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
이십 킬로나 늘어났던 체중으로 인해 밀리안이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자 클레이가 아예 거울을 치워 버렸다. 무리하게 살을 빼면 건강에 더 해롭다. 다시 원래대로 몸이 회복되는 것은 시간이 꽤 걸릴 일인데, 매일 매시간 거울을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예민해지고, 조급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원망도 됐지만, 그 덕에 조급증이 나아졌다. 마음이 안정되자 트레이닝 효과도 탄력을 받았다.
출산한 지 일 년이 지나자 밀리안은 완벽하게 이전의 몸으로 돌아왔다. 클레이와 전문 트레이너의 도움이 컸지만, 밀리안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조급해지는 마음을 눌렀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니 수시로 일었던 피로감도 덜했다. 건강적인 측면에선 의사도 트레이너도 모두 완벽하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예쁘다니까.”
“…….”
“어딜 봐도 완벽해.”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며 클레이가 그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불순한 의도가 전혀 섞이지 않은 산뜻한 입맞춤이었다. 삽입 섹스를 하지 않은 지 벌써 이 년이 됐다. 가벼운 애무 정도로는 욕망을 모두 해소하긴 무리였다. 밀리안은 클레이가 이렇게 오래 금욕을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그녀의 자제력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주치의인 대니얼 크래포드가 이제 가벼운 섹스는 괜찮다고 했음에도 클레이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래서였다. 불안한 감정이 드는 이유가. 클레이가 더 이상 자신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지 우려돼 계속 몸에 신경 쓰게 된다.
밀리안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막 잠에서 깬 아이의 웅얼거림에 움찔 몸을 굳혔다.
“레이나, 잘 잤니?”
“꺄!”
클레이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를 안는 그녀의 손길은 매우 능숙했다. 오히려 밀리안보다 나았다. 출산 직후부터 클레이와 벤틀로가 전적으로 육아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클레이는 수시로 일어나 아이를 살폈다. 전문 시터의 도움을 받는 건 밀리안의 운동시간 외엔 없을 정도였다.
클레이에게 안긴 레이나가 요란스레 발버둥 쳤다. 이때 아이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다른 침대에 누워 있는 조쉬의 곁에 가고 싶어서. 하지만 힘을 제어할 수 없는 레이나는 몇 번이나 조쉬의 얼굴을 마음대로 주물러 상처를 입혀 놔서 두 아이는 잠정적인 격리가 필요했다. 조쉬의 포동포동한 볼은 아직도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레이저 치료를 받게 할 수도 없으니 흉터를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범인 역시 그들의 아이여서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조쉬를 왜 이렇게 괴롭혀?”
“까아아! 마아!”
“안 돼. 네가 아무리 울어도 조쉬는 못 줘.”
“…….”
누가 들으면 레이나는 다른 사람이 낳은 자식인 줄 알겠다. 밀리안은 레이나의 울음에 잠에서 깬 조쉬의 볼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아이는 유난히 순해서 잠에서 깨도 울지 않았다. 동그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밀리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작고 포동포동한 손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밀리안은 조쉬를 품에 안고 레이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우! 우우우우!”
“너무 가까이 오지 마. 또 꼬집을지도 몰라.”
“압니다.”
“조쉬는 여전히 천사 같네.”
클레이가 살짝 고개만 빼 조쉬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혹시라도 상처 날까 매우 조심스러웠다. 레이나를 대할 때와는 차이가 너무 컸다. 조쉬는 금발을 제외하고는 밀리안을 그대로 닮았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 살짝 내려간 눈꼬리, 순한 성격까지. 그래서 클레이가 조금은 편애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 밀리안의 입장에선 아주 많이 편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굳이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레이나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으음. 아기 냄새.”
클레이가 한풀 고집을 꺾은 레이나의 배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코로 배를 간지럽히자 레이나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얼굴과 머리를 치고 있는데도 클레이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저 아이가 재롱을 떠는 걸 보는 것처럼 기분 좋게 웃기만 했다.
레이나는 어린아이지만, 힘이 무척 셌다. 밀리안은 간혹 기분이 극도로 좋아진 레이나를 감당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성인이라면 제어가 되겠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아이여서 제어가 안 됐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레이나를 다루는 클레이의 육아 방식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레이나는 확실히 알파가 될 거야.”
“아직 한 살도 안 됐는데요?”
“벤틀로에게 물어보니 나도 그랬다더라고.”
“아…….”
“게다가 나한테만 적당히 하고 있거든. 본능적으로 서열을 파악한 거지.”
내 아이지만 정말 영악하다고 클레이가 감탄했다. 베타로 살다가 뒤늦게 오메가로 발현했던 밀리안으로서는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가지 않았다.
“몇 살에 발현했습니까?”
“나? 다섯 살에.”
“발현할 때는 러트가 오지 않습니까?”
