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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숨(1) (3/53)

2부. 숨(1)

한 번도 안 해봤으면 모르겠는데.

“아, 잠깐…….”

한 번 손을 댔더니 단둘이 남게 될 때마다 서하림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비벼댔다. 학교고 집이고 장소는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는 화장실로 간 서하림이 칸막이로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뒤따라 들어가 입을 맞췄고 서하림 집에서 공부를 할 때도 눈만 마주치면 쪽쪽거리기 바빴다. 혀를 넣어 진하게 할 때도 있고 그냥 가볍게 입술만 붙일 때도 있었다.

“……싫, 다고, 했지.”

밀어내도 힘으론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이후로 키스하다 숨이 차오르면 서하림은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나는 서하림의 고개를 따라 내 얼굴을 붙이고 또다시 입술을 붙였으나 자꾸만 피하는 탓에 애가 타 두 손으로 서하림의 볼을 잡고 날 보게 만들었다.

“하기 싫어.”

“왜, 너도 좋아하잖아.”

“싫…….”

특히나 이렇게 서하림의 방에 들어올 때면 나는 거의 몇 분을 내내 서하림의 입술을 빨아대야 겨우 진정이 됐다. 뜨고 있던 예쁜 속눈썹이 사뿐하게 내려앉으며 닫혔다. 얼굴을 잡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떼, 한 손은 서하림의 턱을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안았다. 찬찬히 얽히는 뜨거운 혀를 느낄 때마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죽지 않고 살아 있길 잘했단 생각이 수천 번은 들었다.

폐 속 깊숙이, 서하림의 모든 향기를 삼킬 것처럼 들이켰다. 감격에 차오른 숨을 흐트러뜨리며 입을 잠시 뗐다가 품에 안기듯 다시 파고들었다.

행복해. 행복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키스 때문에 도톰하게 부운 입술을 마주 보고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나는 자주 발기하곤 했다. 그러면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는데 한 번 빼고 와서 공부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직도 붉어져 있는 걸 보면 또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길 여러 번이었다.

집중력을 깨기 싫어 참아보려고도 했지만 저 입술이 얼마나 말랑거리고 촉촉한지, 그 안에 있는 치아들은 얼마나 가지런하며 혀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수시로 자릴 비워대도 서하림은 별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내가 화장실로 자위하러 가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게 좋았다. 내가 서하림 머리카락만 봐도, 숨소리만 들어도 발기하는 변태라는 걸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부끄러우니까.

기말고사 끝난 다음 날 내가 침대 위에서 삽질하는 동안 서하림은 과외 선생님과 이번엔 풀면서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할 건지 같은 걸 이야기 나눴을 것이다. 거기서 의대 얘기가 나왔고 서하림은 우선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했다.

그 후로 방학 때까진 과외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방학식을 기다리며 서하림과 함께 공부하는 이유는 서하림이 교내 과학 경시대회에 나가기 때문이었다.

말이 과학 경시대회지 수학 물리 경시대회라고 불러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 이 대회엔 공부 좀 한다 하는 애들은 다 참가했다. 이를테면 공부하는 애들이 하는 번외 경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전교 등수는 여러 개의 과목으로 평균 내고 거기서 순위가 매겨지는 거지만 이건 진짜 딱 한 가지인 거니까.

삼 일 쉬고 학교 나왔더니 물리 선생님이 나에게도 과학 경시대회를 나가보라고 권유했으나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공대 갈 거면 동아리를 관련된 걸 들든가 서하림이처럼 관련 없는 동아리를 들 거면 교내 경시대회라도 열심히 참여해야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뭘 하나’로 시작되는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신청서에 이름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이공계 관련 책들 읽고 독후감은 꼬박꼬박 쌓아가고 있는 중이라며 작게 반박했지만 선생님이 화를 내며 말했다.

‘몇 개. 한 작년 서른 개 올해 열 개 썼어? 학생부에서 독서량으로 승부 봐서 이기려면 해마다 백 개는 써야 된다 이 자식아!’

어떻게 개수를 정확하게 맞춘 건지 신기했지만 해마다 백 개 쓸 자신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차피 공대는 독서량으로 승부 보는 게 아니니까.

대회 나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서하림은 어떻게 알았는지 종례 끝나고 나서야 집에 갈 준비를 느릿느릿 시작한 내게 경시대회 공부할 거면 같이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싸는 속도를 더 천천히 늦췄다. 빨리 학교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반 애들은 바람 같이 사라져 복도에도 몇 명이 지나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착한 서하림은 교실이 싹 빌 때까지 뭐라고 한 마디 하지 않고 날 묵묵히 기다렸다. 책가방 다 챙기고 일어나면서 짧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서하림이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한 거라 우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걷는데 겨우 뽀뽀만 한 게 너무 아쉬워 침이 고였다. 3학년들도 참여하는 대회라 긴장된다고 하는 서하림의 팔을 잡고 복도 끝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왔다. 내가 자위하러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고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곳이다. 역시 언제나 그렇듯 깨끗해 반짝반짝했다.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뒷머리를 잡아 입술을 맞췄다. 서하림이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싫다고 했지만 혀를 빼물고 이리저리 피하는 서하림의 입술을 핥아대기 바빴다. 입술 근처가 전부 내 침으로 범벅이 되도록 고개를 젓다가 물기 없는 세면대 위로 내가 서하림을 올려 앉히자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입을 맞춘 상태로 가방에서 휴지를 꺼냈다. 잠시 입을 떼고 서하림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미안.’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긴 속눈썹이 너무 예뻤다. 팔로 서하림의 허리를 꽉 껴안고 키스했더니 자연스럽게 서하림의 두 다리가 내 허리를 감는 것처럼 됐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 흔들면서 혀를 거칠게 놀렸다. 버거워지는지 서하림에게서 소리가 났다. 이대로는 큰일 날 것 같아 내가 먼저 떨어졌다.

‘미, 미안한데 먼저 나가 있어.’

한껏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서하림은 화장실을 나갔다. 나는 화장실 칸막이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고 들어간 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잠금장치를 걸었다. 잘못했다간 키스한 채로 쌀 뻔했다. 교복 바지와 속옷을 내리자 잔뜩 발기한 게 튀어나왔다. 내가 봐도 기세가 흉흉해서 빠르게 손을 놀렸다.

남자 새끼들 두 명만 모여도 맨날 하는 얘기가 여자 얘기 섹스 애기라 저 새끼들 뇌 속엔 자위밖에 안 들었나 하고 한심하게 여기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내가 그 한심한 새끼였다. 뇌 속엔 자위와 섹스밖에 없는.

맨날 상상하고 꿈에서나 할 수 있었던 서하림과의 키스는 그랬다. 누구든 서하림과 한 번이라도 입을 맞춘다면, 그 달콤함에 아래가 저릿저릿할 것이다. 눈을 감아도 떠도 서하림과의 키스가 떠오르고 섹스를 꿈꾸고 다른 누가 서하림을 부르기만 해도 그 이름에 성기가 아파오고, 저를 닮은 규칙적인 발소리와 정갈한 글씨체만으로도 자위를 하고도 남을 테니까.

한 번 사정하고 나왔을 때 서하림은 없었다. 1층 운동장 등나무 아래에 귀여운 뒤통수가 보였다. 벤치 위에 올라와 있는 두 손끝도, 반팔의 하복 덕에 보이는 팔꿈치도 모두 살짝 붉은색이었다. 피부가 하얘서 분홍색에 가까운 게 또 입을 마르게 만들었다.

‘가자.’

집으로 가는 동안 서하림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늘 그랬다. 서하림은 아무리 숨 막히는 키스를 하더라도, 격한 키스에 내가 발기한 걸 느꼈어도 키스가 끝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와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나도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경시대회 끝나면 뭐 해?”

“글쎄.”

“대회 끝나고 다다음 날이 방학식이잖아.”

“애들이랑 놀기로 했어. 3일 내내 할 거 스케줄 다 짜놓음.”

“아…… 그래.”

서하림 버릇 중에 아랫니로 윗입술을 깨무는 게 있다. 집중할 때도 하고 심심할 때도 하고 생각할 때도 하고 조금 당황했을 때도 하고. 무의식중에 윗입술을 살짝 빨아들여서 아랫니로 입술을 살살 깨무는 거라 보고 있으면 되게 귀엽다. 이는 보이지 않고 도톰한 윗입술이 1/3쯤 사라진 채 우물우물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동영상으로 남겨놓고 싶은데 문제는 자기가 하는 줄도 모르고 하는 거라 진짜 몇 초 하고 만다는 데에 있었다. 메시지 보내는 척 휴대폰 꺼내서 카메라를 켜면 이미 입술은 제자리였다. 서하림의 사랑하는 수천 가지 버릇 중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다.

방금도 윗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학교에서 빨아댄 입술은 서하림 방에 들어오자마자 또 빨려서 아직도 입술이 부어 있는 게, 그 버릇이랑 합쳐지니 두 배로 좋았다.

“오늘 이모님 와.”

“저녁 해주신대?”

“그것도 그렇고 뭐 할 말 있대.”

이모님이 오면 오는 거지 굳이 나한테까지 얘기하는 건 이모님이 내게도 볼일이 있단 뜻이었다.

“또 무슨 어마어마한 문제집이 나왔나 본데.”

“그러게.”

이렇게 보면 한없이 금욕적이고 단정한 애가 입만 맞추면 붉게 달아오르는 게 신기했다. 말로는 싫다고 거부하지만 끝끝내 밀어붙이면 얌전히 눈을 감는 거나 순순히 입을 벌려 주는 것도, 느리지만 혀를 움직여 주는 것도.

나도 처음이지만 서하림도 처음인지 아직은 둘 다 서툴렀지만 그건 그거대로 너무 좋았다. 내가 서하림 첫 키스를 가져갔단 거니까. 반대로 서하림도 내 처음을 가져간 거고. 서하림에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나를 새겨나갈 수 있다는 게 꿈이 아닌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너는 경시대회 끝나고 뭐 하게?”

“나? 평소처럼 선행 학습하겠지. 네가 없으니까 우리 집에서.”

“…….”

“내가 언제 놀고 쉬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미안. 괜히 물어봤네.”

“별걸 다 미안해한다. 방학엔 뭐 해.”

“나도 공부하고 올해 올림피아드 여름학교 갔다 오고 뭐 놀…….”

놀 거란 얘기를 하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바꿨다.

“엄마 아빠랑 여행? 멀리는 말고 짧게. 엄마가 코타키나발루 반딧불 보고 싶대서 아빠가 예매해놨더라고. 너는?”

“나야 뭐, 똑같지. 중간고사 준비.”

“아…….”

졸지에 눈치 없는 사람이 된 서하림은 작게 탄식하더니 또 윗입술을 깨물었다. 공부할 거란 게 거짓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풀 죽은 귀여운 모습 보고 싶어서 한 말이라 나는 작게 웃으며 ‘장난이야’ 하고 말했다.

“키스하고 싶어. 이모님 오면 신경 쓰일 거 같아.”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며 시 하는 모양을 그렸다가 닫혔다. 내게 미안하고 불쌍해하는 게 보였다. 더 나를 동정하고 가엽게 여겨줘. 네게 기대어 숨 쉴 수 있도록.

의자에서 일어나 서하림에게 다가갔다. 턱을 잡고 고개를 올리자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날 동정하며 가슴 아파하는 게 예뻐서 서하림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서하림이 작게 한숨 쉬는 게 느껴졌다.

입을 맞추고 혀가 섞이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나와는 다르게 소극적인 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할 때마다 매번 처음인 것처럼 구는 게 짜릿했다.

손을 내려 서하림의 목을 가볍게 잡았다. 커다랗고 두툼한 내 손에 비해 한없이 연약한 목을 잡고 있으려니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엄지로 서하림의 목젖을 살살 쓸어보았다. 흰 목이 움찔했다.

“……내 침 삼켜봐.”

잘생긴 얼굴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삼켜줘. 목젖 움직이는 거 만지고 싶어.”

“뭐라…….”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입을 맞췄다. 서하림이랑 입 맞추면서 발정 난 개새끼처럼 줄줄 터지는 내 침을 서하림 입으로 넘겼다. 당황했는지 눈도 감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서하림의 턱을 잡고 좀 더 얼굴을 들었다. 목구멍으로 더 잘 넘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눈도 감았다. 손가락 끝에 걸친 목젖의 움직임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됐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는 서하림의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한 번만 더.”

삼 일 굶은 내 앞에 피자를 들이대도 이토록 게걸스럽게 침을 흘리진 못할 것이다. 내 침이, 타액이 서하림의 목젖을 움직이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에 안착해서 몸 안에 흡수될 것을 생각하면 아랫도리가 빠듯해져 왔다. 곧 이모님이 오니까 허벅지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손가락 아래로 서하림의 목젖이 움직였다. 싫다고 해도 이렇게 내 소원을 들어주는 착하디착한 서하림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후로도 한참을 나는 서하림의 목을 잡은 채 키스를 했다. 중간중간 입술을 떼고 서하림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기도 했다. 나는 서하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입맞춤으로 해소하고자 했고, 사실 그러려면 하루 86400초 내내 혀를 빨아대도 모자랄 만큼 서하림이 너무 좋았다.

이모님이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으면 여름 해가 질 때까지 키스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림아, 이모 왔어.

오래도록 꼭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제법 민망한 소리와 함께 입술 사이에 가는 침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그걸 보니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서하림에게 달려들었지만 서하림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제가 내려갈게요!”

“하림아…….”

혀를 넣진 않았지만 버드키스를 하면서 일부러 쪽쪽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방이 워낙 크기 때문에 문밖까지 소리가 새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 맘 놓고 쪽쪽댔다. 항상 촉촉한 서하림 입술에 미친 것처럼 침 흘리는 내 입술이 만나 쪽쪽거리는 소리는 약간 질척이는 것처럼 들렸다.

-현관에 동규 신발도 있는 거 같은데 같이 있는 거 맞지?

“야, 잠깐만, 대답…….”

내 입술 때문에 말소리가 막혀 사라지는 것조차 꼴려 하는 내가 변태 같고 아, 씨발 모르겠다. 너무 좋아…… 어떡해.

“같이 내려갈게요! 10부…….”

어깨를 있는 힘껏 팡팡 내리치는 게 좀 아팠지만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장난도 입맞춤도 멈추기가 아쉬웠다.

“10분만요! 아니 30분만 있다 내려갈게요!”

-그래 그럼 그때 내려와. 잡채랑 육전 해왔어.

네, 하는 대답은 또 내가 먹었다. 이모님의 말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입술을 떼고 바로 섰다. 웃음이 실실 나왔다.

“미안.”

“하…….”

욕먹어도 즐겁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서하림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으로 카메라를 켜 입술 상태를 확인했다.

“아 진짜…… 걸리면 어쩌, 하…… 그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겠어?”

“응.”

“웃어? 웃음이 나와?”

“응.”

“됐다. 말을 말자, 말을.”

어차피 죽을 거 네 손에 죽는 것도 좋지. 하지도 못할 말을 삼키며 바보처럼 웃었다.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떼질 못하는 걸 보고 방 냉장고에서 아이스팩을 꺼내왔다. 가방에 있는 물티슈를 둘러 서하림 손에 쥐여주었다.

예전에 맞은 거 붓기 빼려고 들고 다니던 것 중에 하나를 까먹고 놓고 간 건데 혹시 몰라 넣어둔 게 이럴 때 요긴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예쁜 붕어 같아. 걱정되면 입술에다 올려.”

“됐어. 너 해.”

만약 진짜로 다친 거면 억지로라도 서하림이 아이스팩을 쓰게 했을 테지만 퉁퉁 부은 입술은 보기에 아주 좋아 나는 내 입술에 아이스팩을 바짝 붙였다.

정확히 30분 뒤 서하림과 나는 1층 다이닝룸으로 내려왔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다.

금방 된다며 식탁에 앉아 있으란 얘기에 서하림과 마주 보고 앉았다. 빨간 입술이 평소보다 1.3배쯤 커진 걸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씰룩거렸지만 티 내지 않았다.

저녁을 안 먹고 왔다는 이모님도 같이 식사에 참여했다. 잡채랑 육전 말고도 서하림이 좋아하는 궁중떡볶이에 굴젓에 맑은 해물탕에 전복초에 대하에 동치미에 아주 신선로만 없지 수라상이 따로 없었다. 아까 방문 노크하기 훨씬 전에 이미 도착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림아, 이모가 진짜 유명한 선생님 겨우 잡았어.”

애가 아직 밥도 한 술 뜨지 않았는데 이모님은 입맛 뚝 떨어지는 소리를 하면서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라며 접시들을 서하림 쪽으로 밀었다.

“아, 네.”

“과학고 출신이고 너처럼 KMO에서 상 받고 12년 전에 S대 의대 갔고.”

“아 그럼 지금…… 전문의인가요? 되게 젊은 선생님이네요. 근데 이렇게 입시 과외를 해요?”

“아직 졸업도 안 했고 의사 안 할 거란다. 휴학하고 용돈 벌이로 과외 시작했다가 처음부터 대박이 터져서는 이제 아예 의대 입시 전문으로 굳힌다나 봐. 고작 스물넷, 스물다섯일 때부터 알음알음 소수 정예 합격률 100%로 유명했다지 뭐니.”

“아…….”

이모님의 말에 서하림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지만 이모님은 계속해서 그 사람이 예과 2학년 마치고 휴학한 해에 가르친 두 명이 전부 다 의대를 간 것부터 시작해서 작년에는 한의대를 포함해서 여섯 명을 합격시켜 이 지역에선 그 선생님에게 과외를 하고 싶어 대기표까지 생겼다는 것까지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나는 전복초를 네 등분으로 잘라 서하림의 밥 위에 올려두며 입 모양으로 ‘먹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님한테 허락받은 건데, 동규도 같이하는 거야.”

“네?”

이모님은 어차피 서하림에게 얘기하는 거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밥이나 먹고 있다가 갑자기 들린 내 이름에 막 집은 소고기 전을 떨어트렸다.

“네 부모님이 동규네 신경 많이 쓰잖니. 이번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그, 이혼 서류 제출했다며.”

“……네.”

“이모님, 그으게 과외랑 무슨 상관인가요?”

이 동네 소문 퍼지는 속도는 진짜 대단했다. 우리 집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둘 만큼 대단한 집도 아니고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이 다 되는 곳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서하림 이모님이 갖고 있는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서하림 이모님은 호시탐탐 우리 부모님이 뭐라도 해달라며 찾아오진 않을까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몇 년 됐다.

그리고 나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긴 했는데 공부한다고 서하림 집으로 하교하는 길에 서하림과 내 손에 마실 거 하나라도 들려 있으면 이모님은 서하림이 내 것까지 다 산 건지 아니면 내 것은 내 돈으로 산 건지를 꼭 확인하곤 했다. 말이 확인이지 캐묻는 수준에 가까웠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나 내 부모님이 뭐라도 뜯어먹을 것처럼 의심하는 이모님 태도에 엄청 불만을 갖고 서하림한테 토로를 했었는데 지금은 좀 불편할 뿐 이모님을 나름 이해하는 중이었다. 서하림에게 이모님의 과거를 들은 후부터였다.

이모님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아주 젊을 땐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 이모님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서하림 할아버지로부터 큰 금액의 돈을 빌렸다.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던 중 임신 초기에도 일을 쉬지 않던 서하림 아줌마가 유산을 했고 이모님이 매일같이 집에 들러 서하림 아줌마를 적극 간호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다쳐 자꾸만 우는 아줌마를 위로하고 달래고 복직의 두려움이나 유산된 아이에 대한 죄책감까지 덜어주면서.

이모님 덕분에 빠르게 털고 일어난 아줌마는 1년 뒤 서하림을 임신했고 이모님은 할아버지와 차용증을 새로 썼다. 내용은 태교부터 출생, 육아, 교육 전반을 두 사람의 자녀가 만 스무 살이 되는 해까지 케어하는 것으로 빚을 변제한단 것이었는데 직업이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게 운이 좋았던 셈이다. 아줌마가 서하림을 임신한 직후 2년 동안 낮에는 집안일을, 저녁엔 야간대로 아동복지학과를 다녔고, 이후 서하림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방통대에서 청소년 교육을 전공했다.

물론 약속한 게 있으니 열심히 한 것도 있을 테지만 배 속 세포 시절부터 성심을 다한 데다 조산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던 것도 보고 어릴 때 유괴될 뻔한 것도 몸이 안 좋아 과학고 입시에서 떨어진 것도 다 봤으니 자식 같은 맘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몇 년 전부터는 본인의 건강도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모님 나름대로 필사적이라는 게 느껴졌다. 내가 서하림을 위해 온갖 레시피를 외우고 쉬는 날 없이 공부하는 거나 서하림 끼고 도는 이모님이나 별다를 게 없으니까.

다만 우리 집 관련된 일에는 오지랖을 부리지 말았으면 할 뿐이다. 아니 하더라도 내 앞에서만 하지 꼭 서하림 있는 곳에서도 하니까 착한 애가 눈치를 보는 상황을 만든다. 그럴 필요 없는데 이렇게 한 번씩 내 기를 죽이겠단 식으로 나오신다. 몸이 안 좋으니까 이해해야지. 해드려야지.

“다 관련된 얘기야. 내년 되면 고3이고 동규도 더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엄마랑 둘이 살면 서포트 하기 현실적으로 힘드니까. 그런 부분을 우리가 지원을 해주겠다는 얘기다.”

“아, 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 아빠랑 살 거 같아요.”

“아빠랑?”

“네. 그렇게 됐어요.”

“그럼 더 해야겠네! 동규도 이 과외 할 거지?”

대답하기 전에 별말 없이 밥을 깨작거리고 있는 서하림을 한 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 정말로 제가 해도 될까요. 그, 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과외비가…….”

“아이고, 우리 학생들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서하림네 아줌마한테는 따로 연락드릴게요.”

“이모님 저 그렇게 대단한 선생님이랑 같이 안 해도 괜찮은데요.”

“이미 결정된 거라 무를 수도 없어. 이모님이 하란 대로만 하는 거야.”

지금 선생님이랑 알아서 잘하고 있는 애를 괜히 옆에서 흔드는 거 아닌가 싶어 이모님을 째려봤지만 서하림은 작게 한숨을 쉬며 반찬을 뒤적거리는 게 다였다. 이모님은 당연히 의대 보낼 생각이라 저렇게 선생님도 모시고 신이 난 거 같은데 이를 어쩌나. 하림이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방학식이 금요일이라 첫 주말은 쉰다지만 그다음 월요일부터 방학은 화금 오전에, 학기 중은 월금 학교 끝나고 바로, 수시 합격이 된다는 걸 전제로 내신은 당연하고 최저 등급 관리를 포함해 수능까지 할 거라는 간단한 안내를 들으며 남은 밥을 먹었다. 내가 밥을 거의 다 먹어가자 두 그릇은 기본으로 먹는 걸 아는 이모님이 말을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내 그릇에 밥을 담아주었다.

