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5화>
* * *
본래 진유성은 수능을 그렇게까지 열심히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림, 아놀드 벡, 아멜라 메건의 철통 수비 때문에 약이 올라서 더욱 열심히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유성은 특정 학문을 전혀 몰라도 객관식 문제를 50% 가까이는 찍어서 맞출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흔히 불가에서 말하는 신통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전혀 몰라도 문제의 단어와 문장을 유심히 살피면 출제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한데 학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정답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게다가 정답 기입 따위의 사소한 실수를 하는 법이 없고, 생사결의 상태에 돌입하면 한정 없이 고민할 수 있다.
그렇게 나온 건 당연한 결과였다.
수능 만점.
“와, 씨! 진유성 만점이래!”
“야, 너 커닝했지.”
“나는 부정하고 삿된 방법으로 이윤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때, 눈에 멍이든 채 교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지종수가 입을 열었다.
참고로 지종수가 멍이 든 것은 그가 수능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우의 길을 걷겠다면서 수능을 거부했다가 아버지한테 몇 대 맞았다고 했다.
그래도 지종수의 표정은 환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지종수의 결정을 용인해 줬으니까.
“야, 근데 원래 수능 만점 맞으면 언론사에서 취재 오고 그러지 않나?”
“에이, 진유성한테 취재가 오겠냐? 카메라 들이밀면서 ‘수능 만점의 비결은 뭔가요?!’ 이렇게 한다고?”
“아예 주변에 엄마들이 자식 과외도 부탁한다고 하지 그러냐.”
“아니면 뭐, 인강이라도 찍어 달라고 요청이라도 오겠냐?”
“그치? 말도 안 되지?”
“그래. 그게 말이 되냐? 아무리 우리나라 교육열이 강하다고 해도.”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언론사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진유성은 당연히 응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물 만난 고기처럼 움직인 여인이 있었다.
바로, 유혜연이었다.
“호호. 저는 지켜보는 걸로 응원했죠. 공부하라고 압박을 주지도 않았고, 그저 믿음을 가졌죠.”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유혜연의 대답에 취재진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진유성에게 대체 누가 공부를 하라고 압박을 준단 말인가.
하지만 유혜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은 너무 아이들에게 압박을 줘서 문제인 것 같아요.”
“그, 어, 그렇군요.”
“아침 방송에 출연이라도 한 번 할까요? 아이들 공부법으로?”
“그, 글쎄요.”
유혜연의 모습에 상소윤은 충격을 받았다.
“가정주부인 줄 알았던 우리 엄마가 사실은 연예인 지망생?”
그때 취재진 중 한 명이 진유성에게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의 말씀이 정말입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응원만 했으니까, 맞긴 한데……?”
생각해 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취재진과 진유성이 혼란에 빠진 사이, 유혜연은 카메라 앞을 활보하고 있었다.
* * *
상소윤도 의외로 수능을 잘 봤다.
본인 스스로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고 하지만, 진유성이 보기에는 그냥 운이었다.
대운(大運)이라도 받은 듯, 찍은 걸 족족 맞췄다.
좀 신기하긴 했다.
상소윤이 자신의 영향을 받아 힘을 축적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 상단전이 개방될 단계는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잘 찍었다는 건, 그냥 운이다.
하지만 상소윤은 인생 최고의 성적을 대학에 진학하는 데 써먹진 않았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인 학교로 유학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장학생이었다.
쇼핑몰을 하면서 틈틈이 만들어 낸 디자인들이 높은 가치로 평가받았다.
“진짜 나 혼자 보낼 거야……?”
인천공항에서 상소윤이 슬픈 눈망울로 쳐다보자 진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좀 가거라.”
“너무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유성 씨는 맨날 그런 식이야.”
“…….”
아무래도 어제 함께 본 드라마의 약발이 과한 것 같다.
어째 상소윤이 점점 과거의 자신처럼 되어 가는 것 같다.
“아, 좀 가라고.”
상소윤이 프랑스로 먼저 떠나긴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아니다.
상소윤은 입학 일정 때문에 급했고, 진유성은 한가했기에 한 가지 일을 처리하고 갈 생각이었다.
즉, 진유성도 곧 출국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길어 봐야 이틀이다.
한데, 이 주접을 떨고 있다.
상소윤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다가 최종 보딩 방송이 나오자 비행기로 들어갔다.
진이 다 빠진 유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KSG 본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지후 본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 다들 기다리고 있지?”
“괜찮습니다. 시작하시죠.”
이어서 한지후 본부장의 주도에 진유성은 전 세계의 각성 질서를 책임지는 이들과 화상 미팅을 시작했다.
진유성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간단했다.
비행기는 번거롭고, 여권은 더 번거롭다.
어차피 진유성은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 상소윤과 함께 여권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대가로 그가 내미는 것은 달콤했다.
바로, S급 이상 게이트의 완전한 해결이었다.
-무제한급 게이트까지 전부 해결해 주신다는 말은, 무제한급 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사실 진유성도 잘 모른다.
