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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95화 (295/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5화>

“넌 누구냐.”

“질문을 하나씩 교환할까?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답변 먼저.”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아멜라 메건이 아니다.

아멜라 메건을 뒤집어쓴 무언가다.

아카샤가 언급했던 ‘어떤 존재’가 저 안에 있었다.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현상에는 이유가 있고, 행위에는 의도가 있으니까.”

태풍 현상이 발생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지진 현상이 발생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행위도 마찬가지다.

한낱 미물인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개미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한데, 중원의 진유성이 서울역에 나타났다는 거대한 현상에 아무런 이유가 없을까?

물론 짭유성의 이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짭유성을 도와주는 이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걸까?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유혜연 덕분이었다.

또 다른 입멸공의 등장에 온몸이 무공으로 가득 차는 순간, 유혜연 덕분에 냉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은 서울역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진유성의 대답이 충분하지 못했는지 아멜라 메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끝? 근거가 빈약한데?”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나쁘구나. 짭유성의 등장과 비슷한 크기의 사건이 타트바의 강림 말고 또 있느냐?”

“…….”

“행동의 크기는 이유의 크기에 비례하는 법이니라.”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내 질문에 답하라. 넌 누구냐?”

“네가 짭유성이라 부르는 이는 내가 누군지 맞추던데? 진짜가 가짜보다 멍청할 수 있나?”

아멜라 메건이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아놀드 벡이 흠칫 놀랐다.

저 모습은 평소의 아멜라 메건과 완전히 똑같다.

저건 아멜라 메건일까, 아니면 아멜라 메건을 뒤집어쓴 무엇일까?

아놀드 벡의 혼란과 관계없이 진유성과 아멜라 메건의 대화는 이어졌다.

“짭유성이 네 정체를 맞췄다면 단서가 더 있었겠지.”

“흐음. 그렇게 생각해?”

“별로 문답에 성실하지 않군? 문답무용이라고 아느냐?”

“아, 좋아. 나도 양심이란 게 있으니 짭유성이 가지고 있던 힌트 정도는 줄게. 짭유성? 어감 괜찮네.”

슬쩍 웃은 아멜라 메건이 짭유성과의 대화를 짧게 전달했다.

이름, 나이, 성별.

대명제국에서 고을의 호구를 조사하기 위해 촌장에게 내미는 문답지와 같은 질문과 답변.

그걸 들은 진유성이 잠깐 생각하더니 단번에 말했다.

“네놈, 전능이 남긴 자아로군. 아니면 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왜? 모를 줄 알았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진유성이란 존재들은.”

아멜라 메건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평소 아멜라 메건이 가지고 있는 표정이 아니라, 완전한 무표정으로.

진유성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정말 신을 담았다가 텅 비어 버린 그릇이라면, 그 도량은 얼마나 넓겠는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성향도 띠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모두 품었기 때문에 철저히 무표정한 표정.

모든 색을 섞었기 때문에 채도의 변화 따위 상상할 수 없는 회색.

그것이 저 존재의 본질이다.

아멜라 메건의 성향을 벗어던진 그릇이 시선을 주자, 아놀드 벡과 상림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일순간 죽음을 느꼈다.

진유성의 등 뒤에 서 있음에도.

그릇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진유성. 너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아멜라 메건이 왼손을 들었다.

거기에는 진유성도 익히 알고 있는 힘이 서려 있었다.

입멸공의 모태가 되는 힘.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서 발견했으나, 진유성이 흡수하지 않았던 힘.

중원 차원을 떠난 전능의 존재가 두고 간 전능의 9할.

그것이 아멜라 메건의 왼손에 있었다.

그릇은 진유성에게 소멸당한 마도사들의 첫째를 이용해 해남도에 남은 전능을 흡수했다.

“보아라, 이것은 전능의 힘이다.”

이번엔 그녀가 오른손을 들었다.

역시 진유성이 익히 알고 있는 힘이 느껴진다.

아카샤와 타트바가 품고 있던 힘.

전지전능한 존재의 절반에서 기인한 전지(全知).

그릇은 오래 전부터 아멜라 메건이 화신의 그릇으로 선택받을 것을 예상했고, 마침내 타트바의 전지를 흡수했다.

“나는 이미 타트바의 절반을 먹어치웠다. 타트바의 자아를 흡수하지 못한 건 몹시 아쉬우나, 이미 완성되었다.”

그릇이 선언했다.

[그대가 품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어 나조차 뚫어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간 그대의 앞에 전지와 전능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위상의 수호자가 말했던 전지와 전능을 동시에 품은 존재.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반푼어치들이군.”

“뭐?”

“거지도 아니고, 남이 버린 걸 잘도 주워 먹는단 소리다.”

진유성이 입멸검을 들이밀었다.

이것은 가짜지만, 신을 베어 넘겼던 검이다.

“넌 타트바의 절반을 먹은 게 아니다. 절반을 먹지 못한 거다.”

“…….”

“이미 먹은 걸 토해 낼 수도 있겠지.”

진유성의 입멸검이 허공을 가르며 아멜라 메건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멜라 메건은 별다른 방어를 하지 않고, 진유성의 검을 회피했다.

공간을 뒤틀며 위치를 바꾼 것이었다.

“꺄아아악!”

아멜라 메건은 상소윤과 유혜연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아멜라 메건은 상소윤과 유혜연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전지의 절반을 먹었으니 나머지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화신을 담을 그릇을 잃어버린 타트바가 어디로 불시착하는지만 알 수 있다면.”

아멜라 메건이.

아니.

“하지만 그전에.”

그릇이 진유성을 쳐다본다.

“내가 살찌운 돼지를 잡아먹어야겠구나.”

“돼지?”