역시 이모님 손맛 장난 아니라고 감탄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서하림은 입맛이 없는지 국물만 열심히 떠먹었다.

“첫 수업은 성적 얘기랑 공부 습관이나 진로 뭐 이런 거 얘기한다니까 지금까지 모아둔 시험지랑 노트랑 문제집 제출해야 해.”

“언제까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갑자기 생긴 공백 자리를 내가 잡은 거라 여유가 없다. 원래는 시작하기 최소 보름 전에 받아서 분석하고 수업 들어간대.”

대기표까지 있다는 사람을 갑자기 잡을 수 있다는 게 좀 의심스러웠지만 이모님 말대로 그런 건 이모님이 신경 쓸 부분이었다.

“밥 먹고 다녀올까요?”

“그럴래? 그럼 좋지. 동규 기다리는 동안 하림이도 꺼내 놓음 되겠다.”

남은 밥들과 반찬들을 쓸어 담듯 먹어치우고 바로 집을 다녀왔다. 티는 안 냈지만 사실 과외 받을 생각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삼 년의 고등학교 생활 중 딱 절반 지점인 지금, 안 그래도 이 험악한 입시 전쟁에 나 혼자 꼴랑 창과 방패 하나씩 들고 남은 일 년 반 어떻게 버티지 싶었는데. 이거 뭐 생각지도 못한 탱크와 전투기를 장착한 것과 다름없었다. 엄마 따라가면 꿈에도 못 누릴 일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작년부터 풀었던 문제집 중 제일 열심히 풀었던 것들을 선별하고 몇 권의 노트, 나름 괜찮은 내신 시험지와 그에 비해 좀 부끄러운 모의고사 시험지를 싹 다 챙겨 가져왔다. 서하림은 이미 이모님에게 갖다 준 모양이었다.

나도 챙겨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모님이 내 걸 챙겨 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벌써 가냐고 물어보는데 돌아온 대답은 주방에 귤 씻어놨으니 가져다 먹으란 말이었다. 그렇게 급한가? 얼마나 비싼 선생님이길래 저렇게 부리나케 전달하러 가는지.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대충 하고 주방에서 귤 바구니와 접시, 숟가락과 컵을 챙겨 서하림 옆에 앉았다. TV에선 코미디언 넷이 음식을 한가득씩 먹는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서하림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입이 짧고 못 먹는 게 많은 자기와는 달리 저렇게 많이 그것도 잘 먹는 걸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귤이 가득 든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하림에게 입을 맞췄다.

“야, 잘 보고 있는데 가리면 어떡하냐?”

“미안.”

짧은 입맞춤에도 내 심장은 떨려 죽겠는데 서하림도 마찬가지겠지. 부끄러워 틱틱대는 게 귀여웠다.

귤을 까야 해서 화장실 가서 손을 닦고 왔다. 서하림 옆자리에 앉아 엉덩이를 소파 끝에 걸치고 귤을 깠다. 귤 세 개를 까 접시에 모아두고 하얀 속껍질을 벗겼다. 익숙하게 까 벗기니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한 주황색의 알맹이들을 컵에 차곡차곡 모았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하림이 손을 뻗어 컵을 잡았다. 미리 컵 속에 꽂아둔 숟가락이 컵에 닿아 소리가 났다.

“와 귤 진짜 달다.”

“진짜?”

“응.”

서하림 말에 나도 귤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깠다. 귤 절반을 입에 넣고 씹었는데 터지는 과즙이 정말로 달았다.

“헐 진짜. 더 먹을래?”

TV 프로그램에 꽤 집중했는지 서하림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내가 먹던 귤을 내려놓고 새 귤을 세 개 더 깠다. 밥은 적게 먹으면서 과일은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한 박스씩 먹는 서하림이 오늘은 귤을 얼마나 먹을지 궁금해졌다. 먹기 좋게 속껍질도 깐 알맹이들을 접시 한쪽에 모아두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요리하면 되고 나름 대식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게는 그렇게 큰 흥미가 없는 방송을 따분하게 보면서 귤이나 까먹었다.

그러다 문득 귤로 청을 만들면 좋겠단 생각에 벌떡 일어나 주방 찬장을 뒤졌다. 안 그래도 오늘이나 내일 딸기청을 만들 생각이었다. 서하림 만들어주게 딸기 좀 사와 달라는 내 말을 이모님이 잊지 않았는지 냉장고엔 큼지막한 딸기들이 보였다. 백설탕과 딸기, 식칼, 제빵 저울, 청 담을 유리병을 챙겼다. 유리병을 끓는 물에 소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박. 딸기청 만들게?”

“응. 오늘은 귤청도.”

“좋지 좋지.”

그새 서하림은 까놓은 귤 알맹이들을 컵에 옮겨 담은 뒤였다.

서하림은 설탕 많이 들어간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만든 딸기청, 자몽청에 탄산수를 섞은 에이드를 여름 내내 달고 살았다. 자몽은 씨도 씨고 속껍질이 존나 두꺼워서 만들기 제일 까다롭기 때문에 진짜 서하림 먹이는 거 아니면 다음 생에서도 안 만들었을 거다. 그래도 이번엔 귤이 있으니 자몽은 안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이모님이 미리 딸기도 씻어놔서 나는 꼭지와 흰 부분을 잘라 모으고 귤도 열심히 속껍질까지 깠다. 중간중간 서하림이 귤을 집어 먹기도 했다. 유리병에 무게를 잰 과일들을 먼저 넣고 설탕을 1:1 비율로 넣었다. 약간 무거운 유리병들을 다이닝룸에 있는 커피 머신 위에 올려놨다. 이제 설탕이 과즙에 녹기 시작하면 흔들어주면서 잘 섞이도록 해주면 끝이다.

“나 오늘은 그만할 거야.”

“난 마저 하고 갈래.”

“그래라.”

“자신 있나 봐.”

“좀?”

하긴 나처럼 급하게 일주일 준비하는 게 아닐 테니 좀이 아니라 많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번엔 최대한 TV를 가리지 않고 입을 맞췄다.

서하림 방으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하림의 문제집, 공책, 샤프 등을 정리해 서하림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잠자는 거 방해하기 싫어 손님방으로 자릴 옮겼다. 혼자 앉아 공부하고 있으려니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첫 키스했던 날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그제도 그 전날도, 하여튼 처음 키스한 날 이후로 한 몇백 번의 키스들이 너무 간지러웠다.

처음으로 키스했을 때, 흔들리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한참이나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감았던 눈을 뜨자 시야 가득 예쁜 얼굴이 들어찼다. 서하림은 두 눈을 감고 있었고 내가 다시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얼굴에 감탄하느라 멈춰 있자 찬찬히 눈을 떴다. 그리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왜…….’

나는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이번엔 서하림이 눈을 감지 않았다.

‘……좋아해. 사랑해, 하림아.’

‘…….’

‘너무, 너무……. 나한텐 너밖에 없어…….’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내 뜨거운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서하림은 눈동자만 굴리다 집으로 돌아갔다. 하림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틀 더 집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첫 키스의 여파로 자꾸만 발딱발딱 서는 내 똘똘이를 신나게 위로하며 쉬다가 학교에서 다시 만난 서하림은 평소랑 똑같았다. 다만 내게 미안하다느니 마음을 못 받아주겠다느니 그런 말이 없어 나는 또 서하림에게 입술을 들이댔다. 서하림이 싫다고 하는 건 키스라는 행위이지 내가 아니다. 게다가 그 싫다는 것도 진짜 싫은 게 아니고 한 번쯤 튕기는 말인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침묵은 긍정을 대신한다. 내 고백에 대한 서하림의 반응은 침묵이었고 발정 나 헉헉거리는 내게 입술을 벌려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애의 대답을 충분히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내게 갖는 감정이 동정이든 불쌍함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서하림이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밀어내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착한 애니까, 맘 약한 애니까 내가 매일 옆에 붙어 아빠한테 처맞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걸 계속 보게 되면 언젠가는 그런 불쌍한 내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게 될 거다.

원래 서하림이란 애가 그렇다. 지금도 싫다고 말만 하지 눈만 마주쳐도 키스해 달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데, 고작 일주일도 안 된 시간에 내게 익숙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익숙함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오늘 당장 신부님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고고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서하림이 혀와 혀가 얽히는 다분히 음란한 행위를 그것도 나 같은 애와 한다는 것부터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아직은 사랑이 뭔지 몰라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인기가 많고 캐스팅을 당하면 뭘 하나. 공부나 하고 피아노나 쳤지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나도 물론 연애를 해본 건 아니지만 서하림 좋아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플라토닉보다는 에로스적인 것에 더 가깝긴 하지만 원래 사랑하는 사람과는 입을 맞추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고 그런 거니까 당연한 거다.

그리고 나같이 평범하고 음침하고 별 볼 거 없는 애를 좋아해 주는 서하림에게 나는 늘 예쁜 거,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지 않나. 노력이라기보다는 다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거지만.

또, 서하림의 진정한 내면의 모습들까지 이해하는 건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었다. 서하림이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더라도, 길가의 이름 없는 풀이나 발에 채는 쓰레기봉투였어도 나는 서하림을 사랑했을 거고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 생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도 서하림을 찾아내 또다시 반하고 또 같은 사랑을 할 것이다. 내게 서하림이란 존재가 그렇다.

하물며 이렇게나 예쁘고, 잘생기고, 착하고, 하얗고, 똑똑하고 단정하며 반듯하고 어디 하나 흠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서하림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정신적으로만 교감을 나눈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서하림이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들이 내쉬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만 해도 발기하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숨이 거칠어진 지는 오래였다. 서하림을 사랑하는 수천 가지 이유를 하나씩 읊으며 나는 티슈를 여러 장 뽑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하얀색 릴리를 꼭 닮은 서하림을 떠올리면서. 촉촉한 입술과 말랑한 혀, 분홍빛이 도는 하얀 피부와 내가 비치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아직은 만져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정복할 서하림의 귀여운 젖꼭지와 은밀한 속살과, 뜨겁고…… 좁을 그곳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리면서.

서하림네 부모님한테 감사하단 얘기를 전화로 해야 할지 문자로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늦게 잤다. 두 분 다 정말 감사하긴 한데 날 불쌍하게 여기는 게 심하게 느껴져서 전화를 하기엔 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그냥 문자만 보내자니 과외가 매우 비싼 것 같아 성의가 없어 보였다.

사실 그 사람들은 불쌍한 나를 동정해 적선을 하는 거라 전화든 문자든 별 신경을 안 쓰겠지만 서하림 부모님에게 불쌍한 친구로 기억되는 것보단 예의 바른 친구로 기억되고 싶은 내 욕심이 더 컸다.

[안녕하세요 저 동규예요. 잘 지내셨죠? 과외이야기 이모님께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경써주신 덕분에 공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 나실 때 전화 한 번 주세요~]

아침을 먹으며 서하림 아줌마 쪽으로 문자를 남겼다. 이런 예의 바르고 살가운 말투는 진짜 서하림 부모님이 아니면 쓰지도 않는다. 쓰기도 싫고 쓸 일도 잘 없다. 괜히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어 팔뚝을 벅벅 긁었다.

새벽에 또 술 취해 기어들어온 아빠 새끼 몫의 육개장에다 캡사이신 소스를 한 스푼 섞었다. 병신 같은 아빠는 맛만 괜찮으면 좀 과하게 맵거나 타거나 짜도 잘 처먹었다. 먹는 내내 욕을 하는 거 같긴 한데 지 손으로 밥은 못 차려 먹는 병신인 데다가 진짜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건지 일단 밥과 국에 밑반찬 세 개가 잘 차려져 있으면 술이 안 취해 있다는 전제하에 그거 가지곤 밥상을 엎는 일이 없었다. 술 취해도 두 번에 한 번쯤만 지랄하고.

지난주에 그 난리를 치면서 이혼이 어쩌고 새 사랑이 어쩌고 하더니 아빠는 새 사랑과 헤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받은 돈을 혼자 쓰고 싶단 게 이유였다. 진짜…… 한심하다는 말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전부터 베트남에 갈 준비를 꽤 하고 있었다는 게 사실인지 하루가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둘이 재산이나 온갖 걸 다 합의 끝내놓은 상태로 가정법원에 갔기 때문에 뭐 질질 끌 것도 없어 이혼 숙려 기간만 끝나면 두 사람은 정말로 이혼이었다. 내가 아빠랑 같이 살겠다고 한 것과 자녀가 독립할 때까지 엄마가 집세를 내주는 조건이 걸리면서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고 했다. 전과자인 아빠가 판사 앞에서 개과천선한 연기를 한 것도 한몫했고.

이번에 새로 안 사실이 있는데 우리 집이 완전 엄마 거가 아니고 서하림 이모님 아는 분이 엄청 싼 보증금에 아주 저렴한 반전세로 해서 집을 계약한 거였다. 그 외에도 엄마가 지금 집은 재건축 어쩌고 해서 운 나쁘면 쫓겨날 수 있으니 장학금 잘 받아서 기숙사 들어가란 말도 했다.

나름 18년 인생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었으나 부모님의 이혼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내 사랑만 생각해도 시간이 부족했고 나름대로의 사생활로 무척 바빴기 때문이었다.

반도 못 맞히면 쪽팔려서 어떡하지 싶던 과학 경시대회에서 한 문제 차이로 동상을 놓쳤고, 자신만만했던 만큼 서하림은 금상을 받았다. 그러고는 하루는 놀이공원, 하루는 전시회, 하루는 방 탈출 게임을 하며 열심히 놀러 다녔다. 서하림이 그러는 동안 나는 학교가 끝나면 방 안에 틀어박혀 2학기 준비를 했다.

앞뒤로 앉긴 하지만 학교에선 서하림과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 데다가 과외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이라 서하림과 함께 있을 시간이 극도로 적었다. 고작 며칠. 며칠 떨어져 있는 것인데도 견우와 직녀라도 된 것처럼 슬펐다. 괜히 의미 없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서하림 친구들의 SNS에 올라온 사진을 저장해 보고 또 봤다.

맘 같으면 서하림 집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싶은데 아무리 착한 서하림이라도 그건 좀 싫어할 거 같고 공부할 시간도 뺏기는 일이라 불가능했다. 오늘은 아마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던가. 얼른 주말이 끝났으면 좋겠다.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과외를 받는 것도 기대되고 학교 밖에서 공부하는 서하림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학교는 다대일이고 아무래도 교사의 일방적인 느낌이 강한데 서하림이 다닌 서울시 영재원과 과학고 영재원은 그보다는 좀 더 자유로웠을 테고 과외도 비슷할 거 같고. 우리 둘이 공부할 때는 거의 뭐 둘이 하는 침묵의 자율 학습 시간이나 다를 게 없으니 과외 선생님이 끼면 좀 더 눈이 반짝반짝한 서하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신나기도 했다.

〈뭐해? 내일 과외 시작이다]

〈좀 기대됨]

-야, 동규야. 안주 좀 만들어봐라.

방문을 쾅쾅거리는 아빠 새끼만 아니었다면 좀 더 많이 기대하고 더 오래 설렜을 테지만 꼭 초 치는 데 뭐가 있는 사람이다.

한동안 술 안 마신다 했다. 아니, 집 밖에선 마셨을지도 모르지. 이러나저러나 내게 좋은 아빠가 되겠다며 법원에서 광광거렸으니 하루 한 끼 정도 밥 먹으러 들어올 때 빼곤 집에 붙어 있질 않아 술 먹는 꼬락서니를 아예 안 봤으니까. 아 술 먹으면 시끄러워서 존나 싫은데. 게다가 이미 아저씨들이랑 1차 다른 곳에서 하고 온 오늘은 더더욱.

혼자만 들릴 정도로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냉장실을 열었다. 부추랑 버섯을 넣어 왕계란말이나 해줘야겠단 생각으로 양푼에 계란을 반 판이나 까 넣고 소금 존나 친 다음 저었다. 버섯은 대충 슬라이스했고 부추는 어차피 계란말이 자를 때 같이 잘라버리게 대충 씻어서 반으로 잘라 놨다.

만약 하림이가 먹는다면 얼마 전에 본 대로 노른자와 흰자를 따로 분리해서 체에 두세 번씩 거르고 거기에 우유를 조금 넣은 뒤 간은 서하림 이모님이 좋아하는 어디의 천일염이나 어디 종갓집 100년 간장으로 맞추고 통후추도 그라인더로 갈아 넣은 다음 버섯은 적당히 씹히는 정도가 될 정도로 너무 작진 않은 큐브로 잘라 넣거나 그날 서하림 취향에 따라 빼도 그만. 부추도 구석구석 깨끗이 씻어 끝부분은 다 잘라내고 열심히 다진 후 네모난 계란말이 전용 프라이팬에 흰자부터 올리고 그 뒤에 부추 올린 다음 흰 계란말이를 먼저 완성하고 노른자를 부어 색이 세 가지로 예쁘게 분리된 계란말이를 만들었을 테지만 수많은 과정과 고급 기술을 저런 좆같은 새끼들에게 펼치기엔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코팅이 반은 벗겨진 프라이팬에 식용유 왕창 둘러 계란 물을 막 부었을 때였다.

“야. 아들.”

“왜.”

“고기 두고 뭐 하냐.”

주려면 곱게 줄 것이지 냉동실에 있던 오리고기를 머리로 던질 건 뭐야 시발. 뒤에서 날아와 피할 수도 없는데 무슨 벽돌 던진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곧바로 아빠 새끼가 깽판 치기 전에 떨어진 오리고기 팩을 주워 들고 “거기 안에 오징어 남은 거도 있는데 그것도 줘”라고 선수를 쳤다. 오징어도 해준다니까 욕먹은 것도 잊고 얌전히 갖다 준다. 병신 새끼.

더 맛있고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맛은 있지만 존나 짠 왕부추 계란말이, 다른 거 하나 없이 그냥 볶기만 한 훈제오리고기, 마찬가지로 야채라곤 하나 없이 소스에 오로지 캡사이신만 추가한 고추장 오징어 볶음을 만들어 진상했다.

“동규야 잘 먹을게!”

“고맙다야!”

아저씨들이 역시 안주는 형네 집이라는 개소리를 해대며 내게 감사 인사를 했지만 나는 죄다 무시했다.

화장실에 들러 방광 좀 비우고 문에 ‘공부중 방해금지’ 팻말을 걸었다. 이 팻말은 아빠의 손에 백 번은 떨어지고 깨졌지만 그때마다 나는 새로 사서 공부할 때마다 꿋꿋하게 걸어 놨다.

방문을 잠그는 버튼은 아빠가 아예 빼버렸기 때문에 대신 책장을 옆으로 45도 기울여 문이 열리지 않게(책장을 하도 기울여대다 보니 방문에는 책장 모서리가 닿는 곳에 자국이 깊게 파여 있을 정도였다) 고정했다. 그리고 반쯤 들린 책장 바닥 면엔 길에서 주워온 작은 스툴 의자를 딱 맞게 받쳐놓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의자가 없어도 문을 열기가 쉽진 않겠지만 아빠가 힘이 워낙 좋아 이 정도는 해줘야 문이 꿈쩍을 하지 않았다.

“김동규! 국물이 없잖아!”

안 그래도 책장 눕히면서 라면이라도 끓였어야 됐나 하고 후회했으나 또 팻말 부서지는 소리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중고로 구입한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썼다. 상금 쓰면 충분히 새 걸 살 수 있지만 노래를 듣기 위한 게 아니고 오로지 소음 차단을 하려고 산 거라 별 상관은 없었다.

아빠 새끼가 준 이 덩치 때문에 하루에 네 끼는 먹어야 하는데 아빠와 친구들이 언제 꺼져줄지 몰라 마지막 한 끼는 아무래도 포기하고 내일 아침에 많이 먹어야 할 듯싶다.

[포켓볼 치고 영화 보고 집에 가는 길〉

[하..........〉

[친구들 야식 먹으러 간다는데〉

[나는 열시 넘어서...〉

이거 봐. 꼭 필요할 때, 보고 싶을 때 이런다니까.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참 재밌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안 봐도 30분 전부터 이모님한테 연락 왔닼ㅋㅋㅋ]

[아니 이제 방학인데〉

[엄마도 놀라고 했단말임〉

[이모님 좋은데 이럴 때마다 좀 유난...〉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진심〉

〈잘 어울려]

[? 뭐래냐〉

[나 대학 붙으면 차보다 집부터 달라고 할 거〉

〈그것도 좋지]

[전부터 미리 떡밥은 깔아 놨어〉

[학교 근처 15분 정도가 제일 좋다고〉

〈난 기숙사]

이대로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고 싶은데 공부도 해야 하고 종일 놀러 돌아다녔을 서하림이 피곤할 것 같아 이런 말 저런 말을 썼다가 쭉 지웠다.

〈내일봐]

살짝 헤드셋을 벗어보니 웬일로 빠르게 포기를 하셨는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방문에 귀를 붙여 바깥 소리를 들어보는데 누가 라면을 끓이는 것 같았다. 누군진 몰라도 아빠 새끼는 아닐 게 확실했다. 진짜 저 인간은 독거노인 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1순위로 죽을 거다. 지 손으로 라면 하나 햇반 하나 못 해 먹는 병신이라.

엄마 말에 의하면 운동 시작했을 때부터 적수가 없었고 학창시절 내내 감독님들이 관리도 잘해줘서 슬럼프가 왔을지언정 운동하는 데 부족한 것 하나 없던,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운동선수였다지만 감독님들이 밥도 다 떠서 먹여준 것도 아닐 텐데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냥 덜떨어지고 답 없는 꼰대에 굶어 죽은 귀신이 붙은 병신이다.

10년 뒤에 혼자 사는 아빠 새끼를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놓고 쌀을 한 가마를 갖다 놔도 알아서 죽을 것이다. 모두가 사인을 아사로 생각하겠지만 그건 틀렸다. 자살이지 자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죽음으로 해외토픽에 올라도 할 말 없는.

새벽까지 치킨을 시켜 먹으며 해가 뜨고 나서야 사라진 아빠와 친구들 때문에 덩달아 나도 잠에 늦게 들었다. 시끄러워도 잘 자는 편이지만 깊게 잠드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잘 순 없었으니까. 몇 시간 자지도 못해서 이걸 잤다고 해야 할지 눈만 감았다 떴다고 해야 할지. 늦게 자면 늦게 잘 수록 위도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져 힘들었다.

