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0화>
Chapter 2. 상소윤, 스물셋
상소윤은 원래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 언젠가 유튜브에서 보기로는 모든 사람들은 꿈을 꾸지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했지만…….
뭐 어쩔 거야.
내가 꿈을 안 꾼다는데.
그런 이유로 상소윤은 스스로가 꿈을 잘 안 꾼다고 생각했다.
한데, 최근 몇 년간은 이상하게 꿈을 많이 꾼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유성과 인과율로 얽히고 힘을 공유받으면서부터였던 것 같은데.
뭐,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인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게, 재밌었으니까.
이번엔 또 어느 순간일까?
“소윤아. 엄마가 해 줄 말이 있어.”
“응? 뭔데?”
“이제는 우리 딸한테도 말해 줄 때가 된 거 같아서. 아빠의 정체에 대해서.”
“정체? 무슨 정체?”
“아빠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는…… 북에서 왔어.”
아, 그래.
언제인지 알겠다.
이건 진유성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아빠가 갑자기 웬 남자애를 밖에서 데려와서 엄청나게 의심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해 줬던 이야기.
사실 아빠가 간첩이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그 뒤로 상소윤은 장대수 이사(상림의 회사 창립 멤버)의 도움을 받아서 친자 확인 검사를 했다.
결과는 당연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고.
‘근데 생각해 보면 진유성은 잘생겼고, 아빠는 험상궂게 생겼는데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어쨌든 꿈은 그녀가 기억하던 과거와 똑같이 흘러갔다.
아니, 아니다.
이건 옳은 표현이 아니다.
정확한 표현은 꿈속의 상소윤이 현실의 상소윤과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라고 해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결과를 도출해 낸 거고.
물론 상소윤이 마음만 먹는다면, 꿈속에서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에 꾼 꿈에서는 그렇게 한 적도 있었다.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꿈은 차곡차곡 흘러갔다.
진유성은 현대 사회에 천천히 적응해 갔고, 알게 모르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녔다.
‘어휴, 또라이.’
마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핑거 스냅으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상소윤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떤 순간이 다가왔다.
“여보, 아무리 그래도 유성이를 고등학교에 보내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음……. 그런가?”
“네. 일단 검정고시를 보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대학교라면 몰라도 고등학교는 좀…….”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고 싶어 할 거 같은데.”
“그럼 대정고 말고 일반 고등학교는 어때요?”
엄마와 아빠가 방 안에서 대화를 하고 있고, 자신은 살짝 열린 문 밖에서 듣고 있는 상황.
어렴풋이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순간이다.
상소윤이 알기로 진유성이 대정고에 입학했던 건 위장 신분을 세탁하기 위함이었다.
블랙 마켓에서 구매한 신분을 안정화시키는 건, 실제로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했던가?
하지만 꼭 고등학교에 갈 필요는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빠는 진유성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삶.
반대로 엄마의 걱정도 이해는 갔다.
대정고는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고 진유성이 사고를 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모른다.
위장 신분에다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위험이 있으니, 걱정을 한 것이었다.
터놓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엄마, 아빠가 진유성과 관련된 비밀을 공유하지 않는 순간.
그때, 잠깐 고민하던 상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말처럼 검정고시나 일반고가 낫겠네. 교, 유성이한테 물어볼게.”
“그래요.”
그렇게 진유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끝이 났고, 상림과 유혜연의 대화 화제가 돌아갔다.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상소윤은 어리둥절해졌다.
‘진유성은 대정고에 갔는데?’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꿈인데 뭐가 어떻단 말인가.
현실에서 갔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상소윤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져서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유성, 대정고 와?”
“응? 딸, 안자고 있었어?”
“물 마시러 나왔다가 들었는데, 진유성이 대정고 오면 괜찮겠네.”
상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그의 딸과 교주님은 사사건건 충돌하며 견원지간이란 고사성어를 몸소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아니, 요즘, 그, 학교에 이상한 놈들이 많거든. 진유성이 있으면 좀 낫겠지.”
“소윤아, 혹시 누가 괴롭히니?”
유혜연의 진지한 얼굴에 상소윤이 푸핫 웃으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좀 예뻐야지. 싫다고, 싫다고 해도 귀찮게 하는 애들이 많다니까? 그리고 막 연예 기획사가 따라오고!”
거짓말이긴 했지만,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랬던 순간도 있으니까.
‘아, 뭐. 내가 진유성이랑 학교를 같이 다니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맨날 이상한 짓을 하는 데다가 상식도 하나도 없는데 분명 친구 하나 못 사귀고 졸업을 할 거다.
불쌍한 인간 구제해 준다고 쳐야지.
상소윤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살짝 놀랐다.
분명 꿈이었는데, 너무나 현실처럼 생각했으니까.
상소윤은 그 뒤로도 진유성이 대정고에 와야 하는 당위성들을 마구 이야기하다가 엄마, 아빠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는데…….
거실에 진유성이 웃으며 서 있었다.
“그랬군. 그렇게 된 거였군.”
