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07화>
Quest 36. 인연 속 천마님
아놀드 벡은 ‘진유성’이란 사람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진유성은 존재 자체가 미증유이며, 스스로 밝힌 삶의 기록은 신화에 나올 법한 것이다.
만약 진유성이 뒤끝이 길고, 장난기가 많으며, 지나치게 어려 보이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헤라클레스 못지않은 영웅 서사시처럼 여겨질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진유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을 믿게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아놀드 벡은 이야기의 순서를 정했다.
가장 처음 이야기할 것은 진유성에 대해서가 아니다.
게이트의 기원에 대해서였다.
“여러분도 느끼지 않았습니까? 게이트가 게임 시스템이나 컴퓨터 시스템의 것들을 차용한 부분이 있다는 걸.”
게이트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존재라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해 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게이트 제작자가 누굴까?
근거는 없지만, 답은 뻔하다.
외계인 혹은 신.
“마도사들은 지구와 쌍둥이처럼 닮은 다른 행성에서 왔습니다.”
아놀드 벡은 진유성에게 들은 상실의 공간이나, 위상의 수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너무 복잡해진다.
하지만 마도사들이 외계인 같은 존재라고 하면 받아들이기가 쉽다.
이 넓은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지구인뿐이라는 생각은 오만하니까.
아놀드 벡의 어투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동안 각성자들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며 품었던 의문들에 대해서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이야기를 믿든, 믿지 않든, 그럴 듯한 이야기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문수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언노운 엠페러는 누굽니까?”
“마도사들과 같은 곳에서 온 사람입니다. 시대는 다르다고 하더군요.”
아놀드 벡이 소설 <지존천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놀드 벡은 한글을 읽지 못해서 지존천마도 읽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다.
지존천마의 내용이 진유성의 실화라는 말에 각성자들 중 대다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려의 왕자였다고?’
너무 허황된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어떻게 그런 허황된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허황됐으니까요.”
“네?”
“대부분의 허황된 말들은 사기입니다.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이 경우에는 대체 무슨 이득을 본단 말입니까?”
“언노운 엠페러가 저희를 속여서 이용하려 들 수도 있죠.”
“여러분의 무엇을 이용한단 말입니까?”
각성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저희는 하이랭커와 랭커 집단입니다. 가치가 없을 수가 없죠.”
“아뇨. 진유성에게 우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놀드 벡이 단언했다.
“제가 본 진유성은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가정 하에, SG 전체와도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전면전으로 붙으면 진유성도 사람인 이상 지칠 것이다.
하지만 싸우다 도망치고, 싸우다 도망치고를 반복하면?
인류는 진유성이란 재앙을 막을 수가 없다.
“오래된 중국 영화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홀로 백 명과 싸우는 이를 일당백이라고 하고, 홀로 천명과 싸우는 이를 일기당천이라 한다.
그리고 만 명과 싸우는 사내를 만부부당이라고 한다.
아놀드 벡이 거기에 덧붙였다.
“진유성은 그 뒤에 어떤 숫자를 넣어도 무방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인류란 단어를 넣어도.”
“그런 게…….”
이 말을 한 사람이 아놀드 벡이 아니라면 모두 코웃음을 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놀드 벡이다.
인류의 정점으로 평가되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그가 언노운 엠페러를 오롯이 올려다보고 있다.
그 어떤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언노운 엠페러와 싸워 보셨습니까?”
“첫 만남에서 싸웠죠. 그가 죽이고자 했다면, 전 1초 만에 살해당했을 겁니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끝난 것은 아놀드 벡이 소설에 나오지 않은 진유성의 인생에 대해 설명하면서였다.
그리곤 지구에 도착한 이후 진유성의 행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럼 서울역 1차 비징후 게이트에서 진유성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있겠군요?”
“네. 개중 소수가 각성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울역 1차 비 징후 게이트에 들어간 이들은 CSG 소속인 강새룡을 제외하면 모두 민간인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각성했지만, 대부분은 민간인으로 남았다.
진유성 혼자서 거의 다 클리어하면서 레벨업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김인창. 그분이 서울역 1차에서 각성하지 않았나?”
“한 소장님 육사 선배?”
“어, 맞다. 인창이 형, 서울역 각성자였어.”
김인창은 각성자들에게 꽤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각성자였다.
천성이 정의롭고, 신중하다.
다른 게이트 클리어에 투입되지 않았으면 분명 독도 S급 게이트 클리어에 자원했을 인물이었다.
“지금 불러 볼까?
“게이트 스케줄 없을까?”
“없어. 나랑 같이 수원 게이트 클리어했으니까, 지금 비번이야.”
각성자들이 교차 검증이 가능한 인물인 김인창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뒤로도 아놀드 벡의 입을 통해 진유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 그럼 그게…….”
진유성의 이야기는 그동안 각성자들이 궁금해하던 부분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그동안 왜 정체를 숨겼는지.
왜 서울역 2차 게이트에서 문수혁의 방패를 부수고, 차정명의 검을 훔쳤는지.
독도 S급 게이트가 클리어되고, 왜 게이트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지.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산도 멤버들의 감상은 반반이었다.
믿는 이들과, 믿기 힘들지만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물론 여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는 소수였다.
아놀드 벡쯤 되는 사람이 진유성을 완전히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묘한 감흥 속에서 누군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한데, 그럼 진유성이 저희를 부른 이유는 뭡니까? 행적을 보면 원래는 각성 사회에 관여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때, 문이 열리며 진유성과 상림이 펜션 안으로 들어왔다.
진유성은 방금 질문을 던진 각성자를 흘겨보았다.