8시 50분 알람 듣자마자 일어나 세수도 하기 전에 라면 물부터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소변도 보고 세수도 하고 거실도 조금 정리했다. 라면 다섯 개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았다.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종량제봉투에 넣었다. 음식물이고 분리수거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차피 땅덩어리 넓고 인구수 많은 나라들은 이런 거 지키지도 않는데 좆만 한 나라에서 열심히 해봤자 지구에는 일말의 도움도 안 됐다. 어차피 고작 100년밖에 못 살 거 대한민국 환경이 망하든 말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빡빡 닦고 서하림네 집으로 출발했다. 버스 타면 30분도 안 걸리지만 과외 첫날이고 아침부터 너무 햇빛이 강렬해 택시를 탔다.

유명한 선생님을 어렵게 모셔서인지 몸 안 좋은 이모님도 아침 댓바람부터 나온 모양이다. 몸이 안 좋아진 이후로 서하림네 엄마가 집안일을 전담으로 해주시는 가정부를 아예 집에 들였다. 그 전까진 이모님이 집안일도 하고 서하림 케어도 다 했었다. 고등학교 올라와선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만 하니까 이모님이 픽업할 필요도 없으니 주말엔 거의 쉬는 편이고.

“덥지?”

“네 조금.”

“뭐 좀 마실래?”

“아 저 제가 만든 거로 에이드 해 먹을게요.”

서하림은 이미 손에 든 딸기 에이드를 흔들며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만든 딸기청으로 만든 거다.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딸기 에이드를 마시고 있어서 그런가 서하림 입술이 평소보다 더 붉어 보여 괜히 열이 올랐다. 원래도 입술이 혈기 좋은 코랄색인지 진한 분홍색인지 그런 색인데……. 도톰한 입술로 빨대를 오물거리는 걸 넋 놓고 보다가 서하림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마주친 시선은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어쩐지 도둑질을 들킨 느낌이 들어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왔다.

딸기청 잔뜩, 얼음 잔뜩, 탄산수도 하나 다 때려 넣은 에이드를 한 세 번 만에 전부 빨아 마시고 또 한 잔을 막 완성했더니 딩동 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도착했다. 수업 시작 5분 전이었다.

“안녕하세요. 하림이랑, 동규? 그리고 이모님이시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뭔가 지하철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안경 쓴 남자 강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되게 작고 똑 부러지게 생긴 여자분이었다. 만난 지 3초 만에 수시 합격 창을 본 것만 같은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와, 그거 맛있어 보이네. 뭐야. 에이드?”

“네.”

“선생님도 드릴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음…… 어디로 가면 될까?”

선생님과 나는 서하림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선생님이 들고 온 다소 무거워 보이는 가방은 내가 대신 들었다.

2층 큰 손님방을 정리했다더니 정말 침대나 전신거울 같은 것들이 빠지고 커튼도 어두운 암막 커튼에서 밝은 거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방 중앙을 차지한 원목 테이블과 의자에, 벽걸이 TV, 화이트보드를 보니 정말 소규모 스터디룸처럼 보였다.

“좀 앉을까?”

앉아서 선생님이 서하림과 나에게 최대한 빨리 적어서 내라며 설문지 같은 것을 건넸다. 원하는 학교, 학과, 어떤 전형 생각하는지, 학생기록부에 적을 것들은 뭔지, 좋아하는 과목, 잘하는 과목, 못하는 과목, 장래희망, 선생님에게 바라는 것 뭐 이런 것들이었다.

선생님이 가방에서 노트북과 우리의 시험지로 보이는 이것저것을 꺼내 분류를 하고 빔프로젝터를 연결하는 동안 이모님이 마실 것과 주전부리를 한가득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두고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첫 수업 정도는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갑자기 동규랑 하림이를 만나게 돼서 준 것들을 일주일밖에 못 보긴 했는데, 솔직히 일주일은 좀 분석하기에 빡빡하거든. 내가 너네만 수업하는 것도 아니고.”

서하림과 내 시험지들에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서하림과 나는 열심히 적은 종이를 선생님에게 돌려주었다.

“근데 두 학생이 워낙 훌륭한 학생들이라 분석 자체는 쉬웠어. 틀린 게 많으면 많을수록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런 게 좀 덜하니까. 먼저 동규.”

“네.”

“너도 알겠지만 내신은 좋은데 모의고사가 영 별로야. 알지?”

선생님은 내가 적어낸 종이를 훑으며 내가 백일장 상을 지독하게 많이 받았다는 걸 신기하게 여겼다. 국문과 가야 하는 거 아니냐길래 “자소서에다 예술 할 생각이에요” 하고 딱 잘라 얘기했다. 그 외에는 수시로 붙겠지만 모의고사도 열심히 하자는 다 아는 얘기였다.

서하림은 일단은 의대로 적어낸 듯했다.

“하림이는 하늘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서하늘이요?”

체육대회에서 MVP 받은 팔씨름왕 서하늘은 서하림 친가 쪽 사촌이다. 생일이 서하늘이 더 빨라서 어른들 계신 자리에선 서하림이 누나라고 부른다고 했다. 걔도 의대 준비했던가? 약대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하늘이 엄마랑 따로 아는 사이라 하늘이랑도 친하거든. 근데 과학고 아닌데도 어떻게 올림피아드를 나갈 생각을 했어? 대단하다 정말로!”

“올해도 나가요.”

“진짜?”

그 뒤로도 선생님은 서하림이 쌓아온 교내 상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대단하단 말을 몇 번이나 더 했다. 듣고 있는 내가 다 뿌듯했다. 중3 때 몸이 안 좋아 과학고 못 간 대신 지금 학교에서 노력 중이란 서하림 얘기까지 다 들은 선생님은 앞으로 어떻게 수업할지 PPT를 띄워 설명했다. 특별한 건 없어서 쿠키랑 젤리만 신나게 까서 먹었다. 서하림도 뭐, 아무래도 의대는 버리기로 결심했는지 눈동자가 허공에 맴돌았다.

살인적인 더위도 열대야도 아빠 새끼도 여름방학의 이 잔인한 운명보단 나았다. 작년에도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작년과는 서하림과 내가 완전히 다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올해 내 심정은 정말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7월에 이미 날짜는 다 나와서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그야말로 오산이었다.

내 D그룹 문학상 본선인 문학 캠프와 서하림의 올림피아드 여름학교가 어떻게 연달아서 딱 하루 겹칠 수가 있는 것일까. 문학 캠프는 금토일 2박 3일, 서하림의 여름학교는 일월화수목금토일 7박 8일. 일요일 하루가 겹치는 바람에 무려 열흘이나 서하림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문학 캠프와 여름학교 날짜가 발표된 7월 초엔 아직 나 혼자 짝사랑 중이었고 서하림도 내 마음을 몰랐을 때니까, 아니 작년에도 한 일주일 못 보긴 했는데 그때는 사진 보면서 딸치고 상상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 올해도 그럴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기말고사 끝나고 내가 고백을 하고 서하림이 받아주고 비록 사귀진 않지만 전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가 되어 과학 경시대회 끝나고 과외 새로 시작할 때까지 한 이삼 일 못 본 것도 말라 죽어가는 심정이었는데 열흘은,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길었다.

매일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껴안고 있기도 바쁜데…… 이 상태에서 열흘이나 떨어져 있으라는 건 신혼부부보고 결혼하자마자 떨어져 살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우린 아직 첫날밤을 보내진 않았지만 아무튼, 마음 잘 다스리고 멋진 모습으로 헤어지기 전 마지막 수업을 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이면 동규 가고. 일요일에 하림이 가고 나면 담주 일요일까진 나도 방학이네.”

이번 주 금요일 수업을 목요일 학생과 바꿔 진행했다. 내일과 모레는 서하림과 선생님 둘이 아침 일찍 그리고 자기 전에 올림피아드 수업을 따로 하고. 선생님이 둘 다 좋은 소식 기대한다며 스터디룸을 나갔다.

서하림 없으면 어차피 과외도 하기 싫어서 나는 하림이 올 때까진 과외 안 하고 있겠다니까 선생님도 이모님도 별말 없이 그러마 했다.

나는 서하림을 기다리며 일주일간 집 밖을 아예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서하림 없는 동네는 걸어 다니기도 싫고 서하림 없는 서울 공기는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 이렇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중증이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손을 오래 타지 못할 서하림이 아쉬워 발정을 하고 있는 나였다.

선생님이 나가자 하림이도 많이 아쉬운지 샤프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하림이와 내 사이에 있는 선생님의 의자를 서하림 쪽으로 가까이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샤프를 쥔 하얀 손에 내 손을 덮었다. 나보다 훨씬 작고 가는 손이었다.

“……하림아.”

“응.”

예쁜 이 손에서 유일하게 덜 예쁜 곳을 찾으라면 열심히 공부하느라 생긴 중지의 굳은살. 하지만 온몸이 말랑거리고 쫀득한 하림이의 몸에서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이 까끌거리는 살을 만지고 있노라면 마치 커플링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하림이의 손과 내 손의 결합을 방해하는 샤프를 던져 버리고 깍지를 꼈다. 언제나 차가운 서하림의 것에 비해 내 손바닥에는 땀이 배여 있었다. 덕분에 깍지 낀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미끌미끌해 기분이 묘했다.

“나, 너무 슬퍼. 너 오래 못 볼 생각하면.”

맑은 눈동자가 하나가 되어 꿀렁이는 우리의 손을 바라보았다. 예쁜 입술이 벌어졌다 닫혔다.

손가락에 힘을 줘 서하림의 얇은 손가락들을 꽉꽉 압박했다.

“아파…….”

“내가 더 아파.”

냉한 탓에 끝이 분홍색인 손가락이 미지근해지고, 늘 뽀송하던 손이 내 땀에 젖을 즈음 나는 손을 떼 양손으로 하림이의 얼굴을 잡았다. 깨질 것처럼 아주 유약하고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내 두 손에 담긴 서하림은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엄지가 딱 눈동자 아래 애교살에 닿았다. 이대로…… 조금만 손을 더 올려서 힘을 주면…… 눈동자가, 앞을 보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이 줄어들 것이다. 당장 며칠 뒤인 여름학교에 못 갈 거고…… 그보다, 별빛 같은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서하림을 앞에 두고 자위 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고 있는 하림이 귀에 ‘하림아’ 하고 부르면 시각을 잃어 몇 배나 예민해진 청각이 내 목소리에 반응해 잠에서 깰 것이다. 일어난 하림이를 준비해 둔 어떤 의자에 앉힌 다음 부드러운 긴 천으로 묶어놓는다.

그리고 일부러 철컥철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벨트를 풀고 지퍼 소리도 천천히 아주 선명하게 들리도록 내린 다음 바지 버클을 풀고 발목까지 한 번에 내린다. 발을 빼야겠지. 내 신발에 닿은 벨트에서 달그락 소리가 날 것이다.

그다음은 속옷이다. 밴드 부분을 한 번 살짝 튕겨본다. 하림인 귀가 예민해진 상태라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영상처럼 보일 것이다.

이윽고 나는 속옷도 끝까지 내린다. 탄력적인 천이 살에 쓸리는 소리는 크지 않지만 하림이의 예민한 귀는 잡아내겠지. 눈을 잃은 서하림을 무력하게 의자에 묶어 놓은 순간부터 터질 것처럼 발기하고 있던 내 성기는 벌써부터 귀두가 젖어 꺼떡거렸다.

‘후우…….’

내 한숨에 하림이가 움찔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침 때문에 미끈해진 윗입술을 물고 우물우물했다. 아, 방금 그거 때문에 쌀 뻔했어. 난데없는 자위 쇼에 하림이도 애가 닳은 것이다. 하나를 잃고 몇 배의 민감함을 얻었으니 망한 장사는 아니다.

잔뜩 성이 난 내 성기를 잡고 천천히 훑었다. 내 손이 서하림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림이의 손은 늘 처음 하는 것처럼 서툴고 어색하니까 그 느낌을 잘 살려야 한다. 평소에 내가 하듯 하면 흥이 좀 깨질지도 모른다.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거친 숨소리를 참지 않고 훅훅 내쉬었다. 내 숨소리에 젖은 살이 치대는 소리가 섞여 굉장히 외설적으로 들렸다.

하림이도 슬슬 몸을 틀며 꽃잎 같은 예쁜 입이 벌어졌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얼굴만 보면 잠을 자고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눈 하나 감았다고 엄청나게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고. 어찌 됐든 묶여 있는 서하림을 앞에 두고 한 번 사정했다. 사출된 정액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나 하다못해 원숭이를 데려와 눈을 가려놔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전부 남성의 자위 쇼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으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선정적인.

발목에 걸려 있던 속옷에서 다리를 빼고 서하림에게 다가갔다. 구두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경쾌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하림이가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빨고 싶어?’

‘으……응, 아니.’

‘좋단 거야 싫단 거야?’

한 번 사정했지만 여전히 힘이 선 성기를 서하림의 볼에 가져갔다. 체온보다 조금 더 높은 것이 닿자 흠칫 놀래며 반대로 몸을 뺀다.

‘비리……잖아.’

‘그럼 안 비리면 상관없고?’

‘그, 그건…….’

‘음. 싸는 거야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볼게. 네가 먹어준다면 바랄 게 없지만 토할 것도 잘 알아. 입에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송하니까.’

‘아니야…….’

‘음…… 꿀을 바를까? 하지만 그건 네가 먹기엔 너무 달아. 생크림은 어때?’

‘생크림?’

‘괜찮을 거 같아. 생크림은 다 빨아먹어도 미끌미끌한 게 남아서 그대로 네 입안을 맘껏 쑤시기도 좋을 거 같아.’

‘그래?’

‘그리고 하얀 생크림이 입에 꽉 차서 입술 근처에 치덕치덕 발라져 있는 광경도, 존나…… 좋을 거 같고.’

‘그럼 나도 좋아…….’

“야. 김동규.”

양손 엄지로 애교살을 살살 문지르며 든 짧은 생각은 청아한 목소리에 쉽게 깨졌다.

“아, 미안.”

키스해 달라고 조르는 걸 앞에 두고 딴생각을 했다. 네 눈동자 터트린 상상했단 얘긴 할 수 없으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 마음 반, 이상한 생각해서 미안한 마음 반의 키스를 했다. 큰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 사라지자 나는 고개를 좀 더 돌려 깊숙하게 혀를 섞었다.

한동안 못 먹을 거라 그런가, 오늘따라 침이 너무 달았다. 서하림의 혀도 그랬다. 서하림의 혀를 빨고 있자니 정말 달짝지근한 젤리 같아 나도 모르게 씹어먹을 뻔했다. 나한테 혀가 잘려 반토막 난 혀로 귀엽게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서하림도 무척 귀여울 것 같았다. 근데 뭐 귀엽기 전에 혀가 그만큼 잘리면 죽으니 안 되겠지.

눈동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병신 같다 생각하기도 하지만 0.1퍼센트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서하림이 내게서 멀어지는 건 싫고 내겐 이미 전적이 한 번 있으니까. 또 한 번 일을 저지르려면 진작에 벌일 수 있었으나 이번엔 참았다.

서하림에게는 인생에 다시없을 유일한 실패이자,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사고였기 때문에 평생 마음에 두고 살 기억이겠지만 이젠 내겐 가물가물해진 그렇게 오래되진 않은 성공담이다.

초등학교에서도 영재원을 다녔던 서하림은 중학교 역시 영재원을 다니며 주말을 바쁘게 살았는데, 나도 서하림과 같이 영재원을 다니겠다고 안 하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4년을 팽팽 놀았으니 고작 2년 한다고 영재원 문턱을 밟아 볼 수나 있겠나. 아무리 해도 영재원은 안녕이구나 싶었는데 중학생이 되니 등수가 오르는 게 확연하게 보여 시험을 보면 볼수록 서하림의 등수에 가까워졌다.

비록 서하림처럼 영재원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밑바닥을 기던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등수가 쭉쭉 올라오니 그게 서하림에게 자극이 됐던 것 같다. 모르는 게 있으면 EBS 강의 몇십 번씩 돌려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말도 붙일 겸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서하림에게 물어봤는데, 2학년 땐 심지어 반이 달랐는데도 내가 찾아가니까 선생님들이 날 기특해하면서도 특이하게 봤다.

바쁜 서하림 부모님 대신 이모님이 그 소식을 듣고선 내 담임선생님이랑 얘기를 나누더니 2학기부터는 서하림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해줬다. 늦더라도 영재원 중3 반에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온갖 신에게 매일 손이 닳도록 빌어댄 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림이와 함께 공부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이루어진 대신 반작용으로 이모님의 시험이 잊을 만하면 주어지고 잊을 만하면 주어졌다. 내가 서하림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혹여 거지 새끼가 서하림에게 빌붙지는 않을지를 가늠하는 그런 시험이. 한 번은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한테 전화해서 우리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아무튼 서하림과 주기적으로 같이 공부할 수 있단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3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고, 아빠가 정신 못 차리고 다시 사람들을 패고 다니고 나도 때리고 엄마도 때리고 집안이 그렇게 콩가루가 되어갔지만 그때마다 서하림이 찾아왔다. 집안이 공포로 물들고 아빠에게 허구한 날 처맞아도 날 안아주는 그 애가 있어 살아 있는 1분 1초가 즐겁고 행복했다.

행복은 금세 깨진다고, 서하림이 과학고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을 땐 나는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좌절과 허망함을 느낀 것이 처음이었다.

‘어…… 그럼 우리 같은 학교 못 가?’

‘아마도? 나는 오래 준비했는데 너는 아니니까 좀 힘들겠지.’

어떻게 찾은 행복인데, 어떻게 온 천사인데 이렇게 쉽게 떠나보낼 순 없다. 내 머릿속은 서하림이 사라져 홀로 된 내가 그 애의 부재를 못 견디다 못해 아빠를 찔러 죽이고 자살하든 혼자 뛰어내려 자살하든 피로 엉망이 되는 장면들이 판을 쳤다. 당연한 일이지만 서하림이 1차 서류들을 다 통과했다는 걸 들었을 땐 사이렌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환청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점점 심해지는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 그럴수록 갈급이 난 듯 서하림을 찾던 나를 기억한다.

하림이와 서점에 가기로 약속한 어느 주말 나는 일부러 아빠에게 대들어 흠씬 맞았다. 아빠를 화나게 할 수십 가지 시나리오를 짜놓은 상태였고 전날 술 먹고 뻗은 아빠를 일부러 깨우지 않고 있었다. 서하림이 우리 집으로 와주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고의로 어젯밤부터 에어컨을 있는 대로 켜 집 안을 춥게 만들었다. 서하림이 올 시간이 다 되자 주방에서 냄비나 도마 같은 걸 던지며 요란스럽게 아빠를 깨웠다. 그리고 수많은 시나리오 중 하나에 걸려든 아빠에게 열심히 말대꾸를 했다.

‘추워 뒤지겠네. 고물 에어컨이라도 에어컨은 에어컨인가 봐? 빨리 꺼라.’

‘난 시원해서 좋은데.’

그대로 손이 날아와 냉장고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고 멱살을 잡힌 채 뺨을 수십 대를 맞았다. 그때 마침 안에서 우리 아빠 소리가 들리니까 비밀번호를 아는 서하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맞으면서 떨어져 깨진 그릇 위를 밟아 피가 낭자한 꼴을 본 하림이가 놀래서 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 아저씨, 피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엄마가 몇 번이나 얘기한 그 의사 부부 아들이라는 걸 아빠는 한 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자길 말리는 서하림에겐 손 하나 대지도 못하고 시뻘게진 눈으로 나만 쏘아보았다. 몇 대 더 내 뺨을 내려친 아빠 새끼는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골이 울렸다.

그땐 이미 서하림은 내 발바닥에서 흐른 피 때문에 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누굴 이렇게나 세게 때리는 것도 처음 봤을 것이며 피칠갑 된 꼴도, 그릇 파편들이 박혀 너덜너덜해진 발바닥도 전부.

바들바들 떨며 119를 부르자는 걸 내가 겨우 막았다. 그럼 엄마라도 아니면 이모님이라도 부르자는 걸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어른들이 알게 되면 너랑 헤어지게 되는데 그건 싫다면서.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서하림이 날 버리지 못하게 만드느라 혈안이었으므로 악어의 눈물도 뚝뚝 흘려대며 그렇게 말했다.

우선 서하림은 잠시 등을 돌리고 숨을 크게 쉬었다. 우는 자신을 진정시켰는지 다시 몸을 돌려 바닥에 깨진 접시들을 정리했다. 여린 서하림의 손이 다치면 안 됐기 때문에 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청소기 사용 방법도 알려주었다. 청소기까지 사용한 서하림은 이렇게나 찬바람이 숭숭 나오는데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이 땀으로 젖어 있는 건 또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근데 차마 서하림보고 걸레질을 시킬 수가 없어 물을 적셔오게만 하고 피를 닦는 건 내가 하려고 했는데 서하림이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을 닦았다.

‘앉아 있어. 움직이면 진짜 화낼 거야.’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서하림의 말을 들었다. 눈물을 닦으려다 그 하얀 손에 내 피가 묻은 걸 보고 흠칫 놀라는 거나 점점 땀이 식어 다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예뻤다. 이런 걸레질은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봤을 애가 어쩜 그리 꼼꼼하게 닦고 다시 화장실 가서 빨아오고 하는지. 예술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냉장고에 기대어 서하림을 감상했다.

바닥을 정리한 서하림은 발바닥에 있는 조각들을 빼준다고 했다. 사실 상처가 너덜너덜한 것까진 아니고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지만 서하림이 보기엔 흉했는지 빼준다고 말만 해놓고 손도 못 댄 채 괴로워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나는 내 손으로 조각들을 빼면서 이번엔 진짜 눈물을 흘렸다. 좀 아파서.

‘아줌마 집에 오면 응급실 꼭 가. 약속해.’

‘응.’

‘근데, 너 어디 아파? 왜 이래?’

‘몰라.’

‘야, 너 진짜 불덩이 같아!’

‘침대로 갈래.’

‘어어, 잠깐만.’

저보다 훨씬 큰 나를 거의 포대처럼 질질 끌어다 내 방 침대 위에 올려놓은 서하림은 다시 땀으로 범벅이 됐다. 내 시나리오에는 이런 것까진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 방까지 에어컨을 틀고 잔 건 실수였다고 생각하며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서하림은 날 침대에 눕혀놓고 내 방 에어컨을 꺼야겠다며 침대 위로 올라왔지만 버튼도 없는 걸 어떻게 꺼야 하는지 서하림이 알 리 만무했다. 나는 침대 아래에서 리모컨을 꺼내 전원을 껐다. 아니, 끄려고 했는데 건전지가 다 돼서 끌 수가 없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리모컨을 아무 데나 던져 버렸다. 서하림은 어른들에게 알리지 말아달란 내 부탁에 발만 동동 굴렸고 나는 끙끙거리는 와중에도 서하림한테 감기 옮기기 싫으니 어서 집에 가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서하림은 휴대폰으로 뭘 찾아보더니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비장한 얼굴로 내 이불로 들어왔다.

