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2화>
신주청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계의 인물들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인물’은 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존재 하나하나가 한 시대를 풍미한 걸물(傑物)들이며, 진원진기를 잃어 수명이 다했음에도 극도로 연단한 영혼으로 힘을 발휘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천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신주청의 물음에 누군가 걸어 나왔다.
수나라의 복식이지만, 묘하게 당나라의 느낌도 있다.
수(隨)의 멸망과 당(唐)의 건국 시기에 활동한 인물일 확률이 높다는 뜻.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
당시에도 무림은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까.
-그른 것을 바로 잡으러 왔다.
“그른 것?”
-전대 천마신교주 진유성으로 인해 이 세상은 개변되었다.
신주청이 피어오르는 놀람을 숨겼다.
진유성이 인과율로 세상을 개변시킨 건 지구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복잡하게 생각한다면 한없이 복잡한 일이지만, 쉽게 생각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더 말이 되니까.
현재 중원의 역사에서 진유성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에 도망친 고려의 왕자가 멸마대와 생존대를 거쳐 천마신교를 설립하고, 중원을 일통한다.
다만 원래 역사와 다르게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배하진 않았고, 30년 뒤 홀연히 사라졌다.
덕분에 중원에는 진유성이 우화등선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이후에 교주 위(位)에 오른 것이 진유성의 동료이자 친우, 무림의 이인자였던 신주청이었다.
한데, 천계의 존재들이 진실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천계는 중원의 하위 차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적은 영향을 받았을 텐데?
-그가 옳은 의지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존재는 너무나 위험하다. 그가 악한 의지를 품는 순간, 두 개의 차원은 악에 신음하여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래서?”
-진유성을 작금의 세계에서 퇴출시키겠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설령 가능하더라도 해로울 것이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차원의 위상을 구분 짓는 게 진유성 교주다.”
자칫 잘못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차원의 위상이 뭉개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있다.
“진유성 교주를 퇴출하고, 위상을 구분 짓는 방법이라는 건가?”
-천계가 중원의 상위 차원이 되면 간단한 일이지.
“…….”
이론상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 말은 곧, 천계가 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거다.
그리고 거기에 닿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피가 흘러야 한다.
일시적이지만, 천계 차원이 품은 힘의 총량이 중원 차원의 총량보다 많아져야 하니까.
아무리 천계의 인물들이 고절하다고는 하나, 적어도 수억의 인구가 줄어야 하는 일이다.
“미친놈들이었군.”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웃기지 마라. 그 거시적인 관점에 희생당할 셀 수 없는 개인이 있다.”
-희한한 일이군. 그대 정도의 존재가 인간 개개인의 생사(生死)와 애락(愛樂)에 관심이 있단 말인가?
“그게 나의 소우주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진유성과의 약속을 기억한다.
상실의 세계에서 진유성에 대한 존경, 우애, 사랑 등등의 모든 감정을 잃었을 때도 이 명제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게 신주청의 소우주이며, 신념이다.
한데 저 괴물 같은 존재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두라고?
그것도 몇 억의 인간들을 희생하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군. 그대를 설득하면 과정이 편해졌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너희들이 직접 손을 쓰겠다는 소리인가? 영혼체에게 그 정도 영향력이 허용될 리가 없다.”
-글쎄.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신주청은 천계가 자신만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진유성이 신주청에게 언급했던, 천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청아. 생각해 보면 걔네 좀 이상하지 않냐? 천계?”
“뭐가 말입니까?”
“중원에 귀속된 하위 차원이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고절한 깨달음으로 영혼을 연단한 존재들이 아니면 입구컷이잖아?”
“개념만 놓고 보면 상위 차원인데, 현상만 놓고 보면 중원의 하위 차원이다. 이 말씀입니까?”
“그치. 세쌍둥이 마도사가 중원으로 우회할 때도 천계를 이용했었고.”
“그건 몰랐지 않겠습니까?”
“알았을 수도 있지. 아무튼 신경 쓰면서 중원을 경영해라. 고결함이 없는 힘은 타락하기 마련이고, 스스로를 고결하다고 믿는 이들은 이미 타락한 이들이니까.”
진유성의 말이 맞다.
“그렇군. 마도사들이 오가며 천계에 변화가 있었군. 너희들은 그 변화로부터 행동할 인과율을 얻어 냈고.”
-그대를 설득했다면 일은 쉬웠겠으나,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간의 총량이 현저히 낮아지는 일이니.
“나를 죽이는 데 너희들 중 절반은 소멸될 거니, 무게 추는 인간 쪽으로 기울 거다.”
투두두두두둑!
천신궁에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계의 영향력으로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천신궁 전체의 물기가 증발하였으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액화되어 내리는 것이었다.
그만큼 천계와 신주청의 기세는 열렬했고, 서로가 명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기세 싸움뿐이었으나, 상상 이상인 신주청의 저력에 천계의 인물들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2대 천마신교주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계의 절반을 죽이겠다는 건 신주청의 허세였으나, 사분지의 일 정도는 소멸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그 정도의 힘을 품고 있는 게 놀랍구나.
