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76화>
본디 무공이란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한 단계, 한 단계가 다르다.
일류 무인의 한 걸음과 절정 무인의 한 걸음이 다를진대, 중원 역사상 유일하게 벽을 넘은 진유성의 한 걸음은 그 보폭이 아득하다.
그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으나, 운명이 있다고 믿었다.
운명이 없다고 말하기엔 그가 살아 온 삶이 너무나 가혹했으며, 때론 너무나 존귀했다.
수많은 흐름들에 휩쓸렸고, 그 흐름 속에는 불가항력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유성은 자신의 삶이 온전히 운명의 굴레에 따라 굴러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치열했고, 무거웠으니까.
운명은 있지만, 그 운명의 변곡점은 분명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지금 순간에 과거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 과연 우연일까?
또다시 거대한 흐름이 밀려오는 건 아닐까?
문득, 마도사들의 첫째가 보여 줬던 고통받고 신음하던 중원의 백성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가짜 진유성.
놈은 자신과 같은 근원에서 시작한 존재지만, 분명 다른 존재이다.
놈이 정말 자신이었다면 멀더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았을 거고, 중원의 백성들을 고통에 신음하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유성은 과거에 ‘나 자신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의 9할을 움켜쥔 가짜 진유성은 과연 나 자신인가?
내가 그를 이길 수 있는가?
진유성은 잠깐의 의문 뒤로 확신을 가졌다.
‘이길 수 있다.’
설령 놈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해도, 그는 이길 수 있다.
그렇게 믿는 게, 진유성이란 존재니까.
한동안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진유성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김수철을 비롯한 MK 엔터테인먼트의 사람들이 깊은 생각에 빠진 진유성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원래 같으면 김수철은 연습생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으면 정신 차리게 만들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진유성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으니, 상념을 깨우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는 깨우라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진유성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으면 일순간 무인의 소우주가 확장된다.
진유성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과정에서 흘러나온 진유성의 아득한 역량이 김수철에게 무의식적인 위압감을 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진유성이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감추자, 그제야 김수철이 입을 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그러나 위압감이 남아 있었는지, 김수철의 태도는 여전히 약간 주춤거렸다.
‘춤은 별로 재미가 없군.’
그는 몸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를 이미 무공이란 이름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니 무공이 아닌 다른 행위로는 충족감을 얻을 수 없다.
춤을 제 아무리 격렬하게 춘다고 해도, 무공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유성은 타인이 인생을 바친 영역을 폄하하는 사람이 아니니, 재미없다고 말을 하진 않았다.
“나한테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네.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연습실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김수철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디 가!”
“집.”
“연습생 계약은 하고 가야지!”
“안 할 건데요.”
김수철이 보기에 진유성의 얼굴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이놈은 정말 이대로 퇴장한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김수철이었다.
공자님께서 그러지 않으셨나.
배울 것이 있으면 거지에게도 배움을 청해야 한다고.
‘거지가 아니라 아이였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김수철은 살짝 부끄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태도는 당당하게 물었다.
“아까 문워크 어떻게 한 거니?”
“이거?”
진유성이 앞으로 걷는 듯 뒤로 쭉 밀려났다.
이번에는 내공으로 한 것이 아니다.
호기심이 들어서 내공 없이 직접 해 봤는데, 그 움직임은 내공을 썼을 때와 차이점이 전혀 없었다.
“어, 그거!”
“이게 왜? 아까 쟤도 잘하던데.”
진유성이 문워크를 선보였던 연습생을 가리키자, 김수철이 고개를 저었다.
“달라. 퀄리티가 완전 달라.”
진유성은 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무엇이 다른지는 알고 있었다.
초식의 형(形)과 의(意)의 문제이다.
“뒤로 가려고 하니까 다르지.”
“뒤로 가는 춤이니 뒤로 가야지.”
“아니지. 몸은 뒤로 가더라도 마음은 앞으로 가야죠.”
