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80화>
* * *
진유성은 완성된 무인이다.
그는 평소에 드라마를 보며, 친구들과 놀며 감정 기복을 드러낸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릴 때도 있으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트릴 때도 있다.
일희일비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유성의 무심(無心)은 완벽하다.
무심이란 아무런 마음도 갖지 않았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을 비우고 냉철하고 냉정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외부의 충격에도 심동과 무심동을 완벽하게 조율하며, 의념지경과 생사결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
무심지경(無心之境).
진유성은 입멸공을 얻기 전부터 무심지경을 완성한 사람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공에 입문하기 전부터 무심지경을 체득하고 있었으며,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금세 그것을 무공에 녹여 냈다.
본인보다 강한 상대를 수없이 죽인 진유성의 승부사 기질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무심이 깨어진 순간은 딱 두 번밖에 없었다.
하나는 이름 모를 화전민 모녀가 생존대를 숨겨 주다가 대신해서 죽었을 때.
둘은 주혜미가 죽었을 때.
그 외에는 진유성의 무심이 깨어진 적이 없었다.
주혜미가 죽은 지 어느덧 80년이 지났으니, 80년 동안 그의 무심이 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유성의 무심이 깨졌다.
“네가……!”
로스차일드의 새까만 영기에서 튀어나와 진유성의 검을 막아 낸 남자.
그가 바로.
신주청이기 때문이었다.
“주청아!”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
진유성의 눈빛과 신주청의 눈빛이 마주했다.
그리고…….
진유성은 신주청의 눈빛에서 살기(殺氣)를 읽었다.
* * *
[죽을 뻔했군.]
여유를 되찾은 로스차일드가 몸을 털었다.
그러자 영기로 이루어진 영혼체에 박힌 진유성의 심검이 떨어져 나간다.
놀라운 일이다.
중원의 절대자는 심검을 통해 자신의 영기를 흩어 버릴 수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중원의 절대자가 가진 의념의 집중도가 자신이 품은 마도 역량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컨디션을 제 정비하는 로스차일드를 보며 신주청이 비웃었다.
“죽을 뻔했군?”
[젠장. 방심했다.]
진유성을 얕봐서 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방심은 진유성의 단호함이었다.
로스차일드는 진유성이 그들의 계획을 알던 모르던,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고?
그들은 영생을 이룩하는 길을 걷고 있으니까.
영생(永生).
모든 절대자들의 숙명.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도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먼지로 바스라진다.
자신의 힘이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연속성이 없으면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 뿐이다.
그러니 로스차일드는 진유성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스차일드는 실제로 진유성과 손을 잡고 첫째를 소멸시킨 후, 함께 신이 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세쌍둥이 마도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건 도플갱어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하다.
진유성은 그들과 완벽히 다른 존재이니, 손을 잡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는 방심했다.
진유성이 품은 정의는 절대 퇴색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마도사들이 지구를 착취해 신성을 획득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시기적절하게 월성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자신은 순식간에 소멸당했을 것이다.
실로 믿기지 않는 강함이었다.
그때였다.
“주청아!”
진유성이 입을 여는 순간, 월성의 온몸에서 끔찍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진유성은 살기를 마주하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신주청은 로스차일드의 영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적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주청이가 아닐 확률은?’
잘 모르겠다.
외양 자체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키가 더 크고, 이목구비도 미묘하게 다르다.
눈빛은 냉랭하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그러나 지닌 바 무공에서 신주청의 향기가 진하게 났다.
외모가 닮을 수는 있지만, 무공이 닮을 수는 없다.
똑같은 무공을 익혀도 무인마다 풍기는 냄새가 전부 다르기 때문이었다.
지구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진유성의 생존 본능에 경각이 울렸다.
그가 알던 신주청보다 확연히 강하다.
아무래도 벽을 넘은 것 같다.
‘승률은?’
신주청과 일대일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신주청과 로스차일드가 힘을 합쳤을 때는 미지수다.
두 사람의 합격이 얼마나 능숙하느냐에 따라 승률이 갈린다.
신주청과 로스차일드.
진유성.
폭이 좁은 삼각형 형태로 서있는 세 사람 사이의 공간이 요동쳤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더니, 산소가 연소하며 불꽃이 튄다.
무형의 기운들이 충돌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강하군.]
가장 먼저 뒤로 물러선 것은 로스차일드였다.
이 대 일의 기세 싸움에서 진유성이 승기를 잡았다.
[그나저나 옛 수하를 만났는데 너무 정이 없는 거 아닌가?]
로스차일드가 진유성의 평정심을 흐트러트리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기세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한 기운이 신주청과 로스차일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유성도 신주청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죽었다고만 생각한 신주청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왜 지구에 있는지.
어째서 마도사들과 손을 잡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자신에게 살기를 뿜는지.
많은 것이 궁금했다.
상림을 만났을 때처럼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호기심을 뒤로 미뤘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모두가 머뭇거릴 때 한 걸음을 더 내딛을 수 있는 사람.
그게 진유성이다.
그그그그그-!
천지사방을 가득채운 무형의 기세가 신주청과 로스차일드를 향한 공세를 취했다.
진유성에게는 마도사들을 추적할 마땅한 방도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로스차일드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팟!
신주청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검기는 진유성의 기세를 거슬러 오르더니 심장을 노렸다.
