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12화>
강사가 보조 강사에게 신호를 주자, 3명의 보조 강사들이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구멍 뚫린 바구니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바구니 안에는 요리에 쓰기 좋게 잘린 양파, 대파, 무, 다진 마늘 따위가 들어 있었다.
다듬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에, 수업 전에 보조 강사들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요리만 만들면 되는 수업.
하지만 거기에 불만을 가진 이가 있었다.
진유성이었다.
“네? 학생?”
진유성이 손을 번쩍 들자 강사가 진유성을 지목했다.
옆에 있던 상소윤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만히 있으라고 옆구리를 찔러 댔지만, 진유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료를 직접 다듬고 싶습니다.”
“그럼 시간이 촉박할 텐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칼은 조심히 다뤄야 해요.”
“알겠습니다.”
진유성의 요구는 쉽게 수용됐다.
어차피 재료는 넉넉하고, 대정고의 외래 강사들은 학생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대정고에 초빙됐을 때부터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었다.
이내 양파, 무 등등의 재료를 받은 진유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야, 그냥 준비된 거 쓰면 되지.”
“허어. 조용해라. 아무것도 모르면.”
“내가 뭘 몰라? 다 알거든.”
“다 알았으면 꼴등을 했을 리가 없지.”
“꼴등은 지종수고.”
상소윤이 그렇게 말하고는 아차 싶어서 지종수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종수는 가만히 있다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 종수야. 미안.”
“아니야……. 내가 꼴등이었는데, 뭐…….”
“아니, 그게 아니고…….”
상소윤이 절절매는 사이, 진유성은 손에 들고 있는 칼에 정신을 집중했다.
칼을 쓸 때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무게 중심이다.
하급무사들은 칼을 직접 들고 휘둘러 봐야 무게 중심을 알 수 있지만, 진유성은 아니었다.
진유성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검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을 베는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닌지라 무게 중심이 날 쪽으로 쏠려 있긴 한데, 꽤 균형감이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칠 것을 생각하면 잘 잡혔다고 봐야 하는 무게 중심이었다.
‘괜찮군.’
확실히 지구의 제련과 정련 기술은 뛰어나다.
장인의 기운을 담지 못해 명검이나 신검을 만들 수는 없으나, 쇠를 다루는 기술 자체는 중원보다 월등하다.
진유성은 이어서 칼의 무게와 길이를 확인했다.
날카로움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풀잎으로도 철을 베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진유성이 설레는 표정으로 도마를 왼쪽에, 야채 바구니를 오른쪽에 놓았다.
도마와 바구니 사이의 거리는 대략 30cm 정도.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진유성이 도마 위에 반으로 쪼갠 무를 올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호흡했다.
“스으으읍.”
그사이, 상소윤은 진유성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레시피에 따라 요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상소윤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유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유성이 저런 거창한 짓을 벌일 때는 분명 엉뚱한 짓을 계획하고 있을 때니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려는지 기대가 돼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상소윤이 깜짝 놀랐다.
‘내가…… 기대하고 있어?’
놀랍게도 상소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유성의 엉뚱하고 멍청한 짓을 기대하고 있었다.
불량 식품에 중독된 것처럼 진유성의 바보짓에 중독이 되어 버렸다.
“이럴 수가…….”
본인의 상태를 깨달은 상소윤이 충격에 빠진 순간.
진유성이 눈을 번쩍 떴다.
진유성의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됐다.
“흐압!”
짧은 기합과 함께 진유성의 손이 움직인다.
상소윤의 눈이 커졌다.
타타타타탁!
날아다닌다.
진유성이 칼로 잘라낸 무가 허공을 난다.
도마, 칼, 진유성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무를 잘라 내면, 하얀색 뭔가가 휙 떠올라서 착 하고 바구니로 들어간다.
‘미친놈이?!’
상소윤이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진유성이 이 멍청한 놈이 세상에다가 ‘나 간첩이오.’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고교생이 이런 칼놀림을 선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근데 이게 간첩이라고 가능한 일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까 진유성이 하는 일은 엄청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칼로 무를 자름과 동시에 손목 스냅을 이용해서 툭툭 바구니로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진유성이 무를 잘라 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지는 않다.
TV에 나오는 숙련된 요리사들과 비교하면 꽤 느리다.
놀라운 건 정확도였다.
일정한 리듬에 따라 무들이 휙휙 잘리고 허공을 휙휙 날아서 바구니에 착착 착지하는데,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간첩들이 받는 훈련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지 않는가.
그러니까 저딴 짓이 가능한가 보다.
‘어휴, 또라이.’
상소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학생들이 입을 헤 벌리고 진유성을 쳐다봤다.
난데없는 기합 소리가 들려서 대체 뭔가 싶었는데, 요리 재료가 날아다니는 건 처음 본다.
“와, 뭐냐.”
“우와…….”
그때 학생 중 한 명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 저거 만화에서 봤는데.”
“만화? 무슨 만화?”
“요리왕 비룡이라고, 좀 옛날 만화일걸?”
“그게 뭐야?”
“기달.”
학생들 중 한 명이 유튜브를 켜서 요리왕 비룡을 재생했다.
만화 속 캐릭터가 중식도(중화요리에 쓰이는 칼)를 든 채 기합을 내지르는 순간.