‘하림아, 감기 걸려…….’

‘잠깐만. 미안해. 팔 좀 들어봐.’

‘집에 가. 옮고 싶어서 그래?’

‘팔 올리라니까.’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서하림이라, 나는 또 팔을 들라는 대로 들었다. 서하림은 그대로 내 티셔츠를 벗겨냈고 저 자신도 마찬가지로 상의를 벗어 곱게 접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흐려지던 정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간 아주 선명해졌다.

‘하, 하림아, 너, 이거…….’

‘급할 땐 이렇게 하는 거래. 좀 안는다?’

내 머리 아래로 들어오는 가는 팔뚝을, 탄탄한 내 가슴팍과는 달리 부드럽게 눌리는 젖꼭지를,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걱정하는 얼굴까지 띵한 머리가 조금 늦게 인지한 순간 나는 다급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오른손을 바지 안으로 넣었다. 벌써 고추가 뜨거워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안 걸릴 수 있지? 옆으로? 아래로? 아니면 다리 사이로? 짧은 순간에 고추를 어디다 놔야 좋을지 몇만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서 돌리며 머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존나 웃긴 건 어떻게든 발기한 고추 숨기겠다고 바쁜 와중에 서하림 젖꼭지는 보고 싶어서 밝은 대낮인 것에 감사했고 슬쩍 상체를 뒤로 물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서하림이 가슴을 내밀고 딱 붙어와 못 보는 게 안타까웠다. 봤다간 이대로 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림이가 눈앞에서 벗은 채로 내 품에 있으니까 진짜 머리도 고추도 터질 지경이었다.

‘아 맞다. 아줌마한테 빨리 오라고 연락해야지. 너 다쳐서 응급실 가야 한다고.’

안 돼. 일어나지 마. 아니, 일어나 줘.

상반되는 마음이 열심히 싸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서하림은 내 피부에서 이불이 최대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에 던져둔 가방을 가져왔다.

‘아우 너무 추워.’

수천 번 상상하고 매번 멀리서만 봐왔던 것처럼 서하림의 젖꼭지는 언제나 예쁘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끝 발끝처럼 맑은 분홍색이었다. 춥다며 내 품에 다시 안겨드는데…… 열이 난 내 몸이 따뜻한지 쏙 들어오는 서하림이 계속 가슴을 눌러대니까…… 진짜, 정말로 한계였다. 열과 함께 서하림으로 인한 충격 탓인지 정신이 서서히 멀어지며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서하림이 사실을 그대로 고해바친 바람에 일하던 엄마가 바로 날아왔고 서하림은 콘센트만 빼면 됐을 걸 뭘 그렇게 고생했냐며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다. 나름 똑똑하단 말 많이 듣고 산 앤데 고작 에어컨 전원 하나 못 껐다는 게 좀 충격인 것 같았다. 뭐, 정신이 워낙 없었으니까.

엄마는 도착한 뒤에 바로 서하림을 돌려보냈고, 도무지 나를 업고 갈 수 없어 열에 헤롱거리는 내가 다시 잠들지 못하게 했다. 엄마의 노력에 겨우 정신이 든 나는 온몸의 신체감각 중 제일 먼저 오른손의 촉감을 느꼈다. 끈적하고 미끄덩한 이게 뭔지 생각도 하기 전에 쉬 마렵다며 화장실로 피신을 했다. 피가 멎은 발바닥이 다시 다 터진 줄도 몰랐다. 진짜 천만다행으로 귀두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어서 팬티는 별로 젖지 않아 망정이었다.

화장실 바닥에 앉아 최대한 발바닥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힘겹게 바지와 속옷을 벗은 뒤 속옷은 휴지로 돌돌 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힘들게 바지를 올려 입었다. 화장실 바닥은 피로 엉망이었고 진이 다 빠진 나를 데리러 결국 택시 아저씨가 화장실까지 들어와야 했다.

이날 덕분에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서하림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일주일이 넘게 학교를 쉬었고 괜찮아진 줄 알고 오랜만에 등교했다가 찬바람을 쐬어서인지 다시 열이 올랐다. 조퇴를 생각하며 한 시간만 버티겠다고 용을 쓰다가 교무실로 가는 계단에서 서하림은 그만, 정신을 잃고 굴렀다.

모두가 서하림이 심하게 콜록대다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진 줄 아는데, 아니다. 서하림은 분명 누가 고의로 밀쳐 넘어졌고 그 범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2년 전 여름, 서하림이 과학고 입시 최종 관문인 과학 영재 캠프나 면접 따위에 참여하기 보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서하림은 병실에 누워 있느라 캠프도 면접도 그 어떤 것도 갈 수 없었다.

수업 시간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기침을 무척 심하게 한 바람에 앞으로 무게중심이 쏠리고 있던 몸에다 아주 살짝 힘을 더한 것뿐이라 서하림조차 자기 스스로 넘어진 줄로만 알고 있는 이 기억의 진실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 굉장히 오랜 시간 서하림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 되겠지.

뭐든지 간에 서하림에게 날 각인시키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날 계단을 구른 하림이가 반병신이 됐어도 남는 장사였다. 목격자도 가해자도 오로지 나,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서하림의 발목을 잘라 내 옆에 있게 하려고 했으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획을 접고 상상 속에서만 실행했다. 사랑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던 서하림이 일어나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자연스럽게 서하림의 허벅지 하나가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서하림의 얼굴을 감싼 손을 떼 한 손은 뒷머리를 다른 한 손은 허리를 안고 있었으므로 서하림의 허벅지는 단단해진 나의 것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키스하면서 예쁜 눈알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또 예전 기억을 떠올리다가 두 번 사정한 것까지.

우리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 반바지는 내 정액 냄새를 가려주기엔 한없이 얇았고 나는 내일부터 서하림이 없단 생각에 뭐라도 하고 싶어 발정이 난 상태였다. 쪽쪽 빨려 더 붉어지고 더 도톰해진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 이건…… 미안.”

서하림의 것과 달리 비린 냄새가 진하게 올라와 나는 다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책상 위 티슈를 통째로 들어 휴지를 미친 듯이 뽑았다.

“냄새 많이 나지.”

왜 정액 냄새는 좋은 향이 아닌 건지 있지도 않을 신이 원망스러웠다. 은은한 백합향이면, 달콤한 꿀 냄새가 나면 얼마나 좋아. 속옷 안으로 휴지 뭉텅이를 넣어 닦았다. 땀과 섞여 찝찝했지만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닦은 휴지는 화장실 변기에 버려야겠다.

“너 못 볼 거 생각하니까, 그냥 입술만 대고 있어도 너무 좋아서…….”

당황한 내 말을 듣는 동그란 뒤통수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뭐라고 날 탓하지 않는 게 고맙고 미안했다.

“벗어.”

“어, 어?”

“벗으라고.”

뒷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서하림의 얼굴은 충분히 상상이 갔다. 당황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민망해하는 나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배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존심 상해 하지 않을까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거다.

“집에 그러고 가게? 빨아야지.”

“어. 어어. 그렇지.”

“옷이랑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서 있기 머쓱해서 의자에 앉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문제집이나 필기구들이 펼쳐져 있었다. 일단 정액 묻은 휴지들도 좀 처리하고 손도 좀 씻어야겠다.

화장실에 다녀왔을 땐 서하림이 잠옷으로 보이는 걸 들고 있었다.

“이거 손님용 잠옷인데 너한텐 좀 작아…… 보이네.”

“어차피 고무줄 바지니까 상관없어 길이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서하림이 뒤를 돌았다. 사실 봐도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뭐, 봐줬으면 좋겠다 싶고. 내 거 보고 어떤 얼굴일지, 표정일지, 눈동자일지 궁금하니까.

서하림의 걱정대로 허리만 맞지 길이는 좀 짧았고 허벅지나 엉덩이가 꽉 꼈다. 가뜩이나 여름용 얇은 천으로 만들어져서 이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나면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딱 좋네. 세탁기 어딨어? 1층 베란다?”

“다용도실.”

“빠른 세탁하고 빠른 건조하면 대충 한 시간이면 되겠다.”

세탁기를 찾아 내려가는 나를 서하림이 따라왔다. 선생님 가면서 이모님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화장실에서 빨아 축축한 속옷과 바지를 세탁기에 던져 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뿌렸다. 특히 섬유유연제는 엄청 넣었다.

서하림은 TV 채널을 무의미하게 넘기고 있었다. 중간중간 서하림이 좋아하는 예능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보고 싶은 걸 찾는 건 아닌 듯했다. 그냥 무표정으로 리모컨만 딸깍이는 게 다였다. 분명 내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느라 그런 거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아니, 사실 너무 발정 난 거 같아서 민망하긴 한데 그거야 내가 서하림을 너무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런데 오래도록 못 보니까 거기에 속상하고 슬프니까 그런 거지 이상한 건 아닌데.

나는 서하림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덩치가 훨씬 큰 내가 좀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서하림이 자리를 조금 내줬다.

“뭐 보게?”

“아니.”

“좀 쉬려는 거 아니었어?”

“맞아. 볼 게 없네.”

“다시 보기라도 보지.”

“…….”

“영화 구매해서 보거나 옛날 예능 같은 거라도.”

“영화는 너무 길고 예능은 지금 딱히 안 끌려.”

“그럼 다큐멘터리는?”

“지루해. 귀찮아.”

“뭐 먹을래? 귤?”

“응. 과일 딴 거 있나 한번 봐줘.”

냉장고 열어보니 사과랑 복숭아가 보였다.

“어 좋아. 그럼 귤 말고 사과랑 복숭아 먹을래.”

이모님이 알아서 깨끗하게 닦아 놨겠지만 또 씻었다. 어차피 빡빡 씻을 필요 없이 무농약 유기농으로 키운 거라고 이모님이 얘기한 적 있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잘 알고 있어도 열심히 씻게 된다. 그러니 이모님도 열심히 씻어 놓는 것일 테고.

과도를 챙겨 앉았다. 여전히 채널은 멈추지 못하고 서하림의 손에 돌아가는 중이었다. 깎은 과일을 먹으려고 멈춘 채널은 서하림이 좋아하는 예능이 하고 있었다. 떡볶이 편이었다.

목요일 과외 학생 중 시간을 바꿔줄 수 있는 학생과 바꾼 거라 점심을 먹기에도 저녁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서하림은 한입에 먹을 수 있도록 알맞게 잘라놓은 복숭아와 사과를 집어 먹으면서 시선은 TV에 딱 고정하고 있었다. 볼 게 없다고 하더니 막상 시작하니 재미있나 보다.

남으면 버리면 되니까 서하림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과일을 잔뜩 잘라두고 손을 씻고 왔다. 작게 큐브로 자른 과일들을 포크에 여러 개 꼽아 먹은 탓에 볼이 오동동해 귀여웠다. 과일 먹느라 소파 앞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은 서하림과 달리 나는 깊숙이 앉아 등을 대고 서하림의 그런 빵빵한 볼이 우물우물 움직이는 걸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 서하림의 귀여운 머리통에 손가락을 넣었다. 사이사이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이대로 손에 힘을 주고 잡아당겨서 머리카락을 몇 개 챙겨두면 좀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야. 아파.”

그렇게 힘을 세게 주지 않았는데 서하림이 고개를 돌리며 내 손을 떨어트렸다. 아, 머리카락 안 뽑혔다.

입에 복숭아가 있어서 그런지 우물우물하며 눈동자로 ‘또 잡지 마’ 같은 말을 하는 듯한 서하림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서하림에게서 “야!” 하고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입술을 딱 붙이고 안에 있는 복숭아를 가져가자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복숭아는 다 사라지고 없었지만 서하림 입안 구석구석엔 아직도 복숭아 과즙이 남아서, 마치 서하림의 타액이 꼭 그런 맛인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어느 날 서하림 땀을 핥았을 때 이런 맛이 나도, 갑자기 어느 날 서하림 오줌을 마셨는데 이런 맛이 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마침 먹고 있던 게 복숭아라 그렇지 새빨간 사과의 상큼한 맛도 잘 어울릴 것이다.

빨간 사과를 물고 있을 서하림을 생각하자 침샘이 아려오며 침이 줄줄 나왔다. 그걸 그대로 서하림에게 넘겨주며 삼키게 했다.

“나 또 섰어.”

“아니…… 왜?”

“너무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근데 오래 못 보잖아. 헤어지잖아. 멀리 떨어지잖아. 키스가 아니어도…… 나는 네가 포크로 사과를 찍기만 해도 이래.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거나, 그냥…… 그냥…… 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이렇게…….”

늘어나지 않는 재질인 데다가 너무 꽉 낀 탓에 발기한 것이 앞으로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옆으로 누운 모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너 없는 동안 보고 싶어서, 이렇게…….”

두 손으로 서하림의 얼굴을 잡았다. 내 큰 손에 얌전히 담기는 하얗고 작은 얼굴이 너무 좋았다. 하루 종일 보고만 있어도 좋은 얼굴을 이렇게 내 두 손에 담는 게 좋았다. 진짜 내 것 같아서. 서하림의 맑은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도 가득 차는 것도 좋았다. 그만큼 내가 가깝다는 뜻이니까.

“이렇게 만지고 싶어서 어떻게 참지?”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다리 사이에서는 답답한 걸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내 숨도 점점 거칠어졌지만 서하림에게 허락을 받기 전까진 참을 생각이었다.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뭘…… 왜.”

“손 빌려줘.”

조심스럽게 시작된 문장을 잘랐다. 참는 건 참는 건데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할게. 그러면 열흘 잘 참을 것 같아.”

“…….”

“아…… 나 지금 죽을 거 같아, 응? 남의 거라 보기 징그러우면 그냥 눈 감고 있어. 앞에 보고 앉아서 TV 마저 봐. 손 하나만이라도 주면 돼. 소리도 안 낼게. 입이랑 코 다 막고 찍소리도 안 낼게. 제발…….”

“손이나 좀 떼.”

예쁜 얼굴을 담고 있던 손을 바로 뗐다. 땀 때문에 손은 축축했고 약간 떨리는 것도 같았다. 서하림은 윗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TV 볼륨을 높였다.

“휴지랑 물티슈는.”

“가져올게.”

다시 소파에 앉았을 땐 조금 전보다 TV 소리가 더 커져 있었다. 귀가 아플 법도 한데 참는 건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서하림은 긍정을 늘 침묵으로 대답했다.

나는 곧게 선 서하림의 등을, 옷 속에 있을 하얀 등과 바른 척추를 상상했다. 서하림의 날개뼈엔 진짜 하얀 날개가 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 소파 위에 가볍게 올려진 서하림의 왼손을 잡았다. 조금 놀란 것 같았으나 다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하얀 손은 차가웠고 끝이 분홍색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만 불어도 차가운 손과 발 때문에 많이 고생하는 게 안쓰럽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손끝이 분홍빛으로 물든 건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천재 예술가들의 명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손이었다.

보고 있으면 고귀하고 성스럽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 손에 내 손을 넣어 깍지를 꼈다. 피부색이 하얀 손가락과 대비됐다.

나는 그 분홍빛의 손끝을 하나 입에 물었다. 끝만 맛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가락 두 개를 입에 처넣고 빨고 있었다. 내 더러운 침이 손가락에 묻은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어차피 더 더러운 것도 묻을 건데 하나쯤 더 물어도, 아니 두 개쯤 더 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댔다.

복숭아, 사과, 포도, 석류…… 그 외에 서하림이 좋아하고 먹어온 모든 과일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림이의 피부는 달콤했고 향기로웠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답답한 곳에 갇혀 있던 성기를 꺼냈다. 동시에 입에 물고 있던 서하림의 손도 뺐다. 차라리 손목까지 다 입안에 처넣어 빨 걸, 그런 후회가 조금 들었다.

사람의 타액이 원래 이렇게 많은 것인지 아니면 흥분해서 많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물에 젖은 정도가 아니라 침을 모아 뱉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서하림의 손은 내 마음에 작은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깨끗한 것만 만져도 모자란 손에 더러운 내 것을 묻힌다는 게. 다만 죄책감은 크지 않고 정말 작았다.

내 시야에서는 서하림의 얼굴이 보이지가 않았다. 왼쪽 귀와 볼 조금? 잘 보면 긴 속눈썹 끝도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고.

아직도 내 침이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이 내 뜨거운 것을 잡기까지가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1초가 아주 길게 늘어져 마치 한 시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열이 오르는 입술은 자꾸만 말랐지만 하림이의 손을 물고 있는 입속은 사정이 달랐다. 그렇게 많이 침을 만들어놓고도 혀 아래에 침이 한껏 고였다. 귀 아래 침샘이 징징 울리도록 잔뜩 고인 침을 삼켜댔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뜨거운 내 입속에서 한참을 빨렸는데도 불구하고 차가운 하림이의 손이, 손끝이…….

“…….”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욕을 내뱉었을 것이다. 욕이면 다행이지, 사람의 말로도 되지 못할 소리를 뭉텅이로 토했을지도 모른다. 하림이의 손등을 붙잡고 그대로 성기를 감싸 쥐자 하림이의 힘없는 손가락이 따라왔다. 나보다 훨씬 작은 손이기 때문에 겹쳐 잡은 손을 움직이기는 수월했다.

힘을 줘 성기를 꽉 쥐었다. 내 성기와 손 사이에 서하림의 손이 끼어 있었다. 색이 짙은 성기가 하얀 손가락에 반응해 꿈틀거리며 힘줄이 돋아났다. 아, 진짜 좋아 뒤질 것 같다. 이대로 뒤져도 좋았다. 경찰과 소방관들이 내 알몸을 본다고 해도, 자위하다 죽은 장면을 본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다.

비비지도, 뭐 다른 걸 해볼 생각도 않고 그냥 그렇게 쥐게만 했는데도 나는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아 사정의 욕구를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소리 하나 내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입을 가린 손을 더 힘주어 눌렀다. 조금의 소리도 새게 하고 싶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신음과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손에서 힘을 조금 풀었다. 서하림의 손가락이 살짝 떨어졌다.

잠시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숨을 골랐다. 쿵쾅거리며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혈액순환을 시켜주는 심장이 마치 귀에서 뛰는 것처럼 생생했다. 달리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폐는 더 많은 숨을 원했다 가슴팍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빠르게 들이쉬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최대한 많이, 오래 할 수 있도록.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었다. 침이 다 새어나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림이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가볍게 내 것을 쥐고 있게끔 했지만 서하림의 손으로는 다 잡을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내 것에 비하면 작았지만 나름대로 맞춤 사이즈로 만든 서하림의 손을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내는 대신 숨소리를 냈다. 자꾸만 벌어지는 입에서는 침이 흘러 삼키기 바빴다. 내 스스로가 진짜로 발정 난 개새끼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내 것과 손에 비해 하림이의 손은 여전히 온도가 낮았다. 그래서, 그래서 더 서하림의 존재감이 크게 다가왔다. 얼음으로 좆 대가리를 문질러도 이토록 자극적이진 않을 것이다.

손가락 끝을 귀두에 짓이기듯 비비다가 사정을 참느라 움찔거리는 구멍에 가져가 보기도 했다. 하림이의 검지가 내 사정을 막고 있었다. 정액을 당장에라도 줄줄 흘릴 것처럼 굴면서도 요도 구멍이 막혀 있는 꼴이 존나 웃겼다.

하림이의 손을 자위 도구 삼아 흔들면서 나는 뇌가 하얗게 세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가까워졌다. 내 손은 점점 의지를 잃어가는 듯했고 뜨거운 성기로부터 열을 전해 받아 이제는 살짝 미지근해진 것 같은 하얀 손은 반대로 서서히 힘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서하림은 아닌 것처럼,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자위의 현장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으면서 이렇게나 나를 함락하고 정복한다. 빨리 사정을 하라며, 제 손을 내 정액으로 더럽혀 달라며. 씨발, 존나 서하림은 세상 다시없을 요부였다. 성에 대한 경험은 전무하면서 날 대하는 건 이렇게나 익숙했다. 마치 내 음탕한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또는 내 음침한 상상을 다 훔쳐본 것처럼.

시끄러운 TV 소리에 살 부딪히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내가 귀머거리였어도 장님이었어도 서하림 손 하나에 이렇게 침 질질 흘리며 좋아했을 테니까.

빨리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서하림이랑 섹스하다 복상사로 뒤지든 이렇게 하림이 손으로 딸치다 좋아 뒤지든 아니면 아빠한테 맞아 죽든 갑자기 길거리에서 차에 깔려 뒤져도 아쉬운 건 서하림을 더 이상 못 본다는 데 있었지 죽는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내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쁜 하림이를 두고 죽지 못해서 스스로 선택을 하기 싫은 거지 갑자기 내일 길 가다 죽어도 누굴 원망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거면 무조건 서하림보다 더 늦게 죽어야겠단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림이가 죽으면 시체를 훔쳐와 박제할 것이다. 신체에 더러운 모든 것을 씻어내고 예쁜 옷을 입혀 매일 끌어안고 살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손을 모아 자위도 하고 뒤에 박아 섹스도 하고 딱딱해진 젖꼭지를 빨아대고.

죽었지만 그래서 더 성스럽고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서하림은 그야말로 성서에 나오는 성자의 모습일 것이다. 온몸이 차가운 하림이의 시체를 껴안고 숨을 거둔다면 끝맺음까지 완벽하게 서하림으로 점철된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었다. 무조건 서하림보다 오래 살아야겠다. 서하림 죽는 순간도 옆에서 함께하고 싶다.

사방이 하얀 병원에 누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하림이가 보였다. 그런 하림이에겐 이것저것 붙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곳엔 나와 서하림 둘뿐이었다. 하림이는 죽음의 공포와 온몸을 감싸는 고통에 힘들어했다. 나는 그런 서하림의 가는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평온이 찾아오며 떨리던 하림이의 몸이 잠잠해졌다. 하림이와 눈이 마주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림이의 눈이 감기며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나는 사정을 했다. 하림이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정액이 엉겨 붙었다.

숨을 고르면서 조심스럽게 하림이의 뒤통수를 살폈지만 그 귀여운 뒤통수는 말이 없었다. 나는 정액으로 한껏 질척해진 서하림의 손을 깍지 끼듯 잡아도 보고 손등을 덮은 채 귀두로 문질러 손 구석구석 정액이 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사정 직후 귀두가 문질러지는 자극도 끝내줬다. 겨울이면 건조한 손이 싫다며 핸드크림을 바르는 그 말랑하고 부드러운 손을 다른 것도 아닌 더러운 내 정액으로 문지르고 있자니 진짜로, 정말 아드레날린이 펑펑 터져 나와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림이의 손을 내 좆에서 떼어내고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렸다. 하얀 손이 정액 때문에 유리 인형처럼 반질반질했다. 내 것은 먹어 본 적이 없는데 하림이의 손을 거쳤으니 정화라도 된 듯 보였다.

