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25화 (125/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25화>

지종수를 비롯한 남학생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진유성이 오른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여학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암호.”

정새롬을 비롯한 여학생들이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암호란 말인가?

우리가 암호를 정했었나?

그런 시선들이 오갈 때, 상소윤이 쭉 뻗은 진유성의 손을 탁 쳤다.

“내가 헛소리는 집에서만 하라고 했지?”

상소윤이 진유성의 손을 치워 주자 학생들이 우르르 숙소 거실로 들어왔다.

상소윤은 문을 닫으면서 복도에 누가 있나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사실 대정고 학생들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건 선생님이 부모님한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원래는 수학여행에서 술을 먹든, 돈을 걸고 포커를 치든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학년 1반은 아니었다.

그들의 담임인 연기훈은 대정고 출신.

얼마든지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선생의 역할을 꽤 즐기기도 했고.

이게 그들이 여학생들의 방으로 모인 이유였다.

위험인물 진유성이 있는 방은 연기훈이 급습할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상소윤이 거실로 돌아오자, 정새롬이 진유성과 상소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둘이 집에서 자주 봐?”

“노트북을 주면 알려주지.”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이 자리에 앉다 말고 진유성의 등짝을 후려쳤다.

물론 진유성은 가볍게 피했지만.

“야, 이 또라이야. 어제는 준다니까 동정하지 말라며?”

“어제 주는 건 동정이고, 오늘은 거래가 아니더냐?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받는 거니까.”

“웃기고 있네. 그거 이미 내가 받았거든?”

정새롬은 장기자랑의 부상으로 받은 노트북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소윤에게 노트북을 선물했다.

사실을 전해들은 진유성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상소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어이가 없다.

진정 정새롬에게 1등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진유성은 2등은커녕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참가상은 가장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줬으니, 잘해 봐야 4등이다.

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으면 이런 상황에서 1등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진유성과 상소윤의 행동을 보고 있던 정새롬이 재차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집에서 자주 보냐고.”

“갑자기 그건 왜?”

“아까 헛소리는 집에서만 하라고 해서.”

“아…….”

상소윤이 찔끔했다.

진유성의 헛짓거리에 반응하다 보니 말실수를 한 것 같다.

그때 여전히 정새롬에게 삐져 있는 진유성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자주 간다.”

“왜?”

“어머니가 좋은 분이다.”

“어머니? 소윤이 어머니?”

“그래.”

“혹시, 사위로서?”

정새롬의 장난에 상소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진유성이 발끈했다.

“난 사위가 아니다! 내가 일위를 했어야 맞는 거다!”

“…….”

“알량한 장기자랑에서 일위를 했다고 날 능멸하는 게냐?”

“…….”

진유성의 반응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이토록 좀생이에다가 뒤끝이 길다니…….

과연 진유성이었다.

하지만 상소윤은 모르고 있었다.

저 좁은 속과 뒤끝을 받아 주느라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잠깐의 소란 뒤에 본격적인 음주의 시간이 찾아왔다.

마트에서 사 온 현지 과자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으, 쓰다.”

“맥주가 아니네?”

농구 내기에서 처참하게 져서 술을 공급한 브로커(?)는 소소한 복수를 감행했다.

도수 높은 보드카를 준비한 것이었다.

대정고 학생들 중에는 평소에 술을 자주 먹는 이들도 있었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보드카를 즐길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진유성뿐이었다.

‘훌륭하군.’

진유성이 얼음도 없이 보드카를 홀짝이는 사이, 학생들이 룰을 정했다.

“게임하자. 진 사람이 먹기 어때?”

“그럴까?”

“콜.”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난 빠지겠다.”

그는 술을 먹고 싶은데, 지는 사람이 먹는 게임을 해서 뭐 하겠는가?

그때 정새롬이 진유성을 도발했다.

“또 질까 봐?”

“……!”

“아, 지금 마시는 게 어차피 질 거 같으니까 미리 마시는 건가? 패배자?”

술자리 게임 같은 건 누구 한 명이 빠지는 순간 흥이 깨지기 마련이니, 도발을 한 것인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진유성이 내공을 일주천했다.

방금 들어온 술기운이 순식간에 분해가 돼서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승부에 임하기 위해 몸 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려 정신을 바짝 집중한 것이었다.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채로 멸마대에 들어갔지만, 1년 반만에 멸마대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멸마대는 단순히 무공의 고하로 대주를 가르지 않았다.

통찰력, 지도력, 생존 본능 등등.

수많은 요소들에 점수를 매겨서 가장 높은 총점을 받은 이가 대주가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처음 3년간은 달마다 평가를 했는데, 진유성은 대주직에 오른 이후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보잘것없는 무공을 가지고도 언제나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뭐?

패배자라고?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한 번 1위를 했다고 기고만장한 정새롬에게 패배의 쓴맛을 느끼게 해 주겠다.

진유성이 이글이글 불타는 사이 고인수가 말했다.

“나 게임 모르는데.”

“나도 잘 모르는데.”

“쉬운 걸로 하자.”

고등학생들이만큼 아직 술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가벼운 게임으로 시작했다.

예능에서 종종 나오는 게임들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그리고 진유성은 TV를 아주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예능에서 나오는 게임의 룰은 어지간하면 다 알고 있었고, 룰을 알고 있다는 건 절대 패배하지 않음을 뜻했다.