인과율에 따라 발생한 게이트 현상은 점차 소멸되고 있지만, 마지막 지점에는 인과율의 폭풍이 발생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아닐 확률이 더 높긴 하다.
그러나 뭐가 됐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자신한테 유리하다.
진유성의 말을 들은 각국의 게이트를 관리하는 지도자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언노운 엠페러의 경고다.
쉽게 넘길 수 없다.
-만약 두 개 이상의 게이트가 두 개 이상의 국가에 발생하면 우선순위는 어떻게 됩니까?
“야, 내가 게이트 해결하는 데 10분이면 충분하고, 다른 국가로 날아가는 데도 10분이면 충분해.”
진유성의 호언장담에 각국의 수뇌부들이 결국 원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영국은 언노운 엠페러의 입국과 출국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주는…….
그렇게 진유성은 여권의 자유를 얻었다.
* * *
서양인은 동양인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진유성과 상소윤은 프랑스에서 꽤 조용히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프랑스인들, 아니 유럽인들은 언노운 엠페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신기해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기에, 인과율로 세상이 개변하던 시점을 모두가 강렬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는 이들도 많았고, 사인을 해 달라는 이들도 많았다.
진유성은 그런 이들을 귀찮아했지만, 야박하게 대하진 않았다.
상소윤이 의외라고 느낄 정도로 친절한 모습도 보였다.
진유성과 상소윤은 그렇게 프랑스 생활에 적응해 갔다.
물론 그들이 시간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건 아니었다.
진유성 덕분에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세계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엄마! 나 왔어!”
“아, 또 왔어?”
“꺄하하!”
“도윤아, 누나 왔어!”
상소윤과 진유성이 프랑스로 떠날 때는 남몰래 눈물도 살짝 흘렸던 유혜연은 어이가 없었다.
점심에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온다.
이게 유학을 간 건지, 옆집으로 놀러 간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저 왔어요.”
“유성이 왔니? 뭐 먹고 싶어?”
“음, 김치찌개요.”
“아, 왜 엄마는 진유성만 챙겨! 난 갈비찜 먹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진유성과 상소윤은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는 와중에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러한 여행들은 상소윤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고, 디자이너로서의 역량도 성장하게 했다.
그사이, 진유성은 이런저런 게이트들을 클리어해 줬다.
게이트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 이상, 하위 각성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고위 각성자들만 남았다.
그러니 게이트 클리어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A급 이상의 게이트가 탄생하면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도와주는 형식이었다.
진유성은 게이트의 부산물을 전혀 탐내지 않았다.
각성자들은 늘 진유성에게 고마워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진유성은 늘 자신이 세상에 공개되는 걸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막상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됐지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유성이 아득히 위의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서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진유성은 지금의 평화가 즐거웠다.
“진유성. 내가 파이 좀 해 봤는데…….”
“파이는 3.14다.”
“야! 바보 행세하지 마!”
요리에 재능이 없는 상소윤이 자꾸 요리 전공 친구들에게 배운 요리를 해 오는 것만 빼면.
* * *
게이트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는 순간부터 진유성은 점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진유성이 딱히 모습을 감춘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 활동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시선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사람들도 더는 진유성을 찾지 않기 시작했다.
시간은 언제나 놀라움과 충격을 상쇄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진유성이 간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영화 <에이전시>의 촬영 현장에서였다.
“종수 씨!”
“네!”
그리 특출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지종수는 배우로서 성공했다.
지종수의 과거를 아는 친구들이 보기엔 어이없을 정도로 대기만성 노력형의 아이콘이 되었다.
<에이전시>는 그런 지종수가 처음으로 맡은 단독 주연의 영화였다.
에이전시는 범죄와 사고를 미리 계획해 돈을 버는 일당을 좇는 형사의 이야기였고, 지종수는 주인공인 형사였다.
와이어 액션 신을 앞둔 지종수는 살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큐 소리와 함께 와이어가 지종수를 쭈욱 당겼다.
한데, 속도가 너무 빠르다.
게다가 와이어가 갈 지(之) 자로 흔들린다.
“으아아아아아!”
엄청난 속도에 지종수가 깜짝 놀라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진유성이 지종수의 옆에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와이어 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지, 진유성이다!”
찰칵, 찰칵.
그 모습을 본 기자들이 미친 듯이 카메라로 진유성을 담기 시작했다.
진유성이 지종수에게 속삭였다.
“됐느냐?”
“야, 뭐 더 드라마틱한 연출 없어?”
“와이어를 끊는 건 어떠냐?”
“받아 줄 거지?”
“살려는 드릴게.”
와이어가 툭 하고 끊어진다.
“으아아아아!”
지종수의 열연 뒤로 진유성이 지종수를 가볍게 받았다.
그리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고를 예지하고 촬영장에 나타난 진유성의 이야기로 전 세계가 들썩였다.
어떻게 보면 에이전시란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당연히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내 도움에 대한 대가가 고작 양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해프닝은 첫 단독 영화를 홍보하려는 지종수의 잔머리였고.
* * *
6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네덜란드의 과학자 헤라르트 엇호프트의 예측처럼, 세대가 바뀌자 진유성에 대한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유성이 신적인 존재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유리 겔라처럼 개인 능력을 기반으로 한 연기자처럼 생각했다.