두 번째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아, 평소 맡던 그 비릿한 냄새가 이토록 옅어질 수가 있나. 고작 서하림 손 하나 탔다고?

고추가 존나 아파왔다. 좀 전에 사정해놓고도 힘이 빠지긴커녕, 씨발 이러다가 종일 정액만 싸지르다 내일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림아, 서하림…….

차마 부를 수 없는 고귀하고도 음란한 이름을 애타게 속으로만 불렀다. 내 침과 정액으로 마침내 더러워진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서하림이 더러워진 걸까 아니면 내 것이 깨끗해진 걸까. 이성은 후자를 원했지만 본능은 전자를 원했다.

더럽고 음침한 나 때문에 한껏 더럽혀졌으면. 창부같이 닳고 닳은 몸이면서 늘 성자의 얼굴을 하고 깨끗한 눈동자를 잃지 않았으면. 쾌락에 져 달큰한 눈물을 흘리고 욕망에 젖어 붉은 눈동자를 하고 그러면서도 뒤는 늘 처음처럼 조여대고 오직 날 위해서만 다리를 벌려 주었으면.

빨리 서하림이랑 섹스하고 싶다…….

그 예쁜 입술로 날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일인데…… 그러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숭고한 의식처럼 키스를 하고 빨아줄 텐데. 제대로 풀지 않고 박아대서 피도 보고 싶지만 처음은, 제일 첫 섹스는 한없이 다정하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해줄 것이다. 내 상상 속 하림이는 내 손길 한 번에도 질질 흘려대며 우는, 쾌락과 색욕을 아는 애지만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휴지를 앞에 대고 서하림의 손을 꽉 붙들어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었다. 정액 덕분인지 치덕거리는 소리가 TV 소리 속에서도 들려왔다. 그 소리를 더 크게 하려고 나는 무척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휴지를 적시며 정액이 터졌고 그럼에도 나는 사정으로 민감해진 성기를 계속해서 흔들어댔다.

“아, 윽…….”

소리를 참으려고 했으나 사정을 하고 나서도 하림이의 손으로 강한 자극을 받으니 끓는 듯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다물었다. 물밀 듯 계속해서 밀려드는 쾌감과 성적 흥분에 뇌가 타오르는 와중에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휴지를 더 가득 뽑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의 곽 티슈 한 통을 다 뽑아 귀두에 가져가기 무섭게 나는 정액도 소변도 아닌 이상한 물을 쏟아냈다.

허벅지와 온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려왔다. 보지 않아도 요도 구멍이 수도 없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입에서는 자음과 모음이 뭉개진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튀고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 자꾸만 신음을 흘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림이의 얼굴이 보였다. 예뻐, 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이상한 걸 싸는 중이라 정확하게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뇌수라도 싸지르는 것처럼 휴지가 젖으면 젖을수록 정신이 멀어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나온 뒤에도 나는 하림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하림이의 손에도…… 내가 싼 물이 묻어 축축했다. 이게 뭔진 모르겠으나 정액과는 다른 어쨌든 내 안에서 내 좆에서 나온 게 저 하얀 손을 적셨다는 게 존나 음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커다랗던 TV 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이게 마약을 하는 기분인가. 갈무리하는 거친 숨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하림이의 손은 어느덧 내 손처럼, 내 성기처럼…… 따뜻하고 뜨거웠다.

시끌벅적한 TV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니 사실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체감 시간이라는 건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반대로 아주 짧게도 느껴지니까.

정신을 차린 나는 제일 먼저 물티슈로 손을 닦고 TV를 껐다. 시계 초침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여전히 나는 몽롱한 기분을 만끽했다. 내 정액과 소변 같은 것 때문에 한껏 젖은 휴지들은 소파를 굴러다니고 있었고 서하림의 손을 더럽힌 내 성기는 제 할 몫을 다 했다는 듯 얌전했으나 또 서하림 얼굴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서하림은 2층 화장실로 올라간 듯했다. 어렴풋하게 계단 밟는 소릴 들은 것도 같다. 더러운 걸 손에 묻혔으니 깨끗이 닦아야 하겠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 예쁜 손에 못된 걸 묻혔다.

나도 아래를 씻어야 하기 때문에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욕실과 연결된 화장실 세면대에 물이 한 방울도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서하림은 위층 화장실로 간 게 맞았다. 1층 화장실 두고 굳이 2층으로 간 건 성적인 자극에 부끄러움이 많은 하림이를 생각하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아드레날린은 여전히 분비되고 있는지 샤워를 하면서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아프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서하림이 딸쳐 준 기억 하나면 일주일은 버티고도 남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면 일주일이 뭐야, 두세 달 치 딸감은 된다.

손에 샤워젤을 묻혀 거품을 내서 다리 사이를 닦다가 서하림 생각하고 또 발딱 설 뻔했는데 서하림 이모님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빨리 소파 정리를 해야 해서 간신히 참았다.

온갖 찐덕거리는 게 묻어 있는 소파를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닦아냈다. 아무래도 이 수건들은 버려야겠지. 서하림 정액이 묻은 거면 내가 가져가겠는데 그건 아니라. 입고 있던 손님용 잠옷도 버려야겠다.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 서하림 집에서 버리긴 좀 그래서 까만 비닐을 찾아 뒤처리를 한 수건과 잠옷 바지를 넣었다. 집에 가다 쓰레기통 발견하면 거기다 버려야지.

건조기에서 뽀송하게 마른 옷을 입고 환기까지 마친 다음 잠시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하림이의 손을 떠올리다 서하림 집에서 나왔다.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다가 관뒀다. 집에 아빠 새끼가 날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행복한데 지가 배고파 뒤지든 날뛰든 내가 알 반가? 밥하라고 지랄을 해도 오늘만큼은 아니 당분간은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자신이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좆으로 느낀 서하림 손을 생각하면 바로 옆에서 뭘 깨부셔도 천국일 것만 같았다.

“어딜 싸돌아다녀?”

현관문 열자마자 본 것은 맨날 아빠가 처신고 다니는 슬리퍼였다. 동시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발로 슬리퍼를 구석으로 밀어놓고 신발을 벗었다.

“공부하고 왔어.”

“밥이나 좀 차려봐라.”

“장 봐야 돼.”

“미리미리 안 봐두고 뭐 했어?”

“베이컨이랑 냉동야채 있는데 많이 배고프면 볶음밥 해주고. 아님 장 봐와? 한 시간은 기다려야 돼 그럼.”

“김치찌개라도 같이 끓여.”

나는 지금 존나 행복하기 때문에 내 행복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설탕을 존나 친 달콤한 김치찌개를 만들어 내놨다. 볶음밥은 굴 소스 넣어 대충 볶아줬다. 군말 없이 밥을 해줘서 그런가 오늘은 지랄도 없고 딱히 별말이 없다. 밥 먹고 술 마시러 나갈 테니 먼저 자고 어쩌고 하는 말이 다였다. 굳이 정신 차린 척 안 해도 판사님 앞에서 아빠가 개새끼에서 사람 된 것 같다고 얘길 했지만 뭔 바람인지 모르겠다.

책장 제일 위, 안쪽에 숨겨둔 파우치를 꺼내고 아빠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책장을 눕혔다. 밥을 그 큰 프라이팬 가득 볶아놨으니 반주 하며 먹기엔 좋을 것이다.

파우치 안에는 노트와 만년필이 있다. 이 노트와 만년필은 그냥 문방구에서 살 수 있는 건 아니고 노트는 맞춤 제작, 만년필은 몽블랑이다. 만년필 필기감에 제일 좋다는 종이를 꽤 두꺼운 것으로 선택해 내지를 만들고 표지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무광에 흰색으로 만들었다.

만년필은 케이스가 있으니 괜찮았지만 노트는 때가 탈까 봐 opp 봉투에 한 번 담고 뽁뽁이가 둘러진 안전봉투에 담은 다음 두툼한 솜이 든 파우치에 보관했다.

비싼 몽블랑 만년필은 작년에 샀다. 안 그래도 노트를 먼저 제작하고 언제쯤 만년필을 살지 타이밍만 보던 중에 어디였지 문체부였나 국토부였나 정부에서 하는 공모전에서 대상 받고 상금으로 30만 원의 문화상품권을 받았는데 그걸 인터넷에서 현금으로 바꾸고 그 외 자잘하게 모아둔 상금들이랑 설날 서하림 부모님이 고등학교 입학 축하한다고 준 용돈이랑 싹 다 합쳐서 큰맘 먹고 구매했다.

책상 위에 흰 천을 깔고 세정제로 손을 닦았다. 파우치에서 까만 봉투를 꺼내고 또 그 안에 투명 봉투를 벗겨 하얀 노트를 펼치고 만년필도 꺼내 노트 옆에 두었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내 심장은 빠르게 요동쳤다. 무광의 깨끗한 이 노트는 표지를 보기만 해도 함성을 지르고 싶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 표지를 넘기자 내가 수없이 적어 내려간 릴리가 보였다. 어느 날은 영어로 적기도 하고 언젠가는 성욕에 찌들어 흉폭한 글자로 써내려 간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페이지는 서하림이 너무 보고 싶어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쓴 덕분에 평소보다 글씨가 차분했다.

나는 갑자기 급격하게 분비되는 침을 삼켜대며 만년필을 들었다. 펜촉에 잉크를 담갔다 꺼내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고 수만 번, 수억 번은 써보았던 서하림의 또 다른 이름을 숭고하게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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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종이에 까만 잉크가 새겨지는 건, 매번 볼 때마다 질투가 났다. 이 흰 종이 위에 쓰여지는 건 서하림의 순결한 이름이었으므로. 나는 순결한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더러운 존재인데 반해 종이는 마치 서하림처럼 깨끗하고 하얀 것이라 그 순결한 이름을 마음껏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종이에 이름을 적어가듯 문신을 새기고 싶었던 적이 수십 번이지만 그랬다간 릴리의 이름이 더럽혀질 것을 잘 안다.

나는 서하림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하얀 종이를 마치 펜촉으로 탐하는 것처럼 그 애의 이름을 빈틈없이 적어나갔다. 하얀 공백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까만 잉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나는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너무 뛰어 아파왔으며 눈이 아려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 애를 부르짖었을까. 가면 갈수록 글자의 형태가 어그러져 본래의 단어를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손이 너무 아파 만년필을 잡기 힘들 정도로 바들바들 떨려왔다. 속옷은 축축했으며 발기한 성기가 느껴졌다. 이젠 더는 쌀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노트를 덮고 진정되길 기다렸다. 벌써 이번 노트도 거의 다 써간다. 자기 전에 미리 주문하고 자야겠다. 그 이름을 아무 종이 위에 적을 수는 없으니까.

뜨거웠던 속옷이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뒤에 노트와 만년필을 파우치에 담고 책장을 제자리에 세웠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을 싼 것인지, 기력이 다해 굉장히 피곤했다.

방을 나왔을 땐 아빠가 없었고 밥상에 그릇들만이 날 반겨주었다. 하여튼 설거지하란 말은 안 할 테니 물에만 좀 담가달란 것도 죽어도 안 한다. 주방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지는 줄 아는 노답 새끼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짐. 존나 귀찮은데 언제 싸냐.”

눅눅한 팬티를 빨고 있자니 문학 캠프에 팬티를 몇 개 챙겨가야 좋을지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는 갔다가 또 서하림이랑 대딸을 하든 섹스를 하든 몽정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아서. 아 제발 화장실이랑 가까운 방으로 배정됐으면.

캠프에서 쓴 소설은 내가 생각해도 좀 잘 쓴 것 같았고 꽤 만족스러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참여한 애들에게 미안한데, 솔직히 상 받을 것 같다. 대상까진 잘 하면 될 거 같고 못해도 금상이란 느낌이 딱 왔다.

그도 그럴 게 나온 주제가 <구원 · 탄 냄새 · 단 하나의 존재 · 접시 ·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로 시작하는 소설/시 쓰기>가 나와서 나는 다섯 개중에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스토리가 마구마구 떠올랐다. 글 하나에 저 다섯 주제가 다 들어가는 거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고른 주제는 마지막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로 시작하는 글쓰기였다. 처음엔 접시로 생각난 얘기를 쓰다가 바꿨다. 왜냐면 접시로 아빠 새끼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 문득 이거로 큰 상 받기 싫어서. 천 자는 쓴 것 같았는데 어차피 시간이 굉장히 널널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종이를 바꿨다.

그리고 2박 3일의 새벽엔 화장실을 부지런히 다녀왔다. 짐 싸면서 예상했던 대로 첫 번째 밤엔 서하림과 서로 고추 비비며 딸을 쳤고 두 번째 밤엔 서하림 묶어두고 뒤를 핥아댔다. 이틀 내내 서하림이 나와서 그런지 글 쓰는 내 손은 종이 위에 날아다녔다. 간혹 이렇게 스스로도 잘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 열에 여덟은 상이 따라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삘이 왔다.

캠프 끝나고 집에 왔을 땐 아빠한테 존나 맞았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갑자기 내가 사라져서 엄마한테도 연락을 했었는지 아빠가 날 찾았다는 엄마 문자를 받아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눈에 핏발까지 세우며 화낼 줄은 몰랐다.

‘백일장 참여하느라 문학 캠프 다녀왔다고.’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나도 많이 컸는지 아니면 맷집이 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빠가 약해지는 건지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은 발길질을 맞으며 든 생각은 도대체 밥이 뭐길래 이 인간이 밥 하나 못 먹었다고 이렇게 돌아버렸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밥해줄 사람이 없으면 사먹든가. 길가에 차이도록 많은 게 식당인데.

하지만 나는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사과만 열심히 뱉었다.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이제 하림이만 잘하고 오면 될 텐데. 거긴 예술의 세계가 아니라 숫자의 세계니 잘만 하면 중학생도 금상 받고 1학년도 마찬가지라 별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몸 안 좋은 애가 일주일 내내 이루어지는 캠프에서 갑자기 체하거나 어지러움을 느끼거나 하면 어쩌지 걱정이 들었다.

휴대폰을 사용하는 게 금지는 아닌 곳이기 때문에 연락을 할까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고민했지만 하지 않았다. 괜히 집중력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나 신경 썼다가 컨디션 망치면 안 되니까.

내가 자처한 일이지만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끙끙 앓았다. 연락을 너무 하고 싶어 구구절절 할 말을 다 쳤다가 혹은 간단히 잘 하고 있냐는 한 문장만 썼다가 지워 버리길 반복했다.

“삼겹살 사왔으니까 구워.”

과외 쌤이 숙제로 내준 문제집을 풀 의지가 사라져 존나 천천히 풀고 있는데 그 위로 아빠가 삼겹살이 든 봉지를 내려놨다. 미친 새끼가, 좁아터진 책상이어도 빈 곳이 있는데 굳이 사람이 쓰고 있는 곳 위에 처올릴 건 뭔지.

“아 시발.”

봉투를 들었더니 물기인지 기름긴지 때문에 문제집이 엉망이었다. 살인 충동이 든다면 이런 것일까 싶은 감정이 들었다.

“주방에서 굽는다.”

TV 채널을 돌리며 대충 어어 하고 대답하는 걸 보니 빨리 구워 가져오라는 듯했다.

나는 우선 신문지를 주방 바닥에 열심히 깔았다. 그리고 저 새끼가 안주로 튀김을 내놓으라고 지랄을 한 탓에 온갖 해산물 튀김을 하고 모아놓은 폐식용유를 가져왔다. 기름 색은 이미 까만색에 가까웠고 이미 전에 몇 번 치킨이니 튀김이니 할 때마다 써온 나름 오랜 전통이 있는 기름이었다.

깨끗한 식용유에 삼겹살을 구워도 맛이 존나 느끼할 걸 썩어빠진 폐식용유로 구우면 더 좆구릴 것이다. 취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망작의 요리를 한다는 것에 (있지는 않을) 요리의 신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우리 집 프라이팬은 약간 웍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깊다. 나나 아빠 새끼가 워낙 많이 먹어서 일반 프라이팬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따로 산 거다. 가스레인지 화력도 내가 손을 좀 봐서 일반 가정집보다 두 배 가까이 높고.

프라이팬에 존나 까만 폐식용유를 한껏 붓고 달궈지길 기다렸다. 이젠 반밖에 차지 않은 1.5리터 페트병을 보면서 이거 먹다 급사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조금 들었지만 저 덩치면 폐식용유 1.5리터 전부 원샷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기는 굽는 게 아니라 거의 튀기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열심히 구웠다. 그래도 아빠라고 접시에는 키친타올을 깔아주었다. 굽는 틈틈이 상추도 씻고 양파도 잘랐고 쌈장도 꺼냈고 냉동실에 넣어둔 밥도 해동했다. 국은 귀찮아서 걍 수돗물에 홍합이랑 청양고추 존나 때려놓고 끓였다. 간은 알아서 지가 맞추겠지. 세상에 이런 착한 아들이 어딨냐.

첫 번째 상을 차려주고 바로 다음 고기를 구웠다. 고기를 얼마나 사온 건지 구워도 구워도 끝이 없었다.

“너도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배 안 고파.”

예쁜 얼굴 못 본 탓에 입맛이 사라진 지 오래라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서하림이 바로 눈앞에 있었어도 이 고기는 한 입도 안 먹었을 것이다.

“밥 좀 더 떠와봐라.”

네네. 그래야죠. 밥을 꽉꽉 눌러 고봉밥을 만들어주고 남은 고기를 살폈다. 아까 들었을 때 한 2kg는 넘는 것 같았는데 그럼 네 근쯤인가? 존나 무슨 돼지를 잡았나.

느끼하긴 느끼한지 청양고추 존나 썰어 넣은 홍합탕을 매워하면서 잘도 먹었다. 그 와중에 소주는 또 안 빼먹고. 겨우 한 병만 먹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그래도 고기를 두껍게 썰어 와서 죽기 전엔 고기 굽기가 끝이 났다. 중간중간 밥을 왜 뜨기 힘들게 눌렀는지, 쌈무는 왜 없냐느니, 상추가 떨어지는 게 말이 되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댔지만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마지막 고기를 갖다 주고 주방을 정리했다. 깔아둔 신문지들이 기름에 다 젖었다. 존나 헛웃음이 나왔지만 주방 바닥이 삼겹살 기름 때문에 미끌거리는 것보단 낫다. 여러 장 깔아두길 잘했다.

삼겹살을 구운 까만 폐식용유는 식혀서 또 페트병에 넣었다. 삼겹살 기름에 치킨 기름에 새우 기름에 아주 온갖 것들이 모인 까만색은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페트병을 주방 베란다에 내려놓으며 깨달은 건데 돼지기름은 굳지 않나? 어차피 딴 기름이랑 섞여서 많이 굳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위에 기름 굳으면 음…… 뭐, 내가 먹는 거 아니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TV를 보며 껄껄 웃는 모습이 혐오스럽다. 하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알아서 산더미 같은 고기랑 밥이 차려졌지, 지는 그걸 처먹기만 했으니 웃다가 뒤져도 모자랄 정도로 좋을 거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씻어 먹었다. 바로 앞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펄펄 나도 식욕이 돌질 않는다. 사과, 바나나 이런 것들로 배가 차진 않았지만 안 먹으면 죽을 것 같아서 먹었다.

과일을 열심히 먹어서 그런가 의도치 않게 디톡스 다이어트를 하게 된 느낌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몸의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전혀 아니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종일 하는 일이라곤 숙제, 아빠 새끼 밥해주기……. 존나 그냥 침대에 누워서 시간만 죽이고 싶었지만 숙제는 해야 하니 책상에 엎어져서 문제를 풀긴 푸는데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지도 않고 하림이가 너무 보고 싶어 중간중간 하얀 노트 꺼내 빼곡히 그 이름 적기 일쑤고…….

잠도 잘 안 왔다. 꿈에서 서하림을 볼 수 있어서 좋긴 좋은데 그만큼 깼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잠에 들고 싶은 맘이 안 생겼다. 그래도 아예 안 자자니 하림이를 보고 싶으니까 꾸역꾸역 안 자고 숙제하다가 해가 뜨기 전에는 잠들었다. 몇 시간 낮잠처럼 자고 일어나서 아빠 새끼가 밥 달라고 하면 밥해주고, 숙제했다가 이름 썼다가 존나 무한 반복이었다.

서하림이 돌아오는 일요일 아침. 나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인정해야 했다. 서하림의 손으로 자위를 하고 그 기억의 조각과 함께라면 몇 달도 버틸 수 있다고? 그건 10년에 가까운 일상이 반복되던 지난날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서하림이 키스했던 그날, 우리의 일상은 끝이 났고 내게는 서하람이 없다면 말라 죽을 운명의 시작이었다.

더. 더, 더 강렬히 서하림이 고팠다. 가슴이 사무칠 만큼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맞아서 생긴 상처보다 가슴에 핀 아픔이 더 진할 것이다.

밤을 샜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몇 시간만 더 기다리면 서하림을 볼 수 있는데 내 맘을 모르는 시간이 느리게만 흘러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끝끝내 서하림을 위해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던 미련한 내가 불쌍해서. 눈을 감아도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서하림이 도착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 두 눈 뜨고 기다리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고 청했다.

하지만 분명 도착 예정 시간인 다섯 시에 알람을 맞춰두었음에도 나는 번번이 깨어나 다섯 시가 넘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마다 시간은 한 시간이 지나 있기도 했고 고작 10분이 지나 있기도, 3분 남짓한 시간이 흘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차라리 푹 자서 시간을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 반, 그랬다가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 반. 불안함에 잠을 자도 잔 것이 아니었다.

침대에 쳐 누워 뭐 하냐며, 밥이나 빨리 안 차리냐는 아빠 새끼만 아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혼자 뜨겁다 못해 녹아내릴 것 같은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시간을 죽일 수 있도록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무시하고 돌아누워 귀를 틀어막았다.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빠에게 멱살이 잡혔다. 시발, 책장 눕혀놓는 걸 깜빡했다.

이미 아빠에게선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아들내미 눈이 팅팅 부운 건 보이지도 않는지 아빠라는 새끼가 매정하게 멱살을 잡고 기운 없는 자식새낄 질질 끌어 주방에 던졌다. 나는 40시간쯤 공복 상태라 무기력했고 조금만 있으면 볼 수 있는 서하림을 당장 보지 못해 곧 죽을 사람의 행색이었다.