흔히 허초라고 부르는 초식들은 속임수 초식이다.
허초 뒤에는 늘 변초가 있다.
상대방에게 사선으로 움직인다는 속임수를 넣은 다음에, 그에 맞춰 반응하는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허초를 허초로 생각하면 상대는 당해 주지 않는다.
이 초식에 모든 걸 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용해야지만, 상대방이 당해 준다.
때로는 허초가 실초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진심을 담아 허초를 던지다 보니 이걸로 상대를 벨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베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긴 했다.
심동과 무심동의 묘 역시 극한의 허초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특정 움직임의 심동을 보낸 다음에 반대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무심동을 보여 준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니 말이었다.
김수철은 춤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고, 진유성이 말하는 바를 곧장 이해했다.
“마음은 앞으로 가야 하는 거라고?”
“어디 칼이나 가위 같은 거 없나?”
진유성의 말에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던 연습생이 구석에 있는 서랍에서 커터 칼을 가져다주었다.
“잘 봐요.”
커터 칼의 날을 세운 진유성이 그걸 쥐고 김수철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김수철은 섬뜩함을 느꼈다.
저 칼로 자신을 찌를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 순간 진유성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고, 김수철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진유성의 몸은 뒤로 가고 있었다.
깜짝 놀라 호흡을 들이켰던 김수철이 얕은 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됐군.’
진유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커터 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는 나름의 서비스였다.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괜히 들쑤신 것 같으니, 이상한 길로 빠지지 말라고 정도를 보여 준 것이었다.
“이 정도면 됐죠?”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안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김수철이 후다닥 뛰어왔다.
“가, 가지 마!”
“……?”
“넌 춤을 춰야 하는 사람이야!”
“아닌데.”
“머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네 몸과 마음은 여기,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해야 한다고!”
진유성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편의점의 평화를 유지시켜 줬던 비기를 꺼내들었다.
지건을 맞은 김수철이 스르륵 잠에 들었다.
5분 정도 있으면 깨어날 것이니, 그사이에 어서 피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수철을 자판기 옆 의자에 앉히는데, 헐레벌떡 MK 엔터의 직원이 달려왔다.
직원은 진유성이 춤을 배우기 시작할 때 자리를 피했었는데, 김수철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리자 사무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야, 수철 쌤 왜 이래요?”
“피곤했나 봐요. 갑자기 잠드네.”
“아니, 아무리 피곤하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 들어요?”
“뇌에 혈압이 올랐나 보죠.”
“그 무슨 무서운 소리를…….”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안무실의 입구가 보이는 휴게실에 앉아 있었는데, 분명 김수철은 쌩쌩했었다.
한데, 진유성이 김수철에게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말소리가 끊겼다.
그 다음으로 보인 광경은 진유성이 김수철을 의자에 앉히는 것이었고.
‘기절시킨 거 아니야? 아니, 근데 무슨 수로?’
때린 것도 아니고, 목을 조른 것도 아닌데 건장한 성인 남성을 어찌 기절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의심의 눈을 거두기에는 진유성의 반응이 너무 태연하다.
보통 누군가 눈앞에서 갑자기 잠에 들면 당황할 텐데 말이었다.
직원이 진유성을 힐끔거리자, 진유성이 슬쩍 웃었다.
그리곤 한 걸음 다가가서 속삭였다.
“이래서 감이 좋은 꼬맹이는 싫다니까.”
“……!”
“농담인데.”
“……아.”
진유성이 직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위층에서 느껴지는 기감을 읽었다.
때마침 지종수의 오디션이 끝났다.
* * *
진유성과 지종수가 떠난 뒤, 박차명이 MK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을 모았다.
본래 그는 진유성을 탐냈고, 여전히 탐을 내고 있다.
하지만 진유성은 연예인이 될 생각이 없다면서 쿨하게 떠났다.
고민거리 하나를 안겨 주면서.
그들을 고민하게 만든 것은 지종수의 카메라 테스트 영상이었다.
