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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07화 (10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07화>

* * *

진유성은 지금껏 한국에서 많은 스포츠를 경험을 했다.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경쟁을 원칙으로 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의의가 있는 역도나 달리기조차 그렇다.

기록의 위대함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진유성은 스포츠에 큰 흥미를 갖지 못했다.

다른 이들과 ‘경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E-스포츠는 조금 달랐다.

E-스포츠는 경쟁이 됐다.

진유성이 빠르게 움직인다고, 게임 속 캐릭터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니다.

1초를 60으로 나눠 인식하는 순간 인식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엄청난 우위는 아니었다.

최고 단계의 선수들 중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진유성만큼 집중할 수 있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진유성처럼 눈으로 보고 정밀하게 반응하는 건 아니었다.

엄청난 연습량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은 놀라워서, 순간적으로 진유성과 대등한 모습을 보여 주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덕분에 진유성은 E-스포츠에서 경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만약 ST-1 구단에서 진짜를 보여 준다면, 프로계약을 할 의사도 있었다.

그 순간, 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진짜가 뭔가?”

“경쟁.”

“경쟁?”

“무의미한 승리가 아닌, 쟁취할 수 있는 승리를 원한다.”

“약팀에 가서 프로로 데뷔하면 그게 경쟁을 하는 게 아닌가?”

“내 플레이에 만족감이 차오르는 경쟁을 원하는 거다.”

“흐음…….”

진유성의 말에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근데 자네 몇 살이야?”

“…….”

“몇 살인데 자꾸 반말이야?”

진유성은 순간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살인데요.”

“미성년자라고?”

“네.”

스물셋이나 넷 정도로 생각했던 단장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미성년자니까 컨셉에 취해 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노안이네. 이름은?”

“진유성.”

“나는 ST-1의 김동수 단장이야.”

인사를 나눈 단장이 진유성을 미팅룸으로 이끌었다.

미팅룸에 들어온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 안 합니까?”

“테스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구단이 진유성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보여 주고 싶어서.”

단장이 직접 빔 프로젝터를 실행했다.

그러자 스크린으로 하나의 표가 올라왔다.

“이건 전 세계 신인 선수의 연봉 Top 20 목록이야.”

신인으로 한정되어서 그런지, 최고 높은 연봉이라고 해 봐야 8,000만 원뿐이었다.

“다음으로는 한국 프로 선수들의 연봉 Top 20.”

이번에는 액수의 단위가 달랐다.

그 순간, 단장이 리모컨을 조정했다.

그러자 17위와 18위 사이에 진유성의 이름이 들어갔다.

17위의 연봉은 6억 3천.

18위의 연봉은 5억 8천.

“우린 자네 연봉을 6억까지 베팅할 생각이네.”

신인에게 해 주는 대우라고는 믿기지 않는 금액.

이 계약이 성사되면 E-스포츠 업계 전체가 떠들썩해질 것이었다.

프로 경기를 한 번도 뛰지 않은 신인이 곧장 연봉 랭킹 18위에 기록되니 말이었다.

하지만 단장은 자신이 있었다.

아니, ST-1 단장뿐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프로게이머도 챌린저 구간에서 승률 80퍼센트 이상을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앞에 있는 지존천마를 제외하고는.

단장은 진유성이란 친구가 분명 감격하거나 혹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묘한 표정이었다.

“게임이나 하죠.”

“왜? 돈 얘기가 거북한가? 하지만 프로라면 자신의 가치가 정확히 얼마나…….”

“일단 알겠습니다.”

“일단이라니? 혹시 거짓말 같아서 그런가?”

진유성은 적당히 돈 이야기를 넘기려고 했지만, 단장은 아니었다.

단장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진유성의 가치를 얼마나 고평가하는지를 꼭 보여 줘야 했다.

자꾸 단장이 질척거리자 게임을 하고 싶은 진유성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단장에게 내밀었다.

그가 보여 준 건, 방금 전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남은 계좌의 잔액이었다.

그 잔액은…….

“유, 육백억?”

육백억이었다.

눈을 몇 번이나 씻어 봐도 변하지 않았다.

몇천만 원을 후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잣집 자제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고등학생 통장에 육백억이나 있는 거지?’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상림이 몇 개의 통장에 쪼개서 넣어 준 것이었다.

블랙 마켓에 마정석과 F급 아이템을 꾸준히 팔아치운 진유성의 재산은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진유성이 박수를 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

단장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진유성을 안내했다.

잠시 뒤, 진유성은 ST-1 구단의 1군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개중 가장 반가운 얼굴은 단연 샤이나크였다.

게임과 개인 방송에서 인연이 있어서 그런지, 샤이나크도 그를 꽤 반갑게 맞이했다.

“그때 받은 후원금은 아무래도 돌려 드리는 게…….”

“됐다. 그 값어치만큼 배운 게 있으니.”

진유성의 대답에 샤이나크가 물었다.

“근데 몇 살이세요?”

“……비밀이다.”

나이부터 물어보는 한국의 문화는 뭔가 잘못됐다.