버리기 귀찮아 자리만 차지하는 고장 난 김치냉장고에 어깨를 세게 부딪쳤지만 참을 만했다. 어느 한 감정이 심해지면 다른 모든 감각은 둔해지는 모양이었다.

“뭐 하냐. 직접 주방으로 모셔와 줬는데.”

모셔오긴 무슨. 일어날 힘도 없어 그냥 주방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그게 꼴 보기 싫은지 바로 발길질이 이어졌다. 지금 이걸 내가 판사한테 고스란히 다 말하면 어떡하려고 이러시는 건지 싶었으나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기다렸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독한 새끼…….”

“아빠 새끼라서.”

“뭐?”

“아냐.”

발로 맞은 건 오랜만이라 몸이 약간 삐걱거리는 듯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싱크대를 잡고 섰다. 180이 넘는 등치 둘이 주방에 있으니 존나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놈의 밥, 밥, 밥. 진짜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해줄 테니까 가서 TV나 보고 앉아 계세요 좀.”

말본새가 그게 뭐냐고 바로 다음 공격이 들어올 줄 알았지만 자긴 그렇게 열심히 때려 땀범벅인 데 비해 나는 고개를 몇 번, 허리를 몇 번 돌린 게 고작이라 평소답지 않게 씩씩거리며 거실 소파에 앉는다. 그래도 쫄지 말고 계속 손이고 발이고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참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썰어 볶은 다음 베이컨을 잘라 넣었다. 그리고 캡사이신 소스를 다섯 바퀴 둘렀다. 원래는 빡칠 때마다 한두 바퀴만 둘렀었으니 이 정도면 엿먹으란 것이지만 내 의도가 그런 거니까 신나게 요리했다. 잠이라도 푹 잤으면 혹은 밥이라도 잘 먹었으면 평소처럼 두어 바퀴만 두르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나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존나 화가 났고 아빠 새끼랑 똑같이 손썼다간 둘이 같이 개판 되고 잘못했다간 아빠란 패를 잃게 되는 거라서. 고작 음식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치는 게 한심하고 유치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몇 숟갈 뜬 아빠는 밥상을 엎었고 김치볶음밥이 바닥을 어지럽혔다.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리는 것만 아니면 다 받아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만들었냐, 어?”

“그럼 먹으라고 만들지 뭐 하러 만들어.”

“이게 진짜 미쳤나, 드디어 돌았지?”

지금 보니 발음도 부정확한 게 그냥 취한 정도가 아니라 낮부터 술을 한 트럭 때려 붓고 온 듯했다. 그 와중에 옷 아래로 드러난 맨살은 피해 때리는 게 용하다고 해야 할지.

“너, 너잇, 이 새끼가 아빠를 뭐로 알고!”

제 화에 못 이긴 아빠는 내 얼굴과 머리통을 한 번에 쥐어 잡고 바닥에 찧어댔다. 머리는 잘못하면 골로 갈 수 있는 치명타인 부위인 데다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어 아빠가 화를 못 참을 때면 꼭 한 번씩 깨부수는 곳이기도 했다. 진짜 세게 쳤다간 살인 날 수 있어서인지 적당히 힘 조절해서 가벼운 뇌진탕 정도로 끝내는 경지에 이르셨지만. 아, 몇 번만 더 찧어댔다간 코피 터질 것 같다.

“병신으로? 아 죄송.”

참 이상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아빠나 나나 같은 모양이었다. 두터운 손에 입술이 반이 넘게 눌려 있었지만 내 웅얼거리는 소리를 아빠는 확실히 들은 듯했다. 내 말에 떨어진 손이 부들대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프라이팬으로 맞아 보는 건가, 하고 공격 태세를 취하려는데 내 얼굴에 닿은 건 단단한 것이 아닌 부드러운 쿠션이었다. 딱 하나 있는 1인용 소파에 올려져 있는, 아빠 새끼가 허리가 아프다며 어딘가에서 가져온 쿠션.

나는 이런 부드러운 물건이 사람의 숨을 손쉽게 압박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빠가 진심으로 날 죽일 생각인지 쿠션에 있는 대로 힘을 줘 벗어나기 힘들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산소가 모자랐고 힘이 빠져나갔다. 최대한 빨리,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산소를 찾아대는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했고 터질 것처럼 굴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죄다 열리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시발 이대로 죽는 건 존나 억울하다. 이대로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너가 아니라 서하림 품속에서 죽을 거야 씨발 새끼야…….

까만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숭고하고 예쁜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림은 메시지 창을 켜 열흘 전 봤던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도착하는 시간 맞춰서 마중 나갈게〉

[작년이랑 같지?〉

[그럼 5시에 역 앞에서 기다림〉

[다 맞아와!〉

〈응ㅇㅇ]

지금 시간은 5시 13분이었고 역 앞엔 조금 전 인사한 친구들도 전부 떠나 이젠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버스는 정확히 5시 4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5시에 도착이란 얘길 들으면 적어도 30분 전부터 때때론 한 시간 전부터 하림을 기다리던 동규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니 못 나왔나 보다, 하고 그냥 택시를 잡으려다가 10분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못 오면 그렇다고 연락을 했을 테니까.

하릴없이 동규의 메시지를 또 읽고 있던 중 15분이 됐다. 하림은 트렁크를 끌고 도로 쪽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역삼동으로 가주세요.”

택시에 올라타니 길었던 여름학교가 정말로 끝났다는 게 실감 났다. 작년에 비해서 더 성장한 괴물 같은 천재들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좀 피곤했다. 단 게 먹고 싶었다. 예를 들면 딸기 스무디나 망고 스무디 같은 거. 많이 단 건 싫으니까 시럽보다 생과일을 더 많이 넣은 걸로.

진짜 뭔 일 있나?

창밖으로 익숙한 동네가 들어차자 하림은 허벅지에 올려둔 검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찬찬히 두들겼다. 서울역에서 집까지 오는 30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게 좀 이상했다.

“저 죄송한데 여기 말고 주공아파트 후문으로 가주세요.”

“거의 다 왔는데 주공아파트로 간다는 거죠?”

“아뇨, 주공아파트 안에 말고 후문 쪽이요.”

“한 15분 더 걸려요.”

“감사합니다.”

여름학교 끝나고 버스 탈 때 부모님과 이모님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아빠는 집에서 볼 거고 엄마랑 이모님한테 하는 전화는 집에 도착해서 해도 늦지 않으니 잠깐 동규의 집에 들렀다 온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진 않을 것이다.

“뭐야.”

그러나 동규의 집에 도착해서 보니 집에 없는 건지 벨을 눌러도 안에선 기척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일곱 번째 전화를 걸어보며 벨을 연속으로 눌렀다. 이 정도면 집에 없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동규가 제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몰라 동규가 수십 번은 얘기해 준 비밀번호를 눌렀다. 도어락이 해제되며 경쾌한 소리가 났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문고리를 잡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본 것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문을 열었다. 현관문으로 들어오자 바로 보이는 거실엔 동규가 누워 있었다. 잔다기보다는 난장판인 걸 보아 아빠랑 무슨 일이 있었던 듯했다.

적막은 불안을 낳았다. 하림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동규에게 달려가 제일 먼저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숨은 쉬고 있다. 그렇다면 몸은? 동규의 입술은 터져 있었고 티셔츠를 들추자 멍이 보인다.

“야, 야 김동규. 야! 일어나 봐! 정신 들어? 야!”

심장이 멈추거나 숨을 쉬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심폐소생술을 할 필욘 없었지만 덜컥 겁이 났다. 동규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리며 소리치던 하림은 동규에게서 떨어져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 잠시만. 하…… 시발 이게 뭐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정신 차리자. 큰일이라도 허둥지둥하면 안 된다. 하림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함에서 조금 전 택시비를 결제한 것을 캡쳐했다. 그리고 동규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119에 전화를 했다.

구급차는 몇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고 하림은 난생처음 구급차에 올라타며 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혹시 몰라서 와봤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고 있기에 들어갔더니 쓰러져 있더라. 왜 쓰러져 있는지는 알 만했지만 동규가 전에 얘기해 둔 게 있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모른다고, 밥 먹으려다가 갑자기 쓰러진 게 아닐까요 하는 말로 넘겼다.

응급실에 도착해 의사에게도 똑같이 얘기했다. 응급의학과 배지를 단 의사는 하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간호사가 “어! 서도영 선생님 아들!” 하고 알아보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저도 잘…….”

“아빠한테는 연락했고?”

“아뇨. 이제 하려구요.”

“그래요.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서 정신없었겠다.”

“네. 저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무슨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지. 제일 가까운 병원이 하필이면 아빠네 병원일 게 뭐야.

아빠한테 먼저 전화를 할까 하다가 이모님의 번호를 눌렀다. 어차피 아빤 오늘 출근도 안 했다. 그리고 의사가 대충 봐도 이건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맞아서 기절한 거란 걸 알아챌 테니 아빠보다 더 자세하게 동규의 집안 사정을 아는 이모님이 와주는 게 훨씬 나았다.

이모님은 하림이 “이모님, 김동규가 아빠한테 맞은 거 같은데 좀 큰일이 났는데요. 지금 아빠 병원 응급실이에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고 나서도 이어지는 하림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어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끊었다.

동규의 휴대폰은 미리 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혹시라도 동규의 부모님에게 연락이 갈 수 있으니까.

의사가 119 대원에게 아무래도 맞은 게 분명하다며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림은 보호자를 불렀으니 제발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모님은 하림이 많이 난처해지기 전에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하림의 이모님을 아는 듯했다. 하림은 왜 저 사람들이 이모님을 알고 인사를 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이모님이 의사와 119 대원을 끌고 한쪽으로 가 뭐라 뭐라 얘기를 했다. 보호자도 없고 폭행의 흔적 때문에 잠시 멈춘 응급치료가 다시 시작됐다.

“뭐래요? 뭐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 하림이는 몰라도 됩니다.”

“아, 뭔데요?”

“이모님이 다 처리했어요. 경찰에 신고 안 할 거고 지금 정신 못 차리는 게 이상해서 MRI 찍어본대.”

“MRI?”

“그래. 아빠한테도 이모님이 얘기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집에 가 있을래?”

“아뇨. 잠시만 있다가요. 결과 보고.”

“그럼 배고플 텐데 근처에서 밥이라도 먹고 와.”

카페 가서 스무디나 먹고 올 생각으로 응급실을 나가려다가 좀 전에 동규를 봐준 간호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선생님. 저 뭐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제 친구요. 확실하게 그, 맞은…… 흔적 맞는 거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100%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죠.”

“네, 감사합니다.”

심각해진 낯빛을 한 하림은 병원 근처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에 들려 블루베리 스무디와 빵을 잔뜩 샀다. 이렇게까지 많이 살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보니 트레이에 종류별로 담은 뒤였다. 어떻게 줘야 할지 당황하는 직원에게는 그냥 한 번에 다 담아 달라고 했다.

트레이를 새로 바꾸고 하얀 유산지를 깔아 빈 테이블에 앉았다. 색이 예쁜 블루베리 스무디를 한 입 먹었다. 분명 생과일 함량이 70%라고 써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곤 너무 달았고 인공적인 블루베리 시럽 맛이 살짝 느껴졌다. 블루베리 맛 껌을 먹으면 나는 맛이었다. 요거트 맛도 나는 걸 보니 요거트 파우더를 넣은 듯했다. 요거트를 넣었으면 블루베리 요거트 스무디라고 써놔야지 왜 그냥 블루베리 스무디라고 써놨는지 모를 일이었다.

딸기를 새로 시켜볼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딸기 스무디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서.

몇 모금 마신 음료를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아니 왜 김동규 아빠는 오늘 같은 날…….

“아 미친, 엄마랑 아빠는 또 난리 나겠네.”

하림의 부모님은 이모님에게서 한 번 걸러진 동규의 이야기를 듣는다. 덕분에 그 두 사람은 동규를 굉장히 동정하고 있으며 하림의 똑똑한 친구지만 불쌍해서 자신들이 이따금 도와줘야 하는 친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동규가 나중에 더 커서 아빠를 신고하겠다고 했단 얘길 들었을 땐 필요하다면 법정에서 의사로서의 견해를 적극 주장해 주겠다고도 했다.

집게를 깜빡해서 트레이 옆에 꽂힌 것을 가져왔다. 베이커리의 로고가 박힌 커다란 쇼핑백을 뒤져 페스츄리 하나를 꺼냈다. 맛이 좋아 페스츄리 말고도 다른 빵 몇 개를 더 먹고 일어났다. 결국 스무디는 거의 다 녹은 채로 버려졌다.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하림이 처음 들은 얘기는 김동규가 수술을 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수술이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뇌출혈이 약하게 났고 그 후로 심정지가 한 번 온 것 같아 뭐가 심각해졌다더라. 혹시 하림이 네가 발견했을 때 동규 상태가 심각했어? 그래서 심폐소생술 해준 거니?”

“미쳤네.”

“뭐?”

“아니요. 제가 김동규 발견했을 땐 숨 잘 쉬고 있었어요. 저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묵직한 쇼핑백을 이모님의 품에 안겨주고 하림은 응급실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았다. 동규의 휴대폰 잠금을 풀고 아빠 새끼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하림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번호를 쳐 다시 전화를 했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 김동규 친구 서하림인데요. 전화 끊지 마세요. 신고할 거니까.”

-뭐라고?

“지금 김동규는 S병원 수술실이구요, 의사들이랑 119 대원들이 경찰에 신고한다는 거 겨우 막았어요. 김동규가 말하지 말래서 저도 입 닥치고 있던 건데 만약에 죽으면.”

동규의 말에 의하면 욕도 엄청나게 하고 소리도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이라 말이 통하질 않는다고 했는데 의외로 가만히 듣고만 있다. 하림은 죽는다는 말에 작게 숨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죽으면 아저씨 살인죄인 거 알고 계시고요, 저는 누가 이랬는지 다 얘기할 거예요. 근데 제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아저씨 폭력 전과 있어서 경찰들이 누가 가해잔지 바로 알아낼 수도 있겠네요.”

-너 이 새, 너 인마. 지금 어른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뇨. 사실을 말한 건데요. 아, 그러고 보니까 좀 전에 들은 건데요 김동규가 심정지가 한 번 왔었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제가 김동규 발견했을 땐 멀쩡했거든요.”

-…….

“의사 선생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심정지 왔던 흔적도 분명하고. 와, 설마. 아저씨, 아들 죽였다가 살린 거예요? 그리고는 도망간 거고?”

대답은 없었지만 전화를 끊지 않는 게 어떤 것보다 확실한 긍정이었다. 욕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할 줄 알았더니 조용함을 넘어 하림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한 침착함까지 느껴졌다. 그 고요한 침묵에 하림은 작게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으면 좀 나았을 텐데 정말로 자기 자식을 죽였다가 살린 사람을 부모라 부를 수 있는지, 지성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 맞는지, 제 자식도 때려죽이는 인간쓰레기를 잘못 자극했다간 저 역시 죽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지금…….”

목소리가 조금 떨려 하림은 목을 가다듬었다.

“……어디 계세요?”

-알아서 뭐 하게. 경찰이라도 보내려고?

“뭐래. 그걸 제가 왜 해요. 지금 해외에 있다고 해도 빨리 병원으로 날아오는 게 좋겠단 얘기하는 거예요.”

동규의 아버지인 김철호는 인천에 있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진짜로 숨이 끊어져 버려 급한 대로 CPR을 하긴 했지만 겁이 나 다시 숨 쉬는 것만 확인하고 그대로 도망친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바로 튈 생각에 항구를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수술 중에는 김동규가 깨어나길 빌어야 할 거고, 깨어난 뒤엔 김동규가 신고 안 하길 빌어야죠. 걔 앞에서 무릎이라고 꿇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자기 아들 살인 미수해놓고 생각보다 참 태평하시네.”

-야! 빌어? 빌어어? 이 미친 새끼가 개 같은 소릴 지껄여!

“여기 강남 S병원이에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좀 곱게 자라서 나이 먹을 만큼 먹어놓고 비속어 찍찍 쓰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해요. 로밍 안 된 거 보니 우리나란 거 같은데 빨리 오세요. 수술 시간은 몇 시간 된다니까 그만큼 기도할 시간은 충분하겠네요.”

사람 취급 안 한다는 단어 하나에 꽂혀 그거 가지고 온갖 꼬투리를 잡으며 욕을 해댔지만 하림은 전화를 끊지 않고 그저 멀리 벤치 끝에 휴대폰을 밀어 놨다. 한참을 그렇게 욕을 하던 전화가 ‘너 이 씨발 새끼, 병원 구석에서 딱 기다려!’를 끝으로 끊어졌다. 하림은 전화 녹음이 잘 됐는지 확인 후 로비로 돌아왔다. 가족도 아닌데 수술실에 있는 건 좀 그렇다는 이모님의 말에 따랐다. 딱히 이모님 말에 순종적이라 따른 건 아니었다. 수술 시간이 짧았다면 하림도 그 앞에서 기다렸을 테지만 몇 시간 걸린다고 해서 말았다.

살벌한 욕이 녹음된 전화 통화는 다시 들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규의 엄마는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다. 근데 김동규 아빠는 중3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딱 한 번 본 것도 동규를 때리던 것이었으니 사실 하림은 그렇게 아저씨를 패기 좋게 협박하는 내내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모른다.

하림은 이모님에게 경비원을 하나 급하게 구해달라고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아니면 응급실 입구에 있는 경호원에게 미리 말을 해두든가.

긴 수술이 끝나고 동규가 1인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그의 친부인 김철호는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모님이 부른 간병인이 도착했고 이모님도 이만 집에 간다며 나갔다. 하림은 막 도착해 병실을 간단히 살펴보는 간병인을 뒤로하고 가만히 서서 김동규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시계만 연신 보던 몇 시간이 우스워지고 김철호란 사람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단지.

“야, 빨리 일어나.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알겠어?”

곧 깨어날 거라는 간병인의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하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병실을 나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규가 깨어난 것은 1인실로 온 지 일주일 만이었다.

그동안 하림은 동규의 휴대폰으로 그의 아버지에게 하루에 한두 번 문자를 보냈다. ‘아직도 김동규 안 깨어났어요’ 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욕해놓고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겁을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럴 거면 당장 갈 테니까 병원에 붙어 있으라느니 이번엔 정말로 죽여 버리겠다느니 그런 말들은 왜 했나 싶었다.

하림은 녹음해 둔 전화 통화 내용을 쭉 들었다. 들어도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규가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하림은 바빴다. 동규가 빠진 과외를 하고 숙제를 하고 공부도, 친구랑 전화 통화도 하고 약속도 잡고.

하루 세 번 간병인에게 문자가 왔으므로 하림은 그 문자들을 꼬박꼬박 확인하는 것으로 문병을 대신했다.

문자가 아닌 전화가 걸려온 건 과외가 막 끝났을 때였다. 수술이 끝났을 때 이모님에게 동규 상태가 그렇게 마냥 좋진 않았다고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전화 받았지? 이모 출발]

이모님 문자를 확인하고 책상 위에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무소음이라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림은 휴대폰 케이스에 들어 있는 카드만 한참 보다 이모님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규 병실에서 전화 왔어 너 아직도 안 왔다고. 어디니?

“과외 끝나고 뭐 좀 더 풀 게 있어서요. 안 풀리던 문제여가지구요.”

-그래? 동규가 너 찾는대. 얼른 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은 하림은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

[아저씨. 김동규 깨어났어요.]

살인죄는 면했네요, 라고 하나 더 보내려다가 지웠다. 동규의 휴대폰으로 아저씨에게 보낸 문자들도 스크린샷을 찍어 자신에게 보내두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도 증거로 쓸 수 있을 테니 뭐든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림은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냥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고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학생. 도착했어요.”

“아저씨 저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할게요. 택시비는 충분히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주변 한 바퀴 좀 돌까요?”

“아뇨. 그럼 어…… 3만 원만 미리 결제할게요. 10분이나 15분 정도만 있을게요. 길어도 30분은 안 넘겨요.”

“그럼 3만 원은 너무 많지. 2만 원만 줘, 2만 원만.”

카드 결제를 마친 택시 기사는 담배 피우고 있을 테니 편하게 있으라며 택시에서 내렸다. 이모님이 먼저 가 있든 말든 하림은 선뜻 차 문을 열고 내릴 수가 없었다. 잠금장치만 괜히 풀었다 잠갔다만 반복하다가 문을 열고 나왔다.

“감사합니다.”

분명 일주일 전에 왔던 길인데 왜 이리도 낯설게만 느껴지는지. 하림은 동규가 있는 12층까지 가는 동안 간간이 저를 알아보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며 병실로 향했다.

“이모님은?”

그래도 일주일만이고 쓰러졌다 깨어난 건데 안부도 안 묻고 조금 그런가. 하림은 의자를 끌어와 쭈뼛거리며 앉았다. 동규는 네가 보고 싶었다는 말로 입을 뗐다.

“일주일 동안이나 널 못 봤다는 게 존나 아쉽고 아까워. 일주일 지난 거 사실 체감 안 되거든? 그냥 어제 아빠한테 맞고 바로 다음 날 일어난 것 같은데 일주일이 지났다고 하니까 갑자기 막 일주일 치 서러움이 밀려드는 거야. 아니, 일주일이면 168시간 10,080분 604,800초야.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그냥 일주일 아니잖아? 우리 그 전에 열흘이나 떨어져 있었어. 그러면 얼마냐. 열흘이니까 240시간…… 14,400분 864,000초니까 지금 우리 도합.”

“1,468,800초. 그래서 이모님 어디 계시냐고.”

“급한 일이 생겨서 서울이 아니래. 너무 바빠서 늦게 도착한다고 너한테 전해달래. 그리고 이모님한테 상황 설명 다 들었어. 정리 잘 해주셨더라. 방금 전에 의사도 왔다 가서 내 몸 상태도 들었고. 많이 늦으시면 그냥 내일 오라고 전화하는 게 좋겠지?”

“저기, 얘 어떻대요?”

하림은 제게 음료수를 건네는 간병인에게 물었다.

“수술이 잘돼서 다 괜찮은데 시신경에 손상이 좀 있다네요.”

“시신경이요?”

“네. 그리고 최소 한 달 반 정도는 입원해 있는 걸 추천했고요. 수술 경과는 좋은데 진짜 조심해야 한대요.”

“나 방학 때까지만 있을 거야.”

“방학? 너 지금 나 안 보여?”

“보여.”

“그냥 보이는 거 말고 잘 보이냐고.”

“잘 보여. 예쁜 얼굴.”

“하, 아니…… 야. 지금 예쁘고 말고가, 그게 지금…….”

“…….”

“그게 지금 중요하냐고.”

“울지 마.”

