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주말임에도 클레이는 중요한 용무가 있어 외출한 상태였다. 밀리안은 조금 전의 통화에서 결혼식과 관련하여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던 클레이의 말을 떠올렸다. 무슨 말일까. 벤틀로에게도 물었지만. 그는 아무리 봐도 아는 것 같은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밀리안은 소화를 시킬 겸 저택을 둘러보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디어 가의 저택에는 수많은 방이 있었지만, 이 서재는 그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긴 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둘러볼 정신도 못 차리게 클레이가 그를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자신의 곁을 벗어나 클레이가 다른 남자와 있었던 곳. 질투와 불안감에 몸서리를 쳤던 곳. 하지만 반지를 받았던 곳도 이곳이었다. 밀리안은 제 왼쪽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 손으로 문을 열었다.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서재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인테리어가 간소한 편이었다. 한쪽 벽면은 검은색 책장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고, 창문가에는 고아한 원목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양쪽으로 있었다. 밀리안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저 테이블에 누워 클레이와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랐던 탓이었다.
밀리안은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그렇게 한다고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는 것도 아닌데, 밀리안은 연신 얼굴을 쓸었다. 억지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클레이가 앉았을 의자에 앉아 책상 여기저기를 보던 밀리안은 책상 왼쪽에 붙은 수납공간 중 마지막 서랍에 금고형식의 열쇠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차피 잠겨 있겠지. 그런 마음에 별생각 없이 당겼는데 이번에도 문이 열렸다.
“…….”
밀리안은 다시 닫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클레이가 이곳에 숨겨놓은 게 뭔지 궁금해졌다.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클레이에게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금고 안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두 개의 두꺼운 앨범과 그 위에 올려진 휴대폰 한 개가 다였다. 밀리안은 그것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옆에 놓았다. 똑같은 기종. 나온 지 얼마 안 된 최신 기종이라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밀리안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클레이의 금고에서 꺼낸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역시 생각한 게 맞았다. 문자와 통화 기록이 모두 제 것과 똑같았다. 더 뭔가가 있을까 싶어 샅샅이 뒤지니 아주 예전에 제가 다운 받았던 성인용 AV까지 나왔다.
클레이와 첫 섹스가 두렵고, 기대됐던 그때 알파와의 섹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받았다가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지웠던 건데, 클레이는 그걸 계속 보관해 두고 있었다. 눈이 홧홧하게 붉어지는 기분에 밀리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복사폰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것이라니. 어쩐지 제 행적을 샅샅이 꿰고 있는 게 신기했는데 이런 것까지 만들어 감시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밀리안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황망하고 어이없는 것뿐이었다. 그는 복사폰의 화면을 끄고 옆으로 밀어 놨다. 그리고 앨범을 바라봤다. 앨범은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공예품이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다. 밀리안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까지 해킹했다면, 몰래 사진을 찍는 것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클레이에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밀리안은 조심스럽게 앨범을 펼쳤다.
“…….”
역시 자신의 사진이 가득한 앨범이었다. 이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사진은 최근에 찍은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까지의 사진이 두꺼운 앨범 두 개에 가득 차 있었다. 간혹 부모님과 함께 찍은 것도 있었고, 저 혼자만 나온 것도 있었다. 앨범을 뒤로 넘길수록 밀리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게 왜 클레이에게 있는 걸까.
밀리안은 앞니가 빠진 채로 웃고 있는 자신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때는 그렇게 차갑게 내쳐질 미래를 몰랐을 때였기에 가능한 거겠지.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부모님은 자상했고,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그 애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한순간에 버려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결국 다 보지도 못한 채 앨범을 덮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허공을 보다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차분히 앨범과 복사폰을 다시 금고에 넣고 문을 닫았다. 물어봐야겠다. 이게 어떻게 그녀의 손에 있을 수 있는지.
* * *
클레이는 매일 퇴근한 자신을 마중하던 밀리안이 보이지 않자 벤틀로를 바라봤다.
“밀리안은?”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뭔가를 잘못하신 느낌입니다.”
“내가?”
외투를 벗어 벤틀로에게 넘기던 클레이가 멈칫 몸을 굳혔다. 잘못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헤어질 때만 해도 밀리안의 표정이 밝았다. 그리고 틈틈이 통화할 때도 별다른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클레이가 바로 계단으로 향하자 벤틀로가 뒤를 따라갔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체셔와도 놀아 주지 않으시고 계속 침실에서 나오지 않으시고요.”
“언제부터 그랬는데?”
“식사하신 뒤, 주인님의 서재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다음부터 그랬습니다.”
