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화>
[플레이어는 단신으로 F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플레이어에게 가 안배됩니다.]
[F등급 게이트의 절대자 : 참여한 F등급 게이트에서 타인이 획득하는 경험치의 5퍼센트를 징수합니다.]
F등급 게이트에 참여했을 때, 게이트 내의 다른 각성자들이 얻는 경험치의 5퍼센트를 뺏어 온다는 소리다.
보통의 각성자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능력이었지만, 진유성은 심드렁했다.
‘애매하네.’
진유성은 단신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
굳이 다른 이들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데, 타인이 얻는 경험치를 가져서 뭐 하겠는가?
이게 F등급 게이트에 한정되는 능력이라면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A, B, C 등급의 게이트는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진유성은 D등급의 게이트도 혼자서 클리어할 수가 있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룬 가호를 수락하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애매한 룬 가호는 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껏 그가 받은 룬 가호가 인류배려자 하나뿐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은 꽤 옅어졌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알게 되면서, 게이트 시스템이 컴퓨터나 게임 시스템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도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스템에는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레벨업이나, 특정 전투 상황에 신체를 변화시키는 룬 가호는 전부 거절하고 있었다.
룬 가호는 양도가 안 돼서 타인에게 팔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험치에 관련된 가호들은 굳이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새로운 룬 가호를 수락하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본래 룬 가호를 받으면 수락 여부를 묻는 메시지가 뜬다.
[룬 가호를 받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 메시지는 마치 통보하듯이 능력을 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뭐야?”
상태창을 열어서 룬 가호 페이지를 확인해 봤지만 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메시지 창에 룬 가호라는 말도 없었던 것 같다.
‘받긴 한 거야? 오류인가?’
진유성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어차피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능력이니 말이다.
때마침 클리어 메시지가 떴다.
[게이트 내 모든 몬스터가 제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클리어 공헌도에 따라 마정석이 자동 분배됩니다.]
[잠시 뒤, 게이트 외부로 이동됩니다.]
이제 몇 초 뒤에 게이트 밖으로 보내진다.
이 짓도 두 번째다 보니 제법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밖이 조용하겠군.’
서울역 때는 클리어 메시지가 뜨자마자 은신술을 써서 몸을 숨겼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건대, 이 세계의 황제가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황제는 아니지만 SG가 자신을 귀찮게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도, 카메라도.
상림의 말에 따르면 정치인들의 더러운 이해관계가 얽혀서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을 거라 했다.
그 순간,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몸이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여전히 별로군.’
진유성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면 기운의 밀도가 순간적으로 높아지면서 감각이 둔해지는데, 강한 빛 때문에 눈조차 뜨고 있을 수가 없다.
즉, 기감으로 주변을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 눈까지 감고 있는 셈이었다.
진유성은 본래 주변을 백팔 방위로 분할하고, 그 백팔 방위를 다시 삼재(三才)로 나누어 인지하는 사람이다.
한데 갑자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으면, 장님이자 귀머거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
기분도 불쾌하고, 무방비가 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환한 빛 속에서 진유성은 주변을 인식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약간의 수기(水氣)가 느껴졌다.
저수지의 한가운데였다.
본인이 물 위로 이동됐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진유성은 내공을 움직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물에 빠졌겠지만, 진유성은 등평도수(登萍渡水) 수법으로 물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척, 하는 젖은 땅을 밟은 소리가 났다.
본래 등평도수의 경지란 물 위를 걷는 것이지, 서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물이 흙바닥이라도 되는 듯 굳건히 서 있었다.
“에이, 씨. 젖었네.”
최대한 빠르게 반응했음에도 물에 닿았는지 신발과 양말이 젖었다.
투덜거리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으로 화기를 끌어올린 진유성이 신발과 양말의 물기를 증발시켰다.
물건은 전혀 상하지 않고 물기만 날리는 고명한 수법이다.
그러자 발과 인접한 저수지 물에서도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치이이익-
“오…….”
한적한 저수지 위를 걸으며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건, 본인이 보기에도 꽤 멋진 광경이었다.
영화 속 히어로의 등장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걸음마다 수증기를 만들어 내며 진유성은 물 위를 걸었다.
그때였다.
게이트에서 나온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기운이 옅어지자, 진유성의 예리한 기감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뒤늦게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웬 남자가 뭍에 있었다.
진유성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경외심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 신이시여!”
* * *
본래 김운철은 게이트 폭주와 함께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게이트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신을 믿진 않았지만 죽음이 다가오자 누구에게라도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게이트 폭주는 없었다.
대신 환한 빛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물 위에 서 있었다.
‘각성자? 아, 아니야. 저 모습은 각성자 따위가 아니야.’
물 위를 걷는 남자의 걸음걸음마다 신비로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남자의 모습을 가렸다가 바람에 흩날렸고, 다시 피어올랐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각성자가 물 위를 걷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혼자서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김운철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시, 신이시여!”
