랑이었다. 클레이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밀리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가끔, 다시 그곳에 가자. 우리끼리만 있고 싶을 때. 응?”

“……네.”

밀리안이 귓불을 붉히며 대답했다. 클레이는 그의 모든 순간을 홀린 듯 눈에 담았다. 기적 같았다. 그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너무 벅차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만약, 만약 모든 것이 준비된 시기가 온다면 가장 멋지게 하자고 계획했던 말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와 결혼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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