“……뭐?”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던 클레이의 몸이 움찔 굳었다. 서재?
“별채의 서재를 말한 거겠지?”
“아니요. 일 층에 있는 서재입니다. 주인님께서 간혹 집무실로 쓰시는 곳이요.”
“미친.”
저도 모르게 욕설을 짓씹은 클레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뒤 표정이 안 좋아졌다면 원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방향을 바꿔 서재로 향했다. 못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책상의 의자가 삐뚤어져 있었다. 책상으로 가 금고문을 열자 그대로 열렸다. 멍청하게 금고도 잠그지 않고 그대로 뒀다니. 게다가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앨범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고, 복사폰도 전원이 켜진 상태였다.
“다 봤구나…….”
“이게 뭡니까?”
“밀리안이 어렸을 때의 앨범과 복사폰.”
“……이런 걸 조심성도 없이 열어 뒀단 말입니까?!”
“깜박했어.”
“깜박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이런 걸……. 밀리안 님께서 표정이 안 좋을 만하군요.”
벤틀로의 말에 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모든 행적을 감시한 것도 모자라 그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어릴 때 앨범도 가지고 있는 걸 봤으니 그의 기분이 나쁠 만했다. 자신에겐 보물이었지만, 그에겐 아닐 테니까. 그녀는 그대로 금고를 닫으려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다 꺼냈다. 이미 들켰으니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한 뒤 당당하게 보관하고 싶었다. 물론, 그가 정말 싫다고 하면 모두 버려야 하겠지만.
버린다니. 가정만으로도 끔찍했다. 클레이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손에 든 앨범과 복사폰을 바라보자 벤틀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내찼다.
“이러고 있을 때입니까? 당장 밀리안 님께 가셔야죠.”
“당연하지.”
의문을 해소한 벤틀로는 이 층으로 오르는 클레이를 따라가지 않았다. 어차피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여서 제가 따라가 봤자 도움 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멍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는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이 아프게 다가왔다. 먼저 인기척을 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밀리안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습니까?”
“조금 전에. 당신 괜찮아?”
천천히 다가가자 밀리안의 복잡한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밀리안이 자신을 밀어내거나 거부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각인한 상태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금이나마 안도한 클레이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평소라면 그 역시 제게 다가왔을 텐데, 오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안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물건에 닿는 게 보였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벤틀로가 당신이 내 서재에 들어왔다 나간 뒤부터 표정이 안 좋아졌다고 말해 줘서.”
“…….”
“미안해.”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속이 조금 복잡해서…….”
“응.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사람이 나니까.”
클레이는 제 허리쯤에 오는 수납장 위에 손에 든 것을 올려놨다. 그리고 빈손으로 밀리안을 끌어안았다. 잠시 멈칫하던 밀리안이 이내 긴장을 풀고 그녀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이렇게 몸이 닿으면 그의 마음을 더 깊게 알 수 있었다. 슬픔과 자괴감, 허탈함이 뒤엉킨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 줘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클레이는 그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용서해 줘. 다신 안 그럴게.”
“뭘요? 절 감시하는 거 말인가요? 아니면 제 뒷조사를 하는 거?”
“……둘 다?”
클레이의 어정쩡한 대답에 밀리안이 픽 웃었다. 그의 웃음으로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닙니다.”
“지킨다니까?”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
“아니야. 정말 진심이야.”
“당신이 진심일 때와 아닐 때를 이제는 파악할 수 있어요.”
밀리안의 냉정한 말에 클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각인이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었다. 그의 마음을 단숨에 알아차리는 건 좋았지만, 이렇게 제 속을 적나라하게 들키는 것은 좀 아쉬웠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실시간으로 감시했다면, 지금은 아주 가끔만 그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였으니까.
“제게는 아주 사소한 것도 함께 상의하자더니 이런 비밀을 만들고 있었군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피임약을 먹었을 때 제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돌아오자 클레이가 어설프게 웃었다. 밀리안은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그 AV는 지우세요.”
“……아까워.”
“그것 봐요.”
바로 그렇게 말할 거면서 왜 빈말을 하냐고 밀리안이 타박하자 클레이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하지만 그걸 보는 당신이 귀여웠단 말이야.”
“……지워요.”
“으응.”
“그것 외엔 그대로 둬도 됩니다.”
후한 밀리안의 인심에 클레이의 눈이 반짝였다.
“앨범도?”
“대신 클레이의 앨범을 보여 주면요.”
“아, 내 앨범…….”
클레이의 말끝이 묘하게 늘어지자 밀리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되나요?”
“난 앨범이 없거든.”
“네?”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 여상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밀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