엄청난 동체 시력과 신체 능력으로, 가위바위보를 100판 해도 전부 이길 수 있는 게 그였다.

‘후후.’

진유성이 의욕을 불태운 채로 게임이 시작됐다.

“상소윤!”

“아, 씨.”

처음 게임에서 진 상소윤이 술을 들이켰다.

상소윤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드카의 쓴 맛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태어나서 맛있게 먹어본 술이라고는 프라하에서 먹은 맥주뿐이었다.

진유성에게 속아서 끝은 좋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게임은 이어졌다.

학생들이 한 명씩 취해 가는 와중에 진유성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정새롬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절대 저 발칙한 것의 앞에서 패배할 수 없었다.

한데…….

이기면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술자리가 시작하고 마셨던 첫잔 이외에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진유성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꽤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술을 마실 수 없다.

물론 유혜연 몰래 마시려면 마실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술의 출처 역시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술이 아니라, 현지 조달이다.

즉, 체코에서 체코의 맥주를 마셨던 것처럼 하이난에서 하이난의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낭만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 뭐 하는가!

술을 마실 수가 없는데!

결국 참지 못한 진유성이 술병을 잡아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오, 진유성. 드디어 패배를 인정하네?”

“무슨 소리냐. 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술 마시면 패배한 건데?”

“패배하면 술을 마시는 거다. 술을 마신다고 패배가 아니다.”

“아닌데? 규칙이 그게 아닌데? 술 마시면 패배자인데?”

“조용해라!”

“으, 패배자.”

정새롬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셔라, 패배자.”

“뭐야, 진유성 졌어?”

대표적으로 볼이 발그레해진 상소윤부터, 저러다가 얼굴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지종수까지.

모두가 취한 채로 진유성을 패배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동안 진유성이 쌓아 온 행동들의 업보였지만, 진유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구니들이 자신을 괴롭힌다.

결국 진유성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마음을 정했다.

최대한 빠르게 게임을 이겨서 이놈들을 모두 곯아떨어지게 만들겠다!

그리곤 편하게 마시겠다!

그러나…….

이 마구니들이 곯아떨어지는 것보다 술이 떨어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다들 잔뜩 취한 것 같은데 술은 계속 마신다.

결국 진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화장실.”

상소윤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취기가 올라서 고개만 갸웃하고 말았다.

* * *

3학년 1반의 담임인 연기훈은 3학년 교감과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테라스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추억이 있었다.

연기훈이 대정고에 다닐 당시, 학년 교감은 대정고의 선생님이었다.

심지어 2학년 때 연기훈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때 대정고는 진짜 힘들었는데, 요즘은 좀 괜찮네.”

“그러게요. 그때는 진짜 재벌들만 다녔잖아요. 안하무인이었죠.”

지금은 대정고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돈만 많으면 된다.

그래서 고위 관료들이나 판검사 자제들도 충분히 다닐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기훈이 대정고에 다닐 때에는 재벌가만 입학이 허가됐다.

졸부들은 다닐 수가 없었다.

“그때는 돈지랄이 장난 아니었죠. 저희 수학여행이 라스베이거스였던가요?”

“맞아. 그게 뉴스에 나와서 난리가 났었잖아.”

학년 교감이 웃더니 물었다.

“그래서, 선생이 되니까 어때?”

“나쁘지 않은데요. 이 망나니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게 저뿐이기도 하고.”

“애들 방에 급습이라도 해 보게? 아마 30% 정도는 술 먹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봐줘야죠. 학창 시절의 추억인데.”

연기훈은 안하무인인 돈 많은 백수로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충만한 하루를 산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제법 애정이 있었다.

“담배 좀 피고 올게요.”

그렇게 연기훈이 호텔방을 나서는 순간.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새우깡?”

자세히 보니 새우깡은 아니었다.

새우깡과 비슷하게 생긴 과자가 호텔 복도에 있었다.

이게 하나만 떨어져 있으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누군가 실수로 흘리고 갔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과자는 균일한 간격으로 어딘가를 향해 이어져있었다.

“뭐야?”

연기훈이 과자를 따라 걷기 시작하니, 계단 출입문이 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계단의 출입문을 열자, 계단 위에도 과자가 놓여 있었다.

헨델과 그레텔도 아니고 과자로 만든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혹시 서프라이즈 파티?’

수학여행에 와서 고생한 선생님을 위한 깜짝 파티라니.

이래서 교사가 되는가 싶기도 했다.

연기훈이 살짝 기대하는 마음으로 과자를 따라갔다.

과자가 인도한 마지막 목적지는 304호였다.

‘여자애들 방인데?’

구성원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데, 1반의 여학생들 방이다.

문을 슬쩍 만져 보니, 열려 있었다.

‘짜식들.’

연기훈이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곤…….

“우웩!”

화장실로 향하다가 바닥에 토를 하는 지종수를 만났다.

난리가 난 건 지종수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술에 떡이 돼서 잔뜩 취해 있었다.

“뭐야? 담탱인데?”

“담탱이야?”

“담탱이야!”

연기훈을 발견한 정새롬과 심도훈이 실실 웃었다.

그게 연기훈의 인내심을 조각냈다.

“야, 이 새끼들아!”

* * *

“꼴이 좋구나.”

진유성은 혼이 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하는 곳은, 해남의 최남단의 이름 모를 섬.

입멸공이 잠들어 있던 위치였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