“뭐가? 너 뭐 하냐?”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진유성이 다가와서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당시 진유성과 상소윤의 사이를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뭐 꿈이니까.
진유성의 품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 * *
띠디디디디-
알람 소리에 눈이 번뜩 떠졌다.
진유성과 힘을 공유한 이후로는 피곤함이란 걸 거의 못 느껴서 좋다.
당장 지금도 알람만 들리면 눈이 번쩍 떠지니까.
‘그나저나 이상한 꿈이네.’
내용만 놓고 보면 별거 아니었지만, 진유성이 대정고에 못 갈까 봐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꼭 진유성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생각해 보니 열받네.”
최근 진유성이 하는 꼴을 보면 꿈에서라도 잘해 줬으면 안 됐는데!
대정고고 나발이고 집에서 쫓아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부글거리던 상소윤이 시계를 보고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학 생활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오늘 프로젝트 미팅에 늦으면 안 되니까.
* * *
상소윤이 기억하기로 인과율은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진유성이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아무리 강대한 힘을 품은 존재라 해도 원인과 결과의 굴레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다.”
“왜? 강하면 그만 아니야?”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하루는 24시간이지 않느냐? 인과율도 그러한 법칙과도 같지.”
“아닌데? 돈 많은 사람이 비행기 타고 시차가 느린 쪽으로 날아가면 하루가 24시간이 넘는데?”
“…….”
“표정이 왜 그래? 빠른 쪽으로 날아가야 해?”
“해맑게 박색하지 말거라…….”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진유성은 지금의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그걸 관측한 게 상소윤이었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처음 빚어낸 신성의 모태가 되었던 화전민 모녀의 환생이었다.
진유성이란 존재를 기억하기로 약속한 주시자였다.
모두가 진유성을 잊어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억해 낸 구원자였다.
심지어 아빠조차 잊어버렸는데!
‘아빠가 그걸로 갈굼 꽤나 먹었었지.’
그러니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전적인 표현으로 그녀와 진유성은 운명적인 관계란 말이었다.
한데, 요즘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고 거대한 불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라데이션 분노!
“열받아…….”
“응? 방금 한국말 한 거지? 듣기 좋다. 뭐라고 했어?”
“아냐. 혼잣말이야.”
“말은 원래 사람끼리 감정을 나누라고 만들어진 거야. 우리 둘이 나누면 더 좋고.”
같은 패션 스쿨에 다니는 프랑스계 백인, 킬리안이 웃음과 함께 달콤한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상소윤은 시큰둥했다.
‘이 자식은 포기를 모르나.’
킬리안은 벌써 몇 주째 자신에게 들이대는 놈이었는데,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아무리 해 줘도 믿지 않는다.
뭐, 이해는 간다.
상소윤과 킬리안은 진유성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패션 스쿨의 프로젝트에서 만났다.
그러니 평일이고 주말이고 혼자 있는 상소윤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게 거짓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
특히 프랑스의 연애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물론 진유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 직방이긴 하지만, 그건 또 곤란한 부분이 많다.
상소윤은 지난 3년간의 대학 생활 중에 진유성과의 관계를 오픈한 적이 없었다.
일단, 진유성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서 한풀 꺾였지만,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만 해도 다들 진유성을 보고 싶어서 난리였다.
뿐만 아니라, 상소윤은 자신의 디자인을 냉정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그녀와 진유성의 관계가 밝혀지면 분명 진유성에게 끈을 대기 위해 상소윤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디자이너 채용이나 인재 후원 같은 게 있을 거고.
디자인에 진심인 그녀는 그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설령 일이 잘 안 풀리는 한이 있더라도, 후광 효과로 잘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상소윤은 그동안 정체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해 온 것이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건, 두 사람의 보금자리가 파리가 아닌 덕분이긴 했다.
진유성과 상소윤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굳이 집을 파리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프랑스 대표의 항구 도시이자, 제2의 파리라고 불리는 보르도.
거기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저택이었다.
매일 저녁에 보는 해변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답냐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킬리안에게 진유성을 보여 줄 수 없어서 귀찮다는 것이다.
‘귀찮은데 그냥 시원하게 맞짱 한번 뜨자고 할까?’
지극히 진유성적인 사고를 한 상소윤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때렸다가 경찰에 잡혀가면 진유성만 구설수에 오를 거다.
모든 사람들이 진유성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기자들이라면 분명 자극적인 면만 부각할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상소윤은 다시 불쑥 화가 났다.
난 이렇게 진유성의 입장을 신경 써 주는데!
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상소윤이 최근에 느끼는 불만은 진유성이 지금 상태에서 더 나아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기는 12월에 이미 다 끝났고 2월의 파리 패션 위크 프로젝트만 남았다.
즉, 몇 달 뒤면 사회로 나가야 하며, 그녀의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디자인 회사에 취업할 수도 있고, 아무도 불러 주지 않아서 백수가 될 수도 있다.
불확실성만 가득하다.
그렇다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들의 관계라도 확실성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 이야기가 나왔어도 진작 나왔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