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4화>
* * *
“으음…….”
김인창이 정신을 차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환한 빛이 눈을 찔러서였다.
‘벌써 지하철 운행 시간인가?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지하철역에 거주하는 노숙자들의 모닝콜은 첫 지하철을 타기 위해 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런데 빛은 환한데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헉!”
깜짝 놀란 김인창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있는 곳은 서울역이 아니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진 수증기가 새하얀 벽을 스쳐 지나가는, 고급스러운 1인 병실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김인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태창.”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오직 플레이어 당사자만 볼 수 있는 화면.
그것이 김인창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좀 더 검은 계통의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누구?”
“기억 안 나십니까? 육사 62기 한지후입니다.”
“한지후……?”
기억을 더듬던 김인창이 눈을 크게 떴다.
“서면 증언을 했던…….”
“네, 맞습니다. 당시 사건에 조금은 연관되어 있었죠.”
그의 군대 시절은 명예와 불명예의 색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김인창이 누군가에겐 명예로운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겐 불명예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지후는 전자의 사람이었다.
김인창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선배님, 전 현재 SG 서울지부에서 소장의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해서,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몇 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한지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서울역 게이트 안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전에, 게이트는 클리어됐나?”
“물론입니다. 그러니 선배님이 여기 계신 것 아닙니까?”
“그가 해냈군, 정말로……. 사망자는 몇 명이나 되지?”
“4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제 제 질문에 답해 주셔야겠습니다. 왕후란 남자와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지후의 시선을 받은 김인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한지후 소장과 임현상 부소장은 병원을 빠져나오며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깨진 것은 병원 뒤쪽의 흡연 구역에 도착하면서였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군요. 왕후란 소년이 엄청난 무력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게.”
“그래. 조각난 이야기에 김인창 선배의 이야기를 얹으니 딱 맞는군.”
“대체 그자의 정체는 뭘까요? 혹시 수배당한 범죄자일까요?”
임현상 부소장의 질문에 한지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범죄자라면 각성자가 되는 순간 일반 범죄 기록이 사라진다는 걸 모를 리가 없어.”
“여전히 미궁 속이군요.”
임현상이 답답한 표정을 짓는 순간, 한지후가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아.”
“네?”
“생각해 봐. 하이 랭커의 무력을 지닌 각성자가 영웅이 된 순간에 사라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없다. 부를 원하면 부를 얻을 수 있고, 명예를 원하면 명예를 얻을 수 있다.
“딱 하나뿐이지.”
“그게 뭡니까?”
“반SG 집단의 인사.”
“……!”
한지후 소장이 담배를 물며 말했다.
“만약 왕후란 이가 반SG 집단의 비밀 각성자라면 어떨까? 그것도 꽁꽁 숨겨 놓은 히든 패라면?”
“……숨겠죠. 이처럼 큰 판에 끼어들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테니까.”
“그래. 살기 위해서 게이트는 클리어했지만 더 이상 정보를 줄 순 없겠지.”
임현상 부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가 어수룩하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다는 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무섭다.”
“네?”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거야. 철저히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어수룩하다고?
정신이상자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
각성자 상위 10퍼센트의 평균 지능은 인류 상위 10퍼센트의 지능을 웃돈다.
각성자란 이를테면 세 번째 팔과 다리가 생긴 신인류다.
그동안 전혀 활용해 본 적 없던 신체와 능력을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찰력, 분석력, 공간지각력 등등의 다양한 고등 사고가 요구된다.
“특이한 외양으로 고정관념을 만들고 숨는 건 고전적이지만 아주 잘 먹히는 방법이지.”
“그런…….”
“아마 왕후란 이름조차 거짓일 것이고, 십 대란 나이조차 거짓일 거야. 이름과 외모에 국한해서는 절대 그자를 찾을 수 없어.”
10대였다면 가장 고연령층의 각성자를, 남자였다면 여성 각성자를, 어수룩해 보였다면 가장 똑똑한 각성자를.
그렇게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찾는 게 아니라, 하나씩 소거해야 한다.
“우리가 기준을 삼아야 할 것은 단 하나. 그의 절대적인 강함이다.”
“그렇군요…….”
“앞으로는 왕후란 이름 대신 타깃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이름은 추리력과 상상력을 저하시키니까.”
임현상 부소장이 존경심을 가득 담아 한지후를 쳐다보았다.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 아! 그럼 그자가 민간인들을 구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그래.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민심을 얻어야 하니까. SG가 하지 못한 일을 그들은 해냈다고 광고하겠지. 어쩌면 이게 시작일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재 모든 게이트는 SG에 의해 클리어되고 관리되고 있지. 한데, 비징후 게이트는 어떻지?”
“리스크를 관리할 수 없죠, 아직은.”
“그럼 비징후 게이트를 찾아내는 기술이 반SG 집단에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타깃 같은 이들을 파견한다면?”
“……!”
“만약 타깃이 게이트에 들어간 게 우연이 아니라면?”
임현상 부소장이 할 말을 잃었다.
