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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45화 (145/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45화>

Quest 27. 물 건너간 천마님

아놀드 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날 시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 오늘의 만남 때문에 발생한 일들을 처리하고, 한 달쯤 뒤에 다시 아멜라 메건과 찾아오기로 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한국에 방문했단 사실이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SG 차원의 일도 아니고, UN 차원의 일도 아니었다.

게이트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모인 비밀 집단의 일이었다.

“가라, 드벡아.”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엥?”

진유성이 배웅을 하다가 놀랐다.

아놀드 벡이 한국어로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말 할 줄 아네?”

“아멜라 메건의 정신 계통 스킬 중에 당신이 가진 언어 습득의 술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물론 당신이 메건에게 쓴 것처럼 단기간에 효능을 발휘하는 건 아닙니다. 스킬을 활성화한 상태에서 한 달 정도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흠…….”

진유성이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놀드 벡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한국어 능력을 숨긴 것에 대해 진유성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한국어를 쓰지 않은 건, 제 한국어보다 당신의 영어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 일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진유성이다.

그릇이 티스푼만도 못한 사람이니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관없고.”

“그럼 왜 그러십니까?”

“영어로 You라고 할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한국어로 당신이라고 하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약간 맞먹으려는 거 같잖아.”

“……그럼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믿는 신이 있으니 교주님이라고 하랄 수도 없고…….”

별 쓸데없는 걸 한참동안 고민하던 진유성이 말했다.

“Master.”

“마스터요?”

“어. 멋있잖아.”

“어, 네.”

진유성은 아놀드 벡의 무공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마스터란 표현을 써도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가라.”

아놀드 벡이 떠난 뒤, 진유성은 요리할 때 쓴 그릇, 냄비, 프라이팬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동안 요리 도구들을 쓸 일이 없으니, 깨끗이 씻어 놔야 했다.

‘다음엔 색목인 여자랑 같이 온다고 했지?’

그때 색목인 여자를 깜짝 놀라게 만들 요리를 준비해야겠다.

입멸공으로 달걀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들까지…….

“아.”

생각해 보니까 검이 없다.

그동안은 드벡이의 검 덕분에 입멸공을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말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유성의 인벤토리에는 수많은 검들이 들어 있었다.

아마 등급이 꽤 높은 아이템들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입멸공이 필요할 때마다 그런 검들을 일회성으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뭔가 좀 아까웠다.

진유성의 인벤토리에 있는 검들은 각성 마켓에 올린다면 수천만 원에서 수억까지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입멸공을 사용할 때마다 최소 수천만 원을 버리는 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너무 싸구려 검을 쓰면 입멸공이 발현되기도 전에 검이 깨져 버릴 수가 있었다.

입멸공이 발현되고 검이 부서지는 것과 입멸공이 발현되기 전에 검이 부서지는 것은 차이가 크다.

전자의 경우 검만 날려 버리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검과 함께 내공도 날려 버리는 것이다.

‘급할 때는 몸으로 쓰면 되긴 하겠지만…….’

이 역시 살짝 위험하긴 하다.

본래 입멸공은 입멸검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체를 기반으로 입멸공을 쓰다가 신체가 붕괴될 수도 있었다.

결국 진유성은 결론을 내렸다.

검을 얻어야겠다.

아놀드 벡이 가지고 있는 검처럼 꽤 쓸 만한 검을 몇 자루 구해 봐야겠다.

집에 가서 인벤토리도 좀 뒤져 보고.

결론을 내린 진유성이 천마신교 상가의 불을 모두 끄고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 * *

“유성아, 밥 먹었니?”

“어, 왔냐.”

집으로 도착하니 유혜연과 상소윤이 그를 반겼다.

“밥 먹었어요.”

“그래? 뭐 먹었어?”

“철분 가득한 볶음밥이요.”

“응?”

“볶음밥이요.”

“그래.”

진유성이 엉뚱한 소리를 잘한다는 걸 아는 유혜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때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사정없이 표정으로 신호를 보냈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방과 후에 JC 그룹의 회장과 만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만났는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진유성은 호기심을 표현하려 짜부라지는 상소윤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유혜연 몰래 얼굴로 신호를 보내는 걸 보니, 유혜연에게는 JC 그룹 회장이 찾아온 것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을 배려한 게 아닐까?

JC 그룹 회장이 어떤 일로 찾아왔는지 모르니 말이었다.

진유성이 여전히 얼굴로 신호를 보내는 상소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덜 박색하구나.”

“엥?”

“으엉?”

진유성의 입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유혜연과 상소윤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진유성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진유성이 떠난 거실.

상소윤과 유혜연이 눈빛을 교환하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가 아픈가?”

“그럴 수도 있어.”

“건강 검진이라도 받아 보게 할까?”

“에이, 엄마. 19살이 무슨 건강 검진을 받아.”

“아홉수잖아.”

“아, 그러네. 나도 아홉수라서 힘든가 봐.”

“뭐가 힘든데?”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

상소윤을 잠시 쳐다보던 유혜연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마야, 누나가 웃기고 자빠졌다. 그치?”

“아, 엄마!”

2층으로 올라온 진유성은 유혜연과 상소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모녀지간이다.

