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24화 (124/144)

-외전 10-

업무가 바빠져 맥시와 따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밀리안은 계속 제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얼굴을 하는 맥시의 행동에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 중인 그녀 곁으로 다가가 살짝 책상을 툭툭 쳤다.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맥시를 향해 ‘괜찮아요.’라고 입 모양만으로 말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대로 받아들인 건지 그 뒤로는 맥시의 행동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에 한시름 놓은 순간, 밀리안은 뒤에서 느껴지는 클레이의 날카로운 시선에 등줄기가 바짝 곤두섰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클레이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분명 이상한 의도를 가진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밀리안이 눈을 깜박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클레이는 짧은 코웃음으로 대응했다. 당장 가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보는 사람이 많았고, 또 그들의 관계는 아직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클레이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깜찍하기도 하지. 대체 밤에 어쩌려고 저렇게 깜찍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진 진짜 기분이 틀어졌던 게 아니었다. 고작해야 비밀 사내 연애의 느낌을 내려고 했던 클레이의 기분은 잠시 후 확실하게 다운됐다.

인사팀에서 올라온 이브 테일러가 밀리안에게 노골적으로 굴었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잠시 휴식을 갖는 시간 동안 밀리안에게 미묘한 추파를 던졌다.

“밀리안, 넥타이가 삐뚤어졌어요.”

그녀는 제대로 매 주겠다며 손을 뻗었다. 거절할 시간도 없이 이브는 밀리안의 넥타이를 정돈해 주고 손을 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전에 제게 관심이 있다고 말을 했던 터라 순간 기분이 미묘해졌지만, 이브는 정말 삐뚤어진 넥타이를 정돈해 주는 것 외엔 다른 의도가 없다는 듯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면 상황만 더 이상해질 것 같아 밀리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마주친 클레이의 차가운 시선에 눈을 크게 떴다. 무심해 보이지만, 평소보다 그림자가 진 눈동자는 심기가 무척 어그러졌음이 느껴졌다.

각인은 첫날의 그 강렬했던 감정의 교류가 끝나자 날이 갈수록 무뎌졌다. 닥터 크래포드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했고, 두 사람도 인정했다. 계속 첫날 같은 느낌이 지속된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감정이 확 틀어진 상황은 달랐다. 밀리안은 제 살갗에 닿을 듯 밀려오는 클레이의 서늘한 감정에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애매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브 테일러뿐만 아니라, 각 팀의 실장급들까지 함께 있는 자리였다. 그걸 클레이도 알고 있으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리라. 밀리안은 한숨을 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르게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해서였다.

그가 먼저 일어서자 클레이가 따라 일어섰다. 휴식 시간이 끝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줄리아와 맥시만 이 미묘한 상황에 목이 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회의가 끝난 뒤, 밀리안은 내려가려는 이브 테일러를 잡았다.

“이브.”

“네, 밀리안.”

“잠깐 따로 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저야 좋죠.”

오늘따라 유독 화려한 화장을 한 이브가 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밀리안은 이제는 따끔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클레이의 시선을 느끼고 한숨을 삼켰다.

사무실 반대편에는 상당히 넓은 공간의 테라스가 있었다. 일하다 답답하면 나와서 쉬는 용도였는데, 가장 높은 층은 직원이 비서들뿐이어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특히 지금은 회의를 하고 난 뒤여서 테라스에는 밀리안과 이브 테일러뿐이었다.

테라스는 복도와 이어진 벽 전면이 투명한 유리여서 밀리안이 일부러 고른 장소이기도 했다. 괜히 따로 대화한다고 아무도 못 보는 장소로 가면 클레이가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훤했기 때문에.

“이브, 이러지 마세요.”

“……왜요? 내가 밀리안을 넘어뜨리기라도 했어요, 아니면 만지기라도 했어요? 그냥 넥타이만 제대로 해 준 거잖아요.”

“민폐입니다.”

밀리안의 단호한 말에 이브 테일러가 눈웃음을 치다 움찔 굳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잘게 경련했다.

“……더럽게 철벽이네요.”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아까 같은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람 마음이 쉽게 버려지냐고요. 나도 마음 떨칠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제가 배려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죠.”

“…….”

이브는 밀리안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말문이 턱 막혔다.

“저는 연인이 있고, 곧 그 사람과 결혼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결혼식에는 이브도 참석해야 해요.”

