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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당분간 따로 지내자고, 본심이 아닌 말을 한 게 실수였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벤틀로가 작정한 것처럼 그가 지낼 곳을 별채에 따로 만들어 줬다.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해도 벤틀로는 이때가 아니면 클레이에게 벌을 줄 수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며 다그쳤다. 하지만 이건 클레이에게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무 말도 없이 도망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심술이 아닐까. 밀리안은 이 가정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판단했다. 벤틀로는 안 그렇게 생겨서 뒤끝이 길었다. 그래서 벤틀로의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이 상태가 길게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체셔가 그의 무릎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클레이를 닮은 체셔를 보니 더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일주일이나 못보다니.
클레이에게 화를 낸 것도 후회가 됐다. 그녀의 과거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다 알고서도 사랑한 건데 굳이 과거를 걸고넘어진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은 들어가지 못했던 클레이가 속했던 곳을. 클레이의 말처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면 더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래도, 봐야 한다. 그런 곳에서 클레이를 빼내 자신이 소유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건데. 그녀의 과거가 어쨌든, 지금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건데 그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체셔만 쓰다듬고 있을 때,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벤틀로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밀리안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벤틀로가 만류했다.
“왜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그러는 벤틀로야말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체셔를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막다니, 뭘…….”
밀리안은 제 무릎에 있는 체셔를 안아 드는 벤틀로의 말을 따라 하다 문득 든 생각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가 막을 수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이제 화 풀렸어요?”
“제가 언제 화를 냈다는 말입니까?”
“제가 벤틀로를 두고 혼자 도망치려고 한 것, 그리고 벤틀로만 두고 클레이와 단둘이 지낸 것에,”
“크흠.”
머쓱한 얼굴로 모른 척 체셔를 다른 자세로 바꿔 안는 벤틀로의 행동에 밀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화, 풀린 거죠?”
“전 그런 사소한 것으로 화내는 쪼잔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알아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렇게 대답한 벤틀로가 잠시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말을 한다.
“밀리안 님. 제가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까?”
“……네? 그야 당연히.”
“잘못 보셨습니다. 전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네?”
무슨 말일까. 그는 자신에게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자신뿐 아니라 클레이에게도 그랬고, 누구에게도 나쁘다고 평해질 사람이 아니었다. 벤틀로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저는 제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
“설혹, 다른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사람이 가진 게 그것뿐이더라도, 그게 없으면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 아이가 원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뺏어올 겁니다.”
“벤틀로.”
“그래서 그랬습니다. 클레이가 당신을 원해서, 그게 나쁜 짓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눈을 감고 묵인했습니다. 아니, 최선을 다해 도왔지요.”
“…….”
“후회하고 있습니다. 계속, 끊임없이 후회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클레이뿐만 아니라, 밀리안 너 역시 내게 소중한 아이가 될 줄 몰랐어.”
“―!”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밀리안은 무례한 언행을 했다고, 용서해달라고 고개를 숙이는 벤틀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나쁜 사람이니까요.”
“…….”
“그런 주제에 당치도 않은 심술을 부렸습니다. 밀리안 님께서 다정히 받아주실 줄 알고.”
“벤틀로 저는.”
갑작스러운 고해 성사에 머리가 엉망으로 뒤엉켜 정돈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의 주인은 클레이였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의 말 중에 가장 가슴을 친 것은 자신이 그의 소중한 아이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닌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타인에게만 좋은 사람이었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사람. 그리고 그 ‘나쁜’ 애정에 자신도 속한다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토록 원하고 바랐던 것인데.
내가 원한다면 클레이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가볍게 넘겼지만,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밀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부족했던 것이 채워지고 있었다. 클레이에게 받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절대로 채워질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것인데…….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뜨니 벤틀로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제가 또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땐 절 잡아주세요.”
“…….”
“저는 어디가 고장 난 건지, 다정하기만 애정으로는 만족이 안 됩니다. 또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혼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한순간에 마음이 변했다고 돌아설 것 같아서…….”
버려지는 게 당연하다고, 그 모든 원인이 제게 있다는 소리만 듣고 자랐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도 이미 마음에 상처가 나서 무얼 채워도 벌어진 틈 사이로 다 흘러 사라졌다. 제게는 클레이가 주는 비정상적인 집착이 어울렸다. 그래야 균형이 맞았다. 이미 제 가슴은 구멍이 크게 나 있어서 얼마를 받더라도 결코 넘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기만 했다. 그래서 클레이가 좋았다. 그녀에게라면 더 달라고 해도 거절당하지 않을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이 채워줄 것이다.
벤틀로는 심란한 기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밀리안은 담담한 얼굴로 가슴 아픈 말을 하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가출’하려고 한다면 그땐 꽁꽁 묶어놓고 못 가게 막아드리지요.”
