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7화>
Quest 8. 눈물 흘리는 천마님
의식을 잃었던 문수혁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에 놀랐고, 아무 부상도 없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분명 아이언맨 가면을 쓴 이상한 몬스터한테 제압당했는데…….
‘살아난 게 나뿐만은 아니군.’
정신을 집중하니 SG가 운영하는 각성 전문 병원에서 46개의 호흡이 느껴진다.
그에게 호흡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재주까진 없었지만, 각성 전문 병원에 잠들어 있는 46개의 호흡이라면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 순간, 문수혁이 흠칫 놀랐다.
그러곤 재빨리 인벤토리창을 열어 아이템 창을 확인하는데…….
이지스의 방패가 보이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인간형 몬스터의 일권에 이지스의 방패가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지스의 방패가 부서지는 상황에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충격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일여래의 금강을 시전한 이지스의 방패를 부순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타격점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더욱 경악스러웠다.
‘이지스의 방패가 없으니 랭킹 1위는 물 건너갔군.’
이제 대한민국 각성 랭킹 1위는 유일한 SS급 아이템을 보유한 차정명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참 사람이 우습다.
이런 상황에서 랭킹 2위가 된 걸 신경 쓰고 있다니.
그 순간, 병실의 문이 열리며 SG 대한민국 본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 본부장님.”
“문수혁 각성자, 이제 막 정신을 차려서 경황이 없는 건 알지만 비상 상황이라…… 몇 가지 물어도 되겠어요?”
“말씀하시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왜 각성자들이 모두 정신을 잃은 거죠?”
문수혁이 말했다.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누구한테요?”
“모르겠습니다.”
문수혁은 그 뒤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그 순간, SG 본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놈의 뒤통수는 왜 자꾸…….”
문수혁의 얼굴에 서늘함이 어렸다.
게이트에서 살아 돌아온 각성자를 이딴 식으로 대하다니.
본부장 딴에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겠지만, 문수혁은 대한민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각성자였다.
“…….”
문수혁은 대한민국 SG 본부장과 함께 대표적인 친한국 계파의 인물이었지만 이 순간, 그는 친한국 계파에서 마음이 떠났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게 다 진유성 때문이었다.
* * *
공식 명칭 <서울역 2차 비 징후 S급 게이트> 사건이 대한민국과 SG를 휩쓸고 있는 지금.
사건의 당사자인 진유성은 대정고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등교한 지 4일째가 되는 진유성은 상림과 상소윤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무난하게 학교에 적응했다.
친하다고 지칭할 만한 친구를 만든 건 아니지만, ‘같은 반 친구’란 포지션에 무난히 안착했다.
사실 이건 모든 전학생이 그럴 것이었다.
정말 친화력이 뛰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친한 친구가 있는 게 이상하다.
‘뭐지?’
상소윤은 진유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잘 적응했지?’
이해가 안 간다.
진유성이 자신의 특이한 말투와 행동을 자제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와 똑같았다.
틈만 나면 헛소리 뱉고, 드라마와 영화의 대사를 써먹고, 태블릿 PC로 인터넷과 유튜브를 보고, 이상한 말투를 썼다.
근데 아주 잘 적응했다.
자신의 예상과 다름에 당황한 상소윤은 조금 더 신중하게 진유성을 관찰하며 원인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상소윤은 이유를 깨달았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잘생겨서.
뭐가 됐든 사춘기 학생들에게는 외모가 상당히 중요한 우선순위.
그런 면에서 진유성은 무조건 합격이었다.
보기 좋게 큰 키와 간첩 생활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
바른 자세와 자신감 있는 몸놀림.
그리고 절대, 절대로 자신의 취향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외모.
그 덕분에 대정고의 여학생들은 진유성을 살갑게 대했고, 진유성도 자신에게 친절한 이들에게 못되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다.
여자애들이 진유성과 나쁘지 않게 지내니 당연히 그 여자애들과 친한 남자애들도 비슷한 스탠스를 취했다.
첫 번째 이유가 여자 학생들을 중점으로 통용되는 거였다면, 두 번째 이유는 남자 학생들에게 통용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진유성이 운동을 아주 잘한다는 것이었다.
대정고는 학습량이 많은 학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적은 편이다.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위해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고, 토론 수업이나 독서 수업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배양하려고 노력하지만, 덕분에 절대적인 공부량은 적었다.
게다가 대학교도 아닌데, 학교 수업의 3분의 1 정도는 본인이 원하는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수강하고 싶은 수업이 없으면 창설할 수도 있다.
대정고에 다닌다는 건 먹고살 걱정은 없는 이들이고, 공부를 잘해야 가업을 잇는 이들 말고는 공부에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럼 학생들이 어떤 수업을 들을까?
대부분 취미와 관련된 수업들이었다.
뷰티나 운동 같은.
이런 상황 속에서 운동을 잘하는 진유성은 남학생들의 선호 대상이 되었다.
축구나 농구 내기 한 방에 적게는 몇만 원에서 많게는 몇십만 원-심지어 인당-을 걸고 하는데, 당연히 진유성이랑 같은 편이 되고 싶겠다.
라는 게 상소윤의 감상이었다.
그만큼 진유성은 운동을 잘했으니까.
진유성이 학교에 잘 적응한 마지막 이유는 상소윤, 자신 때문이었다.
만약 진유성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학교로 전학을 갔으면 어땠을까?
혼자 이상한 행동을 하는 별종으로 보였을 거다.
하지만 대정고에는 진유성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꼬박꼬박 받아주는 상소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학생들이 ‘쟤네는 원래 저렇게 노나 보다.’하고 적응하고, 결국은 ‘쟤는 원래 저런 놈인가 보다.’라고 납득한 것이었다.