한 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SG 체제의 전복은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그때, 임현상 부소장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 뭐? 왕후? 자세히 말해 봐. 어, 어. CCTV랑 비교해 봤어? 확실해?”
한동안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던 임현상이 전화를 끊었다.
“소장님, 특급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특급 정보?”
“예. 서울역 노숙자 중 한 명이 타깃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게이트에 함께 들어간 사람인가?”
“아뇨. 서울역에 있었지만 선별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군요.”
“운이 좋은 자로군. 그래서? 정보가 뭐야? 타깃의 정체에 대한 단서라도 있나?”
임현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타깃이 남들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 하나를 알고 있답니다.”
“비밀?”
임현상 부소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타깃이 토박이 수준의 호남 사투리를 구사한다고 합니다.”
* * *
“대표님, 요즘 낯빛이 엄청 좋은데요? 보약이라도 드세요?”
“김 소장은 맨날 그런다. 저번엔 키 큰 거 같다면서?”
상림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김 소장 옆에 있던 여직원이 입을 열었다.
“김 소장님이 아부를 즐겨 하시는 건 맞는데, 대표님 요즘 얼굴 진짜 좋으세요.”
“그래?”
평소 빈말을 거의 안 하는 여직원의 말에 상림이 거울을 슬쩍 쳐다보았다.
낯빛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머리카락에 생기가 돈다는 느낌은 있다.
‘추궁과혈이 효과가 있긴 있나 보네.’
진유성이 사심을 담긴 했어도 해 줄 걸 안 해 준 건 아닌 듯했다.
진유성이 그의 집에서 살게 된 지 오늘로 열흘이 흘렀다.
그동안 진유성은 딱 두 가지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첫 번째는 인터넷이었다.
그중에서도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상림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진유성이 뭐에 관심을 두는지 알고 있었다.
“신기하시죠, 과학 정보들이?”
“어. 되게 신기하네. 지진이 이래서 일어나는 거였군. 그럼 하늘에 제사 지내고 그런 건 다 쓸데없는 짓이었네?”
“그렇죠, 뭐. 전 사실 이 땅이 둥글다는 게 가장 신기했습니다. 처음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길래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난 알고 있었는데?”
“에이, 거짓말 마십쇼. 무슨 돼도 않는 허세를…….”
“야, 너 서역 갈 때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냐? 네가 바닷길을 잘못 들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했을 때.”
“어…… 그랬던 적이 있었죠.”
“내가 그때 낭떠러지 없으니까 쫄지 말라 그랬잖아. 한 방향으로 쭉 가면 어디든 나올 거라고.”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시에는 그저 위로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럼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희가 살던 곳에는 지구 구형설 같은 게 없었는데.”
“심심해서 최대한 하늘 높이 올라가 본 적이 있거든. 그때 보니까 땅들이 미묘하게 굽어 있더라고.”
상림이 입을 떡 벌렸다.
국제선 여객기의 최대 고도가 10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보통 사람은 이 정도에서도 땅이 굽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아주 미묘하게 느낄 뿐이다.
물론 진유성은 일반인보다 감각이 몇 배는 예리하니, 그 정도만 올라가도 땅이 굽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맨몸으로 10킬로미터 가까이를 오를 수가 있나?
‘하긴, 게이트 안에서 신 같은 놈도 이겼는데…….’
상림은 그렇게 납득했다.
진유성의 관심을 끄는 첫 번째가 인터넷이었다면, 두 번째는 무협 소설이었다.
이것 역시 상림이 겪었던 단계였다.
신기하게도 무협 소설 속 중원과 그들이 살던 중원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21세기적 사고를 한다는 것과 중원의 넓이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배경 자체는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그래서 무협 소설들을 보고 있자면 고향이 생각나고, 과거의 추억들이 떠올라 꽤 재밌었다.
진유성은 대부분의 무협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간혹 작가에게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었는데…….
“야! 이게 말이 되냐? 참 나, 아무리 상상으로 썼어도 개연성은 지켜야지! 에이, 쓰레기 같은 작가놈!”
그건 보통 작가가 묘사한 소설 속 주인공의 무공이 자신보다 강해 보일 때였다.
이처럼 진유성은 상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한 삶을 이어 갔다.
상림은 진유성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이 고길동이 되고 진유성이 둘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상림은 진유성의 도움을 받아 내공을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건 아니었다.
지이이잉.
상림의 휴대전화가 울었다.
발신자를 본 상림이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우리 딸.”
-아, 아빠아아!
“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어?”
수화기 너머의 상소윤이 한동안 우는소리를 하고, 상림은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게 바로 진유성이 집으로 들어오고 생긴 새로운 문제였는데, 그의 딸과 진유성이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충돌점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다. TV 채널이나 맛있는 반찬 같은.
상림이 보기엔 딸이 진유성을 대할 때 조금 예민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뭔가에 열이 받아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소윤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럴 리는 없는데 말이야.’
“알겠어. 아빠 빨리 들어갈게.”
-빨리 와!
상림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한쪽은 내 눈에 뭘 넣을 수 있는 교주님.
누구 편을 들기도 참 애매하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들 하던 일 마무리하고 퇴근하세요.”
상림이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