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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26화 (126/144)

-외전 12-

클레이는 분명 집 앞까지 파파라치들이 진을 치고 있을 본가가 아닌, 잠시 밀리안을 감금했었던 그 별장으로 가기로 했다. 차는 뒤에서 뒤쫓아 올 가능성이 있기에, 바로 헬기로 갈아탔고, 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제야 소란이 조금 가셨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밀리안은 클레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살짝 흥분한 듯이 볼을 붉힌 남자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클레이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비빈 후,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벤틀로, 준비해 놨던 기사 내보내.”

[알겠습니다. 당분간 이쪽으론 오지 마십시오.]

“그럴 예정이야. 시끄럽겠지만, 조금만 참아 줘.”

[밀리안 님께서 그렇게 멋진 이벤트를 해 주셨는데 그게 뭐가 대수라고요.]

흥분한 벤틀로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밀리안의 귀에까지 닿고도 남았다. 밀리안은 귀를 붉히며 클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는 그렇게 대담하게 굴더니 이제는 수줍어한다. 그 간극이 아찔해 클레이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이러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워서.

“당신이 너무 좋아.”

“…….”

그의 귀가 닳도록 했던 고백을 또 할 수밖에 없었다. 맞닿은 몸을 통해 서로의 심장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벤틀로가 작게 헛기침했다.

[크흠. 아직 통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지.”

“-!”

천연덕스럽게 웃는 클레이와 달리 밀리안은 거의 쥐구멍을 찾을 기세였다. 클레이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밀리안의 팔을 잡아 다시 제 옆에 앉혔다.

[언론 쪽은 법무팀과 비서실 측에서 전담할 예정이고, 이미 모두 준비해 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이 어느 정도 소강이 되면 저도 결혼식 막바지 준비로 저택을 잠시 비울 예정이니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곳에 계십시오. 아, 미셸은 출발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좋아. 그럼 이제 전화 끊어도 될까?”

[물론입니다. 아, 밀리안 님께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미 옆에서 듣고 있어. 그럼 나중에 봐.”

[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클레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밀리안을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 처음엔 잠시 당황해하던 밀리안은 클레이가 가는 방향이 어딘지 깨닫고 얌전해졌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를 뒹굴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뒤늦게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닫고 굳은 밀리안과 달리 클레이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터트리며 밀리안의 얼굴을 물고 빨았다.

“귀여워. 아, 사랑해. 너무 행복해.”

“……제가 계획을 망쳐서…….”

“괜찮아. 벤틀로의 말 못 들었어? 당신이 그렇게 멋진 이벤트를 해 줬는데 그게 뭐가 대수야. 그리고 모두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도리어 마침 딱 적당할 때를 맞춰 줬다며 클레이는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질 줄이야. 밀리안의 과거를 세탁하는 중이었는데 그게 오늘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리고 밀리안이 그 타이밍에 맞춰 대대적인 이벤트를 해 줬다. 이 정도면 정말 운명이 맞았다. 너무 완벽해서 황당할 정도였다.

클레이는 다시금 밀리안이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밀리안답지 않으면서도 의외인 곳에서 성격이 대담해졌다. 다만 그 대담함이 어디서 터질지 몰라 예측이 불가능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클레이는 안도한 표정을 짓는 밀리안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뭐든 당신 마음대로 해. 이젠 절대로 말리지 않을게.”

“……버릇 나빠진다니까요.”

“장담하지만, 당신의 버릇이 아무리 나빠져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게다가 버릇 나빠진다는 밀리안의 행동은 오히려 제 버릇이 나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의 행동, 말, 눈빛. 모두 좋았다. 싫은 점을 찾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 정신을 놓으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미친 것 같아. 어떻게 매일 더 좋아지지?”

“전 이미 미친 것 같습니다.”

밀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깐 정말 이성을 놓았다. 모든 사람 앞에서 이 여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과시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있는 대로 사고를 치고 수습은 모두 클레이에게 떠넘겼다. 아무리 클레이가 괜찮다고 해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자기혐오로 괴로웠다. 이 미친 것 같은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정신을 차려 보면 일을 벌인 뒤였다.

그때 클레이가 그를 더 깊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모두 짓뭉개지도록 꽉 끌어안자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 감정을 느껴 봐.”

“아…….”

“당신이 집중해야 하는 건 오직 나뿐이야.”

“…….”

“우리가 각인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응?”

지금이야 첫날에 비해 교감이 약해졌다고 해도 상대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여전했다. 그게 각인이었다.

“내가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줘.”

클레이의 속삭임에 밀리안이 그녀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감정이 순식간에 안정을 찾아갔다. 그는 클레이의 목덜미에 콧등을 비볐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클레이의 체향에 바짝 수축했던 근육이 나른하게 풀렸다.

