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4화>
* * *
진유성의 말처럼, 두 사람이 지구에 돌아왔을 때는 그리 많은 시간이 흘러 있지 않았다.
주변의 공원을 둘러보던 상소윤이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우리 행사장 왔었지.”
순간 헷갈렸었다.
분명 진유성이 서울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왜 주변에 나무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들은 ST-1 구단의 기금 마련 행사장 근처의 공원에서 문을 열었었다.
“그걸 그새 잊어버렸느냐?”
“까먹을 수도 있지. 다른 세상에 가 본 건 처음인데.”
“소감이 어땠느냐?”
“공기가 다르네.”
상소윤이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 공기만 마시고 살아서 몰랐는데, 공기의 질이 나쁜 게 확 체감이 됐다.
“그래, 멀미가 나거나 어지러운 건 없고?”
진유성의 물음에 상소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 스윗함은?”
“뭐라는 것이냐.”
“아냐, 뭔가 좀 평소보다 스윗한데.”
상소윤이 진유성을 추궁했다.
“너, 어제 새벽에 뭐 했냐?”
“……아무것도.”
“내가 분명히 깊이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감정이 요동쳤단 말이야. 근데 사람이 자다가 감정이 요동칠 수는 없잖아?”
“꿈이라도 꿨나 보지.”
“아냐. 안 꿨어. 아무래도 이게 내 감정이 아니라, 네 감정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진유성은 속으로 좀 놀랐다.
상소윤의 말처럼 그들은 인과율을 공유하게 됐기에 서로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상소윤의 말처럼 감정의 변화를 감지한 건 아니었다.
주혜미는 진유성의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였고, 어젯밤 그 중요한 존재의 결(結)이 맺혔다.
상소윤은 그러한 인과율의 변화를 잠결에 느낀 것 같았다.
“어쩐지 찔끔한 느낌인데?”
“시끄럽다.”
“혹시 중원에 숨겨 둔 애인이라도 만난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너는 나의 삶을 알지 않느냐?”
물론 알고 있다.
진유성은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생존대원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이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다.
특히 여자를 조심했었다.
“흠…….”
여전히 뭔가 의심스러워서 눈을 가늘게 떴던 상소윤이지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근데 엄마,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뭘 말이냐?”
“이제 난 안 죽게 된 거 아니야?”
“내가 죽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이걸 어떻게 말하냔 말이야.”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설명하마.”
“그럼 그, 그거는?”
“그거?”
“너랑 나랑, 그, 어, 계속 함께한다는 거?”
“그것도 내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진유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놀랐다.
지금껏 백 년하고도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허락이란 것을 받은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면 우습다.
지금의 백 분의 일밖에 안 되는 힘을 가지고도 세상 그 누구에게도 허락받을 필요 없는 절대자가 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백 배는 되는 힘을 가지고도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역시 세상은 알 수 없는 곳이고, 진유성은 그 알 수 없음이 좋았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아빠가 반대하면 어떡할 거야?”
“눈에 흙을 넣을 거다.”
“엄마가 반대하면?”
“잘 설득해야지.”
“그게 뭐야.”
“배가 고프구나.”
진유성이 상소윤의 손을 잡았고, 상소윤도 진유성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공원을 떠났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지종수였다.
지종수는 소속사의 연습실에서 연기 연습을 하다가 그만 시간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심도훈의 전화를 받고 뒤늦게 출발했고, 차가 막혀서 이제야 도착했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것이 진유성과 상소윤이었다.
손을 꼭 붙잡고 있는.
“…….”
지종수는 제자리에서 정지한 것처럼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연기 연습을 하고 와서 그런지 감정이 제어가 잘 안 된다.
지종수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행복해라…….”
17살에 시작했던 지종수의 순정이 끝난 것은 스무 살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 * *
상소윤과 함께 집에 도착한 진유성은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꺄하, 꺄하하!”
진유성을 보면 매번 날게 해 달라고 조르는 상도윤은 오늘도 하늘을 날고 있었고.
사실 뭐, 이제 상도윤이 날아다니는 걸 타인이 봐도 상관없게 되었다.
다들 진유성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진유성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덕분에 진유성은 야외에서도 상도윤을 날아다니게 해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제약 회사를 운영하는 회장에게서 은밀히 연락이 온 것이었다.
하늘을 날아 보는 게 소원인데 한 번만 날게 해 주면 안 되겠냐고.
돈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진유성은 거절했지만, 노인네의 집념이 장난이 아니었다.
대정고까지 찾아와서 허리를 조아리기도 했고.
사실 진유성은 안 해 주고 싶었지만, 딱 보니까 노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한 번만 해 주기로 했다.
일견 보기에는 정정하지만, 길어 봐야 두 달도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금방 후회했다.
“으허, 으허!”
뭔가 본능적으로 나오는 감탄인 건 알지만, 상도윤의 모습이랑 겹쳐서 기분이 나빴다.
“할멈! 지금은 할멈이랑 조금은 가까워진 건가!”
하늘을 보며 그렇게 외치는 걸 보고 평소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기도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 품위를 갖춰야 하는 것 같다는 걸 실감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끝낸 진유성은 후식을 먹으면서 상림과 유혜연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상소윤의 관측 덕분에 진유성이 돌아올 수 있었고, 그래서 상소윤도 영생의 삶을 얻었다는 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유혜연이 깊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상림은 발언의 우선권을 유혜연에게 양보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아 보였지만.