“웃기고 있군. 인간의 몸으로 더 살고 싶었지만 늙어 죽은 주제에.”
신주청은 진유성이 할 법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사람의 기세를 빌려야 할 정도로 위험했으니까.
-그대에게 희망이 있나? 혹 진유성을 기다리는가?
“…….”
-그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꿈에서 깨어날 쯤이면, 이미 중원은 천계의 하위 차원이 되어 있을 테니.
“꿈?”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에서 헤매는 꿈이지. 그를 이길 방도는 없으나 묶어 둘 수는 있지.
파르르르르륵-
내리던 빗물이 허공에 고정되더니 물방울이 되어 떨리기 시작한다.
수많은 방울들이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
핏!
싸움은 시작되었다.
* * *
“흠…….”
중원에 도착한 진유성은 낯선 광경에 멈춰 섰다.
그가 의도한 목적지는 천신궁이었지만, 이곳은 천신궁이 아니다.
심지어 번화가도 아닌, 웬 빽빽한 숲속.
잠시 우거진 나무 사이의 하늘을 쳐다보던 진유성이 눈을 감았다.
그는 이제 중력으로 인한 빛의 굴절률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역산해서 현재 행성 내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인공위성 탐색처럼 정확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있는 도시가 어디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광서성이군.”
해남도의 바로 위.
섬을 제외한 대륙의 최남단.
지구의 국가 기준으로 말하자면 베트남의 오른쪽인 중국의 광서 장족(※광시 좡족) 자치구다.
진유성은 입멸공을 얻었던 해남과 인연이 깊었지만, 광서와도 제법 인연이 깊었다.
여기서 일월신교의 잔당들을 흡수해 천마신교를 세웠으니까.
그 힘으로 중원을 통일했다.
과거 일월신교의 근거지는 십만대산이고, 십만대산은 광서성에 있다.
‘이곳이 십만대산일 수 있겠군.’
진유성은 자신이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의문을 품었으나, 길게 가져가진 않았다.
그는 본래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주변의 기감을 읽은 진유성은 근처에 제법 큰 도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이곳은 십만대산이 맞다.
마을 구성원 전체가 일월신교의 교도들이며 일월을 찬양하는 상징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두 번째였다.
둘째, 여긴 과거다.
현세에 일월신교는 없다.
진유성은 일월신교를 무력으로 흡수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교리의 해석으로 흡수했다.
반발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천마신교가 중원을 제패한 이후 반발은 완전히 사라졌다.
본래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그들이 천마신교의 모태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교도들이 되었다.
즉, 온 도시가 일월신교를 추앙하는 일은 현세에 없다는 것이었다.
진유성이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행성을 통해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시대도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다.
행성의 자전축은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화하는데, 그걸 통해서 연도를 얼추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충 75년쯤 전이군.’
현재 중원의 역사에선 스물일곱에 교주위에 오른 진유성이 천마신교를 30년간 통치했다.
즉, 진유성이 태어나기 20년쯤 전의 과거란 말이었다.
놀라는 일이 잘 없는 진유성이었지만, 이건 쉬이 여길 일은 아니었다.
진유성도 과거로 올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지금처럼 한 번에 수십 년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은 아니다.
중원과 지구의 시차를 이용해, 두 차원을 오가며 조금씩 역행하는 방식.
뱃사람들이 해류의 반대 방향으로 항해할 때 지그재그로 물길을 거스르는 것과 비슷했다.
진유성은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현 시점에 진유성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니 지금 벌어지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인과율의 영역이다.
이 시간대에 반드시 자신이 ‘그러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다.
그때였다.
은신술로 모습을 숨긴 채 마을의 골목에 서 있던 진유성의 눈에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보인 것이.
“야! 저 새끼 잡아!”
일월신교를 상징하는 두건을 쓴 아이들이 행색이 초라하고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아이를 흉흉하게 둘러쌌다.
그리곤.
“죽여!”
퍽퍽!
발길질이 쏟아졌다.
다들 열 살 남짓이나 되어 보이는데, 잔인한 폭력의 양상이다.
인상을 쓴 진유성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쳐!”
폭력을 행사하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곧 마을의 경비대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일방적인 폭력에 신음하는 아이를 본체만체하더니, 사라질 뿐이었다.
“…….”
가해자들이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은 골목.
“퉷.”
핏물을 뱉으며 초라한 행색의 소년이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진유성은 소년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보았다.
이 아이가 어떤 삶을 살 것이며, 어떻게 성장할 것이고, 어떤 인간이 되어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달이 만개해 태평이 천지에서 춤을 추니, 어찌 본교가 태양의 밝음을 전파하지 아니할까.”
“중원을 발아래 두어 일월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영원할 광명과 태평을 이룩하겠노라.”
“일월신교의 17대 교주, 이헌원.”
“십만의 충실한 교병과 백만의 신실한 교도들과 함께, 일월 아래 맹세하노라.”
눈앞의 아이는, 멸마대의 본래 목표였던 마교주의 어린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