“설마 우리 사이를 공개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

“아뇨. 그건 절대 아닙니다.”

자기혐오의 근원은 감정에 못 이겨 제멋대로 행동했음에도 희열을 느꼈다는 것에 있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로. 밀리안의 단호한 말에 클레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당신이 후회했다면 난 조금 슬펐을 거야.”

밀리안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클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포만한 얼굴로 나른하게 웃었다.

이상할 정도로 성욕이 일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서로의 몸을 씻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두 사람 모두 깊게 잠들었다.

* * *

품이 허전해 눈을 뜨니 밀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클레이는 몸을 벌떡 일으키다 철컹, 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오른쪽 발목에 족쇄가 달려 있었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신은 묶여 있고, 밀리안은 이곳에 없다.

“도망,”

아니지. 그렇지 않을 거다. 어제 그렇게 대대적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밝힌 밀리안이 하루 만에 도망갈 리는 없다. 아마도 그냥 묶고 싶었겠지.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클레이는 경직된 몸을 이완시켰다.

십 분만. 십 분만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오면 찾으러 가야지. 밀리안을 위해 십 분 정도는 참아 줄 수 있다. 클레이는 자신의 기준에서 줄 수 있는 최장의 시간을 정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댔다.

“몇 시지?”

밀리안을 가두기 위해 만든 곳이어서 하필 창도 없고, 시계도 두지 않아 시간을 알기 어려웠다. 빛이라곤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놓인 작은 스탠드 불빛이 다였다.

일 분이 지났다. 앞으로 구 분. 퍽 여유롭게 굴던 클레이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뻗었던 다리를 살짝 흔들자 쇳소리가 연달아 났다. 속으로 세는 시간에 맞춰 침대 기둥에 매달린 연결고리가 점차 흔들리더니, 오 분이 지나자 아예 침대마저 흔들거렸다.

처음에는 초침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세던 숫자가 제멋대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육 분, 칠 분, 팔 분, 구 분, 십 분.

제대로 셋더라면 이제 육 분이나 됐을 법한 시간이었지만, 클레이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난 채였다. 그녀는 손으로 사슬을 잡아당겨 끊어 버렸다. 어디에 있지? 왜 아직도 돌아 오지 않는 걸까? 고작 십 분도 안 되는 사이, 엄습한 불안감은 어쩔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벽에 걸린 가운을 낚아채 손에 쥔 채로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밀리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서슬 퍼런 얼굴로 문을 열었던 클레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리? 왜 여기에 서 있,”

“늦었습니다.”

“……뭐가 늦었다는 거야?”

“아까 일어났는데 왜 지금 나와요.”

언제 찾으러 올까 계속 기다렸다며 밀리안이 그녀를 탓했다. 클레이는 조금 기가 막혔다. 일부러 참고 참으며 기다려 줬더니 하는 소리가, 뭐? 왜 지금 나오냐고?

그때 밀리안이 클레이의 손에 들려 있는 가운을 받아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팔, 넣으세요.”

“…….”

“당신이 날 찾으러 오는 게 좋아요. 날 잡을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분입니다. 그러니.”

밀리안은 클레이의 가운을 바짝 여며 준 뒤 활짝 웃었다. 클레이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음에는 더 빨리 나오세요.”

예쁘게 웃으며 하는 말에 클레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한숨도 웃음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려나.

“당신 말이야. 일부러 이러는 거지?”

“네?”

“여기서 더 어떻게 빠지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이런 식으로 굴어.”

몸에 힘을 빼고 그에게 안기자 밀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정정할게. 적당히 해 줘. 이러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어.”

클레이가 밀리안의 어깨에 턱을 괴고 투덜거렸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주 들었다 내렸다 난리였다. 롤러코스터도 이렇게까지 다이나믹하진 않을 거다. 제발 제자리에만 내려놔 달라고 우는소리를 하자 밀리안이 안도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사실은 긴장했다. 클레이가 어느 정도 선까지 그의 행동을 봐줄지 몰라서. 이렇게 시험하는 행동조차도 달게 받아 준 것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작게 속삭이는 그의 고백에 여자는 같은 말을 되돌려 주었다.

* * *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안젤라 디모시 여사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드디어 이 나라를 뜬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던 그녀에게 그 부산스러움은 안정은커녕 불안감만 더 고조시켰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쳐든 안젤라 디모시의 눈에는 대형 모니터에 밀리안이 한 여자와 열정적으로 끌어안은 채 키스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게 비쳤다.

왜, 왜, 밀리안이, 그 짐승 새끼가 저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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