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클레이는 밀리안의 뒤에 서서 임신진단 테스터기에 줄이 뜨길 기다렸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밀리안은 수치스러운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 몰래 테스터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를 빌미 삼아 매주 테스터기를 쓸 때마다 그녀의 손을 빌어야 했다.
어차피 매주 대니얼 크래포드가 와서 검진을 해 주는데도 클레이는 꼭 테스터기를 사용했다. 다 잊었다고,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가 혼자 임신했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려던 과거를 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밀리안도 클레이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줄이야.”
“…….”
“매일 그렇게 싸는데 왜 아직 임신이 아니지?”
“아, 정말이지…….”
클레이의 상스러운 말에 밀리안이 치를 떨었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밀리안이 말하자 클레이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에 든 테스터기를 선반 위에 올리고는 그의 성기를 손으로 문질렀다.
“싫다면서 왜 세우는 건데?”
“―!”
“상스러운 말을 들을 때마다 좆을 이렇게 세운다는 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아, 아니,”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한번 싸자. 응?”
“아―!”
밀리안은 결국 클레이 손에 사정하고 샤워까지 하게 됐다.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으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앞에 선 클레이가 여상한 목소리로 결코 여상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뭘,”
“대니얼에게 약 처방을 받았지.”
“…….”
“왜 피임약을 먹는지, 이제는 말해 줄 때 아닌가?”
“어떻게.”
“테스터기를 쓰자고 할 때마다 그렇게 불안해하는데 모르면 더 이상하지.”
추궁하기 전에 순순히 말해 주기를 기다렸는데, 인내심이 너무 빨리 닳아 없어졌다.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이 시선을 피했다. 클레이는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당신도 아이를 원했던 거 아니었어?”
“원하는데…….”
“그럼?”
“그게.”
“편하게 말해도 돼. 임신하는 건 당신인데 내가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정말 원하지 않는 거라면 번거롭게 피임약을 먹지 말라고, 자신이 수술을 받으면 된다고 클레이가 말하자 밀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절대로 다시 수술하지 마세요. 그냥, 조금 뒤로 늦추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단둘만의 시간이 줄어드니까. 밀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나한테 그 얘길 안 했는데?”
“……기대하는 것 같아서…….”
“맞아. 기대했어. 하지만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면 난 당신의 뜻에 따랐을 거야.”
클레이의 차분한 말에 밀리안의 고개가 더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밀리안의 모습에 클레이가 혀를 차며 그의 손을 잡았다.
“화내는 거 아니야. 화나지도 않았고. 그냥 당신이 내게 편하게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닥터 크래포드가.”
“응.”
“임신하면,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고…….”
“……뭐?”
“나, 남성 오메가는 특히 호르몬 변화가 심해서, 임신 기간 내내 금욕해야 한다고,”
클레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밀리안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게 참 귀여우면서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레이는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읏.”
“그럼 그렇게 말했어야지. 왜 피임약 따위를 함부로 먹어.”
“성분이 좋은 약이라고 해서요.”
“그래도 그런 약을 먹을 땐 나와 상의해 줘.”
대니얼이라면 밀리안의 몸 상태에 맞는 약을 처방해 줬을 것이다. 자신에게처럼 임상시험도 안 된 약을 먹였다가 제 화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굴어도 그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밀리안이 제게 비밀로 했다는 것이 서운했다. 그래,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운한 거였다. 물론 피임약을 밀리안에게 처방해 놓고 제게 말하지 않은 대니얼에게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지만.
“알아줘. 난 뭐든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거라는 걸. 그저 먼저 말해 주기만 하면 돼.”
상의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게 할 거라는 일방적인 통보여도 좋다. 그저 말만 해 주면 된다.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했던 마음이 누그러지자 이젠 웃음이 나왔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그대로 밀어 침대에 눕혔다.
“나와 섹스를 못 하는 게 그렇게 아쉬웠어?”
“…….”
짓궂은 물음에 밀리안이 팔로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클레이는 그의 팔을 잡아 아래로 누른 뒤 기분 좋은 얼굴로 채근했다.
“대답, 해야지. 응?”
“……네.”
제가 먼저 말해 놓고 다시 물으니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뭘까. 클레이는 탄식했다. 매일매일 더 귀엽게 구는 남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대로 잘근잘근 씹어 배 안에 삼키고 싶을 정도였다. 한참을 물고 빨고 난 뒤에 클레이는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 물었다.
