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18화>
“실패했군?”
천신궁의 진유성은 첫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좌 위에 묻어있던 피가 순식간에 증발하며, 다시 천신궁이 무채색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천신궁의 진유성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난데없는 파안대소에 마도사들의 첫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자가 왜 웃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미친 건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왜 웃는 거지?”
“나였다면 최종오의 멸(滅)에 대항해 똑같은 오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진유성은 그러지 않은 것 같던데? 페이타티움과 비슷한 힘을 쓰더군. 입(入)이라고 부르던가?”
마도사들의 첫째는 진유성이 품고 있는 힘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즐겁군.”
“어째서?”
“그와 나는 다른 객체임이 증명됐으니까.”
천신궁 진유성의 말이 틀림없었다.
천신궁의 진유성과 지구의 진유성은 똑같은 상황에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천신궁의 진유성을 못내 즐겁게 했다.
하지만 첫째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됐든 실패했다. 그대가 게이트에 간섭하기를 원하는 바람에 그대가 지구에 현현하는 시간은 더욱 뒤로 밀릴 것이다.”
첫째는 천신궁의 진유성을 지구에 불러들여야 했다.
그래야만 천신궁의 진유성이 지구의 진유성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목적은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지구의 진유성이 죽고 난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구의 진유성이 죽는 것으로 첫째가 품고 있는 많은 난관이 해결된다.
문제는 천신궁의 진유성을 지구로 불러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의 9할을 품고 있는 쪽이다.
상실의 공간을 넘고 또 넘어 봤자, 그의 영혼백육은 천신궁에 남는다.
그러니 상실의 공간을 통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마, 첫째가 지구와 중원을 왔다 갔다 하는 방식으로 천신궁의 진유성과 지구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진유성.’
진유성이란 존재는 수백 년을 살아온 첫째조차 경악하게 만드는 불가해의 존재였다.
영리하고 현명하며, 과감하고 단호하다.
그런 그에게 차원을 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게 첫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진유성이 스스로의 신성을 빚어 낸 존재라는 걸 알고부터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첫째는 조금 더 안전한 방법으로 진유성을 지구에 현현시키고 싶었다.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들었다.
게이트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멸망한 차원의 잔영이다.
멸망한 차원에 남아 있는 사념, 영혼, 에너지의 찌꺼기들을 지구에 투사하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진유성을 지구에 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천신궁의 진유성이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가 되는 셈이었다.
아주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천신궁의 진유성이 지구에 오는 게 아니라, 지구와 연결되는 것이다.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 연결을 끊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는 천신궁의 주인을 게이트를 통해 지구에 투사할 수 있는 인과율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티스푼으로 용에게 물을 주는 것과도 같으니, 지극히 더디게 진행되는 일이었다.
한데 이번에 진유성이 한 가지 요구를 했다.
지구의 진유성에게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다면서.
진유성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첫째는 그동안 모은 인과율 중 적지 않은 양을 사용해야 했다.
그때 진유성이 말했다.
“내 현현이 뒤로 밀렸다라……. 인과율 때문이겠지?”
“그래. 그대와 같은 존재를 지구에 현현시킨다는 것은 대명제국 인구의 절반을 지구로 넘기는 것과 비슷한 인과율이 든다.”
“절반이라. 생각보다 적군.”
“대명제국의 인구가 몇인 줄은 알고서 하는 말인가?”
“당연히 알지.”
그 순간, 진유성이 마도사의 첫째를 쳐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도사여. 아무래도 그대와 내가 인과율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듯하군.”
“인과(因果)란 결국 원인과 결과가 아닌가? 그대는 내가 지구에 현현할 결과에 대한 원인을 모으는 중이고?”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인과율이란 그렇게 편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첫째의 생각이었다.
집에서 5분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생판 모르는 타인이 죽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5분만 일찍 출근했으면 자전거와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전거 운전자가 놀라서 도로로 튀어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자동차와 부딪히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5분의 지각이 인이라면, 사망은 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과의 법칙상 밀접하지 않다.
5분을 늦게 출근시키는 인과율로 사망이란 현상을 도출해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사들의 첫째가 진유성의 현현을 위해 모으는 인과율이 더딘 것이었다.
그러나 첫째의 설명을 들은 진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대와 생각이 다르다. 자동차가 무엇인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마차 같은 것이겠군.”
“비슷하다.”
“나라면 출근하는 이를 5분간 붙잡아 놓고, 자전거를 타는 이를 죽이겠다.”
“웃기는 소리 마라. 그건 인과가 아니다. 사이에 그대의 의지가 개입된 것을 어찌 자연스러운 인과로 보는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원인에 개입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결과가 먼저인가, 원인이 먼저인가?”
그 순간, 첫째는 진유성의 행동을 이해하고 말문이 막혔다.
“혹시……?”
“눈치 챘는가? 아둔한 마도사여.”
천신궁의 진유성은 처음부터 지구의 진유성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리 간단히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지구의 진유성과 인과율을 섞는 것이었다.
이제 지구 진유성이 품은 입멸공은 ‘또 다른 입멸공’과 싸웠던 인과율을 품게 되었다.
또한 지구의 진유성은 ‘또 다른 입멸공’을 품은 존재를 인식했다는 인과율을 품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 ‘또 다른 입멸공’을 품은 존재가 존재할 가능성을 월등히 높였다.
즉, 천신궁의 진유성은 자신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결과를 먼저 품은 것이었다.
지독히 과감하다.
과감하고 영리하다.
‘내가 이자와 손을 잡은 건, 어쩌면 큰 실수가 아닐까?’
첫째는 그런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진유성과 자신이 싸울 경우 승산이 반반이라고 보고 있었다.
