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1화>
진유성과 상소윤이 서로의 영원한 필연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는 간단한 삼단 논법이었다(물론 진유성에게 들었다).
1. 상소윤이 관측함으로서 진유성은 존재한다.
2. 진유성은 죽지 않는다.
3. 그러니 진유성을 관측하는 상소윤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든, 결혼 이야기가 나오든 해야 했다.
지금도 늦다.
함께 프랑스에 왔을 때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연애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보이든가!
사실 상소윤은 진유성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슬쩍 ‘신혼여행은 중원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듯?’이라는 말을 했었다.
한데 그에 대한 진유성의 반응은…….
“저녁으로 어머니가 해 주신 김치찌개는 어떠냐. 한국에 안 간 지도 좀 된 거 같은데.”
말을 돌렸다!
한국에 안 간 지 좀 되긴 개뿔.
바로 이틀 전에 집에 가서 갈비를 뜯어먹고 왔는데!
이때부터 상소윤이 간헐적 분노 상태에 휩싸인 것이었다.
‘근데 엄마도 좀 이상하단 말이지.’
아빠한테 하긴 좀 그래서, 엄마한테 이 분노를 토로했을 때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평소의 엄마 같았으면 별 관심도 없이 ‘요즘 살쪘니? 박색해진 거 아니야?’라고 했을 텐데…….
이상하게 공감을 해 줬다.
근데 그 공감 속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좀 참으라는 뉘앙스를 읽었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다.
자신만 모르는 게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진유성의 마음을 의심하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인과율을 나눠 가졌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정원에 나란히 앉아 노을 지는 해변을 보고 있을 때면, 진유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별거 아닌 일상 속에서도 충만해지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그걸 아니까 더 답답한 것이었다.
“아, 진짜 열받네.”
“여르 받? 뭐라고 했어?”
그때 킬리안이 상소윤에게 말을 걸면서 슬쩍 손을 잡아 왔다.
상소윤이 흠칫 놀라 팔을 떼자, 씩 웃는다.
“아니, 이 자식이.”
그동안은 말로만 수작을 부려서 넘어가 줬는데, 이건 선을 넘었다.
넘어도 한참 넘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소윤이 킬리안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삶을 포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진유성!”
진유성이었다.
“언제 왔어?”
“방금 왔다.”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게이트를 통해 온 게 아니라, 비행기 타고 왔다. 일단 비켜 봐라.”
“야야, 죽이면 안 돼.”
“고민을 좀 해야겠다.”
진유성이 킬리안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진유성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정체 모를 압박을 느낀 킬리안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다가, 뒤늦게 진유성을 알아봤다.
“지, 진유성?”
“선택해라. 네가…….”
하지만 뒷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상소윤은 처음에 진유성이 전음을 쓰는 줄 알았다.
사람이 많은 교내의 카페테리아니까 지나친 소동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한데, 뭔가 좀 이상하다.
진유성이 입을 연 상태로 멈춰 있었다.
게다가 카페테리아의 손님들 중 그 누구도 이곳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개벽으로부터 몇 년 지났다고는 하지만, 진유성이 서 있는데 말이었다.
“뭐, 뭐야?”
상소윤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데…….
“여르 받? 뭐라고 했어?”
“뭐?”
“방금 뭐라고 했잖아. 여르 받?”
자신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진유성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리를 박차자마자 나타났는데 말이었다.
‘내가 졸았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진유성의 힘을 공유받은 뒤로 상소윤도 제법 신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는 잠을 안 자도 상관없는데 갑자기 졸아서 꿈을 꾼다고?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킬리안.”
“응?”
“너 누구 못 봤어? 유명한 사람.”
“누구? 디자이너?”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너, 내 손 잡지 마.”
“갑자기?”
“갑자기 그럴 것 같아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깨를 으쓱하는 킬리안을 보며 상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팅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하자. 급한 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진유성한테 전화를 해 봐야겠다.
* * *
-갑자기 없어졌다라…….
“내가 진짜 분명히 봤거든? 네가 딱 하고 나타나는 걸? 근데 갑자기 사라져서 깜짝 놀랐다니까!”
-정확히 무슨 상황이었느냐?
“질투하는 상황.”
-질투?
“어. 어떤 남자가 나한테 작업을 걸고 있었거든. 네가 엄청 화내더라고.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짭유성이랑 싸울 때 빼고 처음 봤네.”
-갑자기 꿈 쪽에 무게가 확 쏠리는 이 마음은 뭐지?
“뒤질래?”
-농담이다. 걱정 마라.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까.
“뭔데? 위험한 거야?”
-넌 전혀 위험하지 않다.
“아니, 나 말고 너. 갑자기 뿅 사라진 건 내가 아니라 너라니까?”
-나도 아니다. 내가 어디 위험과 마주할 사람이더냐?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
지구상에서 진유성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
이성을 되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상소윤이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네 영혼의 근간이 중원에서 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다.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긴 하다.
