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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15화 (330/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5화>

*   *   *

“그렇군. 모든 게 그리 된 것이었군.”

진유성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헌원이 22살이 된 해 이후, 더는 그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둘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헌원의 삶이 어찌 흘러갔는지는 지켜보았다.

진유성이 이헌원과 함께 보낸 시간은 한 사내의 일생 중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이란 존재는 이헌원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헌원의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기쁨과 후회…….

그 모든 것에 진유성이 있었다.

역사가 원래와 똑같이 흐르는데도 말이었다.

그래서 헷갈렸었다.

일련의 일들이 정말 자신이 개입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맞는가?

따지고 보면 이헌원에게 진유성은 미래에서 온 인물이다.

즉, 원래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이헌원의 죽음을 보면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깨달았다.

이것은 미래의 자신이 과거에 간섭한 것이 아니다.

원래 역사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둥그런 원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니 원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결국 진유성이란 존재가 써 내려간 모든 인과율.

그 원 위를 내달리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이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유성은 이 모든 일에 아카샤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러한 일은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서울역이군.”

지금 진유성이 서 있는 장소는 서울역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서울역 전체에 회백색의 뿌연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감히 진유성이 존재하는 곳은 침범하지 못했으나, 온 세상에 가득하다.

진유성은 이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짭유성. 아니, 성좌.

성좌와의 첫 번째 싸움에서 패배하고 타트바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던 때.

그때 도달했던 서울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감을 확장해 보니 지구 전체가 게이트로 변해 있으며, 그 중심에 성좌의 강인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야, 쎄네.”

새삼스럽지만, 성좌는 강하다.

물론 지금의 진유성이라면 어렵지 않게 성좌를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진유성이 성좌를 이길 수 있냐고 한다면, 만에 하나일 것이었다.

구천구백구십구 번을 패배하고, 딱 한 번 승리할 정도의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승리하였지. 아이야.]

진유성이 고개를 들었다.

회백색 기운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아카샤의 힘이 깃들었다.

“오랜만이군.”

[마땅한 표현이 아니구나. 나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럼 지금은 뭐지?”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저 남아 있던 것들이거나, 모든 이야기의 끝에 쓰이도록 이미 기록되었던 것들이거나.]

아카샤가 따스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진유성은 알 수 있었다.

[우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 주겠느니라.]

아카샤의 기운이 스쳐 지나가자, 진유성은 이내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천계가 중원 차원을 하위 차원으로 만들려고 벌인 짓이 시작이었다.

그게 진유성을 인과율의 균열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원래대로라면 진유성은 천계의 잡귀들이 만들어 낸 균열 따위 가볍게 박차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균열을 진짜 인과율의 시험으로 만든 게 아카샤였다.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

더는 이 세상에 인과율의 균열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네가 연민할 줄 알고 있었느니라.]

만일 진유성이 이헌원에게 주화입마를 강제했다거나, 진원진기를 사용하는 무공을 가르쳐 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세상은 다르게 돌아갔을 것이었다.

이헌원은 진짜 천재였다.

어린 시절에는 속았을 수도 있겠으나, 결국 극복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진유성의 가르침 따위는 전부 무시했겠지.

“만약 내가 정답을 찾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던 거지?”

[마땅히 그러하지 아니하기에 진유성이 아니겠느냐?]

진유성이 웃었다.

“그래. 그것도 맞는 소리군.”

[이제 네 배필이 인과율의 균열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다행이군.”

[아마 정말 마지막일 듯한데, 궁금한 것은 없느냐?]

“이헌원의 생을 지켜보면서 느꼈는데, 일월신교가 중원을 침공하는 데 강제적인 흐름이 느껴지던데?”

[맞다. 본디 이헌원은 그릇이 선택한 첫 번째 디딤돌이었니라. 일월신교가 북진한 것에는 그릇의 탓이 크지.]

“그렇군…….”

[하지만 그릇은 이헌원을 통해 이루려던 완전한 혼란을 이루진 못했지. 그 아이가 널 간절히 그리워한 탓에.]

어찌 보면 모든 일을 시작한 그릇의 첫 단추를 잘못 꿰게 만든 것도 진유성이란 뜻이었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진유성이 고개를 들어 서울역을 돌아보았다.

사실 진유성은 모든 일이 해결된 뒤에도 꽤 궁금해했던 한 가지 일이 있었다.

*   *   *

‘타트바는 어디 있지?’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 서울역이 묘한 감상을 주었다.

그때, 진유성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시감 속에서 기운을 느꼈다.

서울역 곳곳에 배치된 사물함 속에서.

그 안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   *   *

성좌에게 패배하고 도착한 서울역에 남겨져 있던 조언.

당시에는 중원어로 적힌 그 조언을 누가 남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지금의 자신이 남긴 것이다.

진유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난장판이 된 서울역에서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리곤 왼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낮은 곳에서 낮은 곳을 보면 연명(延命)이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보면 생존(生存)이다.]