진유성도 감춰 둔 수가 있겠지만, 자신도 감춰 둔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참, 그대의 동생과 손을 잡은 신주청이 나의 분체들을 죽이고 다닌다지 않았던가?”
“……그러하다.”
“그럼 그 분체들이 지구에 존재했을 때의 인과율을 모아 보는 건 어떤가?”
“나쁘지 않군.”
“그래, 내가 지구에 현현하는 시간이 얼마나 당겨질 것 같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첫째가 입을 열었다.
“지구는 현재 6월이다. 그리고 일 년은 12월까지 있지.”
“대통력(大統曆 : 대명제국 역법)과 비슷하군.”
“천신궁의 진유성.”
첫째가 말했다.
“그대는 남은 여섯 장의 달력이 넘어가기 전에 지구에 현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2023년이 정확히 절반 남은 시점.
첫째가 선언했다.
* * *
끼리릭!
용암 속에서 가느다란 몬스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놈이 노리는 것은 대열 우측면의 각성자의 발목.
그 순간, 각성자가 풀쩍 뛰어오르며 개구리 혀처럼 생겨서 보랏빛이 도는 뭔가를 짓밟았다.
“가!”
목소리를 들은 옆자리의 각성자가 냅다 보랏빛 뭔가를 베었다.
각성자는 순간 미끈거려서 원하는 타격점을 베진 못했으나, 끝까지 정신을 집중한 덕분에 비스듬히 베는 데 성공했다.
푸휵!
초록색 점액이 튄다.
각성자들은 이게 몬스터의 본체인지, 꼬리인지, 혓바닥인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라는 것이었다.
“알지?!”
“알아!”
이 몬스터는 잘라 낸 다음이 더 위험하다.
아니나 다를까 축 늘어진 것 같던 잘린 개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한데 놈이 노리는 목표가 진유성이었다.
“뭐야?”
귀찮은 표정을 지은 진유성은 날아오는 것을 낚아챔과 동시에 집어던졌다.
진유성이 던진 몬스터가 먼 곳에서 공격을 당하던 각성자를 구해 냈다.
하지만 딱히 위기에 빠져서 구해준 건 아니었다.
그냥 보여서 한 것이었다.
“다들 잘하고 있네.”
모든 각성자들이 잘 싸워나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베를린 S급 게이트 내부는 독도 S급 게이트의 내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화산지대에서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경로뿐만 아니라, 튀어나오는 몬스터들도 말이었다.
이는 두 가지 요인으로 각성자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첫 번째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
미지의 게이트가 두려운 건 지성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를린 S급 게이트는 미지의 것이 아니고, 이미 경험해본 것이다.
경험에는 여유가 묻어나고, 여유에는 지혜가 묻어난다.
우산도의 각성자들은 착실히 전진하며 몬스터들을 잡아나갔다.
두 번째는, 그들이 성장했다는 것.
각성자들은 훈련을 하면서 종종 독도 게이트를 떠올렸다.
그때 그들이 죽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진유성 덕분이었다.
만약 진유성이 없었다면?
그들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꽤 많이 할 수밖에 없었고, 결론은 늘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보스 몬스터였던 아낙키나문의 이무기에게까지 당도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아마 화산 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산도 각성자들은 진유성과 상림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 결과.
전장을 지켜보는 진유성이 종종 거들어주는 것을 제외하면 순수한 우산도의 힘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해 나가고 있었다.
그게 그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이제 알겠다.’
우산도 멤버들 중 가장 경지가 높은 문수혁과 차정명은 진유성이 자신들을 바꿔 놓은 가장 큰 부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진유성의 말이 맞다.
그들은 등급이 높아졌지만, 딱히 엄청나게 강해지진 않았다.
품고 있는 마력의 총량도 그대로이고, 스킬도 그대로이다.
A급 이상의 각성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가진 스킬을 잘 활용한다.
그러니 진유성에게 딱히 스킬 활용 능력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확연히 강해진 이유는 ‘연결’에 있었다.
각성자들의 스킬은 개별적으로 발동되기 때문에 A의 스킬을 사용하고 B의 스킬을 사용하는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텀이 발생한다.
A스킬 시전, 종료.
B스킬 시전, 종료.
이러한 싸이클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각성자들의 그들의 고정 관념을 부숴주었다.
기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기의 운용이 끊기지 않는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우산도 멤버들은 A스킬을 사용하고, 종료하지 않은 채 B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배울 때는 별거 아닌 차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은 능숙한 고등급의 각성자라서 스킬의 싸이클을 돌리는 데 1초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스킬을 이어 쓸 수 있다는 것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주었다.
각성자들은 모르겠지만 이것이 초식을 완벽히 이해하는 대성의 경지였다.
그렇게 각성자들은 어렵지만 두렵지 않게 게이트를 클리어해 나갔다.
화산 지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도마뱀 같은 몬스터에게 위기를 겪긴 했지만, 그 외에는 큰 위기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화산 지대와 열대 우림의 경계 지대에 도착했다.
경계 지대는 몬스터가 침범하지 않는 공간이라서, 각성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에 포션을 뿌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문수혁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뱀이 보이지 않네?”
“다른 모든 부분은 똑같은데, 보스 몬스터의 개체만 다른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본래는 아파트 몇 채를 이어 놓은 것 같은 거대한 뱀이 열대 우림을 부수며 다가왔었다.
경계 지대에는 들어올 수 없는 놈이었지만, 근처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 뱀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앉아서 물을 마시던 진유성이 손을 들었다.
약속된 수신호에 각성자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뭔가 온다. 강한데?”
각성자들은 ‘뭔가’가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저벅, 저벅.
그들은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걷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열대 우림을 지나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진유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