본래 유혜연과 상소윤은 중원의 화전민 모녀였고, 진유성의 신성을 약탈하려던 ‘그릇’ 때문에 지구에서 환생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그릇은 이미 없어졌는데.
아니, 인과율로 개변한 세상에는 존재한 역사조차 없는데.
-그게 문제다. 본래 네 환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원래는 중원 사람이었던 나랑 엄마가 지금 한국에 있을 이유가 부족하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는 아니다.
“왜?”
-평범한 인간이니까. 인과율에 혼선을 빚기 힘들지. 하지만 넌 나의 힘을 나눠 갖지 않았느냐?
아카샤는 자신을 희생해 인외의 존재들에게 침범당하지 않게, 두 차원을 완벽히 구분 지었다.
그리고 그걸 진유성이 유지하도록 맡겼고.
한데, 구분을 유지하는 진유성을 관측하는 상소윤이 중원의 영혼체다.
이게 문제의 근본이었다.
-그럼 DDP에서 보이는 인과율의 흔적들도 그것 때문이었겠군.
“거긴 왜?”
-내가 지구에서 새긴 가장 강력한 인과율이 너의 옆으로 가겠다는 것이었으니까.
맞다.
그런 일도 있었다.
DDP에서 열린 페이즈2 게이트에 끌려갔을 때, 진유성이 자신을 구해 줬었다.
“해결책도 알아?”
-시간이 해결해 주긴 할 거다. 쌓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인과율이니까.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고민을 해 봐야겠다.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내가 관측 안 하면 너 없어질 수도 있잖아.”
-걱정하지 마라, 소윤아.
진유성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깐 기분이 좋아졌지만, 상소윤은 뒤늦게 자신의 컨셉을 자각했다.
현재 자신은 간헐적 분노 상태다.
그리고 실제로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니까 화가 났다.
“누가 걱정한대! 끊어!”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진유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소윤.
“왜!”
-보고 싶구나.
“뭐, 뭐야. 갑자기.”
-다음에 누가 수작을 부리면 팔을 부러트려라. 내가 프랑스 대통령과 합의를 볼 테니.
* * *
전화가 끊기자 진유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몸을 배배 꼬고 있을 게 뻔한 상소윤의 모습이 그려졌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상소윤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벌써 삼일 째였다.
똑같은 전화가 걸려온 게.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상소윤은 분명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오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아마 그건 환상이나 상상이 아닐 거다.
내일, 어쩌면 모레에 실제로 벌어졌을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상소윤이 미래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결과’를 본 거다.
상소윤은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 가게 만들 원인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결과의 가능성을 관측한 것이었다.
사실 상소윤이 인과를 관측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상소윤 본인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으니까.
아마 본인은 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꿈은 실제 과거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해결하는 중의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반복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상소윤을 통해 진유성을 흔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누구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럴 만한 인물이 없다.
아카샤, 전능의 존재, 세쌍둥이 마도사, 그릇.
전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했던 역사조차 없는 이들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이 지난 이틀간 놀고 있었던 게 아니다.
상소윤에게 똑같은 전화가 왔으며, 하루가 반복되었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DDP에서 역추적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이 균열이 중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구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자신이 감지를 못했을 리도 없고.
솔직히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현재 진유성을 위협할 존재는 없다.
자신의 힘을 나눠 가진 상소윤도 마찬가지고.
본인은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상소윤은 아마 신주청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거다.
물론 무공 경지 자체는 신주청이 아득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결국 오래 싸우면 이긴다.
그러니 대체 이게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발각당하면 소멸될 걸 뻔히 알면서 개수작을 부릴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뭐, 중원에 가 보면 알겠지.’
그렇게 생각한 진유성이 손을 휘둘렀다
많은 것들이 바뀐 진유성이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건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다.
중원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연 진유성이 발을 옮겼다.
* * *
찰박, 찰박.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검을 움켜쥔 신주청이 나아간다.
비가 내린다.
하지만 이 비는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자금성 전체가 화창한데 천신궁에만 비가 내려서가 아니다.
비의 색깔이 혼탁하고 불길한 회색이라서가 아니다.
비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액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서가 아니다.
이 비를 맞은 이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지기 때문이었다.
“아아아악!”
천신궁 전체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무공이 고강한 이들은 고통을 견뎌 내고 있었으나, 그저 견딜 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비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천마신교의 2대 교주인 신주청뿐이었다.
이 말은 곧, 천마신교 전체가 무력화되었으며 유일한 전투 병력이 교주뿐이라는 것이었다.
-투두두두두둑.
쉼 없이 쏟아지는 뿌연 회색의 비를 바라보던 신주청이 검을 들었다.
입멸검(入滅劍).
더는 입멸검이나 입멸공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진유성이 신주청에게 물려준 귀물.
그것을 든 신주청이 허공을 향해 정직한 베기를 선보였다.
횡소천군.
모든 무림인이 알고 있을 삼재검법의 간단한 횡베기였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스스스스슥.
빗발이 옅어지며 회색빛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
차마 학의 울음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수십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검을 고쳐 쥔 신주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계(天界)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