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65화>
* * *
프라하를 떠나기 전, 진유성과 일행들이 들린 마지막 장소는 면세점이었다.
바츨라프 공항의 면세점은 인천공항 면세점보다 크기는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곳이었다.
진유성, 상림, 유혜연, 상소윤은 그곳에서 쇼핑을 했다.
상림과 유혜연은 사치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소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좋은 물건들을 제값을 주고 사지만, 굳이 필요치 않은 사치품을 사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분을 내려는지 여유로운 면세점 쇼핑이 예정되어 있었다.
“유성아, 가서 쇼핑하자.”
유혜연의 물음에 진유성이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저는 혼자 살게요.”
“그래? 그럼 카드를…….”
“아뇨. 그냥 제 돈으로 사면 돼요. 돈 있어요.”
진유성의 말에 유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소윤과 진유성의 용돈은 제법 많은 편이지만, 면세점에서 자유롭게 쇼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돈을 모았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진유성은 돈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친구들과 나가는 것 말고는 집에서 인터넷, 영화, 드라마, 소설만 보고 있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친구들과 놀 때는 늘 내기에 이겨서 돈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막 돈을 뺏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유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유혜연이 상소윤과 함께 쇼핑을 시작하자, 진유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두 여자의 쇼핑 지옥에 끌려가는 줄 알았다.
무사히 고비를 넘긴 진유성은 쇼핑을 시작했다.
상림은 배가 아프다며 면세점 화장실에 전세를 내고 있었다.
‘흠, 뭐가 좋을까.’
진유성은 물욕이 크게 없었지만, 옷은 좋아했다.
이 세계의 옷들은 정말 모양이 예뻤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포목점에서 무복 가지고 고민하던 건 진짜 웃긴 짓이다.
어차피 다 똑같이 생긴 옷이니까 색만 고르면 그만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걸 보고 저걸 보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진유성은 슬슬 면세점을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옷을 샀다.
그러곤 제법 마음에 드는 시계도 샀고, 신발도 샀고, 가방도 샀다.
가방을 살 때는 점원의 추천을 받아서 상소윤의 것도 하나 샀다.
특별히 비싸고 예쁜 것이었다.
며칠 전에 맥주 독박을 뒤집어쓴 상소윤이 단단히 삐진 상태기 때문이었다.
‘또 뭘 사지?’
결국, 진유성은 지갑도 사고, 자켓도 사며 돈을 썼다.
내친김에 상소윤의 선물만큼 비싼 건 아니지만 유혜연과 상림에게 줄 것도 샀고.
이렇게 돈을 쓸 수 있는 건, 상림이 현금화해 준 15억이 통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 사고 싶은 게 없어질 때쯤, 딱 유혜연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이자는 전화였다.
진유성이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유혜연이 말해 준 구역으로 향했다.
* * *
“…….”
“…….”
“…….”
상림, 유혜연, 상소윤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분 전.
네 사람은 면세점 쇼핑을 끝내고 약속된 장소로 모였다.
그러곤 깜짝 놀랐다.
가장 먼저 와있던 진유성이 말도 안 되게 많은 물건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걸 전부 산 거니……?”
“네. 왜요?”
“아니…….”
물론 면세점에도 몇만 원짜리의 싼 물건들은 있다.
하지만 진유성이 사 온 물건의 브랜드들을 보면 그런 제품들이 아니었다.
제일 싼 제품도 몇십에서 몇백은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였다.
게다가 상소윤에게 선물이라고 준 핸드백의 영수증을 보니 얼추 한화로 1,800만 원짜리였다.
유혜연과 상림에게 주는 선물도 제법 비싼 것이었고.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진유성이 물건들을 놔두고 자리를 비우고, 세 사람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상소윤과 유혜연이 떠올리는 생각은 똑같았다.
‘돈이 어디서 저렇게 난 거지?’
상림이 줬을 리는 없다.
그녀들은 상림의 용돈 경제관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림은 결코 부족하지 않을 만큼 용돈을 주지만, 소비가 헤퍼질 만큼은 주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거나,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주거나, 유혜연한테 전달할 뿐이었다.
상소윤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진유성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진유성은 저 많은 돈이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유혜연과 상소윤이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면, 상림은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림은 물론 저 돈의 출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즉매회에게 아이템과 마정석을 팔아서 번 돈이다.
그중 달러로 받았던 것들을 현금화해 준 게 자신이었으니까.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를 유혜연과 상소윤에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모님 보험금으로 할까? 아니야, 그럼 앞뒤가 안 맞는데. 역시 상속이 나으려나? 하지만 갑자기 상속을 받는 것도 이상하잖아?’
상림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상하이로 갈 당시.
상림은 적당한 핑계를 위해 이렇게 말했었다.
“그게, 우연히 중국에서 유성이의 친가 쪽 친척일 수도 있는 분을 찾았거든.”
“그래요?”
“응. 근데 그분이 한국으로 올 상황이 아닌가 봐.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아.”
당연하게도 귀국한 이후 유혜연에게 유성이 친척분이 맞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본래는 아니라고 말할 셈이었다.
한데, 대답 직전에 생각을 바꿨다.
