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48화>
진유성은 상림의 주군이었고, 상림은 진유성의 수하였다.
그러니 유혜연의 계획이 실현되면, 진유성은 부하의 사위가 되는 셈이었다.
‘족보가 좀 꼬이는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족보다.
진유성에게 유혜연은 외숙모고, 상소윤은 친구고, 상림은 부하니까.
이 상황에서 사위라는 직함이 추가된다고 해도 별일은 없을 것 같긴 하다.
‘에이, 모르겠다.’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긴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어차피 결정은 상소윤이 내리는 것이니, 벌써부터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상소윤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유혜연은 계획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한데, 그즈음부터 유혜연의 눈에 상소윤의 이상한 행동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우리 딸.”
“응?”
“오늘 약속 있어?”
“아니? 아, 동대문에 잠깐 다녀오긴 할 거야. 근데 택시 타고 갔다가 바로 올 거라서.”
“혼자서 가?”
“한가한 진유성 데리고 가려고. 근데 왜?”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하자, 유혜연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꾸몄어?”
“거래처 가는데 예의는 지켜야지. 나도 이제 사장인데.”
상소윤의 말은 그럴 듯했고,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혼자 동대문을 갈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유혜연은 일단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의심스러웠다.
이런 유혜연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소윤이 집에서 차림새를 신경 쓴다.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무릎 나오고 낡은 게 아니라, 깔끔하고 예쁜 걸 입는다.
19년을 같이 살아온 엄마랑 아빠한테 갑자기 잘 보이려고 할 이유는 없다.
이제 막 태어나서 옹알이밖에 못하는 동생을 신경 쓸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역시 진유성뿐이었다.
유혜연의 확신에 결정타를 날려 준 사건도 있었다.
“소윤아. 잠깐 나와 봐.”
상도윤과 놀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유혜연이 상소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해도 아무 대답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에 상소윤이 없다.
잠결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편의점에 간 모양이었다.
주인 없는 방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문득 상소윤이 켜 놓고 나간 컴퓨터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모니터에 올라와있는 화면은 유혜연도 종종 구경하는 화면이었다.
바로 진유성의 인스타그램.
진유성은 인스타그램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웃긴 사진들을 올리곤 했다.
본인 스스로는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유혜연이 보기엔 웃겼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독 업데이트가 많다.
그러다보니 진유성의 인스타그램은 은근히 보는 맛이 있었다.
아마 상소윤도 심심해서 보다가…….
“응?”
그런 생각을 하던 유혜연이 재미있는 사실을 두 가지나 발견했다.
한 가지는 상소윤이 보고 있던 것이 진유성이 올린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라는 것이었다.
대정고 또래 애들에게 학생들은 인기가 많다.
일단 대정고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부잣집 자제라는 증거가 되고, 개중 일부는 부잣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재벌 2세였다.
그러다보니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대정고에 대한 묘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영향으로 재벌 2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덕분에 인스타그램에서 대정고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이건 상소윤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대정고 학부모들의 모임 때 들은 것이다.
당연히 진유성에게도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진유성은 대정고에 다닐 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정고 앞에 지나다가다 몇 번 봤는데, DM 보내면 답장해 줄 거죠?]
프로필 사진만 봐도 예쁘장한 여학생이 진유성의 게시글에 남긴 댓글.
그것이 상소윤 컴퓨터 화면의 정중앙에 있었다.
아마 그 여학생의 계정에도 몇 번 들락날락 했던 것 같다.
이게 유혜연이 발견한 첫 번째 재밌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더 재밌었다.
지금 상소윤은 자신의 계정으로 진유성의 계정을 구경하는 게 아니다.
진유성의 것으로 로그인을 했다.
비밀번호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진유성의 계정을 만들어 준 것이 상소윤이었으니까.
로그인 보안 설정 같은 것도 상소윤이 만질 수 있으니, 몰래 염탐하는 것도 들키지 않을 수가 있다.
‘설마 DM을 지운 거야?’
진유성의 계정으로 접속해서, 여자애한테 날아온 DM을 삭제했을까?
흥미를 느낀 유혜연이 아예 대놓고 앉아서 상소윤의 행적을 추적하려고 하는데, 문이 열렸다.
음료수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 상소윤이 유혜연을 보더니 기겁을 했다.
“아, 엄마! 뭐 해!”
후다닥 달려와서 모든 창을 꺼버리는 걸 보고, 유혜연은 확신을 얻었다.
“유성이한테 온 메시지는 왜 지워?”
“걔 이상한 애란 말이야! 막, 그, 대정고 애들 다 찔러보는!”
아니란 말은 안한다.
유혜연은 잠시 내려놓았었던 그녀의 큰 그림을 다시 그릴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소윤아.”
“왜!”
“엄마는 화가야.”
“갑자기 뭔 소리야?”
“넌 물감이고.”
“……?”
“도화지가 필요하겠지.”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유혜연이 도화지에 대해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소윤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방을 나가는 엄마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가끔씩 엄마도 진짜 이상하다.
* * *
상소윤의 쇼핑몰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아직 큰돈을 벌 단계는 아니지만, 신규 회원 가입과 상품 주문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기에 긍정적인 스타트였다.
또한 고무적인 것 중 하나는, 보통의 쇼핑몰보다 환불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었다.
상소윤의 판매 철학이 보기 좋은 옷이 아니라, 입기 좋은 옷을 판다는 것이기 때문인 듯했다.
유혜연은 그런 상소윤이 기특했기 때문에 돈을 조금 더 투자해주었다.
