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6화>
* * *
문수혁이 제주도에서 만났던 AA급 보스는 ‘도플갱어’였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했다.
S급과 A급 각성자로만 구성된 70명의 최정예가 보스의 신전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죽어 있는 보스의 시체였다.
각성자들은 당황했지만,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정예로 팀을 구성했다지만, AA급 보스를 처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 시체는 가짜였다.
진짜 보스는 어느새 사람들 틈에 숨어 들어서 각성자인 척을 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은 보스가 죽었음에도 게이트 클리어 메시지가 뜨지 않으면서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을 때.
긴장이 풀려 잠을 청했던 10명의 각성자들이 뜬눈으로 죽어 있었다.
서로를 향한 의심과 공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문수혁은 제주도 AA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후 극심한 PTSD를 앓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각성자를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도플갱어를 떠올렸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PTSD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헌팅을 나서고,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다.
A급 각성자였던 그가 S급으로 오르고, 대한민국의 각성 순위를 다투게 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문수혁은 S급 보스의 신전에 들어가기 전, 각성자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했다.
“고랭크의 보스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몬스터보다 훨씬 교활하고, 지능적일 수 있습니다. 환영이나 속임수를 이용해 인간인 척할 수도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방패를 믿어야죠.”
문수혁이 손에 들린 방패를 흔들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에 단 2개밖에 없는 SS급 아이템, 이지스의 방패.
이지스의 방패에는 무수한 효과가 있고, 그중에는 정신계 공격에 대한 강한 저항력도 있었다.
만약 이지스의 방패가 있었다면 제주도 AA급 게이트의 도플갱어에게도 그렇게 맥없이 속진 않았을 것이다.
“제가 수신호를 보내면 여러분은 주저하지 말고 공격하셔야 합니다. 설령 그 대상이 동료거나, 가족이거나, 친구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죠.”
문수혁의 말에 각성자들이 단호한 의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문수혁을 필두로 각성자들이 신전에 다가갔다.
그러곤 출입문을 열었다.
“-!”
문수혁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악몽 같았던 그날과 흡사한 광경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는 이미 신전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그날과 다른 점이라면, 누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
아이언맨 헬멧을 쓰고 이상한 천을 두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문수혁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환영이다.’
환영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딴 이상한 모습을 할 리가 없다.
그때 보스 몬스터가 입을 열었다.
[보스를 플렉스해 버렸지, 뭐야.]
[빠끄!]
공격 수신호를 보낸 문수혁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죽어!”
이지스의 방패에 마력이 깃들며 문수혁을 최상위 랭커로 만들어 주었던 스킬이 발동되었다.
[이지스 : 스펠 브레이커!]
[이지스 : 대일여래의 금강!]
상대의 모든 룬 가호, 스킬, 아이템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스펠 브레이커.
세상 그 무엇도 부술 수 없다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智德)을 담은 금강(金剛).
궁극의 공격과 궁극의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는 필살의 일격이었다.
문수혁은 자신이 자랑하는 일격의 약점을 제주도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지난 6년간 수많은 무술과 체술을 익혔다.
그 결과, 이제는 가로 7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의 이지스 방패로 세상마저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보스 몬스터는 피하기는커녕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너나 죽어라! 빠끄!]
이상한 기합을 외친 인간형 몬스터의 주먹이 이지스 방패의 정중앙으로 날아왔다.
문수혁이 눈을 빛냈다.
‘걸려들었다!’
명색이 S급 보스인데 이 한 방에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타격이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동료들이 공격을 가한다면…….
문수혁의 생각은 거기까지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프스스스스!
이지스 방패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자, 사고가 일순 정지해 버린 탓이다.
[빠끄!]
그러곤 날아온 일장에 뒤통수를 맞고는 기절했다.
문수혁뿐만이 아니었다.
[빠끄! 빠끄! 빠끄!]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뒤따르던 각성자들도 모두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1 빠끄, 1 기절이었다.
46명의 각성자를 기절시킨 진유성이 멈춰 섰다.
그러곤 마지막 희망을 담아 김인창을 쳐다보았다.
그가 김인창을 마지막까지 기절시키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역에서 봤던 김인창은 좋은 놈이었다.
소소한 농담에 웃을 줄도 알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분명…….
진유성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육합전성과 혜광심어를 섞어 입을 열었다.
[각성자들을 플렉스해 버렸지, 뭐야.]
진유성은 자신의 유머에 김인창이 웃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인상을 팍 쓴 김인창이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죽어라!”
진유성이 참담한 심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빠끄…….]
마지막으로 김인창이 기절했다.
모든 각성자가 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게이트 내의 보스 몬스터가 제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클리어 공헌도에 따라 마정석이 자동 분배됩니다.]
[잠시 뒤, 게이트 외부로 이동됩니다.]
진유성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전자 기계는 먹통이었다.
천지간에 흐르는 기운을 통해 시간을 느끼는 것도 게이트 안에서는 소용이 없다.
‘아직 점심시간이 안 지났으려나?’
진유성은 게이트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며 평소보다 공을 들여 은신술을 쓰기 시작했다.
은신의 첫 번째는 선을 숨기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많은 선을 가지고 있고, 그 선이 주변과 동화되지 않으면 튀어 보인다.
현재 선을 감출 만한 곳은 기절해 있는 각성자들 사이뿐이었다.
진유성은 각성자들 사이에 몸을 누이고는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은신의 두 번째는 호흡을 숨기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호흡이란 단지 들숨과 날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에서는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약동하여 흥(興)하고 쇠(衰)하는 기운 전체를 호흡이라고 일컬었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호흡은 심장 박동이고, 태어나 처음 배우는 호흡은 들숨과 날숨이었다.