“얼마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당신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약을 먹는 것보다 내가 수술을 하는 게 나아.”
“아니요, 약은 이미 이주 전부터 안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수술하지 마세요.”
“나도 막상 일 년을 금욕해야 한다니 좀 아쉬워서 그래.”
물론 밀리안이 임신한다면 일 년이 뭘까. 이 년을 더 금욕해야 한다고 해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임신한 뒤의 일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좀 더 느긋하게 즐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리안을 안심시킨 뒤에 대니얼을 조져야지. 아무리 밀리안이 부탁했다지만, 감히 제게 비밀로 하고 피임약을 처방하다니. 가만두지 않을 거다. 클레이는 화사하게 웃으며 머릿속으로 그 투실투실한 살을 난도질하는 상상을 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이 너무 새카맣다. 밀리안은 자신의 부탁으로 인해 대니얼 크래포드가 큰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닥터 크래포드는 잘못이 없습니다, 클레이. 제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해서…….”
“아, 그렇게 티가 났어?”
잘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클레이는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더니 더 이상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죽여 버릴 거야.”
“클레이, 제발…….”
“안 돼. 이건 당신이 뭐라고 해도.”
클레이는 밀리안의 볼을 살살 잡아당겼다. 볼이 늘어나 왼쪽 입술이 귀엽게 벌어졌다. 클레이가 킥킥 웃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살벌하다.
“살점을 얇게 발라서 소금을 쳐 버릴 거야. 불에 구우면 돼지 통구이가 되겠지.”
“……용서해 준다면서요.”
“그건 당신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지. 내 관용이 대니얼에게까지 갈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닥터 크래포드는 디어 가의 주치의고…….”
“세상에 의사는 많아, 밀리. 그 수많은 의사 중 하나가 죽는다고 문제될 건 없어.”
이쯤 되니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밀리안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클레이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방어해 주겠다고 대니얼을 안심시킨 뒤에 피임약을 받은 건데,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조금은 차감해 줄 수는 있지만.”
클레이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무릎을 타고 오르는 손길에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요?”
“일단 키스부터.”
클레이가 입술을 손으로 톡톡 치자 밀리안이 살짝 입술을 비볐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살짝 잡아당겼다가 놓은 뒤, 다시 입술을 겹쳤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키스를 받으며 옅게 웃었다. 밀리안의 키스는 모두 제가 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제게 길들여졌다는 증거가 달가웠다. 클레이는 살짝 입술을 열어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밀리안의 혀를 받아들였다. 달짝지근한 입맞춤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 * *
그걸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클레이는 밀리안이 묻어 두었던 어떤 것을 끄집어냈다.
“하나만 더 대답해 줘.”
“뭘…….”
“결혼 선물로 줬던 거 말이야. 그건 언제 쓸 생각이야?”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구속구를 밀리안은 여전히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잔뜩 탐이 난다는 눈을 하고서 안 보이는 곳에 숨겼다. 클레이가 그걸 선물한 이유는 모셔 두라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묶고 홀로 독점해 만족해하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결혼 선물이니까, 결혼한 뒤에…….”
“거짓말. 사용할 생각이 없는 거지?”
“…….”
밀리안은 정처 없이 흔들리던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클레이는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창백한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날 다치게 할까 봐 겁나?”
“-!”
어떻게. 밀리안의 고개가 번뜩 올라갔다.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밀리안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클레이는 낮게 혀를 내찼다.
“클레이, 저는, 저는…….”
“쉬이.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이렇게 겁에 질려 떠는 모습조차도 예뻤다.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클레이는 일어나 밀리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 * *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별장의 방과 똑같이 만든 방에 들어섰다. 창문이 없고, 커다란 방 안에 생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췄던 그들의 은밀한 공간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클레이가 문을 닫자 밀리안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여긴.”
“선물.”
“……과해요, 너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하필 이곳에 그가 가장 갈망하고 또 가장 피하고 싶은 곳이 나타났다. 정말 견딜 수 없이 클레이를 독점하고 싶어질 때만 별장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욕망이 솟구칠 것이 분명했다.
그건, 너무 무섭다. 혹시라도 이 욕망이 잘못된 쪽으로 흘러갈까 봐. 참고 참다가 못 견디겠다 싶을 때만 단둘만의 공간에 들어가 부족했던 것을 채우는 정도가 딱 좋았다. 사람은 한계를 몰라서, 조금씩 조금씩 더 바라게 될 테니까.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점점 더 강한 약을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자칫 잘못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제어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