다섯 살이라는 말에 놀랐다. 발현할 때엔 발정기가 함께 찾아왔다. 그걸 가라앉히는 약은 매우 독해서, 밀리안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알파로 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약을 먹기엔 너무 어렸고, 고작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성교를 했을 리도 없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냐고 묻자 클레이는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약 먹고 러트가 끝날 때까지 케이지에 갇혀 있으면 돼.”
“……약?”
설마 그 독한 억제제를? 밀리안이 경악하자 클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환각성 약물인데, 실제로는 하지 않아도 머리로는 이미 했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약이야.”
보통은 억제제를 쓰지만, 클레이 정도의 등급의 알파는 러트가 더 심해지기만 한다. 그래서 아예 환각제를 썼다. 어차피 중독되지도 않을 테니 약 하나 먹이고 끝내자는 식이었다. 클레이의 설명에 밀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보통 인간보다 육체적 능력치가 높은 알파라지만, 다루는 방식이 너무 짐승 같았다.
“레이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설마. 내가 왜 대니얼에게 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
“신약 개발이라는 게 그거였습니까?”
“응. 요즘 발현 시기가 점차 빨라 는 추세기도 하고, 요즘 인권 부분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굴고 있어서.”
처음에 대니얼에게 투자했던 이유는 분명히 돈이 된다는 판단에서였지만, 지금은 레이나와 조쉬를 위해서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운이 좋았다. 신약은 이제 상용화를 앞두고 있었다. 아마 레이나가 발현할 때쯤이면 사용할 수 있으리라.
클레이의 설명에 밀리안이 안도한 듯 경직됐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아이들은 부모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고 다시 잠들었다. 각자의 침대에 눕힌 뒤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까?”
“아니. 나중에 그렇게 했다고만 들었지, 딱히 기억은 안 나.”
“차라리 다행이군요.”
“응. 그러니 그렇게 심각한 얼굴 하지 마.”
사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불쾌감을 다시 떠올리면 밀리안이 알아차릴 수 있기에 클레이는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그들의 아이들이 그런 일을 안 겪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밀리안이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건 좋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동정했다면,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었겠지만, 밀리안은 언제나 예외였다.
그때 고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 자던 조쉬가 퐁,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아무리 아이여도 방구 냄새는 꽤 지독했다. 밀리안을 닮은 조쉬를 특별하게 사랑하는 클레이도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면 창문을 열었다. 밀리안은 작게 칭얼거리는 아이의 등을 살살 쓸며 피식 웃었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 * *
자려고 침대에 함께 누웠을 때였다. 클레이가 가벼운 어조로 마치 잊었던 게 생각났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꽤 진지해서 밀리안은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허락을 받고 싶은 게 있어.”
“무슨……?”
“정관수술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영구적으로.”
“―!”
“더 이상 당신이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건 싫어. 피임약을 먹는 것도 내키지 않고.”
물론 아이들은 좋다. 두 사람의 유전자가 고루 섞인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귀엽지. 하지만 둘이면 충분했다. 그녀의 사랑은 좁고 깊었다. 많은 아이에게 나눠 줄 만큼 넓지 않았다. 밀리안의 몸이 임신의 징후가 완전히 사라지면 말하려고 기다렸다. 그게 오늘이었다.
클레이의 진지한 말에 밀리안이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고작 일 년 만에 그때의 고통이 언제였냐는 듯 잊혔다. 가능하다면 셋째도 생각해 봤던 밀리안으로선 클레이의 말이 조금 갑작스러웠다.
클레이가 성마른 소리를 내며 그를 끌어안았다.
“나 좀 봐줘. 이제 더 참기 힘들어.”
“……네?”
“벌써 이 년이야. 다음에도 이렇게 참을 수 있는 자신이 없어.”
당신을 벗겨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클레이가 우는 소리를 했다. 항상 담담한 얼굴을 해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오히려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는데, 그녀도 자신과 같았다. 밀리안은 물끄러미 클레이를 바라봤다.
“그럼 정관수술을 하고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까지 참았는데 또 어떻게 참으라는 거냐고 밀리안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던 클레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콘돔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제발. 응?”
“좋아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콘돔을 쓰더라도 클레이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밀리안은 대답과 함께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클레이의 셔츠를 벗겼다. 그녀가 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콘돔을 뜯으려는 클레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물고 혀로 핥았다. 보기 드문 애교에 클레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번만. 잠깐만 삽입했다가 빼 줘요.”
“…….”
“이 년 만인데, 콘돔으로 막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결합하는 순간을 기다려 왔다고, 밀리안이 속삭였다. 클레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밀리안의 말이 그럴싸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아주 잠시만 그를 느낀 다음 콘돔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피임은 처음 삽입부터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흔들릴 정도로 밀리안의 유혹은 매우 값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