유리겔라가 마술을 기반으로 초능력자의 프레임을 쓴 것처럼, 진유성도 각성 능력을 기반으로 신적인 존재의 프레임을 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강력한 증거 중 하나가 친구의 영화 홍보를 돕기 위해 벌인 행각이었고.
진유성이란 남자가 아주 강력한 각성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신적인 존재는 아니다.
인과율로 세상이 재구성되는 순간을 경험했던 이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은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전 인류의 의식과 무의식에 진유성이란 존재가 스며드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지만 당시 스무 살이었던 이들이 벌써 여든이다.
주류의 목소리를 내긴 힘들었다.
아직 진유성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인식은 희미해졌다.
* * *
정새롬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벌써 88살이다.
아직은 건강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느낌은 들었다.
자식도 모두 독립시켰고, 자식의 자식도 대학에 입학했다.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다.
다만 정새롬은 가끔씩, 아니 꽤 자주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서 떠올렸다.
20년 전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진유성과 상소윤.
그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세상은 그들에 대해 떠들어 댔지만, 정새롬은 단 한 번도 외부에다가 입을 연 적이 없었다.
진유성과 상소윤이 조용하고 잊혀진 삶을 원하니까.
그 순간이었다.
“잘 지냈어? 새롬아?”
고등학교 이후로 전혀 모습이 변하지 않은 상소윤이 그녀의 침대 맡에 나타난 게.
정새롬은 눈을 크게 떴지만,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방금.”
“뭐 했어, 요즘.”
“음, 좀 바빴어. 진유성이 사고 친 걸 수습하느라.”
“진유성은 여전하고?”
“여전하지.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어요, 그 자식은.”
상소윤의 말에 정새롬이 여상하게 웃었다.
그 뒤로 십대 소녀와 여든 후반의 할머니가 나눈다고 믿기 힘든 유쾌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대화의 끝에 정새롬이 물었다.
“행복하니, 소윤아?”
“응.”
“끝나지 않는 생을 사는 건 어때?”
“아직은 좋아. 어쩌면 함께여서 그럴 수도 있고.”
“다행이다.”
정새롬이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났을 때.
상소윤은 울고 있었다.
* * *
서울 종로구, 청와대.
청와대는 본디 종로구에서 가장 의미 있고 거대한 건물이어야 했다.
대한민국을 경영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CMSG.
청와대와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CMSG는 청와대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사람들은 CMSG란 기업에 대해서 궁금해 했지만, 제대로 정체가 밝혀진 것은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꾸준히 부를 축적해 오던 정체불명의 기업이라는 것밖에는.
게다가 CMSG에는 수많은 직원들이 있었지만 그 최상층에는 그 누구도 당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 최상층에는…….
“아오, 오늘도 더럽게 심심하네.”
간이용 침대에 드러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리는 시정잡배가 있었다.
그런 시정잡배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말 좀 가려서 해라, 상소윤.”
“뭐! 내가 뭐!”
“어째 갈수록 나의 과거를 보는 것 같구나.”
“그 도발은 생사결을 벌이자는 거지?”
“헛소리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라.”
“왜? 할 것도 없는데.”
“할 건 없지만, 할 만한 건 있다. 다른 세계에 다녀오는 건 어떠냐?”
“다른 세계?”
“사회가 있고, 사람이 있고, 문명화된 타 차원의 세계.”
“너 움직이면 안 되지 않아?”
지구와 중원은 진유성의 유무에 따라서 차원의 위상이 구분된다.
만약에 진유성이 둘 모두를 떠나 버린다면 차원의 위상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상소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아졌다.”
“진짜?”
“그래.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그럼 그 세계도 가 봤어?”
“안 가 봤다. 혼자 가서 뭐 하느냐?”
상소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해? 열어.”
“…….”
“안 열어? 꾸물거릴 거야?”
“그나마 봐 줄 만했던 성격마저 박색해졌구나…….”
진유성이 한숨과 함께 손을 휘둘렀다.
공간의 틈이 열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유성과 상소윤이 그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 * *
한때 진유성은 낙엽처럼 쌓이는 추억을 두려워했었다.
언젠간 그 낙엽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덮어 버려서 숨을 쉴 수가 없고, 괴로움에 허덕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긴 시간을 살아가는 그의 생애는 반드시 그러할 것이기에.
그래서 진유성은 누구와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고 외롭고 아득히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때 그가 추억을 두려워했던 것은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괴롭지도 두렵지도 않다.
“여긴 뭐야?”
“나도 모르겠다. 많은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객잔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객잔이 아니고 학교 같은데. 아카데미?”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람들 생긴 건 지구랑 똑같은데…… 한번 들어가 볼까?”
“네가 원한다면.”
아니, 오히려 조금은 기쁘다.
길고 아득한 생의 끝을 기다리기 보다는 그 과정을 즐길 정도로.
어쩌면 이것이 그가 온 세상을 연민(憐愍)한 끝에 얻은 인연(因緣)일지도 모르겠다.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