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74화>
Quest 31. 찾아간 천마님
가정의 달이라는 수식어답게 5월은 이런저런 행사들이 많았다.
물론 어린이날은 건너뛰었다.
고등학생과 120대-어쩌면 130대-를 어린이라고 볼 순 없었으니까.
상림 가족이 챙긴 첫 번째 행사는 5월 8일인 어버이날이었다.
진유성은 유혜연과 상림에게 꽤 비싼 선물을 건넸다.
유혜연은 만삭이었기에 선물을 고르기 힘들어서 백화점 상품권을 건넸는데…….
“유성아.”
“네?”
“도대체 뭘 사라고 이렇게 많이 준 거니?”
“필요한 거 사세요.”
50만 원짜리 상품권을 무더기로 건넸다.
유혜연이 세어 보니 20장은 있는 것 같았다.
유혜연은 그 돈으로 뱃속에 있는 하마의 아기 용품을 살 예정이었다.
상림에게는 아주 비싼 시계를 사 주었다.
금전적인 크기에 별 관심이 없는 진유성도 깜짝 놀랄 만큼 비싼 시계였다.
상림은 그 시계를 받고 아주 기뻐했다.
자신의 돈으로도 살 수는 있지만, 돈 낭비라서 사는 일은 없었을 물건이니까.
그날 밤, 진유성은 상림을 불렀다.
“상림아.”
“예?”
“난 천마신교주고, 넌 천마신교도야. 그렇지?”
“……예, 뭐.”
상림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천마신교는 수십 년이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거의 혈서를 쓰고 가입한 마피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진유성이 강제로 혈서를 쓰게 만들 거니까.
“천마신교의 열 번째 교리를 기억하느냐?”
“열 번째요?”
다섯 번째까지는 대충 기억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면 기억이 잘 안 난다.
천마신교의 교리는 명나라를 통치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붙여 갔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교도는 천마신교주를 군주와 부모와 스승의 예로써 모셔야 한다.”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상림이 기억하기로, 이 교리가 만들어진 것은 주씨 황가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천마신교의 치세 초창기, 주씨 황가는 어떻게든 진유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진유성은 주씨 자손이 태어나는 순간 천마신교의 입단식을 치르게 만들었다.
입단식에서 모든 황족들을 모아 놓고 십계의 교리를 읽었는데, 그 마지막 교리가 이것이었다.
즉, 주씨 황가가 천마신교에 입단하는 순간 진유성을 군주이자 부모이자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황족들이 반발했고, 누군가는 자결을 통해 진유성을 비난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주씨 황가는 진유성의 압박에 굴복했고, 그게 끝이었다.
다음으로 주씨 황가는 진유성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진유성은 평소에는 유한 사람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궐기를 위해 자결한 황족이 나올 때도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진유성은 무림과 황가의 힘을 억눌러야지만 백성들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생각나요. 주씨 황가를 억누르기 위한 교리였죠?”
“무슨 소리냐!”
“네?”
진유성이 벌컥 화를 내자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진유성, 신주청, 상림이 천신궁에 모여서 저 교리를 궁리했었는데, 왜 화를 낸단 말인가?
“이는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아주 당연한 것이다! 교도가 교주를 부모로 모시는 것은 인의예지! 삼강오륜! 붕우유신! 또, 그, 음, UN 조약보다 중요한 것이다!”
상림은 교주님의 언어에 통달한 사람이다.
토익처럼 교익이 있었다면 만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도가 빤히 보인다.
왜 부모를 강조하겠는가?
오늘이 어버이날이라서 그렇다.
왜 어버이날을 강조하겠는가?
‘선물을 삥 뜯으려고.’
왜 이리 비싼 시계를 사 줬나 했는데, 이제 알겠다.
자기 거를 산 것이다.
“뷰우웅신…….”
“뭐?”
“붕우유신. 아주 중요한 덕목이죠.”
상림은 거부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반기를 들어 봤자 뭐 하겠는가.
뒤통수나 한 대 맞을 뿐이지.
상림은 방금 진유성에게 받은 시계 선물을 돌려주었다.
“커흠, 이게 무엇이냐?”
“생각해보니 교주님은 어버이와도 같은데 제가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송구하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시죠.”
“허어, 어찌 준 선물을 다시 뺏는단 말이냐! 그걸 본 네 안사람은 무어라고 생각할 것이고.”
“네? 그럼요?”
진유성이 상림에게 카톡을 보냈다.