예리한 일격에 진유성의 공세가 수세로 돌아섰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신주청은 벽은 넘었다.
신주청이 처음으로 진유성을 향해 말했다.
“네가 서울역의 왕후인가?”
“뭐?”
“찌꺼기인 줄 알았는데……. 상실의 공간을 넘은 본체였군?”
“너는 신주청이냐?”
“중원에서는 그 이름을 썼지.”
“네가 신주청이라고 자신할 수 있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자신하냐고? 그것 참 철학적인 질문이군.”
진유성은 문득 멸마대와 생존대에서의 신주청이 떠올랐다.
본래 신주청은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차가운 말투로 독설을 내뱉을 때면 쉽게 사람들의 분노를 사곤 했다.
진유성을 대주로 인정한 이후에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넌 죽었잖아?”
“그건 죽음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 질문이지.”
진유성은 신주청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지금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아니다.
“신주청. 넌 멸마대를 기억하나?”
“기억한다.”
“생존대를 기억하고, 정도맹에게 쫓기던 시절을 기억하나?”
“물론, 기억한다.”
“그렇다면…….”
진유성이 두려움을 떨쳐내고 물었다.
“날 기억하나?”
신주청이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진유성을 쳐다보며 답했다.
“물론 기억한다. 미혹(迷惑)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 긴 시절을.”
“미혹……?”
“왕후.”
“난 진유성이다.”
“아니, 넌 왕후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네가 이름을 되찾은 건 전부 입멸공 덕분이니까.”
“뭐?”
“해남도의 이름 모를 섬에서 입멸공을 얻는 건 나였어야 했다. 네가 아닌 내가! 그 힘을 얻었다면!”
고오오오오-
신주청의 몸에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심장이 약동하듯, 로스차일드의 영기가 일정하게 진동한다.
순간, 진유성은 신주청과 로스차일드가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힘을 공유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욱 깊고 근원적인 무언가를 공유한다.
신주청이 선언했다.
“내가 중원의 절대자가 됐을 것이다!”
“…….”
한동안 침묵하던 진유성이 말했다.
“주청아.”
“꽤나 다정하군?”
“상실의 공간에서 무엇을 잃었느냐?”
“난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 다만, 미혹을 벗어 던질 수 있었지.”
그 순간, 진유성은 신주청이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실은 공간은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야 한다.
아마 신주청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바로 자신, 진유성을 향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신주청은 그를 경애(敬愛)했으며 존경(尊敬)했고 우정(友情)했다.
신주청은 자신의 인생을 오롯이 진유성을 향해 바쳤다.
진유성이 세운 큰 뜻에 공감했으며, 진유성의 신념에 인생을 불태웠으며, 홀로 남을 진유성을 위해 벽을 넘다가 소천했다.
그러나 지금의 신주청의 그 모든 마음을 잃어버렸다.
상실의 공간에서의 상실은 부재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유성을 향한 모든 마음을 잃어버린 신주청은 어땠을까?
자신이 인생을 바쳤던 이유가 모두 허망해지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한 이유가 한 줌의 가치조차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진실로 미혹(迷惑)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증오를 품었을 것이었다.
자신을 미혹한 존재.
자신의 인생을 농락하고 마음대로 이용한 존재.
진유성을 향한 증오를.
“아아…….”
진유성은 분노를 느꼈다.
신주청은 그의 형제이자, 친우였다.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상림을 비롯한 생존대원들이 자신의 뜻에 공감하면서도 적당한 행복을 찾아 살았다면, 신주청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인생을 진유성에게 바쳤다.
그러나 신주청의 숭고한 희생 정신은 모두 허망한 것이 되었다.
상실의 공간 때문에.
또한, 로스차일드 때문에.
“네가 주청이를 상실의 공간에 밀어 넣었냐?”
진유성의 스산한 살기가 로스차일드에게 향하자, 로스차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상실의 공간은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설령 억지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통과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튕겨져 나오기 마련이지.]
상실의 공간을 관리하는 이는 두 차원의 위상 다름을 수호한다.
차원을 오가는 이들의 수가 많아지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스륵.
진유성을 가만히 쳐다보던 신주청이 검을 갈무리했다.
“왕후. 오늘은 끝을 볼 날이 아니다.”
신주청이 창문 너머의 멕시코시티를 쳐다보았다.
멕시코로 귀화한 콜 헨드릭이 죽었고, 멕시코를 지배하던 엔리케 카를로가 죽었다.
이는 각성 세계에 막대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무주공산이 된 멕시코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국가도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사망에 대한 온갖 낭설도 나돌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은 시점에 아포칼립스가 시작된다.
신주청이 진유성과 끝을 보는 날은 아포칼립스가 시작 되고, 전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다.
지구가 무너지느냐, 혹은 살아남느냐.
거대한 결말을 두고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진유성을 죽인다고 해도 미혹에 휩싸였던 지난 시절의 보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신주청과 로스차일드가 사라지려는 순간.
“주청아.”
“자꾸 친근하게 부르는군.”
“가능하면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진유성이 입멸검을 움켜쥐며 말했다.
“다음엔……. 죽일 거다.”
신주청은 진유성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그런 인물이니까.
전 지구의 인구와 한 사람의 생명을 두고 저울질하지 않는.
“바라는 바다.”
그렇게 신주청과 로스차일드가 사라졌다.
전 세계에 엔리케 카를로의 죽음이 발표되기 30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