외국은 딱히 나이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1군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는 진유성을 보며 단장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일단 돈으로 꼬드기는 건 물 건너갔다.

하지만 아직 메인 이벤트가 남아 있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ST-1 1군 선수들과 진유성의 경기였다.

단장은 진유성에게 솔로 랭크와는 다른 팀 게임의 벽을 확실히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다.

딱 보니까, 진유성은 승부욕을 자극당해야 계약에 관심을 가질 듯했다.

“일 대 오를 하라고요?”

진유성의 물음에 단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자네 팀으로 데려 갈 네 명은 직접 고르게. 다들 솔로 랭크에서 만났던 친구들이라서 어느 정도 성향을 알고 있을 거 같은데?”

단장의 제안에 진유성이 2군 선수들에게 솔로 랭크 아이디를 물어보고 금방 4명을 뽑았다.

‘역시.’

지존천마의 승부욕은 대단했다.

1군 주전 선수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룬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진유성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네 명의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ST-1의 1군은 얼마나 강하지?”

진유성의 물음에 팀원 중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바로 며칠 전에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니, 세계 1위겠죠?”

“저기 다섯 명이 우승한 건가?”

“안 보셨어요?”

“안 봤다.”

진유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경기를 해 봐야 알겠지만, 꽤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았다.

“너희 네 명에게 당부할 것이 있다. 무조건 내 말만 들어라.”

“예?”

“내가 아무리 엉뚱한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아도 그대로 따라 달란 말이다.”

사실 진유성이 이 네 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솔로 랭크에서 만났을 때 가장 말을 잘 들었던 팀원들이었다.

좋게 말하면 의견을 잘 받아들였고, 나쁘게 말하면 수동적이었다.

그리고 진유성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줄 이들이었다.

꼭 해 보고 싶었던 게 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그동안 혼자 게임을 하면서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

그는 전장을 누구보다 크게 볼 수 있었고, 찰나의 단위로 생각을 했기에 전략적 정답을 금방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진유성의 전략을 제대로 따라 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 네 명이 자신의 말을 아주 잘 수행한다면?

그가 원했던 무학을 발휘할 판이 깔리리라.

“내 말을 잘 따라야 한다.”

진유성의 연이은 당부 뒤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팀 게임은 솔로 랭크와 달랐고, 상대는 세계 1위답게 팀원들과의 엄청난 호흡을 자랑했다.

그렇게 첫 경기는 패배했다.

게임이 패배하자마자 진유성이 아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지?”

“뭐요? 용 싸움 때?”

“그래.”

“아니, 그렇게 크게 돌아가라고 하면 어떻게 돌아가요. 너무 늦을 거 같은데.”

“늦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돌아감으로 인해서 우리는 모두를 잡을 수 있었다. 아주 큰 덫이었단 말이다.”

진유성의 말에 2군 선수가 울컥했다.

하지만 참아 냈다.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단장이 신신당부했던 말 때문이었다.

“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줘. 그래야 패배에 승복하지.”

2군 선수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다음 판은 무조건 들을게요.”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오더를 따라서 패배하면 지존천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고.

그렇게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양상은 첫 번째와 비슷했다.

1군의 선수들은 진유성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1군, 2군의 실력 차이 때문인지, 1군 선수들이 조금 더 여유롭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집중 견제 속에서 진유성은 오히려 샤이나크를 솔로킬 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치열한 양상이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진유성이 갑자기 원거리 딜러에게 바텀으로 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든 걸 쏟아부어서 최대한 빠르게 라인 밀어! 게임 끝낸다!”

말도 안 되는 오더였다.

적 팀이 바론을 챙기려는 순간에 이런 명령이라니?

원거리 딜러는 순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꾸하려다가 참았다.

지존천마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원거리 딜러가 바텀으로 달리는 사이, 진유성이 탑 라이너에게 오더를 내렸다.

최대한 크게 돌아서 들키지 않게 뒤로 숨어 들라는 오더였다.

탑 라이너 역시 그 말을 따랐다.

하지만 선수들이 보기에 여전히 싸움의 구도는 이상했다.

1군 선수들이 진형을 구축하며 바론을 치기 시작했고, 진유성의 팀원들은 진유성의 신호를 기다렸다.

‘구도가 영 이상한데?’

다들 싸움 구도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

진유성이 미리 언질 준 대로 정글과 서폿이 뛰어들고, 진유성이 순식간에 적팀 한 명을 잡아냈다.

하지만 동시에 아군 두 명이 죽었고, 바론 버프도 빼앗겼다.

그사이에도 탑 라이너는 하릴없이 부쉬에 숨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진유성의 팀원은 두 명이 죽고, 적 팀은 한 명만 죽은 4 대 3의 상황.

심지어 한 명은 바텀을 밀고 있었으니 4 대 2의 상황이었다.

이제 1군 선수들이 집으로 돌아가 바텀을 밀고 있는 원거리 딜러를 막으면 게임이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순간 탑 라이너는 소름이 돋았다.