“오, 대박!”
홍보를 할 생각에 신이 난 상소윤이 소리를 질렀다.
물론 상소윤은 유혜연에게 돈을 받든, 받지 않든 돈이 많았다.
유혜연이 넉넉하게 용돈을 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소윤이 평소에 사용하는 돈은 유혜연의 카드였고, 상소윤은 쇼핑몰을 시작하면서 용돈과 사업 자금은 별개로 운용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막힐 때마다 용돈을 끌어 쓸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유혜연은 설령 쇼핑몰이 잘 되지 않아도, 상소윤이 배우는 것이 있길 바랐으니까.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 여름 방학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 방학은 다사다난했다.
해병대 캠프.
상도윤의 탄생.
DDP 게이트.
실종됐다가, 잠에 빠진 진유성.
쇼핑몰 창업까지.
2달 반 밖에 되지 않는 여름 방학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방학이 3일밖에 남지 않는 날.
가족들은 다 함께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근데 엄마, 도윤이를 맡길 데가 있어? 너무 어린데?”
“다 방법이 있지요.”
평소에는 방학 때마다 해외 여행을 갔지만, 아직 상도윤은 비행기를 타기엔 힘든 나이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송파구에 있는 롯데월드.
상소윤과 진유성은 집에서 출발하고, 유혜연은 상도윤을 맡기고 상림의 회사에 들러서 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상소윤과 진유성이 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유혜연과 상림은 없었다.
“야, 진유성. 엄마랑 아빠 못 온다는데?”
“무슨 일이냐?”
“몰라? 별일은 아닌데, 아빠 회사에 일이 있다네.”
상소윤은 몰랐겠지만, 유혜연은 상도윤을 맡아줄 곳을 찾은 적도 없었다.
아니, 놀이공원에 올 생각도 없었다.
오늘의 놀이공원은 그녀가 생각한 도화지였다.
그림을 그릴 곳.
“에이 씨,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 온 거 어쩔 수 있겠느냐. 안 그래도 한 번쯤 와 보고 싶었던 곳이다.”
“놀이공원을?”
“그래. 이렇게 생겼군.”
“드라마에 맨날 나오는 게 놀이공원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보통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놀이공원 전체를 빌리기 때문에 텅 비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상소윤이 진유성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야, 근데 너는 놀이기구 재미없지 않냐?”
“흠. 모르겠다. 타본 적이 없어서. 스릴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재미가 있을 수도 있지.”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유 이용권을 끊고는 놀이공원 안으로 향했다.
* * *
엔서니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유명한 스카우터 겸 에이전트의 대표였다.
엔서니의 특기는 저평가되어 있는 유망주를 발굴해서 특급 스타로 키워 내는 것.
보통 유망주 위주로 발굴하는 스카우터들은 타율이 높기 힘들었다.
수많은 유망주들이 성인의 벽에 부딪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서니는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스카우터였다.
그가 발굴한 유망주들 중에는 성공한 이들이 아주 많았다.
개중 가장 성공한 이는 폼멜 스테인버그.
네덜란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폼멜이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엔서니의 안목 덕분이었다.
“네가 벌써 은퇴를 한다니.”
“벌써라뇨. 엔서니가 늙은 거죠.”
“어쭈, 처음 봤을 때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더니.”
“십수 년 전 이야기를 아직도 하시네요.”
“넌 영원히 꼬마야.”
엔서니는 에이전트로서의 마지막 일을 수행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그가 폼멜의 은퇴 기념 자선 투어를 따라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엔서니에게 폼멜은 아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선수로서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엔서니를 아버지처럼 여기는 폼멜도 엔서니의 동행을 기뻐했다.
폼멜은 엔서니와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소아암 환자들의 기금을 마련하는 투어에 동행했다.
유럽과 미국 다음으로 향한 아시아의 첫 번째는 중국이었고, 두 번째가 한국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폼멜은 예상에 없던 스케줄 중 하나를 맡게 되었다.
한국의 대기업이 스폰서를 서는 기금 마련 행사였는데, 놀이공원의 야외에서 진행하는 3 대 3 풋살이었다.
골이 터질 때마다 한 골당 백만 원의 기금이 적립될 예정이었고.
한데, 풋살을 시작하기 전에 엔서니가 누군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엔서니, 왜 그래요?”
“아, 폼멜.”
“한국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는 사람 같긴 한데……. 동양인들의 얼굴을 구별하는 게 힘들어서.”
“진짜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누군데요?”
“진짜 천재. 축구 천재.”
“천재?”
폼멜이 흠칫 놀랐다.
엔서니는 재능을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폼멜이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스스로를 천재라고 칭할 때도, 코웃음을 치며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던 게 엔서니였다.
그런데 천재라고?
폼멜이 놀라는 사이, 엔서니는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영국의 크로스 브릿지 유소년 캠프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동양인 천재.
혼자서 8골을 넣어 버리던 그 아름다운 드리블과 슈팅.
스카우터들이 몰려들었지만, 홀연히 자취를 감춘 신비함.
길고 긴 스카우터 인생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이다.
그의 얼굴은…….
‘맞아! 저 얼굴이 맞아!’
동양인은 구분하기 힘들지만,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다.
‘내 최고의 스타를 떠나보내는 투어에서 새로운 스타를 만나게 된 건가……?’
운명을 느낀 엔서니가 폼멜에게 부탁했다.
주최 측에 저 동양인 소년이 자선 풋살에 참가할 수 있도록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