추천 게시판에 독후감도 쓰지 않은 불순분자였다.
“야.”
“네?”
“너 몇 살이야.”
“……서른하나인데요.”
“근데 어디 건방지게 이름을 막 불러? 진유성? 내가 네 친구야?”
“그게…….”
“야, 내가 여기서 살았잖아? 그럼 1900년대 사람이야. 1900년대면 일제 강점기지?”
대정고 전교 1등다운 물음에 옆에 있던 상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내가 여기 있었으면 강점기란 단어 자체가 없었지. 다 쫓아냈을 거니까. 알아?”
“…….”
진유성은 각성자를 갈구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한국은 첫 만남에 나이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진유성은 ‘열아홉’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상대가 반말을 한다.
자신의 인생의 20%도 살지 못한 놈들이 말이다!
진유성의 말에 각성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합니까?”
“드벡이처럼 마스터라고 부르던가.”
“마스터……?”
오그라드는 칭호에 각성자들이 인상을 찌푸리자, 진유성이 양보했다.
“그럼 교주님이라고 부르던가.”
“저는 믿는 신이 있는데…….”
“그럼 지존.”
“그건 좀.”
“어쩌라고!”
진유성이 벌컥 화를 내자 각성자가 찔끔 놀랐다.
말로만 화를 낸 게 아니라 순식간에 기세를 올려서 무형지기로 상대방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각성자는 땀을 뻘뻘 흘리다가 교주님으로 합의를 보았다.
마스터와 지존은 너무 오그라드니까, 차라리 교주님이 낫다.
호칭이 결정되자 몇몇 각성자들이 흥미로운 듯 말을 보탰다.
“그럼 우리가 천마신교 한국 지부가 되는 건가?”
“그게 뭔데 씹덕아.”
“뭐? 너 형한테 뭐라고 했어. 뒤지고 싶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인터넷 밈인데…….”
“밀어? 뭘 밀어?”
“아, 형님. 인터넷 좀 하세요. 맨날 무협 소설이나 보지 말고.”
그 모습을 본 상림이 진유성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교주님.”
“왜?”
“저희의 천마신교는 위계질서가 중요한 집단이 아니겠습니까?”
“그치. 중요하지.”
“입교 순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제가 천마신교의 2인자가 맞죠?”
“아닌데?”
“네? 왜요?”
“원래 천마신교는 내 밑으로는 다 평등한 거야. 나만 특별하고.”
“…….”
상림은 그동안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집에도 살게 해주고, 핸드폰도 만들어 주고, 나가서 놀라고 돈도 주고, 학교도 보내 줬는데.
역시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교주 놈,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다.
상림의 입이 댓 발 나왔지만, 진유성은 개의치 않았다.
상림이 삐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참 속이 좁고, 그릇이 작다.
저런 그릇으로 무슨 큰일을 하겠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너희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문수혁한테 말한 적도 있고.”
“그게 뭡니까?”
“내가 너희들의 목숨을 한 번 구했지?”
진유성의 말에 우산도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성이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독도 S급 게이트.
그 끔찍했던 몬스터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자다가 깬다.
그들의 옆에 진유성이 없었다면?
모두가 죽었을 것이었다.
이건 추측의 영역이 아니라, 확실의 영역이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한 번은 목숨을 걸어라.”
“어디다가 걸라는 말입니까?”
“그건 너희가 판단해.”
“네?”
뜬구름 잡는 소리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유성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어디다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끝까지 모른다면, 그건 자신이 아무 문제없이 마도사들을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도사들이 발악을 한다면, 우산도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어디다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일이 하나 있다. 이건 너희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뭡니까?”
“군대.”
“네?”
“나 군대 좀 빼 줘.”
“……?”
“나 군대 가기 싫어. 난 멸마대라는 부대에서 이미 7년간 복무했던 사람이다.”
“군대를 왜 가요?”
“여기, 이 대머리 보이지?”
진유성이 상림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 대머리가 능력이 없어서 본 교주에게 미필자의 신분을 주었다.”
“아니 제가……!”
“대머리의 부족한 능력을 너희가 좀 보강해야겠다. 교도들이 힘을 합치란 소리지.”
“교주……!”
“본 교주는 굳게 믿고 있겠다.”
상림은 억울했다.
진유성의 신분이 고등학생인 것은 외조카라는 설정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물론 약간의, 아주 약간의 사심은 있었지만.
그때 뉴에라를 뒤집어쓴 20대 청년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근데 군대 가서 철 좀 드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말투도 좀 바꾸고.”
“……!”
“……!”
청년의 돌발 발언에 오리지널 상림과 아메리칸 상림과, 보급형 상림 1, 2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진유성을 안다.
진유성은 농담을 즐기지만, 본인이 농담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고오오오오오-
진유성의 끔찍한 무형지기가 한 명을 향해 쏟아졌다.
“엎드려 뻗쳐.”
무형지기가 유형의 힘으로 청년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엎드려 뻗치는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진유성의 가공할 내력이 관절과 근육을 조종하는 것이었다.
“어, 어어!”
각성자가 반항했지만, 감히 진유성의 내력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청년은 이내 엄청난 속도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놀라운 건 각성자의 신체를 움직이는데, 더는 진유성의 내력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진유성은 각성자의 몸 속에 있는 마력의 주도권을 빼앗아, 그것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근육통으로 불경함에 대한 죄스러움을 느껴라.”
세계 푸시업 기네스 기록은 한 시간에 2,400개.
진유성은 1만 개쯤은 시키고 풀어 줄 생각이었다.
각성자의 신체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니, 일주일 정도는 숟가락도 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