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46화>
상소윤은 DDP 게이트를 경험한 이후부터 진유성과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할 때가 있었다.
상대가 불편하거나 꺼려져서 느끼는 어색함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내가 이럴 때 뭐라고 말했지? 그냥 욕했었나?’
이전보다 상대를 의식하게 돼서 생긴 어색함이었다.
멍하니 진유성을 보고 있으면 DDP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구원자처럼 나타나던 진유성.
칼을 휘두르던 진유성.
평소와 다르게 묵직한 말들을 뱉던 진유성.
그것이 상소윤을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엄마나 아빠랑 같이 있을 때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 같은데, 둘이 있을 때만 이런다.
‘뭐…….’
상소윤은 어쩌면 자신이 DDP 게이트를 경험하기 전부터 진유성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아주아주 약간의 호감이다.
같은 집에서 살다보니까 자주 부대낄 수밖에 없고, 상대에게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예쁘다고 하는데 혼자서 박색하다고 놀리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운동을 잘하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보 같아 보이는데 의외로 공부를 잘하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날리는 쓸데없는 드립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고, 상도윤을 대할 때면 의외로 자상한 모습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소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상소윤은 지금껏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지만, 정새롬이나 주변의 친구들이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많이 봤다.
친구들한테 뭐가 그리 좋아서 사귀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답변은 간단했다.
운동할 때 멋있어서.
공부를 잘해서.
밥 먹는 게 귀여워서.
상소윤이 듣기에는 사소한 것들이었고, 고작 그런 걸로 사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 것이었다.
아주아주아주 사소한 호감…….
‘아니, 이러면 내가 진유성이랑 사귀고 싶다는 것 같잖아?’
상소윤은 다시 한번 머리를 휙휙 저었다.
그때 상소윤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겁느냐?”
“뭐?”
“든 것도 별로 없는데 뭐가 그리 무겁다고 흔들어 보는 것이냐.”
“…….”
“그렇게 흔들어 대다가는 얼마 없는 내용물도 빠져나갈…….”
분노한 상소윤이 손을 진유성의 허벅지로 뻗었다.
그간의 경험상 진유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타격은 당해 주지 않는다.
진유성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무수히 시도했지만, 상소윤은 진유성의 신체에 단 한 번도 타격을 가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간첩의 회피력인 줄 알았지만, 무공 고수의 회피력이었다.
아무튼 진유성은 직접 타격을 당해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타격을 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위해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없다는 듯 슬그머니 몸에 손을 대고, 꼬집으면 된다.
꼬집으면 진유성도 아파한다.
게다가 이곳은 좁은 택시이니 피할 길이 없다.
아니다 다를까, 상소윤의 손은 손쉽게 진유성의 허벅지에 닿았다.
탄탄한 근육이 느껴지지만, 살이 없는 건 아니다.
상소윤이 진유성의 허벅지 바깥쪽을 가열차게 꼬집었다.
“아!”
그러나 아픔을 외치는 비명은 진유성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상소윤의 입에서 나왔다.
상소윤은 손톱으로 무쇠를 잡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화들짝 손을 뗐다.
손톱이 부러졌나 싶어서 쳐다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냥 딱딱한 물건을 손톱으로 세게 눌러서 아픈 거다.
손톱을 살피는 상소윤을 보며 진유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금강불괴.”
내공을 티 나게 쓸 수 없을 때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산혼철조 따위에 당해 주지 않는다.
“아, 진짜 짜증나!”
* * *
택시에서 내린 상소윤이 좌측의 건물을 힐끔 보았다.
유려한 곡선 벽면이 무너져서 흉측해 보이는 DDP가 보인다.
아니, 흉측하다는 건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이 들어간 판단일 것이었다.
겉에서 보기엔 꽤 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건축학자들은 DDP가 무너질 일이 없다고 했다.
완벽하게 내부 균형을 맞추고 있다면서.
사람들 중에는 뒤틀린 DDP의 모습에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그로테스크를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오늘 상소윤이 동대문으로 향한 것은 DDP를 다시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준비했던 쇼핑몰의 마무리를 위해 모인 것이었다.
동대문에 재방문한다고 하니 불안해진 유혜연이 진유성을 붙여 준 것이었고.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것이냐?”
“저기 청계천 쪽으로.”
그렇게 상소윤은 진유성과 함께 동대문 도매 상가를 돌기 시작했다.
지난 방문 때 거래할 업체들을 정리해 놨는데, 메모가 없어졌다.
게이트에 들어갔다 나온 여파로 핸드폰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상소윤은 기억을 더듬으며 진유성과 함께 도매 상가들을 방문했다.
다행히 그녀의 기억력은 쓸 만해서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상소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상가 거리를 보면서 활기를 느꼈다.
불과 한 달 전에 게이트가 열렸던 장소의 옆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의 삶을 지켜준 것이 진유성일 수도 있다.
진유성이 아니었다면 게이트가 폭주했을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상소윤이 의아함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게이트 모습이 없었다고 했잖아. DDP에는.”
“그러했다.”
“그럼 만약에 클리어를 못했으면 동대문에도 폭주가 일어났던 거야?”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DDP 게이트는 어떻게든 클리어가 됐을 거니까.”
DDP 게이트는 인간 대 몬스터의 구도가 아니었다.
인간 대 인간의 미션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게이트였다.
그러니 한 명이 살아남더라도 결국은 게이트를 클리어한 셈이 된다.
여기서부터는 진유성의 추측이지만, 아마 진유성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경태가 게이트를 클리어한 유일한 인물이 됐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경태는 금방 첫째에게 잡아먹혔을 것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하던 역할을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있던 오경태가 하게 되는 것과 다름없는 형태로.
“하지만 폭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곳은 위험해졌을 것이다.”