상림에게 선물한 시계보다 명백히 한 단계 위인 시계의 카탈로그가 보였다.
가격이 거의 두 배 차이다.
“네가 고민을 할까 봐, 미리 골라 놓았다.”
“…….”
상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좋다.
자신도 선물을 받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왜 두 개의 버전을 보낸단 말인가?
“교주님, 카탈로그에 걸린 시계가 두 개인데요?”
“군주와 부모와 스승의 예라지 않았느냐!”
벌컥 화를 낸 진유성이 말을 잇는다.
“스승의 날이 머지않아 그것도 미리 골라 보았다.”
“…….”
어버이날에도 선물을 받고, 스승의 날에도 선물을 받겠다는 소리다.
지도 약간 멋쩍었는지 상림의 눈을 피한다.
상림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자신의 무공과 진유성의 무공의 차이에 대해서.
팔 한쪽을 내주면 한 대 때릴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상림은 결심을 내렸다.
“……주문하겠습니다.”
“내, 너 같은 교도를 얻은 것에 웃음이 절로 나는구나! 이리 오너라. 벌모세수를 해 주마.”
상림은 벌모세수를 받고, 방으로 돌아가면서 핸드폰을 두들겼다.
군신의 날.
군주의 날.
신하의 날.
다행히 한국에 그런 날은 없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기관진식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기관진식이 뭐야?”
“함정이라고 생각하거라.”
진유성의 말에 대정고 3학년 1반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스승의 날이 내일인 만큼, 다음 날 연기훈을 어떻게 골려 줄지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책의 중심에는 진유성이 서 있다.
진유성은 중원무림을 제패하고 대명제국의 황실을 제패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았을지는 일반인은 상상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성은 기관과 진법에 나름의 조예가 있었다.
연기훈을 골려 주는 것?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진법을 사용한다면 연기훈이 교무 건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유성의 자존심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진법까지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몇 가지 함정이면 충분하다.
“첫 번째는 목적이다. 죽일 목적인지, 부상을 입힐 목적인지, 저지할 목적인지에 따라 함정의 모양새가 천차만별…….”
간밍아웃을 하는 진유성의 말에 기겁을 한 상소윤이 말을 끊었다.
“어, 어제 전쟁 영화를 보더니 애가 미쳤네.”
“난 어제 전쟁 영화를 보지 않았다.”
“봤잖아! 밤에!”
“어제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 새벽에 봤잖아! 봤는데!”
상소윤의 말에 대정고 학생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새벽에……?”
“영화를……?”
“같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상소윤이 입을 다물었다.
한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새벽에 진유성을 보는 게 어색한 일이 아닌데, 남들이 듣기엔 충분히 어색한 일이니까.
두 눈을 부릅뜬 지종수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진유성은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목적이 중요하다. 이 경우에 우리의 목적인 담임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겠지.”
“두 번째는?”
화제를 빠르게 돌리는 상소윤의 말에 진유성이 대답했다.
“두 번째는 성공률이다.”
“성공률?”
“함정의 성공률. 세상에 100% 확률을 가진 함정은 없다.”
맞는 말이다.
지뢰만 하더라도 상대가 피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설령 밟더라도 불발이 날 수도 있다.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갈 수도 있고, 상대방애 해체해 버릴 수도 있다.
“상대를 죽일 거면 백 개의 함정 중 하나만 성공해도 되는 거다. 그 하나로 목적이 달성되니까. 상대를 저지할 것이면 성공률이 0%여도 상관없다. 발을 묶어 놓는 목적이니까.”
“그럼 마지막은 뭐야?”
심도훈이 흥미를 담아 물었다.
별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진유성이 끊임없이 간밍아웃을 하고 있다는 상소윤의 걱정과 다르게, 대정고 학생들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진유성은 전 과목 100점을 맞은 전교 1등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책도 많이 읽는다.
다들 진유성이 전쟁과 관련된 책을 섭렵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대상의 성향이다. 대상이 예민한지, 호방한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지, 패퇴를 거듭 중인지를 잘 고려해야 한다.”
“우리 담임은 예민하지만 승기를 거듭 잡은 타입이네?”
대정고 출신인 연기훈은 그동안 스승의 날 장난에 당해 준 역사가 없다.
학생들의 수를 훤히 들여다보듯 비웃었고, 모든 함정을 회피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고?”
“너희들이 뭘 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렸지.”
“글쎄? 다른 반 애들은 출석부 열면 잉크 터지게 만든다던데.”
“문 열면 밀가루 떨어지게 한다던가.”