기억 속에는 중원어가 삐뚤삐뚤했던 것 같은데, 너무 깔끔하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체술이 입신의 경지에 오른 진유성은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별 구분이 없다.

“아냐, 아냐.”

부우욱.

종이를 찢어 버린 진유성이 이번에 오른손으로 글을 적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게 아냐!”

몇 번의 창작 열정 끝에, 마침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그런 진유성을 보며 아카샤가 웃었다.

[여전하구나, 아이야.]

사물함에 종이를 넣은 진유성이 아카샤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말 마지막이겠군.”

진유성도 느낄 수 있다.

더는 지구와 중원에 남은 인과율의 균열은 없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지구의 게이트는 종식될 거고, 중원에는 오로지 무(武)를 추구하는 풍토가 사라지고 지식이 꽃을 피울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의 사람들은 점차 진유성을 잊을 것이다.

물론 현 세대는 진유성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조차 예전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진 않을) 것이다.

그동안은 진유성이 무의식적으로 균열을 틀어막고 있어 강한 존재감을 뿜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모든 것이 마땅히 돌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않겠느냐?]

“왜?”

[또 다른 이야기가 써지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

모두가 각자 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팟!

그렇게 진유성은 아카샤와 작별을 고했다.

*   *   *

콰쾅!

천신궁 중심에 벼락이 내리쳤다.

반 시진 넘게 호흡조차 고르지 못한 채 싸우고 있던 신주청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뒤로 훌쩍 물러난 신주청이 숨을 골랐다.

천계의 존재들은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이어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천계와의 싸움은 신주청이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지쳤나.]

천계의 인물 중 한 명이 신주청을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신주청은 이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초상화를 봤었다.

그는 멸마대의 목표였던 마교주 이헌원이었으니까.

젊은 시절의 얼굴 같지만, 알아볼 수 있다.

“날 왜 도와주는 거지?”

[글쎄.]

콰쾅!

그때 다시 벼락이 내리쳤다.

첫 번째 벼락까지는 자연현상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벼락이 내리친 천신궁 앞뜰의 중앙에 누군가 서 있었다.

“교주님!”

진유성이었다.

신주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유성이 올 때까지 버티자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천계가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아서 내심 불안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이런 감상을 공유한 것은 천계 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떻게?]

당황한 기색이 보인다.

심유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진유성, 너는 너무 위험한…….]

“전원, 이 자리에서는 내 체면을 세워 주길 바란다.”

[……?]

그 순간, 진유성이 손을 휘둘렀다.

진유성의 손짓에서 나온 미풍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락거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게 천계의 인물들에게 닿았을 때.

투확!

물에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확산되며 그들을 집어삼켰다.

천계의 존재들이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의념은 전달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영혼체가 사라졌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신주청의 입장에서는 허무한 일이었으나,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소멸시킨 겁니까?”

“아니, 소멸시켜 봤자 윤회할 뿐이야. 강제로 그러기도 힘들고.”

“그럼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어?”

진유성은 그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시련을 주었다.

만일 저들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신념으로 살아왔다면,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그리고 윤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주어지는 욕망과 충동, 자극과 본능으로 살아왔다면 시험은 통과할 수 없다.

영혼체의 힘이 다할 때까지 영원히 시험 속에 갇혀 있다가 완전한 소멸을 맞이하겠지.

그렇게 천계를 처리한 진유성이 신주청의 옆을 바라보았다.

모든 영혼체들을 날려 보냈지만, 17대 일월신교주 이헌원은 아니었다.

[…….]

“오랜만이다.”

[역시 전혀 늙지 않으셨군요.]

“너도 마지막 모습 그대론데? 반로환동 했냐?”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보통 영혼체들의 외양은 죽기 직전의 순간으로 결정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팔이 없는 채로 죽었다고, 영혼까지 팔이 없진 않다.

[그저, 이때가 제 생에서 가장 헌앙하던 순간이었나 봅니다.]

“스스로의 입으로 헌앙하다고 하다니. 다 늙었군.”

[그럴 수밖에요.]

잠깐의 헛웃음 뒤로 이헌원이 말을 이었다.

[부끄러웠습니다. 또한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이 네 탓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농간이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저씨는 뜻을 지켜 내시지 않았습니까?]

이헌원은 천계의 인물들 중 그 누구보다 진유성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진유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끝까지 신념을 지켰고,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모든 걸 알았나 보군.”

[방금, 전부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아카샤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진유성과 이헌원은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시간은 별로 없었다.

진유성이 일시적으로 천계를 중원의 하위 차원에서 축출했기에, 이대로 두면 이헌원은 차원의 미아가 될 뿐이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소멸을 하고 윤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험에 드는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소멸을 하면 네 영혼이 연단한 모든 게 사라지고 완전히 다시 태어난다. 시험에 들면 통과 여부에 따라 완전히 사라지거나, 같은 영혼체로 윤회할 수 있지.”

시험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이헌원이 선택할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헌원은 시험을 선택했다.

“너의 모든 순간이 결국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거다. 고맙다.”

이헌원이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의 선택 덕분에 저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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