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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20화 (220/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20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신주청을 보는 순간 상림은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반가움이었다.

진실로 반갑다.

진유성, 신주청, 상림은 가장 힘든 순간과 가장 슬픈 순간과 가장 기쁜 순간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이야기가 진유성 중심인 게 아니다.

상림과 신주청의 관계도 있었다.

아마 두 사람 간에 벌어진 일들은 진유성이 모르는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었다.

본래 상림과 신주청은 멸마대 훈련소에서 진유성을 상당히 싫어했었다.

딱 봐도 신분이 높아 보이는 몸짓과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아니, 솔직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유성이 부러웠다.

진유성 스스로는 멸마대의 생활을 어떻게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상림과 신주청의 멸마대 생활은 딱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한 번 만이라도 진유성을 이기자.

두 사람의 무공이 진유성보다 높았던 순간에도 그들은 진유성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진유성은 천재였다.

그 어떤 훈련 과제와 그 어떤 임무가 주어져서 완벽히 완수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깃발 뺏기 경쟁.

멸마대원들을 갑, 을, 병으로 나누고 가장 많은 깃발을 빼앗는 쪽이 승리하는 규칙.

갑의 조장은 신주청이었고, 을의 조장은 상림이었고, 병의 조장은 진유성이었다.

당시 진유성의 무공은 두 사람과 비교하자면 꽤 많이 부족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드디어 진유성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훈련 과제의 모든 것이 무력에 달렸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상림과 신주청은 은근한 동맹을 맺었다.

최우선으로 진유성이 조장으로 있는 병의 깃발을 뺏기로.

중간 중간 뒤통수를 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열정적으로 병의 깃발을 빼앗았다.

물론 그들도 빼앗기긴 했다.

5개를 빼앗을 때, 1개를 뺏기는 정도.

진유성의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 때문에 전혀 안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교환비였기에 임무가 종료하는 순간 드디어 진유성을 이겼다고 믿었다.

한데, 그들은 졌다.

진유성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 진짜 깃발을 모조리 땅에 묻어 버린 다음 가짜 깃발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 사실을 조원들에게도 숨겼다.

그렇게 병조의 조원들은 가짜 깃발을 미친 듯이 지켰고, 갑조와 을조는 미친 듯이 훔쳤다.

그러는 사이 야금야금 깃발을 빼앗겼고, 거기에 진짜 깃발을 합치자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상림이 기억하기로 진유성의 전략은 멸마대의 교육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가짜 깃발을 만드는 것은 규칙에 어긋난다는 쪽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쪽.

본인 변론을 위해 불려간 진유성은 교육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적이 가짜 정보를 흘렸을 때, 규칙에 어긋난다고 따져야 합니까?”

그날 밤, 상림은 신주청의 방문을 받았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죽엽청을 들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그때 상림은 더 이상 진유성을 이기는 걸 포기한다고 말했고, 신주청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림은 그 뒤로도 죽엽청을 볼 때마다 신주청을 놀리곤 했다.

절대 포기 안 한다더니 뭐하고 있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얻어맞았지만 뭐, 그리 아프진 않았다.

이처럼 상림과 신주청에게는 그들만의 감정이 있었고,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림은 주차장에서 튀어나온 신주청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두려웠다.

지금 한국엔 진유성이 없다.

신주청은 마도사들과 손을 잡았다.

마도사들은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베를린 S급 게이트를 만든 게 진유성이 한국을 비우게 만드는 술책이 아니었을까?

그 목표는 자신이고.

이런 생각이 든 것이었다.

만약 신주청이 그를 죽이려 한다면 상림은 살아날 자신이 없었다.

상림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신주청이 차 키를 휙 하고 집어던졌다.

차 키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지만, 상림은 잡지 않았다.

그걸 잡는 순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탁, 타탁.

지하주차장 바닥에 떨어진 차키가 형편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신주청이 피식 웃었다.

“왕후에게 전후 사정에 대해서 들은 모양이군. 이토록 경계하는 걸 보면.”

“왕후…….”

“왜? 그 이름으로 불렀다고 날 비난할 생각이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고작 그런 걸로 나무란다면 그동안 뒤에서 교주님 욕한 게 아깝죠.”

상림의 말은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한데, 머리는 왜 그러지?”

신주청의 물음에 상림이 민망한 표정으로 조금씩 자라고 있는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게 상당히 중독적이지만, 중독되고 싶진 않은 느낌이다.

상림은 신주청의 물음을 통해 그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은 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신주청은 죽이고자 하는 이를 조롱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무인 상림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상림은 멸마대에서도 생존대에서도 목숨을 도외시하듯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 상림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림은 신주청을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상림은 달라진 신주청의 이목구비를 쳐다보았고, 신주청은 나이가 든 상림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상림이었다.

“왜 오셨습니까?”

“왕후에게 어디까지 들었지?”

“대부분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멕시코에서 만났다는 것도.”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신주청이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바닥에 떨어진 차 키를 움직였다.

