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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77화 (27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77화>

* * *

먼 과거에는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면 계층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전쟁은 사회계급의 밑바닥에 있는 이들에게 기회였으며, 꼭대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기였다.

그렇기에 때론 이러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세상이 변화했다.

게이트란 요물이 등장하고, 각성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가 완전히 해체되고 뒤집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었다.

현대 사회가 쌓아 올린 자본과 이념의 시스템은 너무나 견고했고, 세상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상류층은 여전히 상류층이었고, 하류층은 여전히 하류층이었다.

변화는 딱 하나였다.

상위 각성자들 중 몇몇이 상류층으로 편입된 것.

오히려 각성 세계의 등장은 재벌들에게 수많은 편의를 가져다주었다.

재벌들은 게이트 쇼크 때 죽은 이들의 신분을 사들였다.

한마디로 유령의 신분을 산 것이었다.

이런 유령 신분들은 재벌 3세들이 사고를 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고, 유령들은 음주 운전이나 뺑소니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령 중 일부는 그들의 회사에 위장으로 취업해, 살아생전 하지 못했던 초고속 승진을 통해 임원에 편입되었다.

그리곤 회사에 이런저런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횡령이나 배임 따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라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재벌들은 각각의 지역을 입맛에 맞게 바꾸기도 했다.

게이트 폭주로 인해 땅이 폐허가 되면, 그 위에 뭘 올려도 상관없다.

재건이라는 명분만 붙이면.

평소 한국에 제대로 된 카레이싱 서킷이 없던 걸 아쉬워하던 재벌들이 강원도 영월에 <영월 인터내셔널 서킷>을 만든 것도 이런 일 중 하나였다.

평균 관광객이 많지 않은 영월에 아시아 제일의 서킷을 만들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그 이면에는 2,000만 제곱미터의 부지 확보를 위해 게이트 폭주를 방치했다는 추악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 * *

‘내가 알았다면 그딴 짓을 못했을 텐데 말이야.’

진유성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영월 인터내셔널 서킷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영월의 게이트가 폭주한 것은 7년 전이니, 시기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긴 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영월 서킷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시아에서는 최고로, 전 세계적으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서킷이 된 것이다.

덕분에 영월은 아시아로 여행을 온 각국 부유층의 주요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월에 5성급 호텔과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고.

하지만 진유성은 결과가 좋다고 과정의 불공정함을 용인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영월의 광활한 땅 위에 지어진 서킷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는데, 때론 해외 취재팀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우르르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다들 가벼운 차림이었으나, 손목에는 명품 시계들이 채워져 있는 이들도 많았다.

진유성은 그런 이들을 스쳐 지나가며 서킷의 입구에서부터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에서는 카레이싱을 즐기려는 이들이 더 많았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대시설이 점점 늘어났다.

‘꼭 인천 국제공항 같군.’

서킷이라고 해서 레이싱 트랙만 달랑 있을 줄 알았는데, 멀티플렉스 시설이 굉장히 많았다.

‘상소윤을 데려올걸 그랬나?’

원래는 레이싱만 잠깐 즐기고 경공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번화한 곳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진유성은 마침내 레저베이션 에어리어에 도착했다.

레저베이션 에어리어에 몰려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레이싱 교육을 신청하는 이들이었지만, 진유성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국제 자동차 기구에서 발급해 주는 슈퍼 A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상소윤에게 생일 선물로 뜯어낸 것이었는데, 주말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 왔었다.

그가 레저베이션 에어리어에 방문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혹시 라이센스 교육과 발급을 위해 방문하셨나요?”

박색하게 생긴 여직원이 방긋 웃으며 진유성을 반겼다.

“F-1 레이싱팀에 후원을 하려고 왔는데.”

“아, 후원 말씀이십니까?”

진유성은 순간 설렘을 느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직원에게 설렌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전개를 기대하며 설렜다.

영월 인터내셔널 서킷은 세계 최고의 F-1 선수들이 비시즌에 훈련을 하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영월을 방문하는 시기에 맞춰서 전 세계 레이싱광들이 몰려든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한 번이라도 같이 트랙을 돌아 보는 것.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성사되기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때 한 마이애미의 주식 재벌이 F-1팀에 어마어마한 거액을 후원하면서 함께 트랙을 돌 기회를 얻어 냈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 선수들과 트랙을 돌고 싶은 부자들이 거액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유수의 F-1팀에서는 이를 비시즌 후원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는 알음알음 하던 것을 대놓고 시작한 것이었다.

그 결과 후원 금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왜냐하면 후원 랭킹을 레저베이션 에어리에어 전광판 형식으로 공개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진유성의 왼쪽에 있는 몇 개의 전광판에 각 팀에 후원을 한 부자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중, 매주 토요일에 갱신되는 주간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는 후원한 팀의 원하는 선수와 트랙을 돌 수 있었다.

이는 마치 선수들과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경매하는 것과도 같았다.

진유성은 지금, 그 경매에 참여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렌다.

박색한 여직원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진다.

그의 손목에는 비싼 명품 시계도 없고, 입고 있는 옷도 동대문에서 산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소윤의 쇼핑몰 모델 촬영을 하면서 입었던 옷이다.

애당초 촬영이 끝나면 남자 모델 의상은 전부 진유성이 갖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날 어서 무시해!’

여전히 힘숨찐 전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진유성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영월이었다.

외국의 부자들 중에는 자신을 전혀 치장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애당초 직원들은 교육을 철저히 받는다.