“왜?”
“인과율이 닿은 최전선이니까.”
첫째는 멸망한 하위 차원을 DDP에 강림시켰었다.
만약 첫째의 계획이 고스란히 실행됐다면, 후일 지구에 시작될 아포칼립스의 출발점이 동대문이었을 것이었다.
“어렵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왜 몰라? 네가 걔들보다 세잖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까.”
진유성은 마도사를 죽일 수는 있지만, 아카식 레코드를 오염시킬 수는 없다.
전투 역량은 진유성이 높지만, 마도 역량은 마도사들이 높다.
“걱정할 필요 없다. 누구나 맞기 전에는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진유성은 정말로 마도사란 외계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잠깐, 그럼 진유성도 외계인인가?’
순간 상소윤의 머릿속에 외계인과의 로맨스를 다루는 영화와 드라마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상소윤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진유성을 잡아끌었다.
“저 라인만 돌아보면 끝이야.”
“쇼핑몰은 언제 오픈하느냐?”
“사진만 찍으면 바로.”
“옷 사진 말이냐?”
“어. 착용샷. 너 모델 해 주기로 한 거 안 까먹었지?”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느냐?”
“아, 했잖아! 얼굴만 안 나오면 된다며!”
“난 굉장히 비싼 몸이다.”
“얼만데.”
“감히 내 몸에 가격을 매기겠다는 것이냐?”
“미친놈인가?”
그 순간 상소윤은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은 진유성이 돈이 많아도 전부 북한의 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말에 따르면 진유성이 벌어들인 돈은 게이트의 부산물을 팔아서 얻은 것이다.
즉, 북한의 비자금 같은 무서운 출처의 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야, 너 돈 많지?”
유혜연은 의도적으로 상소윤에게 쇼핑몰을 열기엔 조금 부족한 금액의 돈을 빌려주었다.
처음부터 너무 넉넉하게 시작하면 어려움을 모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유혜연은 실제 상소윤이 필요한 돈보다 적은 돈을 빌려줬다.
유혜연 입장에서는 쇼핑몰 창업에 필요한 최소의 비용을 계산한 것인데, 막상 사업을 시작하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들어가는 돈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소윤은 딱 몇백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넉넉하게 시작하겠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돈이 부족했다.
한데, 진유성은 돈이 많다.
조금은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상소윤의 표정을 통해서 이어질 말을 짐작한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담보를 걸어라.”
“담보?”
“외숙모가 왜 돈을 아슬아슬 빌려줬는지 알고 있으니, 그냥 빌려줄 수는 없다.”
“음…….”
상소윤은 고민했지만, 딱히 걸 만한 것이 없었다.
“없는데.”
“그렇다면 빌려줄 수 없다.”
“앞으로 쇼핑몰에서 나올 수익금 어때? 그, 뭐지? 지분 투자?”
“딱히 돈은 필요 없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좋다.”
“아빠 머리카락은 어때? 네가 거기에 집착한다던데.”
“그건 담보가 아니더라도 이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상림이 들었으면 기겁할 소리를 하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사소한 것도 상관없다. 외숙모는 네가 책임의 무게를 알길 바라는 것이니.”
“아, 진짜 없는데. 아이스크림 셔틀이라도 해 줄까?”
“그건…….”
이미 하고 있다고 말하려던 진유성이 말을 삼켰다.
매점에 간다는 이야기를 엿들을 때마다 아이스크림 셔틀을 시키고 있다는 걸 인지시켜 줄 필요는 없다.
“그건 됐다.”
“아, 그럼 뭐. 네가 제안해 봐.”
“흠…….”
사실 진유성도 딱히 바라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담보는 나중에 잡자. 필요한 게 생기면.”
“막 이상한 거 요구하는 거 아니야?”
“상식선에서 요구하마.”
“그래. 콜.”
남들이 들었으면 위험한 계약이라고 했겠지만, 상소윤은 나름대로 진유성이란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엉뚱하고 쓸데없는 일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괴롭히진 않는다.
상소윤이 보기에 진유성이 지종수를 괴롭히는 건, 진짜로 괴롭히는 건 아니다.
막상 모든 일을 시작하는 건 지종수고, 진유성은 그걸 받아칠 뿐이다.
게다가 진유성이 뭐가 부족하겠는가.
“야. 담보라는 게 내가 돈을 못 갚을 때 네가 쓸 수 있는 거지?”
“그렇다.”
“그럼 뭐, 그 담보 잡을 필요도 없을걸. 무조건 갚으니까.”
“그게 나을 수도 있겠군.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진유성과 상소윤은 그런 대화를 하며 마지막으로 동대문을 한 바퀴 돌았다.
* * *
상소윤의 쇼핑몰 오픈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옷 촬영은 정새롬이 도와주었다.
정새롬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셀카와 여행 사진을 잘 찍기로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모델은 진유성과 상소윤이었는데, 둘 다 얼굴은 나오지 않는 구도로 찍었다.
진유성만 얼굴이 나오지 않고, 상소윤만 나오는 것도 좀 이상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견딜 수 있겠느냐?”
“뭐?”
“이 완벽한 피사체를 담기에는 턱없이 약해 보이는 카메라로구나.”
“…….”
진유성의 주접 속에서 촬영이 진행되었지만, 의외로 결과물은 훌륭했다.
정새롬이 사진을 잘 찍은 것도 있지만, 진유성의 신체 밸런스가 완벽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촬영이 오래 걸린 것은 상소윤이었다.
사진 모델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인지 부자연스러운 장면들이 많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서울 곳곳의 예쁜 배경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지종수와 심도훈이 남산에서 합류했다.
심도훈은 방학이라 심심해서 나온 것이었고, 지종수는 상소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