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10화>
* * *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은 깊은 산속.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는 햇살.
여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츠츠츠츠츠.
묘한 소리와 함께 햇살이 부서지는 허공에 검은색 직선이 그어졌다.
정확히 수평으로 그어진 직선.
직선이 꿈틀거리더니 위아래로 팽창했다.
이내 직선은 타원형의 면이 되었다.
그리고.
투화아악!
거칠게 공간을 찢으며 오른팔이 튀어나왔다.
새하얀 팔은 구멍이 좁은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허공을 더듬었다.
다음 순간 타원을 통해 왼팔이 튀어나오더니 허공의 어딘가를 꽉 붙잡았다.
츠츠츠츠측.
공간의 균열이 벌어졌다.
균열의 지름이 1미터를 넘었을 때, 누군가가 그것을 넘으며 나타났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는 백인 남성이었다.
남자가 빠져나오는 순간 균열이 빠르게 축소되더니, 모습을 감췄다.
“흐음.”
어지러운 듯 가볍게 비틀거리던 남자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도착한 건가?”
백인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본래 낮에는 태양광에 가려서 별이 보이지 않지만 남자는 그 너머의 별을 꿰뚫어 보며 별자리를 통해 순식간에 행성의 위치를 가늠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태양광의 굴절률을 역산해 경도와 위도까지 체크했다.
“중원의 최남단이군.”
이러한 행동들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
행성 전체의 중력 굴절률의 읽어서 위도와 경도를 확인하는 것은 엄청난 심력과 마력이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인 남자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인식의 범위는 행성을 넘어서 있었으며, 그의 마력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랬다.
남자는 중원의 절대자를 확인하기 위해 중원으로 떠났던 세쌍둥이의 첫째였다.
“너무 오래 걸렸군.”
세쌍둥이 마도사들은 지구와 중원을 오갈 수 있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오가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와 연결된 하위 차원을 거듭해서 지나치다 보면 중원과 연결이 된 하위 차원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중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우연에 기인하는 방법인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샛길을 이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실의 공간.
그곳을 거치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하기에.
사실 첫째는 홀로 상실의 공간에 한 번 더 들어섰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관리자에게 소중한 것을 받쳤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 * *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관리자의 등장에 첫째가 말했다.
“관리자여, 난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그런 내가 또다시 제물을 받쳐야 하는가?”
[상실은 완전한 부재를 뜻하며, 완전한 부재는 존재했던 기록까지의 소멸을 뜻한다.]
[그대가 처음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
첫째는 그 심성이 사악할 뿐, 인세에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관리자의 말을 곧장 이해했다.
관리자는 상실의 공간에서 상실이 ‘완벽한 상실’을 의미한다고 뜻했다.
완벽한 상실이란 간단했다.
만약 어떤 남자가 기억을 상실했다고 치자.
그때 남자가 자신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 그것은 완전한 상실일까?
아니었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인식조차 없을 때, 부재했다는 기록조차 남지 않을 때.
그것이 진정한 상실이었다.
즉, 관리자는 앞서 상실했던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렇군. 그것이 상실의 공간의 법칙인 셈이군.”
[그렇다.]
“그렇다면…….”
첫째가 선언했다.
“나는 오늘 그 법칙을 깬 최초의 필멸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신이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겠다.”
첫째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관리자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대가 법칙을 깬다 하더라도, 그대는 최초가 될 수 없다.]
첫째는 그날 관리자와 싸우지 않았다.
본래는 끝까지 싸워 볼 생각이었으나, 급하게 노선을 바꿨다.
아무래도 법칙을 깬 최초의 인물이 중원의 절대자인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은 지구에 중원의 절대자가 도착했다는 소리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중원에서 진유성이란 절대자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첫째가 홀로 상실의 공간에 들어가기 전, 게이트 사태를 벌이기 위해 준비할 때였다.
그들은 하위 차원을 멸망시키고, 멸망한 세계의 잔영을 게이트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들이 게이트에 들어가서 싸우는 몬스터는 멸망한 세계의 망령들이었다.
멸망한 세계에 남은 에너지가 몬스터의 형태를 갖춰서 등장하도록 마도사들이 손을 써 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하위차원을 멸망시키고 게이트와 연결하는 작업을 반복하다가 우연히 <천계>라는 하위 차원에 도달했다.
천계는 이상한 곳이었다.
분명 하위 차원임은 틀림없었다.
영성을 담을 육신이 없고, 시간의 개념이 없고, 차원의 팽창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거기 모인 이들은 전부 상위 차원에서 고절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었다.
하위 차원임에도 세쌍둥이들이 쉽사리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계를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곳이 그들의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고 자란 행성, 갑자기 그곳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하위 차원을 찢고 그들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수백 년 만에 도착한 고향.
하지만 세쌍둥이는 고향의 흥취를 느낄 새도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너희들은 누구냐?”