여직원은 너무 어려 보이는 고객의 모습에 잠시 의구심을 품었지만, 결코 그것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십니까, 고객님? 후원을 하시기 전에 국제 자동차 기구에서 발급한 라이센스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

“라이센스가 없으시다면 후원이 불가능한데, 혹시 없으신가요?”

“아니, 있긴 한데…….”

분명 소설에서는 쉴 새 없이 나오는 전개인데, 어떻게 된 게 자신에게는 한 번도 기회가 없다.

진유성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라이센스를 내밀었고, 직원이 확인했다.

“금일 오후 2시에 후원이 마감되고, 각 팀의 후원 랭킹 10위 안에 드신 분들은 2시부터 스케줄 매니저와 레이싱 스케줄을 잡으실 수 있습니다.”

진유성이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니 현재 시간은 12시 30분이었다.

‘흠. 5위 정도에 맞춰 후원을 했다가 밀려날 수도 있겠군.’

진유성처럼 뒤늦게 와서 후원을 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 말이었다.

결국 안전하게 하려면 1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혹시 1위가 10위 밖으로 밀려나기도 합니까?”

“어, 인기 팀들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있어요. 2시 마감 전에 오셔서 후원하시는 분들이 많으면 5분 만에 모든 랭킹이 변동되기도 하거든요.”

F-1팀들은 겉으로는 후원 프로젝트가 너무 상업적이지 않길 원해서 랭킹 전광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안 될 것 같으면 후원을 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실제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금액 경쟁을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만 원을 내고 10위에 랭크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만천 원에 10위를 가져갔다?

그럼 만이천 원을 내게 되는 게 경쟁 심리였다.

또한 진짜 돈이 많은 사람들은 마감 직전에 와서 거액을 쾌척하고 사라질 수도 있었고.

“흠.”

진유성이 고민을 하자 직원이 물었다.

“우선 후원 팀부터 정하시면, 제가 평균적인 후원 랭킹 금액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볼프스 PTS-1120.”

지난 3년간 F-1팀 랭킹의 왕좌를 놓지 않은 독일 신생팀의 이름이 나오자, 여직원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볼프스 PTS-1120은 역사가 깊은 명문 팀은 아니지만, 평균 후원 금액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팀이다.

왜냐하면, 팀의 간판 레이서가 워츠 마이빅이기 때문이었다.

워츠 마이빅.

전설적인 F-1 레이서 슈마허의 뒤를 이어, F-1 대회를 재미없게 만드는 주범.

팀, 개인 대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F-1 주관 경기를 우승한 먼치킨.

슈마허의 전설 중 하나가, 2003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것이다.

당시 경기장이었던 몬트리올 서킷은 브레이크를 많이 써야 하는 곳이었다.

한데, 슈마허는 브레이크 없이 기어 조작만으로 우승을 해 버렸다.

워츠 마이빅은 여기서 영감을 받아서 브레이크를 최소로 사용하는 드라이빙 스킬을 만들었고, 지금은 이게 모든 선수들이 구사하는 대세가 되었다.

이런 대단한 선수와 같은 서킷을 돌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볼프스 PTS-1120의 후원 랭킹은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경쟁을 한다.

아무리 편견 없이 고객을 대하라는 교육을 받아 왔지만, 눈앞의 어린 남자가 그 정도 금액을 후원할 수 있을까?

열심히 응대해 봐야 입만 아프지 않을까?

여직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객을 쳐다보다가 움찔했다.

고객의 눈에서 엄청난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간절함은 무언가를 엄청나게 원하고 있는 것이고, 아마 그 무언가는 자신의 친절함일 것이다.

그래, 어쩌면 눈앞의 남자는 부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F-1 레이서의 꿈을 꾸고 있는 평범한 소년이 목표를 굳건히 하기 위해 찾아왔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자책한 여직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최대한의 친절함으로.

“지난 후원금 랭킹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고객님.”

“…….”

그사이, 진유성은 또다시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꼭 재채기를 하려다가 못한 기분이다.

만사가 귀찮아진 진유성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최고 금액이나 알려줘요.”

“최고 금액이요?”

“네.”

잠시 뒤, 진유성은 지금까지의 후원 중 가장 높은 금액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높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조 단위의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국적 펀드의 공격에서 KPM을 지켜 주느라 벌어들인 돈.

아마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마도사들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진유성은 최고 후원 금액과 똑같은 금액을 내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1달러를 더 써 냈다.

“고, 고객님?”

직원이 깜짝 놀라서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이 돈을 정말로…….”

“잠깐만.”

진유성은 상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여기로 내 돈 좀 보내라.”

진유성의 돈은 CMSG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액을 사용하려면 상림한테 시키는 게 편했다.

진유성은 그렇게 상림한테 명령하고는 자신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뒤, 레져베이션 에어리어를 떠났다.

영월 서킷의 여직원은 후원 금액을 믿지 않고 있다가, 정말로 돈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리도 비워 버린 채 상사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뒤, 난데없는 VVVIP의 등장에 영월 인터내셔널 서킷이 뒤집어졌다.

그사이.

“이 나쁜 교주 놈…….”

상림은 치를 떨고 있었다.

자신한테는 엔쵸 페라리를 뜯어내고, 벌모세수를 해 주면서 돈을 받고, 중원 요리를 해 주면서 돈을 받는 교주놈이다.

심지어 자리비움 서비스로 돈을 낸 적도 있다.

한데, 왜 남들한테는 거금을 후원한단 말인가!

“복수할 거야…….”

인터내셔널 서킷이 뒤집어지는 사이, 상림의 복장도 뒤집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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