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2화 (31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2화>

*   *   *

계획 실행의 날은 생각보다 금방 다가왔다.

이건 진유성도 몰랐던 사실인데, 진유성이 대표로 있고 상림이 관리하는 CMSG에서 지종수가 출연한 영화에 투자를 한 것이었다.

사실 이번 생에서 CMSG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기업이었다.

인과율로 세상이 개편되긴 했지만 그건 미시 세계의 이야기.

실물 경제와 관련된 거시 세계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진유성이 벌었던 막대한 돈도 없다.

하지만 중원을 오갈 수 있으니 두고 온 재산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여전히 게이트 클리어도 진행 중이었다.

상림은 그 돈으로 다시 한번 CMSG를 설립했다.

상소윤이 진유성과 함께 영겁을 살아갈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물론 진유성이 궁상맞게 사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찌 됐든 오래 살 거라면, 돈이 많으면 좋지 않은가?

그렇게 탄생한 CMSG는 각성 물품을 비롯한 온갖 것들을 취급했고, 진유성의 인맥 덕분에 일이 끊이지 않았다.

진유성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문화 예술과 관련된 사업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 완결을 내지 않은 작가를 핍박(?)하거나, 차기작을 쓰지 않은 드라마 작가를 착취(?)하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종수가 출연한 상업 영화에도 투자를 했고.

우연이 겹친 일이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촬영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진유성……?”

“진짜로?”

진유성이 촬영장에 나타나자 몇몇 스태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진유성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TV에서도 진유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이제는 한물간 소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진유성을 보면 놀라워했다.

마치 책으로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난 것처럼.

진유성은 그러한 시선 속에서 영화의 여주인공을 향해 다가갔다.

문득 역도부원이었던 최유리가 떠오른다.

“오다 주웠다.”

당시의 진유성은 지구, 특히 한국 사회에 대한 상식이 전무했다.

그래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들이 약간은 과장되었을지언정 전부 진실인 줄 알았었다.

최유리 입장에서는 그런 행동을 실제로 겪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참고로 최유리는 얼마 전 올림픽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카샤의 화신인 타트바를 품었던 순간은 기억에만 있을 뿐이지만, 그게 자신감에 꽤 영향을 미친 듯했다.

잠깐 최유리를 떠올린 진유성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지종수의 여자 친구이자 여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왕년의 솜씨를 발휘할 시간이다.

대머리고자 상림은 자신의 인기가 천마신교주라는 직책 덕분이라고 매도했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다.

천마신교주가 되지만 않았다면, 중원에서 제일가는 화화공자가 되지 않았을까?

“이름이?”

“예? 정수희…….”

“정수희라. 부모님이 예쁜 이름을 지어 주셨군요.”

“대표님이 지은 예명인데……?”

*   *   *

강력한 통치 아래에는 언제나 혁명의 뜻을 품은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혁명이란 단어는 대개 성공한 이들에게 붙기 때문에, 아직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반란군으로 불리기 마련이었고.

그리고 여기.

아주 오랜 시간 반란을 꿈꿔 온 두 남자가 있었다.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손을 내밀자, 젊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이 물건을 정당한 곳에 사용한다는.”

“물론이네. 내가 그 외의 용도에 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소속은 다를지언정 역천(逆天)의 뜻은 같이한다고 믿네. 내 명예를 걸겠네.”

중년인의 진지한 표정에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USB를 건넸다.

USB를 움켜쥔 중년인이 한탄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내 반드시…….”

역천을 꿈꾸는 이들은 생존대 소속의 상림과 연합군 소속의 지종수였다.

*   *   *

진유성과 상소윤은 유혜연의 부름을 받고 압구정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현재 두 사람의 거처는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상소윤은 프랑스의 유명 디자인 학교의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파리에서 디자이너 도전을 하고 있었고.

진유성은 각국의 정부와 협상해 여권의 자유를 얻어, 마음 내키는 대로 전 세계를 쏘다니고 있었다.

최근 가장 많이 간 곳은 남극이었는데, 그곳에 생긴 중원과 이어진 통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진유성과 상소윤이 가족을 만나는 게 오랜만이란 건 아니었다.

당장 프랑스 디자인 스쿨을 다닐 때만 해도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으러 한국에 왔으니까.

오랜만인 것은 만남 자체가 아니라, 다 같이 유혜연이 해 주는 집밥을 먹는 상황이었다.

“엄마, 나 왔어!”

초인종과 함께 울려 퍼지는 상소윤의 목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며 조그마한 남자애가 쪼르르 뛰쳐나왔다.

그리곤 진유성에게 와락 안겼다.

“형아!”

어느덧 다섯 살이 된 상도윤이었다.

“잘 있었느냐?”

“웅! 형아!”

“왜 부르느냐.”

“안 왔어! 오래!”

“그래 봐야 이 주밖에 되지 않았다.”

“이 주?”

진유성이 상도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자, 옆에 있던 상소윤이 쌍심지를 키며 끼어들었다.

“상도윤, 누나는 보이지도 않지?”

“누나도 안녕!”

“누나도?”

“누나…… 까지?”

“까지이?”

상도윤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진유성이 상도윤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닥거렸다.

이윽고 얼굴이 환해진 상도윤이 크게 외쳤다.

“누나가 뭔데 안녕!”

“야!”

“어허. 애한테 소리 지르지 마라. 이러니까 도윤이가 너보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냐.”

“너한테 소리 지른 거거든?”

“어쩐지. 아주 박색했도다.”

“싸우지 마!”

상도윤이 진유성과 상소윤의 손을 잡아끌고 집안으로 향했다.