진유성이 왜 크게 돌아서 이 자리에 숨어 있으라고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유성이 아슬아슬 거리를 유지하며 4명을 뒤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진유성이 날파리처럼 귀찮게 들러붙자, 4명의 선수들이 서로 갈라졌다.

한 명이 진유성에게 잡혀 죽더라도 나머지 세 명이 집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중 한 명이 귀환을 택한 곳은 탑 라이너가 숨어 있던 부쉬 앞이었다.

“적장의 목을 쳐라!”

진유성의 명령을 받고 부쉬에서 튀어나온 탑 라이너가 1군 선수를 잡고, 진유성 쪽으로 합세했다.

집으로 귀환해야 하는 1군 선수들과 집을 보내지 않으려는 진유성 팀원들의 치열한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그사이에…….

바텀을 밀고 있던 원거리 딜러가 게임을 끝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여기까지 봤다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오더였다.

아니, 그냥 운이 좋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탑 라이너가 진유성에게 물었다.

“다 예상한 거예요?”

“당연하지 않느냐.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너한테 거기에 숨어 있으라고 했겠느냐?”

“아니, 그걸 어떻게…….”

“병법의 기본은 나의 강함으로 상대의 약함을 찌르고, 나의 약함으로 상대의 강함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네?”

“우린 절대로 오 대 오 싸움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면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대신 모든 챔피언의 기동력은 우리가 더 좋았지. 이제 알겠느냐?”

잠자코 진유성의 말을 듣고 있던 코칭 스태프 전원이 난리가 났다.

이게 정말로 지존천마가 설계한 판이라면 그는 고작 6억짜리 선수가 아니었다.

“다음 게임!”

놀란 단장의 재촉에 다음 게임이 진행되었다.

2군 선수들은 이제 전적으로 진유성의 명령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겠지만, 적어도 지존천마의 오더에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모든 팀을 압도적으로 꺾고 세계를 재패한 ST-1의 1군.

그들이 내리 7연패를 한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건, 그 모든 패배가 역전패라는 것에 있었다.

1군 선수들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라인전 단계에서는 1군이 늘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라인전이 끝나고 운영에 접어들면 도저히 진유성의 수싸움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진유성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턱을 긁적이던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나?”

“화장실.”

진유성은 그렇게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화장실에 가는 게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ST-1 구단에서 했던 게임은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진유성은 솔로 랭크보다 오히려 팀 게임이 훨씬 쉽다는 걸 깨달았다.

다섯 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팀 게임은 그의 무학이 통하는 전장.

그리고 입멸공을 품고 있는 진유성의 무학은 완벽했다.

이 안에서 그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아마 진유성이 프로 대회에 나간다면 100퍼센트의 승률을 기록해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리라.

진유성은 ST-1 단장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하나를 보내고 그렇게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여기에 [진짜]는 없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진유성은 습관처럼 게임을 켰다.

더 이상 롤을 엄청나게 열심히 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잡초라도 베어야 했으므로 애초에 목표로 잡았던 랭킹 1위는 달성할 생각이었다.

그 뒤에는 뭐, 가끔씩 생각나면 즐기겠지.

그렇게 게임에 로그인하려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떴다.

[삭제된 계정입니다.]

“뭐?!”

진유성이 깜짝 놀라서 다시 로그인을 했지만,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 순간, 진유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곧장 심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심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뭐야, 진유성. 무슨 일이야?

“심도훈, 저번에 PC방에서 썼던 네 아이디를 좀 빌리려고 하는데.”

-그거?

심도훈이 껄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삭제했는데.

“뭐? 왜?”

-말하고 싶지 않아. 끊는다.

심도훈은 지존천마의 협박에 겁을 먹었다가 울컥 화가 났다.

그는 공화 시멘트의 상속자였다.

재벌이 해커의 협박 따위에 벌벌 떨고 있으면 안 된다는 오기가 생긴 것이었다.

심도훈은 곧장 돈을 써서 유능한 해커를 고용했다.

눈에는 눈, 해킹에는 해킹.

지존천마의 아이디를 해킹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해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롤판을 뒤흔들고 있는 지존천마가 사실은 자신의 부계정이었다는 것.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저 지존천마가 자신의 신상을 해킹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철저히 농락하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누구를 적으로 삼은 거지?’

심도훈은 그 즉시 아이디를 지워 버렸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계정이 영구 삭제되는 데 걸리는 시간 보름.

그게 딱 오늘이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진유성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심도훈을 놀린 죗값을 이렇게 치르나 보다.

“허허허…….”

진유성의 눈앞으로 그동안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이아2에서 시작해 랭킹 10위까지 도달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은 사라졌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던 아이디가 더 이상 세상에 없었으니까.

슬픈 꿈을 꾸었느냐?

“기쁜 꿈을 꾸었도다.”

89퍼센트의 승률로 챌린저 구간을 폭격하고, ST-1 구단에 방문해 1군 선수들을 폭격한 지존천마가 홀연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E-스포츠 역사에 길이길이 회자될 거대한 미스터리를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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