눈치 빠른 간병인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냥 좀 오래 자고 일어난 것 같아서 사실 일주일이나 시간이 더 흐른지도 못 느끼겠고 그냥 서하림 돌아오는 날 같다. 열흘 정도 못 본, 그 정도 그리운 딱 그만큼. 거기다 일주일 더한 만큼 아쉽다는 건 그냥 투정이다. 나 귀엽게 봐달라고.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

“미안해. 많이 놀랐지. 네가 나 데리고 왔다며.”

서하림은 휴지를 왕창 뽑아 눈가를 꾹 누른 채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울었다. 내가 죽는 줄 알고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나는 널 두고 쉽게 죽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서하림의 남은 한 손에 깍지를 꼈다. 내 쪽으로 순순히 딸려 오는 하얀 손이 참 곱다.

“그만 울어. 머리 좀 울리고 욱신욱신한 거 빼면 다른 덴 아픈 거 없어.”

“눈은.”

눈알이 터진 건 아니었지만 뇌가 어떻게 된 건지 왼쪽 눈 시야가 좀 이상했다. 빛이 사라진 것처럼 어두웠고 모든 형상이 흐릿했다. 오른쪽 눈도 전보다 정확도가 좀 떨어졌다.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밝아서 불편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왼쪽은 이제 돌이킬 수 없고 오른쪽은 시력 검사해서 안경 쓰면 괜찮을 거라 했다.

그리고 왼쪽 팔과 다리도 좀, 정상은 아니었다. 약간 저릿할 뿐 크게 불편한 건 아니라 의사도 좀 지켜보자고 했고 뭣보다 눈을 더 심각하게 봤다.

“솔직하게 말해?”

“그럼. 거짓말하려고. 다 잘 보인다고.”

“하림아 나 봐봐.”

내내 고갤 숙이고 있던 서하림은 내 말에 눈가에서 휴지를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예쁜 눈동자가 붉게 변해 보는 사람이 다 슬퍼졌다. 나는 침대에 달린 리모컨을 눌러 상체 쪽을 세웠다. 서하림이랑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어 좋았다. 더 잘 보이니까.

“거짓말 치기만 해봐. 똑바로 말해.”

“왼쪽은 좀 많이 안 보여. 누가 불 끈 것처럼? 다시 원래대로 못 돌아올 거래. 오른쪽은 시력이 좀 많이 낮아진 정도라 안경 쓰면 되고.”

“미친 새끼 진짜…….”

나는 팔을 내 쪽으로 더 끌어 하림이의 눈물을 핥아 마셨다. 이 아까운 걸 휴지가 흡수하게 둘 수는 없지. 자꾸만 흐르는 눈물들을 핥아 마시고 그러면서 눈가에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서하림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서하림을 달랬다.

한 번씩 눈동자에 혀가 닿으면 짜릿한 기분도 들었다. 아무도 만진 적 없는 은밀한 속살에 혀가 닿는 기분이었다. 가느다랗고 긴 속눈썹이 내 질척한 혀를 쓸어대는 것도 좋았고 여린 눈가의 피부가 눈물 때문에 촉촉해진 것도 좋았다.

정신 잃고 깨어나 볼 수 있는 게 서하림의 눈물이라면, 앞으로 열 번은 더 아빠한테 맞아도 괜찮다. 날 위해 눈물을 흘리다니…… 이보다 더 강렬한 사랑 고백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수줍음도 많고 간질거리는 표현을 부끄러워하는 서하림은 이렇게 말 대신 행동으로 내게 마음을 표현하고 사랑을 고한다.

어차피 형태도 없이 허공에서 공기나 울리다 사라질 음성보다 이렇게……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날 위해 울어주는 것이 훨씬 더 백배 천배 좋았다. 너무 좋아서, 마음이 아팠다.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간지럽고 울렁거리고 또 뜨겁기도 했다.

나는 죽음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 둘이 진정으로 이어졌음을 알았다. 사랑이 아니라면 하림이의 눈물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잠갔다. 서하림은 우두커니 서서 내가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주일간 링거만 맞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성욕은 어떻게든 몸속의 에너지를 끌어다 만드는 게 분명했다. 진짜 기운 없고 몸이 축축 처지는데 아랫도리는 발딱 서서 서하림만 외치고 있는 거 보면.

딩딩 울리는 머리 때문에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이마를 감쌌다. 얇은 환자복 덕분에 발기한 내 것을 눈치챘는지 서하림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사이엔 초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는 내 허벅지 위에 서하림을 앉혔다. 하림이는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아프면 누워서 더 쉬지, 하는 게 눈동자에서 읽혔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서하림은 내 어깨를 밀치며 일어났지만 나는 서하림의 허리를 잡고 강하게 끌어안아 다시 내 허벅지 위로 눌러앉게 했다. 일주일을 누워만 있었어도 원래 있던 힘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놔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하림이는 더 이상 반항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나는 하림이의 반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여름 느낌 물씬 나는 물먹은 하늘색의 셔츠는 서하림과 잘 어울렸다.

조금은 빡빡한 단추를 풀면 풀수록 그 안에 숨겨진 하얀 속살이 보였다. 당장에라도 그냥 뜯어버리고 하림이의 가슴팍을 핥고 싶었지만 침착하게 마지막 단추까지 기어코 풀어냈다. 앞이 훤히 풀어진 셔츠를 살짝 당겨 어깨 뒤로 넘어가게 했다. 예쁜 분홍색의 젖꼭지가 보기 좋았다.

“빨고 싶어.”

“…….”

“빨게 해줘, 네 젖꼭지.”

이미 내 손은 하림이의 것을 만지고 있었다. 엄지로 작고 귀여운 걸 힘을 줘 쓰다듬었더니 말랑한 젖꼭지가 뾰족해지는 것 같았다. 대답은 없었다. 항상 그랬듯 긍정을 대신하는 침묵이었다.

나는 젖꼭지를 꼬집어보았다. 하림이에게서 작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하림이의 품에 파고들어 여린 것을 입에 물었다. 어깨 위에 올려진 서늘한 하림이의 손이 어쩌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유두뿐만 아니라 유륜과 근처 살까지 모두 빨아들일 기세로 강하게 흡입했다.

“잠깐…….”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구의 것도 아닌 서하림의 젖꼭지를 빤다는 데에 흥분한 내가 침을 질질 흘려대느라 맨살을 빨아대고 있음에도 질척한 소리가 함께였다. 하림이의 품속에서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된 것처럼 나는 하림이의 것을 열심히 빨아댔다. 뭐가 나오지도 않을 테지만 꼭 뭐가 나올 것처럼.

뭐라도 좋으니 나왔으면 좋겠다. 하림이의 젖꼭지에서 나오는 것은 뭐가 됐든지 간에 달콤하고 맛있을 것이다. 아기들이 모유를 먹기 위해 엄마의 유두를 빠는 힘은 무척 강해서 모유 수유를 하는 엄마 중에서는 유두가 벗겨지거나 닳기도 한다는 걸 본 적 있다.

나도, 나도 그렇게 하림이의 것을 내가 빨아 닳게 만들면 하림이는 옷을 입으면서 쓰라린 젖꼭지를 붙들고 나를 떠올릴까? 떠올리겠지. 사람의 기억은 고통으로 각인하는 게 제일 확실하니까. 행복한 기억보다 고통의 기억이 더 오래가고 따뜻한 한마디보다 날카로운 매 한 대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얇은 허리를 더 끌어안으며 하림이의 젖꼭지가 뽑힐 정도로 빨아댔다. 그러면서 이를 세워 깨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동규, 아파, 아프다고…… 야, 씨, 그만, 아파…….”

정말 많이 아픈지 어깨를 밀쳐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빠부터가 90kg 체급에서 메달 따던 선수였고 나는 아빠보다 키도 덩치도 더 컸다. 힘으로 찍어 누르고 싶진 않은데, 일단 너무 급했다. 열흘에다 일주일이나 더 못 봤다니까.

“아, 김동규, 씨, 윽, 하으, 아파, 시발 진짜 아프다고!”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욕을 쓰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져서 입을 뗐다. 옅은 분홍색이던 젖꼭지는 피가 모여 붉은색이었고 크기도 좀 커져 있었다. 살짝 건드렸더니 아프단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한동안 아파서 옷도 제대로 못 입지 않을까. 존나 만족스러웠다. 나는 서하림의 다른 쪽 젖꼭지를 살살 만지며 내 성기를 잡았다.

“여긴 아프게 안 할게. 만지기만. 만지기만 할 거야.”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우고 꼬집듯이 눌렀다. 서하림의 목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 너무 그리웠던 서하림 냄새……. 이걸 장장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못 맡고 있었다는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말랑하던 것이 약간 딱딱해진 느낌이 들었다. 귀여워. 작은 게 지도 젖꼭지라고 흥분됐는지 발딱 서는 게 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런 젖꼭지를 손톱으로 꾹 누르며 가볍게 사정을 했다.

조루가 된 기분이었으나 나는 원래 서하림 생각만 해도 참지 못하고 토끼처럼 정액 질질 싸지르는 새끼였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왔지만 솜을 고르기보다는 서하림의 목을 헉헉대며 핥아대기 바빴다. 사정의 여운을 하얀 목덜미를 빠는 것으로 대신했다.

내 혀가 핥아대는 곳마다 점점 피부가 뜨거워져 갔다. 누가 차가운 서하림을 이토록 뜨겁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할 것이었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곳을 크게 깨물었다. 서하림이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야, 거, 거기는 흔적 남기면 안 돼.”

“응.”

힘을 주진 않고 그냥 깨물 것처럼 이만 살짝 올려놨다. 아…… 또 설 것 같아. 이대로 그냥 힘줘서 깨물고 싶다. 뜯어 먹어서 서하림 피를 보고 싶었다. 나 때문에 난 상처를 내가 또 핥아주면서 서하림의 피를 마시고 내 흔적도 남기고. 이빨을 치우지 않는 내가 꼭 깨물 것 같은지 어깨가 긴장한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하림이의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하림아.”

그리고 서하림의 남은 유두를 괴롭히던 손을 내려 하림이의 바지춤으로 옮겼다. 서하림도, 하림이도 발기한 상태였다. 속옷 안이 축축해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 나는 하림이의 옷 위로 하림이의 것을 움켜잡았다. 나도 모르게 힘이 좀 들어갔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아파했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를 가져왔다. 나는 내 성기를 꺼내 휴지로 대충 닦았다. 하림이의 바지를 벗겨야 해서 손도 닦았다. 조금 찝찝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 바지 안으로 들어가는 내 손을 다급하게 하림이가 잡아 왔다.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서하림의 싫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가볍게 서하림의 손을 쳐내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하림이의 것을 잡아 뺐다.

“아으…….”

크기만 하고 흉측하게 생긴 내 것과는 다르게 하림이의 것은 색도 예쁘고 생김새도 길쭉하니 곧았다. 하림이를 내 쪽으로 더 끌어당겨 내 것과 하림이의 것이 닿을 수 있게 했다. 핏줄이 선 내 성기는 하림이의 것과 닿자마자 사정할 것처럼 또 뭔가를 찔끔찔끔 내보내는 중이었다.

두 개의 성기를 함께 잡자 속이 울렁거렸다. 시발 이게 꿈이 아니란 거지. 내가 살다 살다 서하림 걸 쥐고 흔들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진작에 고백할걸. 처음 감정을 자각했을 때부터 입을 들이밀고 고백했어야 했다. 그러면 깨어나서 이렇게 고추나 비비고 있을 게 아니라 침대에 서하림 엎어두고 섹스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손등에 붙어 있는 거추장스러운 링거를 뺐다. 바늘을 따라 피가 떨어졌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조금 이따 다시 해달라고 하면 되고, 내 위에서 할딱거리는 서하림이 더 중요했다.

피가 줄줄 새는 손으로 하림이의 음모를 잡아 손가락에 둘둘 담았다. 나와는 정반대로 무척 얇고 무성하지 않아 마치 비단 실 느낌이었다. 손에 감은 걸 뽑을 것처럼 당겼더니 또 앓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아, 네 거…… 예쁘게 생겼다.”

자위도 안 해봤을 애니까 이렇게 다른 사람 손 타는 것도 처음이겠지. 어쩔 줄 몰라 엉덩이만 들썩이는 게 나를 더 자극시키는지도 모를 테고. 차라리 아랫도리를 다 벗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말았다. 그러느라 시간 허비하기 싫었다.

“너무 예뻐…… 꼭 너처럼 생겼어. 아 시발 존나 좋아서, 존나…… 죽을 것 같아……. 넌 어떻게 여기도 이렇게 생겼어?”

“하, 하지 마.”

나는 다시 내가 붉게 만든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하림이가 아프다며 버둥댔지만 이번엔 조심스럽게 혀만 이용해서 핥아줬다. 그래도 이미 피멍울이 져 아프고 예민해진 것을 아무리 부드럽게 건든다고 해도 아픈 건 아픈 거라, 하림이의 것이 살짝 힘을 잃었다. 나는 손을 동그랗게 말아 하림이의 것을 위아래로 쭉쭉 흔들었다. 마치 안에 있는 뭔가를 짜낼 것처럼.

성기를 직접적으로 애무하는 감각에 아픔도 쾌락이 된 것인지 하림이는 어깨만 잡고 있던 손을 떼 내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참겠다며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자꾸만 터져 나오는 신음이 듣기 좋았다. 나는 발정 나서 욕이나 하고 헉헉거리는 게 고작인데 하림이는 신음도 예뻤고 존나 꼴렸다. 정말 어디서 이런 애가 태어난 거지? 서하림 아빠도 잘생겼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하림이는 외모는 아빠를 닮고 성격은 엄마를 닮았는데…….

내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이 순간 힘이 세게 들어간다 싶더니 하림이가 사정을 했다. 내 손바닥에 묻은 하림이의 정액을 성수라도 되는 것처럼 핥아먹으며 나도 사정했다. 분명히 내 것과 다른 게 없을 정액인데 하림이의 것은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배고픔을 느꼈다. 사정 직후라 민감해져 있을 서하림의 것을 다시 잡아 흔들면서 나는 서하림이 또 사정하길 바랐다.

“빨리 또 싸.”

“손, 손 치워.”

“얼른. 네 거 먹고 싶어. 빨리…….”

“아으, 야, 손, 잠시, 손, 손 치우라고! 하윽, 씨, 아, 진짜, 야…….”

바로 자극을 해줘서 그런지 하림이의 것이 다시 발기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며 하림이의 예쁜 성기를 눈에 담았다. 요도가 움찔거리는 것이 잘은 아니지만 보였고 모양이 잘 잡힌 예쁜 귀두가 움찔거리는 것도 보였다. 그 옆에 못생긴 내 것이 하림이의 기둥에 대고 비비고 있었다.

아…… 하림이랑 이렇게 매일 고추나 비비며 살고 싶다. 아랫도리 딱 붙인 채 이렇게 비비고 있으면 밥도 안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굳이 발기한 상태가 아니어도 괜찮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상태면 그것도 그것대로 말랑하니 좋을 것이다. 하림이의 가장 은밀한 곳과 내 것을 비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올, 나, 나올 것 같은데…….”

“빨리 싸. 싸줘.”

뜨거운 숨을 겨우겨우 내뱉으면서 하림이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하림이가 기특해 빨간 젖꼭지에 뽀뽀를 하고 하림이와 입을 맞췄다. 침 때문에 가볍게 뽀뽀만 해도 찐득한 소리가 났다.

“읏…….”

어떡하냐, 얘 진짜 한동안 옷 입을 때 고생 좀 할 것 같다. 그럼 젖꼭지에 밴드 붙이고 다니려나? 그건 그거대로 상상하고 있으려니 좆이 터질 것 같다. 붙일 때도 땔 때도 아프다며 신음을 흘려대겠지. 그러면 내 욕을 하면서도 내 손에 흥분하던 저 자신도 떠오를 테고. 시발 먼저 다리 벌리고 찾아오는 거 아냐? 그러면 서하림 뒤를 열심히 빨고 싶은 만큼 한참 빨다가 삽입할 것이다.

침에 젖은 손으로 성기를 치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해질수록 우리의 것은 점점 힘을 받아 단단해졌다. 나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하림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사정해 봐, 얼른 사정해, 참지 마.

“김동규, 하윽, 아, 싸도, 먹지 마 더럽게……. 휴지 내놔.”

하림이가 안고 있던 내 머리를 놓고 휴지로 팔을 뻗었지만 내가 먼저 집어 멀리 던졌다.

“하나도 안 더러워. 깨끗해. 나는, 나는…… 네가 내 입안에 소변을 싼다 해도 기쁘게 마실 거야.”

“뭐……라고?”

“아, 하림아…….”

먼저 사정을 한 건 나였다. 하림이의 하얀 배에 내 정액이 한가득 뿌려졌다. 아래로 흐르는 정액은 하림이의 배꼽에 고이기도 했고 음모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피멍이 든 것만 같은 유두에도 정액이 묻어나는 그게 하림이에게서 나오는 젖이라도 되는 양 또 핥고 빨아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아프다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환상적이었다.

손을 뻗어 예쁘게 쏙 들어간 배꼽을 눌렀다. 정액 덕분에 안쪽까지 미끌미끌했다. 좁은 곳으로 손가락 끝을 넣어 희롱하고 있자니 다른 구멍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나는 하림이의 배꼽을 마치 뒤에 있을 그곳이라도 되는 양 꾹꾹 누르기도 하고 아프지는 않을 만큼 손가락을 넣어 쑤시기도 했다. 아픈 건지, 좋은 건지 하림이의 입에서는 연신 듣기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집요한 내 손에 하림이가 사정을 했다. 하림이의 허벅지가 달달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내 팔뚝을 잡은 팔도, 역시 잘게 떨고 있었다. 나는 내 손에 뿌려진 하림이의 정액을 허겁지겁 핥아 삼켰다. 더 이상 핥을 게 없어도 손 사이사이를 핥고 또 핥았다.

그래도 아쉬워서 아직 떨고 있는 하림이의 성기를 쥐고 손으로 훑었다. 한 방울이라도 더 내 손에 묻으라고. 아니면 정말로 오줌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하림이의 것이라면 먹지 못 할 게 없는데.

뿌리 쪽부터 짜내듯 쭉 올리자 요도를 따라 남아 있던 소량의 정액이 흘러나왔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까 나는 두 손으로 모았다. 아…… 차라리 이러는 것보다 아래를 빨겠다고 하면…….

“비켜.”

하림이는 내 허벅지에서 내려와 아예 바지와 속옷을 벗었다. 내가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다 손으로 받아낸 덕분에 하림이의 속옷이나 바지는 깨끗했다.

매끈하고 길쭉한 하얀 다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팔에 바지와 속옷을 걸치고, 아까 전 내가 던져 놓은 휴지를 줍는다. 서하림이 휴지를 줍기 위해 허릴 숙이자 작고 하얀 엉덩이가 내 쪽에 정면으로 드러났다. 또 날 꼴리게 하려고, 유혹을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닐까. 나는 다리 사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하림이의 정액 냄새가 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머릿속 어딘가를 녹이는 것만 같다. 당장에라도 하림이에게 다가가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려 쑤셔 넣고만 싶다. 손 틈새로 거친 숨소리가 빠져나가 하림이에게 분명 닿았을 텐데, 제 하얀 다리를 보며 발정한 내가 시선으로 다리와 엉덩이를 추잡하게 핥아먹고 있다는 게 뻔히 느껴질 텐데도 서하림은 휴지를 한 장씩 느릿느릿 뽑았다. 내 시선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뒤돌아 내 쪽으로 다가온 하림이의 셔츠 아래엔 서하림의 예쁜 것이 반쯤 가려져 걸을 때마다 수줍게 달랑거렸다. 하림이가 휴지를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는 동안 나는 손바닥이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것처럼 하림이의 정액 냄새를 흡입하고 또 흡입하며 하림이의 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병실 안에 딸린 화장실로 향하는 하림이의 걸음걸이가 이따금 휘청거렸다.

오늘은 손 씻지 말아야겠다. 잘 때 서하림 정액 냄새 나는 손바닥에 코 묻고 잘 거다. 그러다 또 서면 어떡하지 좀 걱정됐지만 서면 그 김에 또 딸 치는 거지 뭐.

한참을 물소리를 내던 서하림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내 위에서 신음을 흘리던 것과는 반대로 아주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래, 저 단정한 애가 내 손이 닿으면 풀어지는 게 좋은 거였지. 하림이는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다 병실을 나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심장이 아파왔다.

간병인이 들어오기 전에 나도 아랫도리를 정리하기 위해 일어나 창문부터 열었다. 혹시 하림이도 한 번 더 빼진 않았나 싶어 코를 킁킁거렸지만 화장실에선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두 번이나 쌌는데 내 똘똘이는 아직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손바닥에 남은 서하림의 향기를 맡으며 한 번 더 자위했다. 정리를 하고 나서야 현기증도 피곤함도 식은땀과 아픔도 몰려왔다. 초록색의 너스콜을 눌러 링거를 다시 맞자마자 손바닥으로 코를 덮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콧구멍이 다섯 개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웃긴 생각을 하면서.

서하림 부모님은 종종 만난다. 두 분 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지만 아저씨보단 아줌마가 몇 배는 더 바쁘고, 그런 바쁜 아줌마가 한 번씩 시간을 내면 얼굴을 봤다.

특히 시험 기간. 시험 기간 시즌 되면 내가 거의 매일 서하림 집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서하림 부모님을 자주 만나곤 하는 것이다. 아저씨는 공부 방해하는 거 같다고 2층에 잘 올라오지 않는데 아줌마는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하다고 바쁜 와중에도 집에 있을 때면 꼭 인사를 하러 왔다.

아저씨는 얼굴 하난 반반했지만 성격은 좀 소심한 것 같았고 배포나 야망도 적어 보였다. 워낙 만난 적이 없어 서하림이나 이모님에게 들은 걸로 추측한 거다. 서하림이 했던 말에 따르면 아저씨는 꿈이 서하림네 외할아버지 돈으로 개인 병원 차려서 자기는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고 다른 의사들에게 월급 주면서 여행이나 다니는 거라고 했다. 원래도 의대가 아니라 경영이나 세무 뭐 이런 쪽 전공해서 병원 재단에서 월급쟁이로 살고 싶었다던데.

그에 비해 서하림 아줌마는 TV에도 자주 출연하고 각종 의학 다큐멘터리에도 많이 참여하고 강의도 해, 책도 써, 해외도 수시로 나가는 분이다. 가끔은 직접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래서 이런 못난 모습들을 보여야 한다는 게 너무 쪽팔렸다. 서하림네 아줌마가 내 소식을 듣고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오는 중이란 얘길 들었을 땐 진짜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그냥 집에서 쉬셔도 되는데 왜 오신, 아니, 와주시는 게 감사하긴 한데요. 이젠 몸도 괜찮고…….”