사회성을 구축하며 얻는 호흡은 분노와 평온이며, 무공을 익히며 얻는 호흡은 진기의 흐름이었다.
진유성은 이 모든 호흡을 자연에 일치시켰다.
이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은 눈으로 보임에도 보았다고 인지하지 못했다.
구름이나 태양처럼 존재를 당연하다고 여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만 완벽히 수행해도 팔대문파의 장문인도 속여 넘길 수 있었다.
그만큼 선과 호흡을 정돈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진유성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은신의 마지막은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정오(正午)의 별처럼.
자정(子正)의 태양처럼.
분명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경지를 이르렀다.
진유성은 이 경지를 입멸공 오의 중 하나인 멸(滅)을 익히며 깨달았다.
그렇게 진유성은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어 자신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이윽고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그의 신체가 게이트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기 직전의 찰나.
‘무언가’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고오오오오-
불길한 어둠과 함께 등장한 ‘무언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신성을 위한 영성이 어찌하여 사라…….]
‘무언가’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진유성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사열식이 진행되던 서울역 광장으로 이동했다.
* * *
“소윤아, 밥 먹으러 안 가?”
“어? 아. 난 잠깐 뭐할 게 있어서.”
상소윤은 평소에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에게 웃어 보이고는 교실을 나섰다.
아무리 기다려도 진유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점심시간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리자마자 복도로 나갔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코빼기도 안 보이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 씨 배고픈데.’
평소보다 더 배가 고팠다.
전학 수속을 밟아야 하는 진유성을 따라 이른 아침에 등교하면서 아침을 거른 탓이었다.
그렇게 상소윤은 2학년 본관을 몇 번이나 뒤지다가 터덜터덜 매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의리 없게 혼자 매점에서 먹고 있으면 욕하려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설마…… 혼자 화장실에서 밥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진유성이다.
이 또라이 같은 자식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진유성은 세상 철면피에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는 것 같지만, 가끔 이상한 것에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이 반 짱 나와!’를 외친 오늘 아침의 사건이 부끄러웠던 게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상소윤이 머뭇거리며 남자 화장실 앞으로 가서 헛기침을 했다.
“큼, 큼큼!”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진유성?”
결국 상소윤은 작게 이름을 불러 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이번엔 좀 더 크게 진유성을 외쳐 보려는데,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아, 씨.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괜히 심술이 난 상소윤이 틱틱거리며 반에 누가 남아 있나 가 보려는데, 갑자기 복도가 시끌시끌해졌다.
식당에 가지 않고 반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붙잡고 마구 떠들고 있었다.
‘서울역’, ‘게이트’ 같은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들려왔다.
놀란 상소윤이 핸드폰을 열자, 실시간 검색어가 <서울역 게이트>, <서울역 2차 게이트>, <비징후 게이트> 따위로 도배된 게 보였다.
최상단에 있는 뉴스를 클릭하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각성자들이 사열식을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징후 게이트가 열렸고, 47명의 각성자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외부에서 게이트 등급이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SG는 게이트 등급에 따라 폭발 반경을 상정하고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한데, 게이트 등급이 측정되지 않으니 기준조차 서지 않았다.
게다가 게이트 안에는 S급 각성자 문수혁과 하이 랭커들이 들어간 상태였다.
“뭐야. 문수혁 들어갔으면 걍 클리어되겠네.”
“47명 중에 38명이 하이 랭커라는데?”
“걍 클리어되는 거 아님?”
학생들이 속 편하게 떠드는 것처럼 여당과 정부에서는 각성자들을 믿고, 혹시 모르니 반경 1킬로미터만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A급 게이트, 진척률 50퍼센트를 가정하고 반경 5킬로미터 내의 모두를 대피시키자고 주장하고 있었고.
‘서울역 5킬로미터면 아빠 회사가 겹치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대정고는 아슬아슬 걸치지 않았다.
상소윤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반으로 돌아와 상림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누군가 교실 안의 TV로 뉴스를 켰다.
앵커가 서울역 게이트 발생 당시의 자료 화면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붉은 자막으로 속보가 떴다.
-속보입니다! 서울역 게이트가 클리어됐다고 합니다!
-게이트는 47명의 각성자가 나타남과 동시에 소멸됐는데, 각성자들이 전부 혼수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SG 한국본부와 각성관리부처는 정확한 진상 조사를 위해 의료진을 파견했으며…….
“아, 뭐야. 일주일 휴교 각이었는데.”
“에이 씨, 클리어할 거면 좀 천천히 클리어하지.”
상소윤이 뉴스를 보며 철없이 떠드는 학생들을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각성자들이 목숨 걸고 클리어했는데 참 속없는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까.
집중이 풀리자 배가 더 고파졌다.
“아, 씨. 배고픈데.”
“나도 배고프다.”
상소윤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진유성이 서 있었다.
“뭐야? 너 어디 갔었어?”
“하얀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아, 헛소리할래? 너 때문에 점심시간 15분밖에 안 남았잖아!”
“15분 안에 우리가 뭘 해낼 줄 알고.”
“어, 그 드라마 뭐였지? 본 건데?”
“알려 줘?”
“아, 기다려 봐. 알 거 같은데.”
“매점으로 가면서 생각해라.”
상소윤이 골똘히 고민하며 진유성과 함께 매점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정고 학생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쟤네 사귀냐?”
“어릴 때부터 친했다잖아.”
학부모를 통해 학생들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는 대정고의 점심시간은 넉넉한 1시간 30분.
진유성은 이동 시간을 빼면 1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기적을 이루어 냈지만.
평범한 학생들처럼 점심시간의 끝자락에야 매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