자체적으로 CSG를 운영하는 중국과 달리 한국 각성자들은 SG의 각성 마켓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즉, 국내에서는 블랙 마켓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다음에도 아이템을 팔기 위해서는 중국에 가야 했고, 그때 또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상림은 유혜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되게 애매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유성이가 아기 때를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어떡해요?”
“일단 서류상으로 좀 맞춰 보고, 다음에 한두 번 정도 더 가야 할 것 같아.”
즉, 친척이 아니라는 말은 안 했던 것이다.
유혜연과 상소윤의 시선을 받고 있던 상림이 입을 열었다.
“아, 유성이가 상속받은 돈이 조금 있어.”
“갑자기 상속?”
유혜연의 반문에 상림이 대답했다.
“그게, 말은 안 했는데 중국에서 만난 분이 유성이의 친척이 맞는 것 같거든.”
“근데요?”
“근데…… 그분이 유성이와 연을 이어 가고 싶지 않나 봐.”
“네? 왜요?”
“음,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그렇게 좋은 이유는 아니야. 유성이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이유고.”
유혜연과 상소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유성이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유산들을 도의적으로 어느 정도 건네준다고 했는데…… 그 돈을 쓴 거 같아.”
뭔가를 생각하던 유혜연이 물었다.
“왜 말을 안 했어요?”
“음, 그게.”
더 이상 생각이 안 난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큰돈을 받았으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게…….”
문득 엄청나게 억울해졌다.
아니, 억울함을 넘어서 화가 났다.
평소에는 아내와 딸에게 사소한 거짓말도 하지 않는데!
진유성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게!
결국, 상림은 무책임하게 진유성에게 결론을 미뤘다.
“유성이가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음…….”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냥, 음, 혼란스러웠으려나?”
될 대로 되라는 말을 뱉은 상림이었지만, 의외로 유혜연과 상소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연은 그럴듯한 이유를 첨언해 주기도 했다.
“결국, 친척과 완전히 인연이 끊어진 거잖아요. 좋지 못한 형태로.”
“그, 그렇지.”
“그래서 돈을 빨리 써 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겠네요. 우리한테 선물을 사주면서.”
“그런가?”
유혜연과 상소윤의 표정을 본 상림은 잠깐 혼란이 왔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제법 먹혀든 것 같다.
상림은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렇게 큰 거짓말을 했으면 진유성과 입을 맞춰 놓아야한다.
“나도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그래요.”
그래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화장실에 있는 진유성에게 방금 있었던 대화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상림이 자리를 떠나고, 유혜연과 상소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짓말에 누가 속아?”
“원래 너희 아빠가 좀 순진하잖아.”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게 아빠 탓이라니까?”
“음, 완전히 부인은 못하겠다.”
“아빠 부인을 안 한다고?!”
“아니…… 어휴, 97등.”
“96등이야!”
“아무튼.”
유혜연과 상소윤은 상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지 않으리라.
불편한 이유로 인연을 끊는다면서 많은 돈을 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유혜연과 상소윤은 상림의 말 속에 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숨겨진 진실을 추론해 냈다.
“흠…….”
상림은 북한에서 왔다.
진유성도 북한에서 왔다.
얼마 전, 진유성은 상림과 함께 북한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뭐겠는가?
급하게 북한을 떠나온 진유성이 뒤늦게 재산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고작 19살이다.
돈을 가져올 당시에는 18살이었다.
18살의 북한 소년이 거금을 가지고 있는 경우?
북한을 떠났지만, 돈을 받아 올 수 있는 경우?
게다가 유혜연이 보기엔 종종 상림이 진유성을 대하는 행동이 어색할 때가 있었다.
말과 행동은 손아랫사람을 대하지만, 본능적으로 올려다보는 느낌.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아무래도…… 유성이의 본명은 김유성인가 보구나.”
북한을 지배하는, 김씨 일가.
그녀들의 머릿속에 진유성의 고달픈 인생 스토리가 촤르륵 펼쳐졌다.
북한의 지배자 가문에서 태어난 어린 진유성, 아니 김유성.
나눌 수 없는 권력 때문에 형들에게서 끊임없는 생명 위협을 받다가.
환멸을 느껴서 북한을 떠난다.
그러곤 선대의 인연이 있었던 상림과 만나고 한국에 정착하게 되는…….
그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
“소윤아.”
“응?”
“이 사실을 안다는 걸 절대로 티 내면 안 돼. 알았지?”
“어…… 그러긴 할 건데, 왜?”
“생각해 봐. 유성이는 얼마나 외로웠겠니?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고.”
“아, 하긴.”
상소윤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엄마, 막 우리가 위험해지진 않겠지?”
“글쎄…… 하지만 분명한 건.”
유혜연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이도 이제 우리 가족이라는 거야.”
그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가족은 서로를 위할 뿐이다.
유혜연과 상소윤이 굳은 각오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망상의 폭주였지만.
* * *
화장실에 다녀온 진유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프라하 여행 내내 삐져 있던 상소윤의 태도가 상당히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역시 인터넷은 옳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삐진 여자의 마음을 풀어 주려면 선물을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 사진이나 한번 찍을까?”
“여기서?”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러곤 유혜연의 진두지휘하에 공항에서 4인 가족의 사진을 찍었다.
잠시 뒤, 바츨라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