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88화>
* * *
12층에 도착한 문수혁은 한지후 소장의 방에 들어가는 대신,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생각에 잠겼다.
‘진유성.’
우연히 듣게 된 이름이 맴돈다.
만약 문수혁이 길에서 진유성이란 이름을 들었다면 별다른 생각을 안했을 것이었다.
희귀한 이름이 아니니, 그저 동명이인이라고 여겼겠지.
그게 아니라면 얼굴 정도를 확인한 뒤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문수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고등학생이 독도 게이트의 진유성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증거보다 확실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름이 같아서도 아니고, 키가 비슷해서도 아니었다.
이곳이 SG라서도 아니고, 그가 각성자로 신고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감각.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고, 승모근이 뻣뻣해지며, 온몸의 근육이 무거워지는 감각 때문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문수혁 스스로가 신체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각성자들이 유전학적으로는 인간과 똑같다고 말을 한다.
각성자들이 내는 힘은 인간 신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뭔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소리였다.
즉, 모든 인간은 똑같은 기종의 컴퓨터지만, 각성자들은 외부 기계를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각성자들 중에는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과학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 각성 전과 다른 존재가 됐다는 것을 느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체를 통제하는 능력.
각성자들도 인간인지라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고, 크게 긴장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요동쳐도 각성자들의 신체는 일관된 반응성을 갖는다.
순간 반사 신경을 재는 테스트를 한다면 100번을 해도 100번의 결과가 거의 비슷하다.
이런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각성자들에게 랭크가 매겨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각성자의 랭크가 올라갈수록 뚜렷해지는데, 문수혁은 최상위인 SS급의 각성자였다.
그러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가 긴장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도 S급 게이트의 진유성이라면.’
우산도 멤버들에게 천외천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던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는 단신으로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문수혁은 엘리베이터의 고등학생을 진유성이라고 확신을 한 것이었다.
“허, 참.”
하지만 정말 어이없다.
어떻게 그 남자가 고등학생일 수 있지?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학생으로 위장을 한 것일까?
외모 자체는 10대보다는 20대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래 봐야 20대 초반이었는데?
문수혁은 진유성의 나이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딴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진유성을 파고들 것이냐 파고들지 않을 것이냐다.
정보는 충분하다.
대정고의 진유성.
방금 SG에서 검사를 받았으니, 인적 사항도 남아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위장된 신분일지라도 충분한 단서가 된다.
그러니 진유성과 접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문수혁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문수혁은 아놀드 벡과 아멜라 메건이 언노운 엠페러를 찾으려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황상 찾지 못한 것 같다.
언노운 엠페러를 찾았다면 SG를 대표하는 아놀드 벡이 조용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SG에 영입하고자 노력했겠지.
이는 아놀드 벡이 정확히 뭘 추구하는지를 모르는 문수혁의 착각이지만, 팀 우산도 멤버들의 중론이기도 했다.
“으음…….”
문수혁이 소파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한지후 소장이 다가왔다.
화장실에 가려다가 우연히 문수혁을 발견한 것이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고민 중입니다.”
“뭘요? 멕시코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할지요?”
“아뇨. 더 중요한 걸 고민 중입니다.”
문수혁의 말에 한지후 소장은 어깨만 으쓱할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이것이 각성자들이 한지후 소장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보통의 실무자들이나 정치인들은 각성자들을 도구처럼 취급할 때가 많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
게이트 사태에 적응해 탄생한 열쇠들.
문제는 이러한 취급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각성자들의 인간성보다 필요성을 크게 여긴다.
이 때문에 각성자들은 종종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한지후 소장은 아니었다.
문수혁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얼버무리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문수혁이란 사람의 ‘인간적인 고민’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별것 아님을 수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무슨 고민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고민은 원래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보통은 놔두면 해결되죠.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흐음.”
“고민은 나중에 하시고, 일 이야기나 좀 해 보시죠. 멕시코는 어땠습니까?”
“멕시코는…….”
문수혁이 자신이 멕시코에서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를 철혈 통치하던 엔리케 카를로의 사망 이후, 멕시코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게이트가 폭주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각성자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서 너도 나도 게이트를 클리어하려고 했다.
문제는 게이트를 클리어할 순서에 대한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난이도가 높지 않고, 돈도 벌 수 있는 D, E급 게이트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반대로 위험도가 높거나, 가치가 낮은 C, F급 게이트는 지원자가 적어 간신히 클리어되고 있었다.
이는 그동안 엔리케 카를로가 자신의 수하들에게만 돈 되는 게이트를 배분한 탓이었다.
“이러다가 A급처럼 위험한 게이트 열리면 방치될 것 같기도 합니다.”
“흐음. 문제가 있군요.”
“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실물 경제가 반병신이 됐다는 겁니다. 콜라 한 캔 가격이 얼만지 아십니까?”
“얼만데요?”
“저도 몰라요. 멕시코 화폐라서.”
“…….”
“아무튼 엄청 비싸다고 합니다.”