잠시 뒤, 기나긴 장고 끝에 드디어 유혜연의 입이 열렸다.
“나도.”
“……?”
“나도!”
“…….”
역시나 범상치 않은 외숙모였다.
유혜연은 곧 장난이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좋네.”
“뭐가, 엄마?”
“아니야.”
유혜연은 대답하지 않았고, 상소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이 유혜연의 눈빛이 진유성을 스쳤고, 진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소윤은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진유성은 유혜연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어차피 자식은 언젠간 부모의 끝을 봐야 한다.
또한 부모는 생의 끝에서도 자식이 계속 나아가길 바라는 법이다.
유혜연은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언젠간 그녀가 흙으로 돌아갈 때도 상소윤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이니까.
또한 두 사람이 영원불멸한 시간으로 얽혀 있다면 잠깐의 부침은 있을 수 있으나, 함께할 것이니까.
그렇게 유혜연의 답을 들은 진유성이 상림을 쳐다보았다.
상림은 묘하게 볼이 부루퉁했지만, 딸 가진 아버지의 당연한 반응 정도에 불과했다.
의외로 생각보다 쉽게 둘의 관계를 납득하는 듯했다.
진유성이 상림을 쳐다보고, 상림이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진유성은 그 눈빛에서 상림의 마음을 읽었다.
진유성은 줄곧 상림에게 장난을 쳐 왔고, 상림은 때때로 진유성을 골탕 먹이려 했다.
성공한 적은 거의 없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두 사람이 그런 피상적인 것보다 훨씬 깊이 있게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상림은 알고 있었다.
진유성의 고결함은 세상을 구해 낼 정도로 고결했다.
그런 진유성은 스스로의 존재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며, 상소윤이 싫어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진유성보다 좋은 남자는 세상에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한 대만 때리려고 하면 반격당할까?’
괜히 얄밉긴 했지만.
상림의 눈치를 살핀 진유성은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던 흙을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무래도 이 흙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상림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 같은 엄청난 생각을 떠올렸다.
‘교주님이 내 사위가 됐다. 난 교주님의 장인이 됐다. 그리고…….’
장인은 사위의 손윗사람이다.
그것도 완벽한 손윗사람!
큼큼, 헛기침을 한 상림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이보게?”
“허어, 과거의 관계는 잊고 새로운 관계를 쌓아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사위.”
“나는 언제나 일위였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 사위?”
“나는 일위였다.”
“사위.”
“일위.”
“사위!”
“일위!”
자동 응답기를 켜놓은 것처럼 대답하는 진유성이었다.
절대로 상림의 손아랫사람이 됐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바보 행세를 한다.
진유성의 단호함을 느낀 상림은 단어를 바꾸었다.
“이보게, 진 서방.”
“나는 동방의 지배자였다.”
“진 서방!”
“동방이라고!”
무논리에 열이 받은 상림이 다시 한번 머리를 굴렸다.
그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진유성의 위에 서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혼식을 하면 된다.
결혼식 날, 장인으로서 진유성의 머리도 좀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도 좀 두들겨 줄 수 있다.
설마 그런 날 반항(?)을 하겠는가.
결심을 내린 상림이 상소윤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라고?”
“아빠!”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마침내 한국의 수험생들에게 중대한 날이 찾아왔다.
바로, 수능이었다.
진유성은 굳이 수능을 볼 필요가 없었지만, 수능을 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고3들의 마지막이 이것이라면 그 역시 경험을 하고 싶었다.
“야! 진유성! 너무 잘 보지 마!”
같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윤은 진유성이 너무 시험을 잘 봐서 혼자 좋은 대학에 갈까 봐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아직도 대학에 갈지 말지를 결정 내리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를 정하지 못하겠다.
본래는 각성 관련 학과에 진학한 다음에 각성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해 볼까도 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게이트 발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는 게이트가 마도사의 의도에 열린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건 역사의 그럴듯함을 갖추기 위한 인과율 때문이었는데, 더는 그럴듯함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발생 빈도가 줄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추세대로라면 10년 안에 게이트는 완전히 종식될 것 같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사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웬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진유성에게 다가왔다.
“교육청의 결정이 조금 늦었습니다.”
“아, 그래? 결국 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교육청은 진유성의 능력이 ‘공정한 시험’ 자체를 위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진유성이 자신의 능력으로 커닝을 하거나, 친구들에게 답안을 알려 주는 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청은 진유성이 독실에서 시험을 보고, 다수의 시험 감독관을 배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안은 교육청 내에서도 역차별이 아니냐는 많은 말들이 있었다.
이게 진유성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각성자 수험생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설왕설래가 오가다가 결국 수능 당일이 돼서야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 뭐. 가자.”
진유성은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 그런 생각은 들었다.
감독관을 천 명을 불러와도 자신이 마음먹고 커닝한다면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그렇게 독실의 문을 여는 순간.
“…….”
진유성은 할 말을 잃었다.
“어허, 수험생은 어서 오도록 합니다. 감독관한테 인사부터 하고.”
여전히 진유성의 손윗사람을 하고 싶어 하는 상림.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아놀드 벡.
“…….”
별말이 없는 아멜라 메건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문득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시험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을 성사시키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건 진유성의 오해였다.
세 감독관들은 자원자들이었다.
“창밖을 보시면 안 됩니다.”
“아니, 창문도 못 봐?”
“마스터는 창문에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 커닝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할 수는 있는데 내가 굳이 그렇게…….”
“안 됩니다.”
진유성을 갈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