딱 3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빠한테 얻어맞고 병원 실려 왔던 게. 서하림도 이모님도 선생님도 그리고 하림이 부모님까지 내가 어떤 새끼랑 같이 살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된 날이었다. 서하림 아빠는 멍을 잔뜩 단 내게 뭐라고 말도 잘 못 건넸지만 아줌마는 달랐다. 내게 몇 번이나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인지 물어봤고 내 대답이 바뀌지 않자 증거 사진을 어떻게 남기는 게 좋은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모님을 통해 내게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금액은 꽤 컸고,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전화를 할 때면 꼭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란 말을 해주었다.

원래도 의사라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필요한 직업과 아주 잘 맞는 분이니 참 감사하긴 한데…… 내가 서하림과 친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 같아 그게 좀 불편했다. 아들 친구니까 더 불쌍하고 더 동정심이 드는 거겠지. 가끔은 아저씨처럼 그냥 대놓고 불쌍하다며 동정 어린 눈빛만 보내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때도 있었다.

“걱정되니까 오는 거지. 몸도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도 그게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부담을 도대체 어떻게 안 가질 수가 있는데요.

하지도 못 할 말을 삼키며 “네” 하고 말았다. 이모님이 뭐라고 더 얘기할 것 같아 나는 보조 책상을 올리고 문제집을 펼쳤다. 수술을 하긴 했는지 오래 집중을 하고 있으면 좀 머리가 아팠지만 머리 좋은 서하림을 따라가려면 마냥 의사 말 따라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딱 이번 달만 병원에 있고 퇴원할 거다. 하루 쉬면 일주일을 고생하고 일주일을 쉬면 한 달을 고생해야 한다. 서하림이랑 같은 학교 가려면 하루 24시간을 50시간으로 써도 모자랐고 심지어 거기다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데 어떻게 그냥 누워서 쉬고만 있나.

내일이면 벌써 2학기가 개학한 지 일주일이다. 하림이는 며칠 전에 교내 영단어 어휘력 경시대회를 나갔다는데 나는 병원에 누워만 있고, 진짜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학교 수업을 못 듣는 것도 아까웠지만 귀중한 방학을 고작 몇 대 맞은 거로 정신을 잃은 채 일주일씩이나 날려 먹었다는 게 제일 어이가 없었다.

때린 아빠 새끼도 용서할 수 없지만 맞았다고, 머리 좀 터졌다고 깨어나지 못한 나도 한심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질 못하는 나 스스로가 짜증 났고 한심함을 넘어 혐오스러웠다. 공부라도, 그나마 이거라도 잘해야 서하림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데 뭐 얼마나 맞았다고 못 일어나고 쳐 누워 있었던 건지.

그렇게 처자빠져 누워 있었을 거면 꿈이라도 문제 푸는 걸 꾸든가 들었던 강의를 다시 복기하며 기억이라도 끄집어내든가 했었어야지 이 멍청한 머리 새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마치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의사는 나보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며 잠을 줄였다. 개학하고도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도 무서웠고 내가 겨우 한 발짝씩 떼는 동안 뛰어가는 서하림과 학교 애들이 두려웠다. 어차피 길게 살 생각도 없다. 백 세 인생에 반만 살아도 상관없었다. 죽는 곳이 서하림 품이기만 하면 됐다.

깨어나고 보니 눈이 나빠져 잘 보이지도 않는 것도 짜증 났다. 왼손, 다리도 존나 저렸다. 씨발 진짜 뭐 하나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왼쪽 눈은 이미 병신 됐고 오른쪽 눈도 좀 찌푸려야 문제가 또렷하게 보였다. 시력은 또 어디서 검사를 할 것이며 안경값은…… 아 씨발, 나 진짜 왜 태어났냐.

속을 태우는 화가 도저히 가라앉지가 않아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존나 빡쳐서 샤프를 던지듯 내려놨다. 간병인과 이모님이 내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을 삭이려는데,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울화가 치밀었다.

근데도 더 좆같은 건, 존나 화가 나서 죽을 것 같고 내가 한심해서 뒤질 것 같은데 샤프를 들고 좆같은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이래야만 계속 하림이랑 같이 지낼 수 있으니까. 저린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같잖았다. 교통사고 나서 온몸의 뼈가 다 부러졌어도 목숨만 붙어 있음 상관없는 게 아니지 않나.

몇 번을 샤프를 던졌다가 끝끝내 다시 쥐고 문제를 풀다가, 또 화가 치밀어 문제 풀기를 말다가를 병신처럼 반복했다.

“아 시발…….”

화를 참지 못해 눈물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코피도 터졌다. 간병인과 이모님이 휴지를 쥐여주며 코를 막으려는데 타이밍이 좆같게도 서하림네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줌마는 바로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의사를 불렀다. 숨을 아무리 열심히 쉬어도 가슴이 답답했다. 하 시발 어지러워. 흐려지는 시야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 것 같은데 작은 소리라 알아들었을진 모르겠다.

가슴께를 주먹으로 치는 나를 눕힌 아줌마가 내게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나는 그냥 바보처럼 고개나 끄덕였다. 고작 코피 하나 터졌다고 이렇게 난리를 필 일인가?

그냥 좀 자고 싶다. 쉬고 싶어. 시끄러운 것도 싫다. 서하림 품에 안겨, 그 애의 향에 취해 자면 아주 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졸려요.”

“동규야, 정신 잃으면 안 돼. 눈 떠!”

뺨이 따끔거리는 걸 보니 누가 내 뺨을 때린 모양이었지만 잠이 쏟아져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 요즘 좀 무리하긴 했지. 아 요즘이 아니구나…… 깨어난 날 하림이랑 그렇고…… 그런 짓 하고 나서도…… 인터넷 강의를…… 켜서…… 간병인에게 부탁해서…… 공책을…… 샤프심도…….

나는 푹 자고 일어나 무척 개운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는데, 눈을 뜨고 본 것은 안락한 1인실과는 현저히 달랐다. 우선 얼굴에 달린 건 산소호흡기 같다. 그 덕분인지 나는 숨 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 외에도 머리에 뭐가 많이 붙어 있어 단순히 잠에 든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간호사를 불렀다.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대답하고 간단한 검사까지 마친 뒤 전에 쓰던 1인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던 의사에게 혼이 크게 났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네네 하고 맘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다만 잠은 좀 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왔었다고요?”

“네. 이틀 전에요.”

의사가 내 문제집을 전부 다 가져가 버렸다. 찢으려다가 환자를 존중해 그냥 가져가는 거란 말도 함께. 심심해서 인터넷 기사나 읽고 있던 내게 간병인이 엄마가 왔었다고 말해주었다.

〈나 1인실 왔어]

〈이번에도 울었어?]

하림이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받진 않고 세 번 더 걸자 전화를 받았다.

-아들.

“응.”

엄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엄마. 나 괜찮아. 엄마가 미안할 거 하나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어. 서하림네 부모님이 병원비 다 해결해 주신다고 했고 이모님이 좋은 간병인도 붙여주셨어. 그리고 엄마 엊그제 왔었다며. 왜 왔어? 안 그래도 이민 준비로 바쁘신 분이.”

-동규야.

“아 이번 일로 나도 이제 좀 몸 사려야겠다고 느꼈어. 솔직히 엄마한테만 말하는 건데 아빠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야. 내가 힘줘서 밀면 그냥 밀리던데.”

-…….

“지금까지 맞고만 있었던 건, 사실 다른 이유가 있어. 별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있는데 엄마는 알 필요 없고. 아빠 새끼가 무서워서 맞고만 있던 게 아니란 거야.”

-내가, 아휴…….

“엄마. 두 달만 딱 눈 감고 귀 막고 지내. 어? 그리고 아빠랑 곱게 잘 이혼하고 베트남 가. 이제 아빠한테 안 처맞고 살 테니까 걱정 말고. 그리고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닌데 여기 서하림 아빠가 있는 곳이라서 다들 나댄 거야. 내가 서하림 친구니까. 봐봐. 눈 뜨니까 바로 일반 병실 온 거. 심각했으면 깼어도 계속 중환자실에 있었을걸?”

“저, 동규 학생. 아빠가 오셨어요.”

“네? 아 잠만. 엄마 나중에 다시 전화해.”

서하림이 혹시 아빠가 올 수도 있다면서 그땐 절대 혼자 만나지 말고 이모님이랑 같이 만나라고 했다. 그래서 만약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이라도 절대 병실 알려주지 말고 서하림 이모님과 간병인에게 먼저 연락을 달라고 얘기해 뒀다. 간병인에게 연락이 온 걸 보니 이모님 쪽으로도 갔을 거다.

Rrrrr-

역시. 액정에 뜬 이름은 이모님이다.

“네, 안녕하세요 이모님.”

-알겠지만 지금 네 아빠 온 거 같은데 한 30분만 기다리렴. 데스크에도 말해뒀으니까 병실로 쳐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네. 저, 이모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혹시라도 아빠한테 먼저 얘기는 안 꺼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뭔 얘긴지 알겠다. 이따 보자.

30분보다 좀 더 지난 시간이 흐른 뒤 이모님은 경호원 두 명을 뒤에 붙이고 나타났다. 이모님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경호원 한 명에게 손짓했다. 잠시 뒤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건가. 좀 말랐다. 밥을 존나 못 처먹고 다녔나 보다.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뭐야.”

문을 막 열었을 때만 해도 뚱한 표정이더니 이모님을 발견하자마자 억울한 얼굴에 과장된 몸짓을 하며 아빠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이모님께 먼저 얘길 시작하지 말라고 한 부탁이 무색했다.

“제가 배운 게 운동밖에 없어 자식새끼 가르치는 것도 이런 거친 방식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이모님은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아빠에게 할 말을 잃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도 뭔 일인지 싶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모님을 서하림 엄마로 안 듯싶었다.

“직장도! 네, 그동안 제가 안 온 건 일을 구하느라 그랬습니다. 병원비를 벌어야죠. 이런 좋은 곳에 입원한지도 모르고…… 하하, 열심히 일해야겠습니다. 자식새끼 요즘은 대학만 보내 놓는다고 능사가 아니고 졸업까지 시켜야 하니까요.”

“병원비는 제가 부담할 테니 신경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의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암. 그렇고말고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동규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맘 같으면 당장 경찰.”

“아닙니다! 앞으로 그런 일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저같이 몸 쓰는 아빠 밑에서 똑똑한 머리 가진 애가 태어나서 저도 사실 많이 자랑스럽고 기특합니다. 애 엄마 몫까지 잘 키울 테니까 앞으로 잘 지켜봐 주시고 우리 동규도 예쁘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닥에 이마 찧겠다. 이모님은 당황은 좀 한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시 한번 더 손찌검하면 선처 없단 말에 아빠는 두 손을 싹싹 빌어 가며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며 비굴하게 굴었다. 나한테는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었고 딱 봐도 길가에서 사온 것 같은 과일바구니를 안겨주며 먹으라는 게 전부였다.

이모님은 뭐 저런 인간 말종이 다 있냐고 치를 떨었지만 나는 원래 저런 사람이라며, 이모님께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어린 게 참 고생이다, 너도.”

“아니에요. 아 근데 이모님. 저…….”

“뭐 부탁할 거 있니? 얘기해. 하림이네서 뭐든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적선이겠지.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끄고 싶었다.

“네. 진짜 죄송한데요. 혹시 저 병원에서 과외……해 주실 선생님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과외? 안 돼.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거 못 들었어?”

“하지만 이모님도 아시잖아요. 여기서 그냥 누워서 두 달 쌩으로 날려요? 서하림은 그 좋은 선생님이랑 공부하고 학교 애들도 경시대회다 동아리 활동이다 열심히 참여하면서 생기부 열심히 채워 가는데요?”

“그래도 안 돼.”

“아 이모님, 진짜 다른 부탁은 하나도 안 들어주셔도 되는데 공부만 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모님은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급해졌다.

“그러면요! 그럼요 이모님,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면 되는 거죠.”

“음…… 그렇다면 뭐. 하지만 일단 오늘은 푹 쉬어. 얘길 하더라도 내일 해.”

이모님 말에 나는 조신하게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그런 나를 보며 이모님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번 주는 잘 쉬고 다음 주에 보자며 이모님은 병실을 나갔다.

나는 이모님이 나가고 딱 100까지 숫자를 센 다음에 너스콜을 눌렀다. 쉴 시간이 어딨어. 당장 2주 뒤면 9월 모의고사다.

곧바로 의사가 들어왔고 우리는 의견이 맞지 않아 한참이나 얘길 나눠야 했다. 의사는 절대 안정을 외치며 공부도 살아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전국 자사고 순위 10위 안에 드는 학교에서 어떻게 전교 등수를 사수했는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평범한 학생의 수험 스토리를 얘기했다.

피 토하며 공부했다는 내 공격에도 의사가 안 된다며 열심히 방어하다가 “저는 법정 공휴일은 물론이고 1년에 110일 정도 되는 주말조차 못 느껴본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요”라는 말에 두 손을 들었다.

“진짜 주말에 안 쉬어요?”

“문제집 풀다가 쉬고 싶으면 EBS 강의 듣는 게 쉬는 거예요.”

“몇 시에 일어나는데?”

“평일이랑 똑같아요. 주말 공부 시간도 학교 수업 시간이랑 같고.”

“독하다 독해……. 나도 그렇게까진 공부 안 한 거 같은데?”

“저는 존나 똘빡 새끼에 흙수저라서요. 그래서 진짜 공부해야 돼요. 왜냐면 저 모의고사 등급은 쓰레기라 진짜 수시 아니면 답도 없거든요.”

“허락은 해주겠는데 또 무리하면 문제집 찢고 필통도 다 버릴 거예요.”

“네.”

“잠은 무조건 오후 아홉 시부터 열두 시간은 자고.”

“헐, 너무 빡센데요. 열두 시간씩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올 듯.”

“몸이 안 좋아서 잠 잘. 올. 듯.”

내 말투를 고스란히 따라 하는 의사의 얼굴은 진지했다.

“선생님, 저 계절 하나만 지나면 고3이에요. 열두 시간씩 자라고 하면 제가 하는 생각이 뭔지 알아요? 잠자는 시간을 못 줄인다면 밥 먹는 시간을 줄여야겠다. 화장실도 참아서 하루에 한 번만 가게 물도 마시지 말아야겠다. 밥은 무조건 주먹밥으로, 양치하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한 끼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야겠다.”

“아오, 진짜. 알았다 알았어. 그럼 열 시부터 열 시간만 자요. 잠이 안 와도 열 시 되면 무조건 불 끄고 누워. 그리고 나도 시간 되면 한 번씩 봐줄 테니까 좀 진정하고.”

“대박. 진짜요?”

“그럼 가짜겠어?”

“근데 선생님 연세가…… 옛날에 배운 건데 생각이 나요?”

“나이도 아니고 연세? 됐어요. 싫음 말든가.”

“싫다고는 안 했는데요.”

의사가 주의 사항을 몇 번이나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나서야 병실을 나갔다. 이모님에게는 내일 얘기해야지. 사실 지금 바로 전화해서 허락받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럼 이모님 말을 안 들은 게 되니까.

그래. 일단 오늘은 좀 쉬자. 학교 끝날 때까지 한 시간이 조금 남았다. 끝나는 시간 맞춰서 서하림에게 전화해야지. 또 울었겠지? 우는 거 못 봐서 존나 아쉬웠다. 내가 먹지 못한 눈물도 아깝고.

바지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찰나, 간병인이 들어와 손을 거둬야 했다. 머리도 좀 띵한 것 같고.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로 쉬는 게 좋겠다.

9월 모의고사를 보기 위해 학교를 가겠다는 내 말에 12층이 뒤집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절대 안 된다며 막아섰고 담임선생님도 쉬는 게 좋겠다며 긴긴 문자를 보내왔다. 과외 쌤도 조심스럽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아주 굳건했고 그 누가 와도 꺾일 기세가 아니었다.

“아니, 도대체 왜? 좀 쉬어!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환자님. 네?”

의사 선생님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사정했지만 나는 근 이틀간 밥을 한 숟갈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빈속에 약을 먹일 순 없으니 학교와 병원 측에서 한발 물러났다. 물러나 준 김에 그렇게 모의고사를 보고 싶으면 병실에서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선처도 베풀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른 친구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차라리 보건실에서 보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 갈래요. 시험은 공정하게 봐야죠. 여기서 볼 거면 차라리 안 보고 말지.’

내 말에 학교도 병원도 옳다구나 하며 보지 말라는 말을 빙빙 둘러 했지만 나는 주말도 공휴일도 반납하며 좋은 학교 가기 위해 부모님의 이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연기해 등교권을 쟁취했다. 대신 시험은 보건실에서 간병인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와야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내내 쓰러져 있거나 쉬었더니 공부도 제대로 못 해서 어차피 점수는 안 봐도 뻔했다. 이번 모의고사는 그냥 출석하는 데 의의를 뒀다. 왜냐면 서하림이 그날 이후로 병원에 오지 않아서였다.

뭐…… 서로 딸 친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가슴에 피멍울 들 정도로 빨아댄 건 좀 심했나 싶기도 하고. 그냥 가볍게 간질간질 빤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전화도 안 받아 메시지도 안 읽고 씹는 건 너무하지 않나? 간병인 휴대폰으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도 않는 와중 메신저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는 세 번이나 바뀌었다. 이모님한테 서하림 어떻게 지내는지 지나가는 말로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림이가 내 연락을 피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어 자존심이 상했다.

화가 났든 삐졌든 어쨌든 간에 의도적으로 날 피하는 거라면 내가 학교로 직접 찾아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서하림이 오라고 오는 어린 애가 아니니까.

나는 성을 떠난 왕자님과 재회할 날만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모의고사 날이 오길 기다렸다. 공부는 뭐, 그냥 대충대충 했다. 이번 모의고사는 진작에 버렸기 때문에 중간고사 준비나 적당히.

수술하고 일어났을 때만 해도 누워 있는 이곳이 서하림 아저씨가 있는 곳인 게 그렇게도 싫었다. 서울에 대형병원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여기일까. 가진 게 좆도 없는 나지만 그래도 서하림과 서하림 부모님에게 더는 못난 모습 보여주는 게 쪽팔렸다.

이럴 때면 나는 왜 좋은 엄마 아빠 밑에서 태어나지 못한 건지부터 시작해서 지독한 자기혐오가 펼쳐졌다. 나 같은 게 서하림이랑 서로 좋은 감정인 것도 안 믿기고 나 같은 걸 왜 하림이가 밀쳐내지 않나 싶고 그러면서도 별 볼 거 없는 나를 품어준 서하림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또 한 번 깨달으며 마음이 깊어지기도 했다.

아무튼 처음엔 싫었단 얘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교 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등교를 이틀 앞둔 날 점심에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서하림엄마].

-어, 동규야! 하림이 아줌마야. 오랜만이지? 몸은 괜찮구?

“네, 안녕하세요.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내 덕분은 무슨. 그 병원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덕분이지. 그건 그렇고, 내가 또 한 번 가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퇴원 전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신에 하림이 아빠가 한 번 갈 거야.

“아저씨도 바쁘신데 안 오셔도 괜찮아요.”

-바쁘긴? S병원에서 제일 뺀질거리는 의사 나오라고 하면 하림이 아빠가 대표로 나가야 돼.

“네.”

누가 서하림 열 달간 배 속에 데리고 있던 사람 아니랄까 봐. 서하림이 떠오르는 말투에 웃음이 흘렀다. 내가 웃는 소릴 들었는지 “오, 하림이한테 뭐 들은 게 있나 본데?” 하는 말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들렸다.

“아니에요. 하나도 없어요.”

-아닌 거 같은데에?

“아 진짜예요.”

-알았어. 믿어줄게. 아무튼 동규야 그건 그렇고, 내일모레 시험 보러 학교 간다며.

“아, 네.”

-솔직히 의사로서의 입장으로도 네 친구 엄마 입장으로도 그냥 좀 병원 안에서 쉬었으면 하는 맘이긴 하거든.

“네.”

-근데 이왕 나간다는 거 말리진 않을게. 너도 하림이만큼 열심히 하는 거 아니까. 그래서 아줌마가 준비한 게 있어.

“뭔데요?”

-사실 준비랄 건 없고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라 좀 민망하긴 한데, 그날 하림이가 널 챙겨주기로 했어.

“네?”

-동규 네가 하림이한테 의지하는 게 크고 하림이 유일한 스터디메이터도 동규 너라서 사실 둘이 같이 보건실에서 시험 보게 해주려고 했는데 하림이가 그건 안 된다고 하더라. 자기가 아픈 것도 아닌데 그러면 다른 애들이 욕한다고.

대박. 나 봐주는 선생님들이랑 서하림 아저씨랑 같은 병원에서 일하니까 이모님한테 얘기 안 해도 알아서 얘기가 전달됐나 보다. 앞으로 입원은 무조건 여기다.

-쉬는 시간마다 내가 보건실 내려가라고 얘기해 뒀어. 점심도 보건실에서 같이 먹을 거야. 만약 끝까지 시험 잘 친다면 병원 침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도 물론이고.

나는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리고 소리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주먹질을 했다.

신이 있다면 온 우주를 통틀어 바로 이분, 서하림을 낳아주신 조현주 님이다. 개념 원리 수학의 정석 EBS 다 필요 없다. 앞으로 이분이 쓴 책이 내 성경이요 코란이자 진리의 말씀이 될 테니까.

“아……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서하림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친구 사이에 이럴 때 도와주고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동규 너도 하림이한테 이것저것 맛있는 거 만들어준다며.

“그건 제가 좋아서 하는 거고요.”

설마 그럼 모의고사 날 나 돌봐주는 것도 서하림이 좋아서 하는 일인가?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어.

진짠가 봐…… 세상에, 이렇게 황송할 일이 다 있나…….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존나 행복하다…… 행복해 뒤질 것 같다 진짜로……. 앞에선 화난 척 삐진 척 다 해놓고 뒤에선 이렇게 깜찍한 짓을 해?

들어가시라며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휴대폰을 손에 꽉 쥔 채 한동안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혼이 났다.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느라 온몸의 피가 쌩쌩 도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발, 이거 꼭 학교에서 데이트하는 거 같잖아.

한 번 그렇게 인식하니까 열이 오르고 얼굴이 뜨거웠다. 심장이 간지러워 벅벅 긁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베개를 존나 때려댔다.

“아 씨발 존나 좋아!”

점수는 엉망진창이겠지만 알 바냐 쓰레빠냐. 어차피 내신에 반영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몇 번 더 소리 지르며 베개를 괴롭히다가 결국 베개를 찢어먹고 한소리 들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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