“달러로 사도 비쌉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달러로 사면 가격이 비슷할 거예요. 좀 오르긴 했어도.”
“국내 통화의 인플레이션이 어마어마하다는 거군요. 지폐가 휴지 조각이 되는 것도 머지않았고.”
“일단 SG가 각성 마켓을 이용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서 폭동이 일어나진 않는데, 실물 경제가 망가질수록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잖습니까?”
“그렇죠.”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SG와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열어서 멕시코에 진출할 거니까. 아마 안정이 될 겁니다.”
“그래요?”
“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죠.”
문제는 세계의 실물 경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가 자유 각성 상태에서 기업들의 무한 경쟁이 허용되면, SG 체재 아래에서 벌었던 돈보다 훨씬 큰돈을 벌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말레이시아나 온두라스 같이 각성 국력이 약한 나라가 멕시코의 뒤를 따르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물론 멕시코는 무정부 상태에서 진행된 자유 각성 국가이고, 다른 나라들은 정부의 주도 하에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각성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결국 이는 연쇄 작용을 일으켜, 국가 주도 하의 각성 사회로의 재편이 시작될 것이었다.
SG의 몰락을 뜻했다.
한국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SG가 없어지면 각성 국가들은 각성 자치 국가가 되고, 연대가 없어진다.
국가들 간의 무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 이게 그 정도 문제의 시발점이었나요?”
문수혁이 한지후 소장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치인들이 멕시코 사태를 두고 떠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 줄은 몰랐다.
문수혁은 영리한 사람이었지만, 정치적인 식견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한국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각성자들이 팀 우산도란 깃발 아래 모여 있는 형태니까요.”
문제는 일본이나 스페인 같은 국가에 있다.
일본과 스페인은 각성자들이 지역으로 파벌이 나뉜 대표적인 국가였다.
각성 사회 초창기에 정부가 대응을 잘못해서 지역 단위로 각성자들이 뭉쳤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중국입니다. 중국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어요.”
“중국이 왜요?”
“중국은 일찌감치 SG를 벗어나 독립적인 CSG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북한을 반쯤 지배하고 있죠. 북한이 SG 소속이 아니니까.”
CSG가 경거망동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전 세계의 연대인 SG를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국이 거대한 국가라고 해도,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SG가 사라지고 국가 자치 각성 사회가 벌어지면 CSG가 막대한 우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SG가 사라지고, 국가들끼리 쪼개지고 화합하는 와중에 중국은 웃을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 3명뿐인, 아니 2명뿐인 SSS급 각성자를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아놀드 벡의 보호가 SG 소속 국가 전체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섣불리 움직이면 SG가 보복을 할 거니까요.”
“그 말은 곧, SG 연대가 없어지면…….”
“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무소불위의 패권을 쥐게 되는 거죠. SSS급 각성자가 중국에만 있으니까. 중화 침략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SG가 약화되어가는 지금, 한국 정부는 고민이 많았다.
“중국의 야욕을 보건대,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쉰 한지후 소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언노운 엠페러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한국에 SSS급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국에 대한 억제력이 생기니까요.”
언노운 엠페러의 각성 등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SSS급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독도 S급 게이트를 클리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SSS급 이상일 수도 있었다.
한지후 소장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것들을 걱정했고, 문수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문수혁의 입이 열린 것은 잠시 뒤였다.
“소장님, 언제는 걱정이 쓸데없는 거라면서요?”
“그거야 개인적인 걱정에 대한 이야기죠. 정치적인 걱정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문수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끝이 났다.
아무래도 진유성을 만나야겠다.
진유성이 무슨 이유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른다.
진유성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을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쯤은 진심으로 대화하는 게 필요할 듯싶다.
대외적으로 팀 우산도는 99명의 각성자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브레인인 한지후 소장의 이름을 넣어서 <100명의 영웅들>이라는 수사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팀 우산도의 각성자는 99명이 아니다.
또한 팀 우산도의 리더는 문수혁이나 차정명이 아니다.
언노운 엠페러, 진유성.
100번째 영웅이자, 팀 우산도의 진짜 리더.
문수혁은 진유성을 만날 생각이었다.
“어디 가세요? 멕시코 출장 보고하셔야 하는데?”
문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지후 소장이 물었다.
“보고는 내일 하죠.”
“안 돼요. 외교부장관님이 오늘 꼭 직보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장관님 번호 좀 줘 보세요.”
“국가 기밀.”
“그럼 문수혁이 피곤하다고 잠수 탔다고 하세요.”
문수혁을 쳐다보던 한지후 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중간 관리자를 하면 안 되는데.”
그러나 한지후 소장은 문수혁에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SG를 나와서, 택시를 타고, 압구정으로.
아마 1시간 전쯤 진유성이 이와 똑같은 루트로 움직였을 것이었다.
문수혁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대정고로 향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뒤, 문수혁의 연락을 받은 차정명도 대정고로 출발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랭킹 1위와 2위의 각성자들이 언노운 엠페러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