“자동차 타이어 터트린다는 놈들도 있던데.”
“에이, 그건 좀 그렇다.”
“방석 먹물이란 게 있대. 앉으면 바지 엉덩이 부분에 먹물 묻어나오는.”
학생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진유성이 담담히 물었다.
“그러니까 얼굴에 잉크가 묻고, 머리에 밀가루가 묻고, 엉덩이에 먹물이 묻으면 되는 거냐?”
“이거 하나도 안 당할걸? 우리 담임이 어떤 사람인데.”
“걱정하지 마라.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있다.”
진유성의 자신만만한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지종수가 물었다.
“뭔데?”
진유성의 말에 학생들이 경악했다.
“미친놈이냐?”
“함정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쉿. 성공하면 그만인 거다.”
진유성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 * *
대정고로 출근한 연기훈은 피식 웃었다.
대정고 선생들은 지정된 주차석이 있다.
당연히 학생들이 장난을 치기 좋은 장소이다.
심지어 작년에는 보도블록을 들어내고 물로 채워 놓은 또라이도 있었다.
그러나 연기훈은 오늘 자동차를 가지고 출근하지 않았고, 평소에 걷는 루트로 교무 건물로 가지 않았다.
걸어서 출근해서 정반대로 빙 돌았다.
“뻔하지, 뭐.”
다음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교무실에 도착한 그는 장갑을 꼈고, 방석을 확인했고, 출석부를 조심히 열었다.
한데…….
‘왜 아무 것도 없지?’
아무런 함정이 없다.
학생들이 장난을 비웃어 주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훈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평소에 가는 교사 화장실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했고, 아침 조회를 위해 3학년 1반으로 가면서도 매사에 조심했다.
“흠.”
장갑을 끼고 문고리를 만져 보니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는다.
바닥도 안 미끄럽다.
머리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문을 열면 뭔가가 떨어질 것 같지도 않다.
‘이 기분은…….’
서운하다.
다른 학급의 담임들이 이런저런 함정에 당하는 걸 보고 혀를 찼는데,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다니.
설마 스승의 날인데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건가?
연기훈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3학년 1반에는 대정고 역사상 최악의 빌런이 있다.
그 자식이 분명 뭔가를 할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연기훈은 장갑을 낀 손으로 교탁을 쓸어 보았는데, 페인트 같은 건 없었다.
“왜…….”
왜 아무 것도 안 했는지를 물어보려던 연기훈은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3학년 1반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아침 조회 시간이다.”
그때였다.
연기훈의 등 뒤에서 진유성이 나타난 게.
“선생님.”
홀연히 나타난 진유성이 연기훈에게 커다란 케이크를 건넸다.
“저희를 지도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진유성은 사제 관계의 무거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부탁에 따라 함정을 파놓은 것과는 별개로 스승이란 존재는 존경받아 마땅한 자리다.
진유성의 말 속에서 진심을 느낀 연기훈은 감동했다.
그리곤 반성했다.
연기훈에게 진유성은 오늘 가장 경계하는 1순위의 인물이었다.
한데 이리 공손히 케이크를 주다니.
“……고맙다.”
감동한 연기훈이 케이크를 받는 순간이었다.
진유성이 다짜고짜 연기훈의 머리에 밀가루를 팍 하고 뿌렸다.
“큽!”
코에 밀가루가 들어간 연기훈이 숨을 멈추자, 이번엔 얼굴로 잉크가 날아왔다.
“컥!”
마지막 마무리는 엉덩이로 날아온 먹물이었다.
촥!
“찰지십니다.”
소리가 찰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3학년 1반 학생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했어…….”
“미친놈…….”
“또라이 새끼…….”
“이게 어떻게 몰래카메라야…….”
학생들이 경악했지만, 진유성은 태연했다.
함정의 미덕은 그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성공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다면 사람이.
기계가 할 수 있다면 기계가.
“야, 이……!”
정신을 차린 연기훈이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진유성이 수건과 선물을 내밀었다.
연기훈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브랜드의 옷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
연기훈은 태연한 진유성을 보며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
문을 열 때 밀가루 봉지가 터지는 건 허용이고, 손으로 뿌리는 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먹물 방석은 허용이고, 손으로 뿌리면 안 된다는 것도 묘하다.
근데 이건 뭔가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해하다.
분명 화를 낼 타이밍인데…….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연기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진유성이 내민 선물을 받았다.
그렇게 대정고가 없어지는 날까지 수도 없이 회자될 스승의 날 전설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