캐스팅 보트를 쥔 직원들이 영상을 보면서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와…….”
“장난 아닌데요?”
“연기를 배운 적 없다고요?”
박차명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대.”
“그럼 연기 경험은요?”
“그것도 없대. 친구한테 몰래카메라 하려고 장난으로 연기한 게 처음이래.”
“근데…… 왜 이렇게 잘하죠?”
“그치?”
화면 속의 지종수는 신들린 듯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전부 가능하다.
처음에는 미니시리즈의 멋진 남주인공 대본을 줬다가, 다음에는 찌질한 역할을 시켜 봤다가, 그 다음에는 살인마를 시켜 봤다.
근데 전부 다 잘한다.
문제는…….
“페이스가 너무 주연감이 아닌데.”
“나도 동감인데. 관리 좀 받고, 메이크업 좀 한다고 치면 어떨까?”
“그런다고 뱀이 용이 되진 않잖아요.”
“전 좋다고 보는데요. 모든 배우가 용이 될 필욘 없잖아요. 뱀 중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뱀들은 용보다 잘나가요.”
“일단 연기를 잘하니까. 저도 동의. 처음에는 빚을 못 보겠지만, 오래 묵으면 이무기는 될걸요.”
“근데 얘가 스포트라이트 없는 산전수전을 견뎌 낼까? 배고파서 어떻게 견뎌?”
어느 직원의 말이 박차명 팀장의 머리를 탁 쳤다.
견뎌 낸다.
얘는 배고프지 않으니까.
돈이 썩어 넘치는 대정고의 학생이니까.
“계약하자.”
그렇게 지종수는 꿈을 위한 첫 번째 스텝을 밟게 되었다.
* * *
‘다들 바쁘네.’
심도훈은 3학년 1반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친구들을 관찰했다.
처음에는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바쁘게 살아간다는 느낌.
지종수는 며칠 전부터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다.
그리고 배우가 되고 싶단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징징거렸을 때보다 훨씬 열정적이었고,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MK 엔터테인먼트에서 곧장 경험을 쌓으라고 연극의 단역을 하나 따다 줬으니까.
고인수와 연극을 보고 왔는데, 지종수는 대사가 한두 마디 나오는 고등학생 양아치 역할을 연기했다.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주인공과 거리에서 시비가 붙는 엑스트라.
근데, 그 모습이 꽤 멋지고 재밌었다.
어딘지 연기하는 모습이 익숙하기도 했고.
“나 어땠냐?”
“잘하던데. 근데 꼭 어디서 본 거 같더라?”
“당연하지. 우리가 아는 최고의 양아치를 따라했으니까.”
“아, 진유성 따라한 거였어?”
“말투만 빼고.”
아직 아버지에게 말을 하진 못했다고 하는데, 지종수는 자신의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지종수뿐만이 아니었다.
상소윤은 매일 진유성과 시끄럽게 떠들고 노는 것 같지만, 쇼핑몰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인수, 정새롬 등등.
모두가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뭐 하고 살지. 그냥 아빠 회사나 물려받게 되나?’
심도훈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가장 정신없이 사는 놈이다.
“뭘 쳐다보느냐.”
“네가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궁금해서.”
“흠. 아주 중요한 문제로군. 그걸 알아보기 위해 내일은 영월에 갈 생각이다.”
“강원도는 왜?”
“나에게 F-1 레이싱의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러 간다.”
“자질?”
“내일 세계적인 F-1 선수가 영월에서 훈련을 한다고 하더군. 놈을 꺾고 오겠다.”
“아, 그래. 아주 멋지네.”
심도훈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진유성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 중에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게 진유성 같다.
심도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 달력을 슬쩍 보았다.
9월 29일.
어느덧 9월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10월이 되고, 11월이 되면 수능을 본다.
그 다음으로는 고3이 끝이 나고.
‘뭐라도 되겠지, 뭐.’
결국 심도훈은 유튜브로 롤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아주 평화로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