토토토토토톡 하는 소리와 함께 요리 재료들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심지어 그냥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당근, 양파, 감자가 세 개의 나선을 그리며 하나로 합쳐지더니 용의 형상이 된다.
그리고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들어간다.
냄비 속의 용이 여의주를 무는 것처럼 당근, 양파, 감자를 물더니 마구 으깨 버린다.
이윽고 수증기가 뿜어지며 요리가 완성된다.
“이게 뭐야…….”
학생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은 진유성이 뭘 따라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심지어 엄청 잘한다.
만화처럼 재료가 살아 춤을 추는 건 불가능하니까, 지금 진유성이 하는 정도가 최선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집에서 연습이라도 한 것 같다.
이런 쓸데없는 걸 연습하다니, 정말 캐릭터 확실하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였다.
진유성은 대정고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꽤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이상한 말투를 쓴다.
드라마와 영화의 대사를 따라하는 것을 좋아하며, 상소윤과 엄청 친하다.
사실 마지막이 제일 중요했다.
사춘기 학생들에게 외모는 굉장히 중요한 지표였으니까.
남몰래, 혹은 남들 알게 상소윤을 좋아하던 남학생들에게 진유성은 아주 거슬리는 존재였다.
탁!
그 순간, 진유성의 마지막 무 썰기가 끝이 났다.
구경하던 학생들이 연습하느라 고생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싶을 때, 진유성이 이번엔 양파를 꺼내 들었다.
양파는 무보다 훨씬 자르기가 어렵다.
무는 단단하기 때문에 자르고 튕겨 내기가 쉽지만, 양파는 아니다.
조금만 힘의 분배가 잘못되면 조각들이 비산할 것이다.
진유성이 다시 한번 집중해서 칼을 노려보는데, 강사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저, 학생?”
“예?”
“그, 또 하려고요?”
“하면 안 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보기 아쉬우셨다면 이번엔 조금 더 빠르게 해 보겠습니다.”
진유성의 말에 강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리에 대한 깊이가 없는 학생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지만, 강사는 요리에 한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들 중에 요리왕 비룡을 따라 해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스승 밑에서 배울 때는 요리로 장난을 치다 걸리면 혼쭐이 나기 때문에 그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집에서, 작업실에서 혼자 요리를 연구할 때는 몇 번 해 봤다.
그러니 그는 이 학생이 벌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재료를 자른 다음에 칼의 옆면으로 튕기는 건 연습을 하면 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정확도와 꾸준함, 그리고 속도다.
강사가 얼추 보기에 이 학생이 자른 무는 굉장히 균일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속도도 꽤 빨랐다.
그런데 뭐?
조금 더 빠르게 해 보겠다고?
심지어 양파를 가지고?
과욕을 부리다가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그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강사가 기겁해서 진유성을 말리기 시작하고, 옆에서 상소윤도 말렸다.
상소윤은 진유성의 몸을 걱정한다기보다는 간첩으로서의 역량(?)이 더 드러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적극적인 저지에 결국 진유성은 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흠, 이 정도가 한계인가?’
더 이상 하면 일반인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과거의 진유성이었다면 내공까지 사용해 가며 3, 4개의 재료를 날아다니게 했을 것이었다.
사실 내공만 쓰면 못 할 게 없다.
얇게 썬 재료들이 나비처럼 허공을 나풀나풀 날아다니다가 냄비로 들어가고, 빛이 뿜어져 나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건, 진유성에게도 상식이란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가 일반인의 경계구나.
그런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공도 안 쓰고, 의념도 안 쓰고, 무를 자른 것이었다.
심지어 할 수 있는 최고 속도의 절반도 내지 않았다.
더 하면 의심받을 것 같으니까.
상림이 안다면 눈물을 흘릴 만한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 뒤로 다시 요리 실습이 시작되었다.
오늘 학생들이 만들 요리는 소고기 뭇국이었다.
“고기를 먼저 볶다가, 80% 정도 익은 거 같으면 무를 넣으시면 돼요.”
“선생님 저…… 고기가 타는데요?”
“어, 혹시 참기름 안 둘렀어요?”
보조 강사들이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요리를 하나하나 잡아 주기 시작했다.
한편 요리를 만들던 상소윤은 뿌듯함을 느꼈다.
엄마를 닮아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요리에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었다.
한데, 왠지 오늘은 느낌이 좋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게, 왠지 맛있을 것 같다.
‘뭐, 빼먹은 건 없겠지?’
상소윤이 모니터에 띄워 놓은 레시피를 보며 자신이 넣은 재료를 확인했다.
완벽하다.
빼먹은 게 없다.
이제 무가 거의 다 익을 때쯤 소금과 후추로 간만 맞추면 된다.
“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매진하던 상소윤이 문득 진유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웬수딱지가 조용히 있는 게 낯설어서였다.
하지만 진유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에 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만드는 게 소고기 뭇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너 뭐 하냐.”
냄비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둥둥 떠다니는 파, 그리고 파밖에 없었다.
수면 아래 재료가 가라앉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무슨 파를 이렇게 많이 썼단 말인가?
“대체 뭘 만드냐?”
그 순간, 진유성이 상소윤을 쳐다보더니 두 눈을 한껏 부릅떴다.
그리곤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라…… 결국…….”
“뭐?”
“파국이다…….”
“…….”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다.
진유성의 개드립과 함께 요리 시간이 종료되었다.
이제 시식을 해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