상도윤은 척 봐도 또래 애들보다 성장이 월등히 빨라, 얼핏 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처럼 보였다.

비단 신체의 성장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이나, 정신적인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연말 가까이 태어난 터라 개월 수도 적었는데 말이었다.

이게 다 진유성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벌모세수와 임독양맥 타통을 시전해 준 덕분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상도윤의 존재에는 특별한 부분이 있었다.

지난 세계에서 상도윤이 생겨난 것은 상소윤이 18살일 때, 속초의 국립 생태 공원에서였다.

거기서 진유성이 상림의 임독양맥을 타통해, 대머리고자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상도윤이 생겨났고(상림의 표현을 빌리자면 펜션문 베이비), 어느 일요일 아침 진유성이 유혜연의 뱃속에서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동생이라니…….”

“싫은 게냐?”

“응? 아니? 싫을 게 뭐가 있어.”

“복잡한 표정이라서.”

“그냥 좀 놀란 거야.”

“걱정하지 마라. 넌 좋은 형이 될 거니까.”

“뒤질래? 무슨 형이야.”

“아직 태아의 성별을 모르지 않느냐?”

“내 성별은 알잖아!”

분명 상림도, 유혜연도, 상소윤도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과율로 개편되기 이전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의 세상에는 네 사람이 속초로 떠났던 일이 없다.

진유성이 인과율의 보정을 받아 돌아온 것이 19살 때니.

명백한 기억이 있으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실물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도윤은 태어났다.

똑같은 날짜, 똑같은 시간에.

진유성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는 둘 중 하나였다.

첫째, 상도윤이 그 순간에 그렇게 태어날 존재였다는 것.

둘째, 상도윤이 인과율로 개변된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뭐가 되든 상관없기도 했다.

전자라면 그냥 그런 거고, 후자라면 자신이 도와주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유혜연이 요리를 하고, 상림이 돕고 있는.

“왔어? 어서 손 씻어. 거의 다 됐다.”

우리 집의 풍경.

신화적인 존재들의 싸움 속에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채 지켜 낸 광경.

“오셨습니까?”

몇 번을 봐도 흐뭇해지는 모습에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자신이 세균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말하는 유혜연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 먹자!”

그렇게 다섯 식구의 식사 겸 담소가 시작되었다.

대화 내용은 다양했다.

상도윤이 어린이집에서 진유성의 도움 없이 하늘을 날려다가 일으킨 사건 사고나, 상소윤이 프랑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남극에 생겼다는 중원과의 통로는 어떻게 된 건지.

올해의 중양절에도 신주청이 방문하는지 등등.

심각하다면 심각한 이야기였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좀 봤는데, 남극에 생긴 통로는 천계 때문인 거 같더라.”

“천계요? 걔들이 왜요?”

“모르겠어. 걔들이 자력으로 연 것 같던데. 인과율로 세상이 개편되면서 천계에도 어떤 영향이 있었나 봐?”

“천계에 가면 장삼봉도 있고, 달마대사도 있는 겁니까?”

“글쎄? 본인이 선택했다면 있을지도? 근데 영혼체가 몇천 년을 버티려나?”

상림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상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응. 가족들이랑 밥 먹고 있는데.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순간, 진유성의 예리한 기감에 ‘진유성’이란 이름이 들려왔다.

상림과 통화를 나누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었다.

진유성은 평소에 주변의 정보들을 흘리지만, 그건 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인식하지 않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흘려보낸 정보들을 재인식해서 필요한 내용을 추출할 수 있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정보들이 재조합되며 상림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영상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유성 대표님께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자신을 대표님이라고 부를 건 CMSG의 직원밖에 없다.

CMSG의 직원이 다른 여자로 오해할 만한 건 지종수의 여자 친구밖에 없다.

뭐, 충분히 할 수 있는 오해다.

하지만 굳이? 지금?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있는 주말에?

영상은 또 뭐고?

진유성의 생각이 뻗어 나가는 순간, 상림의 핸드폰과 연결된 TV가 띡 하고 켜졌다.

그 화면 속에는 지종수의 여자 친구인 유명 여배우와 하하호호 웃고 있는 진유성이 있었다.

누가 봐도 개수작을 부리는 모습과 함께.

상림이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 서방.”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별생각 없이 밥을 먹던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저 영상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저건 지종수와 합의가 됐던 장면이 아닌가.

‘아, 종수 여자 친구라는 걸 모르지? 그럼 엄마 아빠는 오해할 수도 있겠네?’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아빠, 저건…….”

“소윤이 넌 가만히 있어!”

“엥?”

“아무 말도 하지 마. 이 이야기는 사위에게 들어야겠으니까.”

“난 사위가 아니라……!”

진유성이 벌써 3년간 이어진 서방-동방, 일위-사위의 논쟁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고오오오오오.

어디선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젓가락을 든 채 진유성을 노려보고 있는 유혜연이었다.

진유성은 뛰어난 오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태를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니까 네가 우연을 가장해서 접근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순수한 의도인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원흉, 지종수의 계획이.

‘지종수……!’

정황상 상림까지 포섭됐다.

한편 상소윤은 묘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진유성이 분명 지종수의 여자친구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말로만 들은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좀 다르다.

화면 속 진유성이 여배우에게 온갖 주접을 떨고 있는걸 보니, 괜히 기분이 안 좋다.

그사이, 고요하게 불타오르는 유혜연이 물었다.

“소윤아? 이거 뭐니?”

“흥, 나도 몰라.”

“……사, 상소윤!”

그날 진유성은 사위의 ‘사’가 죽을 사(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

지종수와 상림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몇 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일상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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