방으로 들어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유성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잡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유튜브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데, 자신이 핸드폰에 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 보인다.

순간 뭔가 싶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진유성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곤 하나의 사이트를 검색했다.

바로, 바둑 사이트였다.

‘인터넷으로 바둑이라니.’

진유성은 내심 혀를 찼다.

바둑이란 두 명의 명인이 기와 세를 부딪치며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하지만 진정한 명인들은 기세로도 속임수를 넣을 수 있다.

의도적으로 패색을 연기하며 함정을 팔수도 있고, 패싸움을 이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세를 드높이기도 한다.

그래서 바둑은 사활을 건 전쟁인 셈이었다.

병사는 돌.

전장은 판.

전리품은 승리.

사기(事記)는 기보(棋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진유성에게 인터넷에서 마우스로 두는 바둑은 성에 안 찼다.

원래 같으면 진유성은 바둑을 둘 생각을 안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수학여행에서 친구들이 말해 주었던 인공지능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인터넷 기사를 좀 찾아보니,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이미 바둑을 정복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최정상급 국수들이 인공지능 간의 대전 기보를 보면서 바둑 공부를 한다고 한다.

왜 인공지능은 여기에 수를 뒀을까? 라는 내용으로 프로 구(九)단들끼리 토론을 하기도 한다.

씁쓸한 이야기였다.

체스와 장기는 오래 전에 인공지능에게 정복당했지만, 모두가 바둑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체스와 장기는 말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한정되어 경우의 수를 산출할 수 있지만, 바둑의 경우의 수는 너무나도 방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 딥러닝을 개발하는 개발팀에서 바둑을 목표로 삼은 것이고.

물론 혹자는 바둑이 정복당한 게 아니라, 바둑 기사들이 정복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체스나 장기와 달리 아직 바둑의 필승법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인공지능이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올라간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

진유성만 빼고.

“흐음.”

바둑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팝업창이 떠올랐다.

3일 뒤부터 5급 이상의 유저들은 구글의 인공지능과 언제든지 승부를 벌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구글의 딥러닝 팀은 딥러닝 기술을 업그레이드시킬 때마다 각국의 바둑 사이트에서 실험을 한다.

이러한 실험은 인공지능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실험은 아니었다.

이미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고, 연산 속도나, 승리 확률의 계산에 대한 실험이었다.

처음에는 딥러닝 팀에서 인공지능 플레이어의 정체를 숨겼었다.

언젠간 중국의 바둑 사이트에 나타나 60연승을 하고 사라진 유저도, 구글의 딥러닝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홍보까지 하면서 인공지능 플레이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활동하는지를 공개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인공지능을 이길 시에는 꽤 큰 상금도 수여한다고도 밝혔다.

사람들이 점점 인공지능에 도전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다.

‘프로그램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5급 이상이 되어야 하는 군.’

인공지능과의 대전 요강을 읽어 본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디를 만들기 시작했다.

게임 아이디는 ‘Zi존천ㅁr’였지만, 이번엔 바둑인 만큼 조금 진지해지기로 했다.

[지존천마로 결정하시겠습니까?]

진지한 궁서체로 아이디를 만든 진유성이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상소윤이 들어왔다.

진유성은 상소윤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의자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JC 그룹 회장님이 뭐래?”

“사기꾼이었다.”

“엉?”

“상가 건물 때문에 찾아온 사기꾼이었다. 이상한 투자를 권유하더군.”

“아, 진짜? 어쩐지. 무슨 음식 한 번 먹었다고 학교에 찾아오나 했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진유성은 김정철 회장의 각성 마켓에 아이템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아니, 투자도 아니다.

그냥 제값을 받고 파는 것이니까.

아무튼 아놀드 벡이 각성 마켓을 암중에서 도울 것이니까 물건을 팔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김정철 회장의 마켓에 아놀드 벡의 검 같은 것이 올라오면 구입할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이 같은 부분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 사기꾼으로 퉁치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근데 뭐 하냐?”

“바둑을 한번 둬 볼까 했다.”

“잘 둬?”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내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느냐.”

“장기자랑.”

“……나가라.”

“근데 그때 공중 부양 어떻게 한 거야?”

“네 박색함을 보고 깜짝 놀라서 팔짝 뛴 거다.”

“뒤질?”

“오라버니한테 말본새가 험하구나.”

“아이고, 열흘이나 일찍 태어나서 기쁘시겠습니다.”

“그럼. 몹시 기쁘다.”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만약 자신이 상소윤보다 생일이 느리다면 상소윤이 족보상 손윗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그 뒤로 상소윤은 한참동안 진유성의 방을 기웃거리다가 사라졌다.

상소윤이 사라지자 진유성은 마침내 바둑 사이트에서 대전 찾기를 시작했다.

유저수가 꽤 많은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곧장 상대가 매칭되었다.

바둑 사이트의 신규 유저는 18급으로 시작하는데, 급수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같은 급수의 유저들과 10판을 대국해 60%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거나.

같은 급수의 유저들에게 5연승을 하거나.

같은 급수의 유저와의 대국에서 20집 이상 차이(기권 제외)로 3연승을 거두거나.

20집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건 꽤 큰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이니, 합당한 승급 방식이었다.

그렇게, 진유성의 첫 번째 바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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