신의 시선이 쏟아졌다.
김운철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 그냥 각성자면 어쩌지? 병신짓 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하지만 신의 입이 열리는 순간, 김운철은 놀라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아라.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처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가 아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귀로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신의 전언이 틀림없었다.
김운철이 넙죽 엎드렸다.
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는 어찌하여 산화 직전의 게이트 앞에 서 있는가. 게이트는 내가 없애 버렸도다.
“저, 저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게이트와 함께 죽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신의 질문에 김운철이 횡설수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신은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침묵이 맴돌자 김운철은 고개를 들어 신을 쳐다보았다.
신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 모습을 얼이 빠져 쳐다보던 김운철이 정신을 차렸다.
“전, 저는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합니까?! 왜 제 죽음을 막으셨습니까!”
-신의 뜻대로 살아라.
“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는 이미 신에게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게 무슨…….”
-모든 어머니는 신이 갈 수 없음을 대신해서 보내는 대리인이니라.
“……!”
김운철이 입술을 깨물다가 소리를 질렀다.
“하면 어찌하여 저에게 어머니를 뺏어 가셨습니까!”
-나는 생과 사를 관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저에게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몹시 옳다.
“하지만! 하지만 세상에는 나쁜 놈들 천지입니다! 왜 저만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대체 왜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이 말했다.
-너만 착하게 사는 게 아니다.
-너라도 착하게 사는 것이다.
왜일까?
김운철은 어릴 적에 자주 들었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운철이 착하지.”
그 순간, 김운철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우는 김운철에게 신의 전언이 들렸다.
-그대 어미의 보금자리를 지키게 돼서 몹시 기쁘도다…….
신의 전언이 점점 희미해지며, 연기가 거세졌다.
깜짝 놀란 김운철이 소리 질렀다.
“당신은 예수입니까! 부처입니까!”
-무엇도 아니다. 나는 백성들을 삿되게 괴롭히는 게이트를 막기 위해 내려온 천신(天神)이다.
그렇게 천신은 사라졌다.
김운철은 신이 사라진 허공을 쳐다보며 바보처럼 서 있었다.
* * *
“와, 씨. 큰일 날 뻔했네.”
김운철과 10장(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모습을 나타낸 진유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게이트에서 나오다가 정체를 들킬 뻔했다.
다행히도 김운철이란 남자가 자신을 신으로 생각해 줘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육합전성(六合傳聲)에 혜광심어(慧光心語)를 섞었다.
허공답보로 떠 있기까지 했으니, 아마 깜빡 속았을 것이다.
게다가 진유성에게는 그간 교주로 살아온 경험 때문에, 사람들이 신에게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그 뒤로 잠깐 김운철의 기색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신으로 철석같이 믿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사건을 마무리 지은 진윤성은 서울로 돌아가려다가 멈칫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중장비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말하는 내용을 보건대 이놈이 김운철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시장 같았다.
‘바로 나타났네.’
사지를 잘라 죽이는 능지처참보다 더한 극형이 부관참시(剖棺斬尸 : 관을 꺼내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이다.
사실 죽은 사람을 벤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관참시가 최고의 형벌인 것은 그만큼 망자에 대한 예우가 필요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 시장이란 놈은 개념이 없다.
제 잇속을 챙기더라도 적어도 나랏돈으로 이관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진유성이 조금 더 그들에게 접근했다.
게이트 폭발 범위와 가장 가까운, 하지만 확실한 안전지대에 수십 대의 중장비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초조한 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왜 안 터지냐고! 사람 한번 보내 봐!”
“하지만 시장님, 이게 단순히 늦게 터지는 거라면…….”
그들은 한동안 아옹다옹했지만 그 누구도 게이트 폭파 범위 내로 들어가진 않았다.
시장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 보였다.
그는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윗선에 약속한 것들이 많았다.
만약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다면?
윗선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었고, 정치 생명은 그날로 끝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
“젠장!”
결국 초조함이 극에 달한 시장이 직접 향하기 시작했다.
부하 직원들이 겁에 질린 눈빛을 보이며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고요한 저수지였다.
게이트 따위는 보이지 않는.
“이, 이럴 수가……!”
시장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진유성은 은신술을 쓴 채로 시장의 뒤를 밟았다.
끝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던 경산시장은 관사 깊은 곳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은밀한 보관 공간이 아니라서 조금 실망한 것도 잠시.
진유성은 시장이 보고 있는 것이 더러운 청탁 관계의 증거라는 걸 알았다.
퍽!
어둠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진유성이 시장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켰다.
그러곤 캐비닛에 있는 서류들을 전부 가방에 옮겨 담고는 사라졌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진유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걸 세상에 공개하는 건 상림이 해 줄 것이었다.
‘이거 왠지 히어로 같은데?’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CCTV를 피해 관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