가출. 순식간에 그가 한 행동을 가출로 바꿔버린 벤틀로의 말에 밀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소한 말이었지만, 기뻤다.
몸을 돌려 나가려던 벤틀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커튼에 반쯤 가려진 발코니 창을 바라봤다.
“발코니 창을 꼭 잠그고 주무십시오.”
“…….”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소리 지르시고요.”
“네, 그럴게요.”
힌트란 힌트는 다 알려주는 벤틀로의 행동에 밀리안은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자 밀리안은 발코니 창을 잠그는 대신,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천천히 발코니로 걸어갔다. 발코니는 이미 잠겨있어서, 벤틀로의 조언이 의미 없었다. 밀리안은 커튼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형체에 환하게 웃었다.
* * *
팔짱을 낀 채 벽에 있던 클레이는 밀리안이 창을 열자마자 그를 끌어안았다.
“일부러 늦게 열었어.”
“오해입니다.”
“그래서, 화는 풀렸어?”
그녀는 밀리안이 벤틀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렸다. 밀리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노코멘트입니다.”
“언제 말해줄 건데?”
“그것도 노코멘트하겠습니다.”
“흐응.”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나갔다. 단추를 하나 풀면 입을 맞추고 또 다른 단추를 풀면 볼을 살짝 깨물었다. 턱과 목, 귓불, 콧등, 눈가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입술을 비볐다. 일주일간 만지지 못했던 몸을 손으로 훑던 클레이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못 본 사이 밀리안의 몸이 많이 변해있었다.
“운동했어?”
“할 게 없어서요.”
“단단해. 몸의 라인도 더 예뻐졌어.”
클레이의 칭찬에 밀리안이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서로 마주 본 상태 그대로 클레이를 안아 올렸다. 똑같았던 시선의 위치가 순식간에 변했다. 처음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클레이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밀리안의 목에 손을 감았다.
“날 안아주려고 운동한 거야?”
“약속했으니까요.”
“멋져. 역시 내 남자야.”
“…….”
밀리안은 환하게 웃는 클레이를 홀린 것처럼 올려봤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에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빛났다.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아니, 신일까. 여자는 분명 제게 안겨있음에도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에 밀리안은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밀리?”
“보고 싶었어요.”
“나도.”
“고집부려서 미안합니다.”
“그럼 그 빌어먹을 파티는 안 해도 돼?”
“……아뇨.”
하여튼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클레이는 혀를 차며 어설프게 떠 있는 다리를 들어 올려 밀리안의 허리에 감았다. 밀리안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그녀를 단단히 받히고 있었다. 짧은 슬립이 벌어진 다리 위로 말려 올라갔다. 클레이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잡고 있던 밀리안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다 움찔 멎었다.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이러고, 여기까지 왔어요?”
“가운 입었잖아.”
“그래도 속옷도 안 입고…….”
“급했거든. 어차피 당신 생각만 하면 젖어서 속옷만 버리고.”
“…….”
“자기도 꽤 급해 보이는데?”
오랜만이라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귀를 이로 깨물고 핥으며 속삭였다. 그사이 한 손을 내려 밀리안의 바지를 살짝 끌어 내렸다. 헐렁한 파자마 바지는 손쉽게 아래로 내려갔고,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퉁, 하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몸에 매달린 상태로 부풀어 오른 성기에 엉덩이를 내려 은밀하게 문질렀다. 여자의 음부도, 남자의 성기도 잔뜩 젖어 있어서 비벼질 때마다 음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하자. 응?”
“아, 흐읏, 잠깐,”
“이제 말은 그만. 당신은 이제 예쁘게 울면 돼.”
“―!”
귀두 끝부터 천천히 여자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랜만의 결합이라 두 사람 모두 쾌감에 몸서리쳤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허리에 두 다리를 얽어 살짝 허리를 흔들었다. 엉덩이를 내릴 때마다 밀리안의 고환이 흔들리며 살갗에 부딪혔다.
“날 놓치면 안 돼. 끝까지 잘 버텨줘.”
“아, 아아, 클레이, 읏.”
각인한 이후, 섹스의 쾌락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혼자 느끼는 쾌감만으로도 벅찬데, 상대가 느끼는 감각까지 겹쳐지니 아무리 가볍게 몸을 겹쳐도 정신을 놓을 정도였다. 움찔거리는 뜨거운 내벽도, 성기 안쪽 깊은 곳을 꿰뚫는 알파의 관도 모두 아찔할 만큼 야하고, 음란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밀리안이 집중하는 것은 온몸의 감각을 사로잡는 클레이의 쾌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