“맙소사. 그게 무슨 헛소리이예요? 내가 왜 밀리안의 결혼식에 참석해요?”

밀리안의 말에 이브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만약 일반적인 회사 동료였다면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마음이 가는 상대가 결혼하는데 그걸 어떻게 좋은 마음으로 참석해서 축하해 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신부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일을 하면서 밀리안이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알고 있는 이브 테일러는 제마음을 접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을 접으려다가도 밀리안만 보면 다시 사심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그는 굉장히 섹시하고, 관능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눈을 홀렸다. 그와 더불어 사장의 결혼 소식이 은근히 들려오자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해 버렸다. 곧 결혼할 남자를 상대로.

“미안해요. 진짜 안 그러려고 했는데, 밀리안이 너무 매력적이라 나도 모르게 사심이 생겼어요.”

“…….”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부탁이니 잊어 주세요.”

“네, 저도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결혼식은 언제 해요? 사장님 결혼 전은 아니죠?”

“……전은 아니에요.”

후도 아니지만.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밀리안의 애매한 대답에 이브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쨌든 축하해요.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브 테일러와 대화를 끝낸 밀리안은 곧장 클레이가 기다리고 있을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클레이가 그를 벽에 밀었다. 문은 잠겼다. 그리고 이브가 만졌던 넥타이를 바로 끌렀다. 바닥에 떨어진 긴 넥타이가 날카로운 힐에 짓밟혔다. 밀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클레이가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 당신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문제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려다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밀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거절했었습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당신은 이브 테일러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기분 나빠하실까 봐요.”

지금처럼. 밀리안의 변명에 클레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 지금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풀어 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냥 공개하자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도 후회하고 있어.”

“…….”

“하지만 당장 기분 좋자고 가장 소원하는 일에 방해가 생기는 건 싫어.”

밀리안은 제 허리에 팔을 감는 클레이의 은근한 독촉에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붙자마자 떨어진 가벼운 입맞춤에 눈을 내리떴던 클레이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게 끝?”

“일해야죠.”

“내 기분은?”

“이건 클레이가 고집부려서 생긴 일이니까 참으세요.”

“……!”

“그럼 이제 놔주십시오.”

밀리안이 클레이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고는 미련 한 톨 두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줄 몰랐던 클레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클레이를 두고 밀리안이 빨리 자리에 앉아 일하라며 한소리를 했다.

“클레이, 빨리 앉으세요. 시간 없습니다.”

“……이건 좀 부당한데?”

“전혀 부당하지 않습니다.”

밀리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시위 중인 클레이를 보지도 않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열었다. 그러고는 바로 키보드에 두 손을 올렸다. 따각거리는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사무실 안을 메웠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자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밀리안을 가만히 보던 클레이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의문을 가진 채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서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은 명백히 자신이 화를 내야 할 상황이 맞다. 그리고 밀리안이 자신의 화를 열과 성의를 다해 풀어 줘야 한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애교를 부릴지 기대했는데, 대체 이 상황은 뭘까?

클레이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다 밀리안을 바라봤다. 단정한 얼굴로 일에 집중한 남자는 어딜 봐도 매력적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려 근육이 예쁘게 잡힌 팔도, 곧은 목덜미도, 집중할 때의 버릇인 듯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어 하얀 이빨이 살짝 드러난 것도, 섬세한 광대뼈도, 예리한 선을 그리는 턱의 윤곽도 모두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살짝 물기가 흐르는 것처럼 반질반질한 갈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앉았다가 위로 들렸다. 클레이는 그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봤다. 그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조차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밀리안은 제 화를 풀기 위해 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더 봤다간 그대로 그의 위에 올라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이의 시선이 사라지자 밀리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모르는 척,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게 힘들었다. 집요한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여자의 시선이 주는 은밀한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좋아서였다. 밀리안은 반듯하게 모았던 다리를 살짝 벌렸다. 책상에 하반신이 모두 가려져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바지를 밀고 올라온 부위를 그녀에게 모두 들켰을 테니까.

클레이에게 일을 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집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였다. 그는 모니터 화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파일을 해당 부서에 전달했다가는 한바탕 소란이 일 것이다. 밀리안은 제멋대로 쓰던 글자를 모두 지워 버렸다.

그때 맥시가 메신저를 보내 왔다. 잠시 볼 수 있냐는 말에 밀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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