권태로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뭐하는 놈들인데 괴이한 술수로 천신궁에 나타난 게냐?”
놀라운 것은 권태로움 뒤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마력이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육체가 없는 그들은 마도술로 빚어낸 인공 육체 호문쿨루스에 영혼을 담고 있었다.
한데, 목소리를 인지하기 무섭게 점차 호문쿨루스의 기능이 저하됐다.
마력에 민감한 인공 육체가 마력압을 이기지 못하고 기능 저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답답했는지 셋째 록펠러가 호문쿨루스를 벗어던졌다.
영혼체로 돌아와온 록펠러가 권태로운 목소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본 교주를 모르나?”
[모른다! 넌 누구냐!]
마력압이 더욱 농밀해졌다.
그러자 기능 저하를 일으키던 호문쿨루스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
인공 육체가 죽은 것이었다.
첫째는 깨달았다.
저 남자가 풍기던 마력의 압력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지닌 마력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다.
마력을 잠시 폭사시켰을 뿐인데, 호문쿨루스가 죽은 것만 봐도 그러하다.
권태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본좌는 천마신교주 진유성이다.”
진유성의 검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 * *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첫째가 고개를 들었다.
위도와 경도를 확인해 보니 이곳은 진유성이 지배하고 있는 중원이었다.
아니, 진유성은 중원만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 행성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독립된 군소 문명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곳은 진유성의 천마신교에 전부 굴복했다.
그들이 태어났던 서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군.”
하위 차원을 통해 상위차원으로 이동하다 보면 이게 불편했다.
시간이 과거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구에서의 10년이 중원에서의 하루일 수도 있고, 똑같은 10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중원의 절대자를 만나면 알게 될 일이었다.
첫째가 자금성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갑자기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문쿨루스가 기능 이상을 일으킨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것은 거짓 육체의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다.
영혼체가 뒤흔들리는 것이다.
“큭!”
첫째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힘의 파동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첫째는 깨달았다.
록펠러가 죽었다는 것을.
“…….”
록펠러가 죽은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가 모으고 있던 영성이 아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가 록펠러를 죽였을까?
첫째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살아생전 록펠러의 기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기억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가 자의식을 가지고 행한 일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록펠러의 근원,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존재의 원천이 알려 주는 기억들이 있다.
첫째는 누가 록펠러를 죽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중원의 절대자 진유성.
역시 그가 지구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첫째의 몸이 자금성을 향해 쏘아졌다.
정확한 목적지는 자금성 내부에 있는 천신궁이었다.
공간을 접으며 이동하는 첫째의 속도는 엄청났다.
중원의 최남단에 있는 해남성에서 출발했음에도 자금성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첫째가 나타난 순간, 자금성을 지키던 금의위와 천마신교도들이 혼비백산하며 나타났다.
거대한 기운을 품은 존재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자금을 향해 짓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는 잡스러운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신경 쓰는 존재는 오직 중원의 절대자뿐이었다.
하지만 자금성 내부에서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지구로 떠난 건가?’
그 순간이었다.
“재미있군.”
과거 들어 본 적이 있는 권태로운 목소리가 자금성 안쪽에서 들려왔다.
첫째와 권태로운 목소리 사이의 거리는 1킬로미터도 넘었다.
게다가 크게 말한 것도 아니었다.
중얼거리듯이 읊조렸을 뿐이었지만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인이 눈을 뜬 것처럼 엄청난 존재감이 갑자기 천지사방에서 휘몰아 닥쳤으니까.
존재감의 주인이 서서히 자금성의 입구를 향해 다가왔다.
한걸음을 걸을 때마다 존재감이 배로 커지는 것 같다.
“억만창생! 신교천하!”
“억만창생! 신교천하!”
“억만창생! 신교천하!”
엄청난 위압감에 자금성 입구에 몰려 있던 모든 인간이 쿵쿵 소리를 내며 땅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그러곤 몸을 벌벌 떨었다.
감히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는데 모두가 두려움에 신음하고 있었다.
첫째는 이와 비슷한 광경을 많이 경험했었다.
그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서역을 지배할 때.
흡사 그때의 풍경이 도래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에 봤던 놈이군.”
첫째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중원의 절대자 진유성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설마……?’
첫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중원의 절대자가 입을 열었다.
“셋이 덤비다가 꽁지 빠지게 도망가더니 왜 혼자서 다시 찾아왔지?”
첫째는 대답 대신 질문을 선택했다.
“넌 진유성인가? 아니면…….”
이어진 질문에 진유성이 다짜고짜 입멸검을 빼 들더니 첫째를 베어 버렸다.
하지만.
프스스스스.
진유성의 검은 첫째를 베어 내지 못했다.
그저 바람을 베는 것처럼 통과할 뿐이었다.
고오오오오.
온몸에서 시커먼 영기를 풀풀 뿜어내는 첫째가 재차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넌 진유성인가? 아니면 진짜가 남기고 간 일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