차 키가 상림의 손아귀에 놓이자, 신주청이 말을 이었다.

“한국을 떠나라.”

“…….”

“마도사들은 널 찾지 못한다. 아카샤의 의지가 그들의 인식을 가리고 있다.”

신주청이 몇 가지 실험을 해 봤는데, 로스차일드는 상림이란 사람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적어도 지구 안에서는 마도사들보다 아카샤의 능력이 우선함을 뜻했다.

하지만 아카샤는 전능의 존재와 명운을 걸고 싸우느라 대부분의 전투 능력을 잃었다.

신주청이 상림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카식 레코드 아래에서 태어난 존재기 때문이었다.

신주청의 영혼은 중원에서 왔지만, 그의 육신은 본디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떠날 이유가 없는 거 아닙니까?”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격이 시작될 거니까.”

“…….”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시작은 한국이다. 왕후가 살고 있는 이 땅 위.”

신주청과 로스차일드는 기묘한 공생관계지만,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수백 년 동안 쌍둥이들끼리 반목해온 그들은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주청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페이즈2란 게 시작된다는 것과 그 시작이 한국에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까?”

“널 죽이고 싶지 않다.”

“어째서요?”

“글쎄, 복잡한 감정이군. 미혹 속에서도 기억되는 우정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나?”

신주청은 상실의 공간에서 진유성에 대한 마음을 잃었고, 그것은 곧 증오가 되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주청의 모든 인생은 진유성에게 닿아 있었는데, 그것이 전부 무용해졌다.

사기꾼에게 속아 모든 인생을 날린 사람이 사기꾼을 증오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억나는 것들은 있다.

상림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보냈던 추억들이 그러했다.

“네 머리를 보니 화전촌이 불타서 새까맣게 그을렸던 게 떠오르는군.”

화전민들 중 일부가 현상금에 욕심을 내고, 생존대가 잠들어있는 마을에 불을 질렀던 적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곧장 알아차렸겠지만, 그때는 너무나 피곤했다.

보름이 넘도록 일각도 제대로 자지 못하다 만난 보금자리니까.

그래서 모두가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 죽을 뻔했었다.

이를 테면 신주청에게 상림은 사기를 당하던 중 만난 인연과도 같았다.

“주청이 형님, 그날 저희를 살린 게 교주님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안다.”

“허면 왜요?”

“글쎄. 유능하다고 원수를 존경하는 경우는 없지.”

그 순간, 상림은 깨달았다.

차라리 신주청이 진유성이 유능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면 그를 설득할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깔끔히 인정해 버리면 방법이 없다.

이는 신주청이 이성적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그 이성의 근간이 뒤틀렸을 뿐이다.

고학력자가 신념을 가지면 신념을 절대 바꾸지 않듯이 말이다.

신주청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한 상림은 더더욱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주청은 멀쩡하다.

비록 상실의 공간에서 진유성에 대한 마음을 잃고, 증오를 키웠지만 그의 이지는 뚜렷하다.

“전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왕후와 함께할 생각이냐?”

“이제 제게는 가족이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군.”

상림은 굳이 진유성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신주청을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형님은 정말 마도사와 손을 잡은 겁니까?”

“글쎄. 그때는 그것 말고는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긴 했지.”

“정말 전 인류를 죽여서라도 취해야할 것이 있습니까?”

신주청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표정으로 상림을 쳐다보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난 왕후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이전 세계에서 인간들의 황제와도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유성이 대명제국 이외의 영토에 관심을 두었다면, 문명이 피어난 모든 국가가 진유성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니.

“그리고 그 황제는 이제 지구로 넘어왔다.”

신주청이 선언했다.

“난 그 황제를 폐위시키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

신주청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주청이 진유성을 뛰어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상림은 또다시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신주청이 정말 진유성을 뛰어넘는다면.

그는 성군(聖君)인가?

아니면 폭군(暴君)인가?

그러나 상림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걸 잘 가지고 있어라.”

“예?”

“손에 들린 것.”

뒤늦게 손을 보니 상림은 차 키만 움켜쥐고 있던 게 아니었다.

차키와 함께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이 함께 있었다.

“이게 뭡니까?”

“미혹된 시간 안에서 교분을 나눴던 친우에게 주는 것이다.”

신주청은 더는 말하지 않았고, 상림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포권을 교환했다.

인사도, 악수도 아닌 포권.

이것은 그들의 중원에서의 인연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적으로 만난다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겠다는.

그렇게 신주청이 사라졌다.

한동안 주차장에서 서 있던 상림은 걸려오는 전화에 정신을 차렸다.

상소윤이었다.

-아빠, 언제 와?

곧 간다는 말과 함께 상림은 차에 올라탔고, 시동을 걸었다.

상림은 집으로 향하며 걱정이 되었다.

신주청은 한국에 진유성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찾아왔다.

그렇다면 마도사들은 진유성이 베를린 S급 게이트에 확실히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다.

완벽히 준비된 게이트라는 것이다.

아무리 교주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림의 걱정을 품은 자동차가 천천히 압구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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