‘결국은 내 덕이군. 이 자식은 이 하늘과 같은 누님의 엄청난 도움을 알고 있으려나?’
상소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에 빵을 사러 간 놈이 10분째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또 어디서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고 치기 전에 빨리 잡아서 교실로 데려와야겠다.
* * *
지종수는 대정고 2학년 3반의 학생이었다.
이 말은 상소윤, 진유성과 같은 반이란 뜻인데 최근 지종수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야 씨,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치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한테 관심도 없냐?”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그만 좀 포기하라니까?”
지종수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상소윤 때문, 아니 진유성 때문이었다.
그는 대정고 입학식 날 상소윤에게 첫눈에 반했다.
대정고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지종수도 부잣집의 자제였다.
그는 곧장 상소윤에게 값비싼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고백을 했고, 대차게 차였다.
사실, 여기까지는 별일도 아니었다.
상소윤에게 고백했다 차인 대정고 학생들만 모아도 축구팀을 꾸릴 테니까.
하지만 지종수는 그 뒤로도 상소윤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소윤이가 부담스럽겠지…….’라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기회가 올 때마다 상소윤에게 호의와 도움을 베풀 뿐이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천천히 상소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지고지순하게.
지종수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상소윤이 그 어떤 남학생에게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유성이 나타났다.
처음엔 어릴 적부터 친구라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단순한 친구가 아닌 것 같았다.
둘은 아침에 같이 등교했으며, 상소윤은 며칠간 진유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짝사랑 2년차의 직감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혹시 둘이 같이 사는 거 아닐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런 거 많잖아!”
“어휴, 미친놈.”
“아침마다 같이 등교하잖아!”
“소윤이 어머니가 오는 길에 픽업하신다잖아.”
“그럼 혹시 약혼자? 소윤이의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거지!”
“정밀공업기업의 아들치고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 거 아니냐?”
“속초에 같이 갔던 적이 있다던데! 둘이 바닷가를 거닌 거 아닐까?! 막, 옷도 벗어 주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뭐, 그건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러면 안 된다고!”
놀랍게도 지종수는 약혼자 빼고는 대부분의 사실 관계를 적중시켰지만, 친구들은 혀를 찰 뿐이었다.
상소윤이 예쁜 거야 모두가 공감한다지만 2년 동안 상사병에 걸려 있는 건 좀 너무하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사랑에 눈이 돌아간 지종수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몄다.
“야, 진유성. 내기 축구 한판 안 할래? 사람이 딱 한 명 부족한데.”
“축구라? 한번 즐겨 보고 싶긴 했었지.”
“……말투가 참, 재밌네. 그래, 재밌어.”
상소윤이 보는 앞에서 진유성을 묵사발 내겠다!
지종수는 유명한 축구광이자, 실력자였다.
방학이 되면 영국 리그의 유소년 캠프에 참여해 축구를 배우고, 한국에서는 K리그 3군 선수들과 주말마다 축구를 했다.
돈과 백으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꽤 재능도 있었다.
3군이라고 해도 프로 선수들은 일반인을 가볍게 압살하는 실력자들인데, 그런 이들과 주말마다 공을 찼으니 말이다.
그만큼 지종수는 자신이 있었다.
진유성을 상대팀 수비수로 넣고, 화려한 발재간으로 농락할 자신이!
“진짜 종수는 순수한 새끼야.”
“누구 배신할 놈은 절대 아니지.”
물론 지종수도 친구들이 왜 쓸데없는 짓이라고 놀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은가.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아도 한 번쯤은 꼭 이기고 싶은 남자의 자존심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축구 경기에서 지종수는…….
축구의 신을 영접했다.
가벼운 발놀림으로 공을 툭툭 건드리며 7명을 제치고 골을 넣는 진유성의 모습에서.
골키퍼가 살짝 나온 틈을 타서 하프 라인에서 레이저 슛으로 골을 넣는 진유성의 모습에서.
심지어 진유성은 시시해서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다가, 내기로 돈을 따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또 불러 달라며 사라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롱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지종수는 또다시 무시무시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번엔 판이 더 커졌다.
대정고 축구부 주전 선수들을 불러서 팀을 꾸렸다.
대정고에는 재능에 따른 특례 입학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재능은 보통 그 나이대에서 최고를 의미했다.
대정고 축구부 주전 멤버 6명이 대한민국 U-18 주전멤버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지종수는 이번에는 골키퍼를 맡았다.
영국의 유소년 코치들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자네는 골키퍼를 하면 더 잘할 걸세.”
“왜죠?”
“반사 신경이 엄청난데…… 음, 지능이 좀 부족하거든.”
지종수는 결코 자신의 ‘축구 지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코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청소년 대표 선수들의 질식 수비에 허덕이는 진유성의 똥볼을 받아 내고 비웃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축구 경기.
진유성이 공을 툭툭 치고 올라오자 시작되는 압박 수비는 과연 국가 대표…….
“엉?”
지종수의 아버지가 하는 정밀공업사는 온갖 물건을 다 만들었다.
그중에는 자동문도 있다.
지종수는 아버지가 만든 것 같은 자동문 퍼레이드에 당황했다.
진유성이 국가 대표 자동문, 아니 선수들을 제치며 무아지경으로 달려왔다.
지종수가 이를 앙다물었다.
다행히 수비수들이 몸을 들이밀며 슈팅각을 좁혀 놨다.
‘막을 수 있다!’
진유성의 오른발이 공을 차는 순간, 지종수가 일생일대의 반사신경을 발휘하며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건 페이크였다.
오른쪽으로 날아오른 지종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후후, 몸은 솔직하군.”
진유성은 골대의 왼쪽에 가볍게 공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