“나는 마도사란 이름의 어둠을 빚어 냈다. 첫째가 두 마리의 새끼를 낳은 것은 예상 외였지만, 그 역시 즐거운 일이었지.”

“…….”

“또한 전능을 품은 영웅이 탄생하도록 온 세상을 난세로 물들였다. 때론 방해물을 두었고, 때론 기연을 두었다. 간혹 길을 제시하기도 했지.”

그릇이 말했다.

“네가 천신궁 뒤뜰에 게이트를 열기 위해 묻어 둔 보석은 나의 진체(眞體)의 일부이다.”

“……!”

“그렇게 네가 탄생했다. 전능을 삼키지 않은 것은 의외였으나, 오히려 더욱 풍성한 만찬이 되었다. 신성을 빚어냈지만, 신이 되지 않은 인간이라니.”

그릇의 무표정 위로 삐걱거리는 미소가 번진다.

“거기서 범람한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났고 말이야.”

그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압구정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가 계엄령 이후 거주 지역에 설치한 사이렌이다.

사이렌의 소리 패턴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지금의 소리는.

“각자도생(各自圖生)…….”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이 왔으니, 제각기 살길을 도모해라.

마지막의 마지막.

거기서 또 마지막에 울리기로 약속된 신호.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멸망 이후, 인류의 맥을 잇자는 약속.

그것이었다.

그릇의 등장으로 창밖을 전혀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회백색의 거대한 반구체가 있었다.

서울역에서 시작되었던 게이트가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며 서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상소윤과 유혜연은 듣지 못했으나, 진유성과 상림, 아놀드 벡은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엄마!”

“꺄아아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이 게이트로 끌려가며 지르는 비명을.

“아, 압구정으로 가!”

생존자들은 자동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두 발로 달려서 압구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부 지침을 따르려고 압구정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회백색의 구체가 유일하게 압구정만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규칙을 더 어겨 보자꾸나.]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압구정에는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라.]

아카샤 덕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압구정에 도달하려 했지만.

“아아아아악!”

회백색의 반구가 증식하는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다.

인류가 멸망하고 있다.

서울역에서 시작된 게이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집어삼킬 것이고, 이내 지구를 집어삼킬 것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도 않아서.

“…….”

“…….”

그릇의 존재감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이들이 침묵에 빠졌다.

“그럼 진유성.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보자꾸나.”

비탄이 묻어나는 침묵 속에서 그릇이 말했다.

“그때 내 눈앞에 있는 게 중원의 진유성일지, 지구의 진유성일지 몹시 궁금하구나.”

그렇게 그릇은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진유성이 주먹을 내질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신을 담았던 그릇인 그녀는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은 무상하고, 그녀를 향한 모든 증오는 허상하다.

그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과뿐이었다.

인과.

원인과 결과이다.

진유성은 그녀를 때릴 수 있는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때였다.

투-콰앙!

진유성의 주먹이 공간을 떠나려던 그릇의 본체를 가격했다.

“컥!”

불의의 일격에 그릇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어찌……?”

“역시 너였군.”

진유성은 캘리포니아의 자유 각성 지대에서 게이트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게이트 폭주를 의도했었다.

* * *

[게이트가 닫힙니다.]

[남은 몬스터 개체에 비례해 폭발이 일어납니다.]

[공간이 붕괴합니다.]

용권풍이 몰려온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평원의 천지사방에서 붉은 빛을 띠는 폭풍이 휘몰아친다.

진유성이 주먹을 말아 올렸다.

그리곤 온 세상을 떨리게 하는 바람 속으로 가볍게 내질렀다.

핏.

힘없는 일권(一拳)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용권풍을 헤치고, 또 헤치고 나아갔다.

절대 힘을 잃지 않고.

그리고 그 힘은…….

“큭!”

“왜 그래?”

“모, 모르겠어요. 갑자기 숨이 막혀서…….”

“심력 소모가 너무 컸던 건가?”

아놀드 벡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분간 아카식 레코드에 접촉하는 건 삼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럴게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아멜라 메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라 메건과 연결되어 있던 그릇에게 닿았었다.

* * *

“네가 관리자였군.”

그릇은 아카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천, 수만 개로 쪼개서 관리자가 되었다.

관리자가 되면서 아카식 레코드에 편입할 수도 있었다.

마도사들의 노력에 의해 게이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알고 있냐? 나는 너의 진체에 닿은 적이 있고, 관리자를 몇 번이나 소멸시켰었다.”

진유성이 가짜 입멸검을 들었다.

“그리고 이 검은 신을 베어 넘겼었지.”

그릇은 그 순간, 진유성의 온몸에서 넘실거리는 인과율을 느꼈다.

저 인간은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결과를 만들어 낼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인과율을 읽은 그릇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진유성과 사생결단을 낼 필요는 없다.

그 일은 어차피 간절히 원하는 이가 있다.

그릇이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파파파파파파파팟!

압구정을 제외한 서울 전역을 집어삼켰던 회백색의 반구체가 엄청난 속도로 압구정으로 증식했다.

이윽고 반구체가 압구정을 집어삼켰지만.

“무, 뭐야!”

아카샤의 의지에 따라 밀려 나갔다.

압구정에 거주하던 이들을 그 누구도 데려가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순간이지만 압구정은 서울역 게이트에 포함되었다.

그것은 강한 끌림을 만들어 냈다.

지구의 진유성.

중원의 진유성.

본디 한 명이었어야 할 두 존재.

두 존재의 공간 위상이 겹치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결과…….

“드디어 본좌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로구나.”

산처럼 쌓인 시신들 위에 앉아 있던 중원의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진짜 입멸검을 뽑아서 지구의 진유성을 향해 내밀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도다.”

두 명의 진유성이 두 개의 입멸검을 들고 서로의 심장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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